74. 진실(1)
2017.03.03.
저 녀석한테 내가 그걸 왜 말해서.... 술이 웬수지... 등신 같이 왜 그런 취중 고백을... 리엘이 오해하면 어쩌지... 그렇다고 자초지종을 설명해 줄 수도 없고... 등등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생각들이 순식간에 한바탕 쏟아져 들어왔다.
‘휴... 다행히 그럴 생각은 없어 보이는 것 같네...’
리엘이 노심초사하는 사이, 황제는 일단 상황 회피를 선택했다.
“.............리엘, 자리를 좀 비켜다오.”
“네!! 이만 가보겠습니다!!”
소원대로 떠나게 되어 다행인데,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상황에 미칠 노릇이었다. 어쨌든 그녀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
.......나 지금 뭘 겪고 온 거지...? 으아악! 난 못 들었어! 아무 것도 못 들었다고! 하지만 머릿속에서 지우려 하면 할수록 자꾸만 생각났다.
“풉...! 레, 레이디... 큭큭큭큭큭!!”
근데 황제가 그다지 여성스러운 것 같지는 않은데, 왜 하필 레이디라고 놀리는 거지...?
앗! 아냐아냐! 생각하면 안 돼! 난 못 들었어! 아무것도 들은 게 없어! 얼른 머릿속에서 지워야 해! 혹시 나중에라도 마음 바뀌어서 죽일 지도 몰라! 으악 진짜 그러는 거 아니겠지!? 서, 설마... 그러진 않..겠지?
그, 그래! 우리 같이 식사도 함께 한 사이잖아! 사이좋게 고기도 구워먹고! 그러니까 나름대로 가, 가족... 예, 예비가족이잖아!
“근데 아까 정작 무슨 말을 듣고 왔더라...??”
마지막에 겪은 황당한 해프닝 덕에, 황제랑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문장 자체는 기억이 나지만,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인지 잘 와 닿지가 않았다.
그냥... 너희는 아직 어리니까 조심하고, 혹시라도 만약 사고 치게 되면 꼭 말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뭔가 다른 뉘앙스였던 것 같기도 하지만... 이 타이밍에 할 말은 그것밖에 없겠지?
그냥 생각을 좀 읽어볼 걸 그랬나? 아냐, 무례하게 어떻게 매번 그래... 똑바로 쳐다보는 것만 해도 대단 대단히 결례인데, 멋대로 머릿속까지 읽는 건 진짜 너무하잖아.
에휴... 그나저나 능력이 있으면 뭐하나... 상대하는 신분들이 하나같이 까마득하게 높으니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겠네.
그나마 만만한(?) 게 리일이지만 예의상 안 읽기로 했고... 하긴, 뭐 읽어봤자 야한 생각밖에 더 들어있겠어? 안 보는 게 나아!
아무튼 뭐 별로 중요한 건 아니었겠지 하며 대충 납득한 난, 고개를 끄덕이며 방으로 돌아갔다.
“휴..... 어제 오늘 폭풍 같은 일들이 정말 많았어...”
리일이 폐관을 끝내고 나온 지 고작 1박2일밖에 안 지났는데, 그 사이 하도 많은 일이 있었더니 한 일주일은 지난 느낌이었다.
내 누추한 방엔 황송하게도 리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리엘!”
“여기 계셨네요?”
“응, 아바마마랑 대화 잘 했어? 갑자기 무슨 일로 찾으신 거야? 뭐 중요한 말씀 안 하셔?”
“그냥... 둘이 사고치지 말라고요.”
“응? 정말 그렇게만 말씀하셨어? 정...말?”
“뭐... 똑같지는 않지만, 대충 그런 느낌이었던 것 같아요. 나중에 사고 치게 되면 숨기지 말고 다 말하라... 이런 말씀인 것 같았어요.”
“음...? 진짜?”
“......아마..도요?”
리일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내가 재차 그렇다고 하자 어쩔 수 없이 납득했다는 눈치였다.
“그래. 뭐 리엘이 그렇다니... 그런가 보지. 근데 어떻게 아신 거지? 귀신이네...”
“부모로서의 촉인 거죠!”
솔직히 둘이 같이 아침에 그 꼴로 걸어 들어오는 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흐음... 그런가...? 그럼 리엘이 우리 아바마마한테 다녀왔으니 이제 내 차례인가?”
“네? 뭐가요?”
“이제 내가 끌려가서 혼날 차례인 거 아니냐고... 결혼도 하기 전에 딸에게 손을 댔으니 대역죄인 취급받겠지? 생각만 해도 무서운데...”
생각만 해도 무서운 게 아니라, 생각만 해도 기분 나빴다. 그 쓰레기 같은 백작부인 앞에서 리일이 싫은 소리 듣는다니, 그럴 일 절대 없겠지만 상상만 해도 불쾌했다.
“저 가족 없어요.”
어딘가 아빠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없는 셈이었다. 사실 나도 한때는 아빠에 대해 궁금해, 이런 저런 생각을 떠올린 적도 있었다. 내가 엄마를 하나도 안 닮았으니 알고 보면 아빠 판박이일까? 하면서 혼자 상상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젠 다 지워버렸다.
“........”
내가 단칼에 잘라 말하자, 리일은 무슨 말을 해야할 지 모르는 듯 잠시 머뭇거렸다.
“나중에... 나중에 다 말해 줄게요.”
“응...”
“미안해요...”
“아냐. 리엘 이리 와 봐.”
리일은 나를 대뜸 끌어안고 다독여 주었다.
“리...일?”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고생... 많았겠구나.”
“.......”
또 주책없게 눈물이 나왔다.
“앞으로 내가 가족이 되어줄게.”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흑... 으흐흑...”
“울어. 마음껏 울고 다 털어내.”
“으흑... 흐어엉... 흐흑...흑...”
그는 말없이 계속 내 등을 토닥거렸다.
“리일... 저 리일을 만나려고 그동안 그렇게 힘들었나 봐요.”
“응?”
“행운량 보존의 법칙이라고 알아요?”
“그게 뭐야?”
“그런 게 있어요. 행운의 총량은 이미 정해져 있는데, 이 부분에서 이렇게 행복하려다 보니, 다른 시기에 엄청 힘들고.. 뭐 그런 거요.”
나름대로 궤변을 늘어놨건만, 리일은 딱 잘라 부정했다.
“아냐.”
“네?”
“그렇지 않다고.”
“.....아니에요?”
“리엘이 힘들었던 건, 힘든 일을 대신 짊어져 줄 사람이 없어서 그랬던 거야.”
“........”
“앞으로 힘든 건 내가 다 대신해 줄 테니까, 리엘은 평생 행복한 일만 남았어.”
“.........리일.. 으흑..흐흑... 으앙...”
그 따뜻한 말에, 난 바보같이 펑펑 울어버렸다.
***
요즘 우린 아주 평화롭고 그저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내 목도 다행히 아직 무사했다. 황제도 내심 없던 일인 척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휴... 그래. 그냥 이대로 아무 일도 없었던 척 무덤까지 가져가야지. 일단 그 일은 그렇게 머릿속 한구석에 치워버리고, 난 리일과의 데이트에 전념했다.
그가 폐관을 마치고 나온 지 벌써 며칠이나 지났지만, 공주는 아직도 찾아오지 못하고 조용히 찌그러져 있었다. 역시... 오줌싸개 사건이 정말 컸던 듯 했다.
비올레티 역시 마주칠 일조차 없었다. 리일이 눈에 띄지 말라며 단단히 경고해 놓은 덕에, 그녀는 이곳에 얼씬도 못했다. 하긴, 원래도 내궁 안에 들어올 신분이 못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덕분에 나와 리일은 매일같이 꽁냥거리며 소궁에서 데이트를 했다.
느지막이 눈을 뜨면 그와 함께 아침을 함께 먹고, 하루의 대부분을 그와 함께 보내며 호의호식 지냈다. 이렇게 행복하기만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그저 매일매일 좋았다. 예전에는 엄두도 못 내던 비원도 마음껏 함께 산책했다.
가끔 이튼 오라버니와의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 한 구석이 아프지만, 어차피 언젠가 끝나버릴 수밖에 없는 시한부 가족관계였다. 그러니 그냥... 조금 더 빨리 깨져 버린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리일의 생각만으로도 꽉 찬 내 머리는 금세 오라버니의 일을 지웠다.
“우리 리엘, 뭐 먹고 이렇게 예뻐?”
“음... 맞춰보세요!”
“딸기?”
“땡!”
“무카?”
“땡!! 아잉, 왜 이렇게 못 맞춰요!?”
난 콧소리까지 섞어가며 애교를 부려댔다.
“그럼?”
“다시 질문 해 봐요.”
“응? 우리 리엘, 뭐 먹고 이렇게 예뻐!?”
“리일의 사랑 먹고요!!”
내가 생각해도 무리수였는데, 리일은 눈에서 하트를 뿅뿅 뿜어내며 내게 마구 뽀뽀해댔다.
“오구오구 우리 이쁜 리엘!!”
“꺄아, 간지러워요!”
그렇게 미친 애정행각을 하며, 우린 원 없이 데이트를 했다. 보고 싶었던 긴긴 시간을 참았던 만큼, 정말 꿀 같은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한참 만에 드디어 정신을 차린 난, 그동안 미뤄두었던 마법 연구를 계속 하기 위해 황녀의 방을 찾아갔다.
“어서 와, 리엘.”
“언제나 반겨주셔서 감사합니다.”
“후훗. 그야 당연하지. 아, 오늘은 새로운 자료가 왔어. 그런데 정말 중요한 기밀문서라서...”
“아, 곤란하시면 안 보여 주셔도 돼요.”
“아니, 보여주는 게 곤란한 게 아니라... 보안엄수를 부탁하려고.”
“물론이지요! 그리고 전하께서 제게 명령도 아니고 부탁이라니요... 과분한 말씀이세요.”
쉽게 보여줄 수 있는 자료가 아닐 텐데... 나를 믿고 말해주는 그녀가 너무 고마웠다.
“후훗. 그만큼 꼭꼭 부탁한다는 의미에서...”
“넵!! 무덤까지 가져갈게요!”
지난번에 세뇌에 관해 아는 사실을 털어놓고 나자, 황녀는 나를 더욱 신뢰해 주었다. 그런데 정작 내가 그 능력자라는 걸 숨기는 게 조금 미안했다.
하지만 이건 도저히 말할 수가 없었다. 연습을 위해서 줄리에게만 어쩔 수 없이 살짝 말했을 뿐, 다른 사람에게는 영원히 알리고 싶지 않았다.
특히 리일에게는...
“자, 이거야. 중앙교단에 십 수 년간 파견되어 있던 첩자로부터 입수한 최신 정보야. 어마마마께서 오래 전부터 조사하시던 일이었지.”
“십 수 년이요? 폐하께서 아주 오래 전부터 준비하셨나 보네요.”
“응, 고위 정보를 얻기 위해 첩자를 사제로 위장해서 보냈어. 그 덕에 캐낸 고급 정보야.”
“아...”
“고위 사제로서도 쉽게 접근하기 힘든 정보였던 듯, 이걸 알아내느라 정말 오랜 세월이 걸렸다고 해.”
그러다 진짜 저쪽으로 넘어가면 어쩌려고... 아, 신성력의 진실을 알면 그럴 리가 없겠구나.
“이런 중요한 걸 제게... 전하, 절 어떻게 믿으시고... 전 리테인 사람인데...”
“엔릴이 널 믿잖아. 무엇보다도 부모님께서 사람 잘못 보시진 않았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자 어서 읽어 봐.”
“근데 출처는 그렇다 치고, 내용의 신뢰도는 확실한가요?”
“응?”
“아뇨... 혹시라도 첩자가 세뇌에 노출되어 변질되었다던가... 만약 그렇다면 교란을 위한 역정보일 수도 있으니 위험하지 않을까요?”
“아, 그 가능성도 물론 염두에 두었었지. 하지만 세뇌능력이 사실이라 해도, 굳이 교단 내의 인물에게 그러진 않았을 것 같아. 게다가 십 수 년을 충성해온 고위사제라면 더더욱. 잘은 모르겠지만 세뇌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테니, 대상이 한정되어 있지 않을까? 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는 외부인이라던가... 지난번에 추측한 대로 국왕이라던가...”
하긴, 단기로 끝나는 정도가 아니라 장기 세뇌는 매우 어려울 것 같다. 아주 찰나의 순간을 조종하는 것도 어려운데... 직접 해 봐서 아는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그럼 읽어 볼게요.”
...........이건!
차근차근 읽어 내려가던 내 눈이 보름달처럼 댕그래졌다.
“놀랍지? 워낙에 꼭꼭 감추던 내용인지라, 이걸 알아내는 데 굉장히 오래 걸렸나봐.”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짓을...? 보고서에 쓰인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씨받이 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