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진실(4)
2017.03.05.
“지금은 제 여왕님과 시간을 보내기로 해서 곤란합니다. 할 말이 있으시면 나중에 댄스 때를 기약하심이 어떻겠습니까?”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전 그럼 이만...”
다행히 리일이 알아서 잘 막아주었고, 바다마녀는 새침하게 사과하더니 총총총 사라졌다.
뭐야 저 여자... 역시 오늘 무도회... 뭔가 흑심이 있어서 연 게 틀림없어. 설마 고백이라던가, 고백 같은 그런 거 말이야!
내가 그렇게 둘 줄 알아!?반드시 방해해주마! 흥흥!
“여왕님?”
“아! 네, 네? 왕자님?”
“이제 플로어로 나가 볼 시간입니다. 나의 여왕님”
리일은 일부러 과장된 동작을 하며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반짝이는 투명한 날개가 파닥거렸다. 풉, 귀여워!
“어머, 영광입니다. 왕자님.”
플로어로 나가 보니, 이벤트 시작 시간이 거의 다 됐는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잠시 후, 사회자로 보이는 사람이 나와 간단한 인사와 함께 설명을 해 주었다.
“안녕하십니까. 신사 숙녀 여러분. 고대하시던 이벤트, 콘트라댄스의 시간이 왔습니다!”
콘트라댄스는 단체로 추는 춤으로, 서로 마주 보고 상대를 바꿔가면서 추는 춤이다.
오늘의 가면무도회에서는, 콘트라댄스를 이용하여 정체 알아맞히기 이벤트를 진행하기로 되어 있었다.
파트너를 유지하고 있는 짧은 시간에 정체를 최대한 알아내서, 체인지 되기 전에 질문을 해서 맞춰야 하는 방식이었다.
이름을 맞출 기회는 서로 딱 한번, 틀렸을 경우 틀린 사람이 가면을 벗는다.
물론 본인이 맞는데도 아니라고 우기면 알아낼 방법이 없다는 게 문제지만, 죽자고 달려드는 전쟁도 아닌 고작 여흥일 뿐이었기에 거짓말까지 해 가며 잡아떼는 사람은 잘 없다.
아무튼 끝가지 들키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이 최종 승자이며, 우승자에게는 선물도 주어진다고 한다.
“근데, 저랑 함께 온 거 알려지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난 걱정되는 마음에 리일에게 속삭여 물었다.
“괜찮아 둘 다 함께 들키지만 않으면 되잖아. 그리고 만약 들켜도, 오늘 여기 온 사람 중에는 공주 쪽에 연관된 끄나풀은 없을 거야. 아바마마의 측근인 레이튼 후작저니까.”
“아...”
“정 불안하면, 둘 중 한명의 가면이 벗겨지면 바로 떠나자.”
“네. 그래요.”
대화하는 사이 댄스음악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난 맨 처음 마주했던 리일과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가, 다음 파트너에게 이동했다.
“아름다운 레이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우린 구면이지요?”
“글쎄요. 어느 댁 영식인지 알 수가 없으니 그걸 제가 어찌 알겠어요?”
“후훗. 그냥 느낌입니다.”
“그러시군요.”
“아무튼 제가 아는 분 같진 않네요.”
“그럼 신분을 묻는 모험은 하지 않아야겠군요. 즐거웠습니다, 레이디.”
순식간에 여러 파트너가 스쳐지나갔지만, 아직까지는 그 누구도 내 정체를 맞추지 못했다. 내가 워낙 인지도 없는 사람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한때 황녀 시해혐의로 내 이름이 오르락 내리긴 했지만, 이미 흐지부지 넘어간 일이었다.
그 후 무도회 사건으로 리일와의 염문설이 있었다 하지만, 잠시 데리고 놀다 버린 시녀1 정도로 순식간에 잊혔을 거다.
암살 미수사건에서도 내 이름이 공식적으로 거론된 적은 없었으니, 나는 그야말로 존재감 없는 사람이었다.
덕분에 내 앞에서 엉뚱한 사람의 이름을 대던 영식들은, 하나씩 가면을 벗어 나갔다. 이쯤 되자 다들 내 정체를 파악하는 걸 포기한 분위기였다.
그러던 중 슬쩍 리일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마침 아까 그 바다마녀와 마주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악! 안 돼! 막아야 하는데!! 어쩌지!?
아!! 마침 얼마 전 연습했던, 바람을 조절해 먼 곳의 소리를 끌어오는 마법이 딱 떠올랐다. 발을 동동 구르던 난 결국 그들의 대화를 엿들어 보기로 결심했다.
양심에 찔리는 짓이긴 하지만, 어차피 공개된 자리에서 나누는 대화니까 괜찮겠지?
슬쩍 마법을 운용하자 대화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그 바다마녀군요. 반갑습니다, 레이디”
“반가워요, 왕자님. 분장이 참 잘 어울리시네요.”
“감사합니다. 레이디도 아름답습니다.”
“고맙군요. 그런데 그 의상은 누가 골라주었나요?”
“그냥 제가 적당히 골랐습니다.”
“어머, 가까운 누군가가 골라준 줄 알았네요. 원래의 이미지와 너무 딱 어울려서요.”
“.......”
“전 그쪽이 누구인지 알 것 같은데, 왕자님은 제가 누구인지 모르시겠어요?”
“......글쎄요. 레이디께서 먼저 말씀해 보시지요.”
“엔릴, 맞지?”
“이런, 들켰네.”
리일은 순순히 가면을 벗었다.
“전 이미 가면이 없어서 레이디의 정체를 맞출 순 없지만, 그렇게 부르는 걸 보니 누구인지 알겠군요.”
“응. 나야.”
저쪽 역시 스스로 가면을 벗는 것이 보였다. 짐작대로 마가렛이었다.
아마도 그녀는 아까 카드게임을 할 때부터, 아니 처음 입장할 때부터 리일을 알아봤을 거다. 좋아하는 사람이면 뒷모습만 봐도 바로 알아보는 게 당연하니까.
하지만 리일은 그녀가 마가렛인지 몰랐던 듯 싶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걸 보고야 눈치를 챘으니까.
리일 진짜 무심하구나.
좋아하는 게 저렇게 눈에 보이는데, 어떻게 여태 내내 모르지...? 다른 영애들처럼 입술박치기를 하며 좋다고 달려들지 않아서?
휴...
저 둘의 어색한 분위기를 구경하는 사이, 사람들이 리일을 흘긋대기 시작했다. 가면을 벗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시선은 점점 쏠렸다.
“마가렛, 오늘 즐거웠어. 난 먼저 나가야겠다.”
그렇게 말한 리일은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난 아직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그가 들킨 이상 나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리엘, 나가자.”
그가 내 옆을 스쳐지나가며 귓가에 슬쩍 속삭였다. 난 슬그머니 열에서 이탈해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의 뒤를 따랐다.
밖으로 나오니 시원한 공기가 폐 한가득 밀려들어왔다. 안쪽의 공기가 꽤 답답했는지, 머리가 확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리엘, 오늘 재밌었어?”
“네. 정말 좋았어요. 리일은요?”
“리엘과 함께하는 건 뭐든지 좋지!”
“저도요!!”
“하지만 역시 단 둘이 있는 게 제일 좋아...”
또다시 핑크빛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리일이 내 가면을 휙 벗기며 입술을 부딪쳐 왔다.
“으음...”
여기가 남의 집이라는 것, 게다가 정원 한복판이라는 것도 잊은 채 키스는 점점 자극적으로 변했다.
“리엘.. 아... 으읏...”
둘 다 술을 많이 마셔서인지, 오늘따라 우리는 정열적이었다.
내 손이 과감하게 그의 것을 향해 뻗어나갔다. 자극에 몸을 부르르 떨며, 리일이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면서 한 손은 가슴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아읏...”
여기서 이러면 안 되는데... 아무리 내가 마가렛을 견제한다 해도, 그래도 걔네 집에서 이런 짓을 하는 건... 너무 진상이잖아!
하지만 머리와 달리 몸은 쉽게 멈춰지지 않았다. 술이 웬수네...
“리.. 리엘... 아...”
그건 리일 역시 마찬가지인듯했다. 이미 한 번 불장난을 저지른 이상, 두 번째를 참는 건 더 어려운 법이었다. 원래 처음이 가장 어렵지, 한 번이 두 번 되고, 두 번이 세 번 되는 건 순식간이니까.
“흐읏... 아응...”
내가 내는 민망한 소리가 점점 강해짐에 따라, 리일의 자제력은 점차 바닥나기 시작했다.
결국 그의 손은 내 의상의 리본 끈을 하나씩 벗기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 리본을 막 풀으려는 찰나였다. 누군가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며 발소리가 들렸다.
또각또각
“마, 마가렛?”
뒤늦게 쫓아 나온 마가렛이었다.
“......엔릴.”
우리는 후다닥 전광석화처럼 떨어지며 옷을 추슬렀다. 아악, 쪽팔려!!
“그, 그게 마가렛... 아하하...”
“........”
한참 말이 없던 그녀는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어렵게 입을 떼었다.
“.......잠깐 자리 좀 비켜줄 수 있나요?”
무슨 말을 할지 짐작은 갔지만, 비켜주지 않을 수 없어서 일단은 물러났다. 하지만 정말 신경 쓰였다.
리일은 둔해서 모르는 것 같지만, 우연히 그녀의 생각을 읽었던 난 그녀의 마음을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괜히 고백해서 리일을 흔들어놓는 게 싫었다. 나보다 월등히 신분이 높은 마가렛에게 자격지심이라도 느끼는 건지, 그녀의 존재 자체가 거슬렸다.
그래서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또 마법을 사용해 귀를 쫑긋 기울였다.
***
“엔릴”
“마가렛? 무슨 할 얘기라도...?”
“응. 같이 온 애는 역시 리엘이었구나.”
“....처음부터 티 났어?”
“아니. 널 보면 알지. 뻔하잖아.”
“아...”
“아무튼 와 줘서 기뻐. 아깐 제대로 아는 척 못했지만, 그래도 반가웠어.”
“나도. 그러고 보니 우리 오랜만이네. 어릴 땐 자주 같이 놀았는데... 내가 맨날 머리카락 잡아당겨서 미안해. 쿡쿡. 그땐 내가 정말 개구쟁이였지.”
“그러게.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정말 빠르다.”
“응.”
리일의 짧은 대답을 끝으로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엔릴”
망설이던 마가렛은, 마음을 정했는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그녀의 심정을 전혀 모르는 엔릴은 무심하게도 대충 떠나려 했다.
“앗, 나 리엘이 기다려서 이제 가 봐야겠다.”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바로 가버리려는 그의 모습에 마가렛의 눈빛이 처연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능숙히 숨기며 다급히 붙잡았다.
“엔릴, 잠깐만! 나 할 말이 있어.”
“응?”
“나 있잖아...”
“.......응??”
“나 전부터 말하려했는데, 네가 갑자기... 아니, 갑자기 그 애가 나타나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쳤어.”
“응? 뭐가?”
“나 사실......”
그녀가 막 말하려는 찰나,
“꺄아악!!“
“리엘!? 리엘! 무슨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