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진실(5)
2017.03.06.
***
갑자기 들려온 내 비명소리에 리일은 뒤도 안 돌아보고 다급히 내게 뛰어왔다.
“리엘!! 리엘, 괜찮아?!”
“휴... 아무것도 아니에요. 정원을 산책하다가 발을 삐끗해서...”
나 진짜 나쁜 년이다. 방해하고 싶어서, 저 입을 틀어막고 싶어서 일부러 비명을 질렀다.
“많이 다쳤어? 괜찮아? 발목 부은 거 아냐?”
“괜찮아요. 그런데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계속 걷기엔 조금...”
“그래. 그래야겠다.”
“엔릴...”
어느덧 마가렛이 나타나 아픈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상하게 나를 돌봐주는 그의 모습이 마음 아픈 듯, 야속한 표정이었다.
내가 쇼하는 지도 모르고 그저 걱정하고 있는 리일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리고 그녀에게도...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누구라도 내 남자를 공유하고 싶지는 않은 법이니까...
“마가렛, 오늘 즐거웠어. 이만 가 볼게. 다음에 또 보자.”
“.............”
천진하게 웃어 보인 리일은, 그 말을 끝으로 등을 돌렸다.
***
가면무도회는 그렇게 끝났다. 궁으로 조용히 돌아간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헤어져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부어라 마셔라 하며 늦게까지 놀아버린 덕에, 다음날 우린 늦은 점심때야 일어나 다시 마주했다.
“리일, 잘 잤어요?”
“으응... 리엘은? 피곤하지?”
“아뇨. 괜찮아요.”
그렇게 마셨는데 리일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하암... 어제 너무 마셨나봐.”
“그러게요. 달달한 걸로 몇 잔 마시지도 않은 것 같은데, 취기가 확 오르더라고요.”
“응. 머리 아프네...”
헤롱헤롱 취해서 흥청망청 파티라니... 마법쇼에 도박에 온갖 이벤트 등등... 정말 광란의 밤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만 생각하자. 난 머리를 훌훌 털어내며 말을 돌렸다.
“근데, 리일. 우리 정말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되나요? 리테인과 제국의 일은 어떻게 되어 가요?”
골치 아프고 복잡한 일들은 황제가 알아서 처리해 주길 기다리며, 다 정리되면 결혼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면 되는 거야?
그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서 그래?”
“그것도 그렇고...”
“일단 내가 아는데 까지만 말해 줄게. 리테인의 일 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어떤 상황이냐면...”
리일은 찬찬히 설명해 주었다. 일단 동쪽 국경 부근이 얼마 전부터 전쟁 중이었다는 건 나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전쟁의 배경은...
“아바마마도 처음에는 많이 고민하셨어. 실로엔과 오랜 적대관계를 종식시키며 지원군을 보내야 할지 말이야. 하지만 괜히 지원을 보내 동맹을 맺었다가, 실로엔이 덜컥 멸망하면 괜히 곤란해질 우려가 있었지.”
“아...”
“쓸데없이 군사력만 소모하게 되는데다가, 새로 들어설 물리스와는 국경을 맞댄 채 적대관계로 시작하게 되니까.”
“그렇겠네요.” ”
“그래서 그냥 손을 내미는 대신 정벌을 해버리기로 결심하셨지. 어차피 실로엔은 오랜 적국이었으니, 망해가는 나라에 힘을 쏟느니 안정적인 국경을 확보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었나봐. 아, 레이튼 후작이 떠난 것도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서라고 들었어.”
그리고 리일은 몇 가지 덧붙여 설명해 주었다. 실로엔이 멸망한 자리를 차지할 물리스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천혜의 자연요새인 카브산맥 근처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게 낫다는 것이었다.
“그렇군요...”
“응. 하지만 그쪽 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네...”
응. 나도 그쪽이 궁금한 게 아니라, 그지 같은 내 나라의 일을 알고 싶다고! 그러니까 저 공주년 언제 치울 수 있냐!
하지만 리일이 너무 열심히 설명해 주는지라, 차마 안 궁금하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북쪽에 새 왕국이 세워진 건 알지?”
“네. 페텔 왕국이라던가요?”
“맞아. 그쪽 역시 상당히 신경을 썼는데... 그다지...”
“왜요? 어떻게 했었는데요?”
“통일된 나라가 세워지지 않도록, 가장 큰 부족을 견제하며 교란작전을 시행하고 있었다고 해. 상단을 통해 차명으로 물자를 보내, 제2의 세력을 지원하는 식으로 말이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실패. 간접적인 방법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 결과 북부산맥 너머에는 새로운 나라인 페텔 왕국이 세워졌고, 척박한 기후 탓인지 자꾸만 산맥 이남의 제국 영토로 내려오려 해서 골치인 상황이라고 한다.
“그리고 리테인은...”
드디어 본론이었다. 나도 황녀에게 들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내가 파헤치고 있는 영역은 리일 쪽에서 보는 전반적인 상황과는 또 달랐기에 귀가 절로 쫑긋 세워졌다.
“네, 황녀전하께도 대충 들었어요.”
아무튼 아직은 갑갑한 상황이었다. 그나저나, 어쩐지 리테인 쪽 일에 내가 점점 깊숙이 개입해 가는 기분이었다. 뭔가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닌 기분이라고 해야 할지...
“그렇구나. 둘이 요즘 같이 뭐 좀 연구하느라 바쁘다며?”
“네. 큰 도움은 못 되지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어서요.”
물론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지만, 어떻게든 은혜를 갚고 싶은 건 사실이었다.
하아... 그나저나 리일에게 어디까지 털어놓을 지도 생각해 봐야 하는데... 내 출비도 마음에 걸리고, 비올레티도 신경 쓰이니 더 이상 미뤄놓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행히 이틀 쯤 고민했더니 처음만큼 심란하지는 않았다. 난 오늘 밤에는 꼭 털어놓으리라 굳게 다짐했다.
“리엘은 똑똑하니까 많은 도움이 될 거야!”
“감사해요. 아, 저 황녀전하와 만나기로 한 약속시간이라서 가봐야겠어요.”
그러고 보니 새 자료가 도착했다고 아까 연락받았는데, 하마터면 까먹을 뻔 했다.
“잘 다녀와. 맞다 리엘, 우리 내일은 궁 밖으로 나가자!”
“......그래도 돼요?”
과연 오늘 밤 내가 다 털어놓은 후에도, 우리가 내일 아무렇지도 않게 데이트를 나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일순 얼굴이 흐려졌다. 하지만 신이 난 리일은 미처 눈치 채지 못한 것인지, 콧대를 으쓱하며 자랑하기에 바빴다.
“그럼! 나 이제 호위도 필요 없잖아! 오러나이트님이시라고!! 단둘이 나가자. 내가 근사한 곳 보여줄게!”
“우와!”
난 복잡한 내심을 감춘 채 적당히 기쁜 환호성을 질렀다.
근데 내 일도 내 일이지만... 황자씩이나 돼서 그렇게 막 나돌아 다녀도 되는 건가? 허락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었다. 하지만 그의 반응을 보니 뭐 괜찮은 모양이었다. 문제라면 내 쪽 비밀이 문제지...
"내가 정말 완벽한 데이트코스 준비해 놨어! 기대해!!"
"흐음, 그런 건 말하지 말고 짠 해줘야 더 재미있죠!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인데 괜찮겠어요?"
"헉, 그런가? 내가 뭘 몰라서... 아무튼 실망시키지 않을게!"
"그럼 기대할게요!"
“응! 다녀와! 그럼 내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리일은 찡긋 윙크를 날리며 애교를 부렸다. 방에서 또 뭔 짓을 하자고 할지는 안 봐도 뻔했다.
***
“이번 자료는 리테인 첩자 쪽 자료는 아니고, 북부에 숨어 살던 마법사의 후손들에게서 건네받은 기록일지야.”
“마법사들의 후손이요? 오래 전 마도시대부터 명맥을 이어왔다는 그 사람들이요?”
“응. 마녀라고 탄압받던 이들이었지. 그들에게 아주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기록이 있었나봐. 지금은 많이 유실되었지만, 그 기록에 정신계열 마법에 대한 내용도 조금 있더라고.”
“어떤 내용인데요?”
“자, 여기“
특별히 눈여겨 볼 내용은 없었다. 대부분 이미 알고 있던 사실들로, 정신계열 마법에 타고난 아이들이 간간히 태어나고, 핏줄로 희박하게 유전된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맨 아래쪽에 조심스레 써 놓은 글자들이 눈에 띄었다.
“같은 능력자끼리 맞대응 할 때의 반응... 이라고요?”
단순한 추측인지 구전으로 내려온 이야기를 적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횡설수설 하는 가운데서도 대충 내용은 파악되었다.
“응. 정신간섭을 서로 행하면 어떻게 될 것 같아?”
그녀 역시 며칠 동안 고민하면서 저런 의문을 품어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답을 알 방법은 없었다.
“능력자끼리 서로 간섭이라... 예를 들면 교황과 다른 능력자가 서로 맞서 본다면... 글쎄요. 혹시 이게 세뇌상태를 푸는 방법의 단서가 될까요?”
“잘 모르겠어.”
“음...”
“만약 그렇게 마주 능력을 사용한 결과, 더 약한 사람 쪽이 무너진다거나 하면? 너무 유치한 가정일까?”
“아뇨.”
황당하긴 하지만 정말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방의 정신에 간섭할 수 있다는 건, 무너트릴 수도 있다는 뜻이겠지요. 그리고 그건 비단 일반인에게만 통하는 게 아닐지도 몰라요. 비슷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월등히 센 쪽에 당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 하아.. 하지만...”
“네.”
“추측해봤자 검증할 수가 없으니.. 저게 사실이라 해도 어떻게 시도할 방법이 없잖아.”
“그때 말한 그 아이는요?”
“데려오는 데 성공하긴 했는데... 한 명 뿐이라 맞대응시킬 상대방이 없잖아. 그리고 너무 어려.”
여기 눈앞에 있는데... 도무지 그걸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정말 그런 능력이 있나요?”
“그런 것 같긴 해. 아직 어려서 잘 하지는 못하는 것 같지만, 상대방의 생각을 희미하게 읽어내는 것 같던데?”
데려온 아이는 열 살 가량의 어린 여자아이였다. 남자아이였다면 교황의 아들로 후계자로 길러졌겠지만, 여아인 관계로 결국은 씨받이 신세가 될 예정이었다. 사제라는 직책은 남자의 전유물이었으니까.
“간섭은요?”
“그건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해.”
필요한 건 핏줄뿐이라서인지, 신전에서 굳이 능력을 계발시켜 주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아...”
“너무 신경 쓰지 마.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연구가 흘러오게 됐지만, 어차피 이걸 이용해 저쪽을 어찌 해보겠다 계획한 건 아니었어. 그저 무언가 비밀이 있다는 생각에 파헤쳐 본 거였지. 우리가 알고 있던 비밀 외에도 무언가 수상한 게 더 있다 싶었거든. 그래서 아주 오래 전부터 첩자를 보내놨던 것이었고.”
이건 어디까지나 우연히 알아낸 정보일 뿐, 어린 꼬마애를 이용해 공작질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황제 역시 마찬가지로, 결국 리테인과 신전의 일은 전쟁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다만, 주변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잠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고, 그 사이 황후가 이것저것 조사하고 있던 것뿐이었다.
“그래도요... 일을 조금 더 쉽게 만들 수 있는 열쇠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지금 가진 정보만으로는 글쎄... 우리 쪽에는 딱히 대항마도 없고... 어린애잖아. 그 애가 크기 전에 전쟁이 먼저일걸?”
‘어쩌지, 말을 해야 하나...?’
“음... 다른 쪽 국경선이 안정되는 대로 곧 전쟁을 재개한다고 했죠?”
“응.”
“황후폐하께서 전쟁을 몹시 싫어하신다고 들었어요.”
“그야 좋아할 리는 없잖아. 정확히는 아바마마가 전장에 나가는 걸 싫어하시는 거지만... 하지만 잊었나본데, 양국은 벌써 10년째 전쟁 중인걸?”
“그렇죠... 이런 저런 이유로 잠시 강화협정 중이지만요. 휴... 저쪽에 혼선을 줄 수 있으면 조금이라도 유리해 질 텐 데요.”
“교황을 얘기하는 거야?”
“아니요. 리테인 국왕이요. 가장 윗대가리가... 아차, 죄송합니다. 군주가 잘못되면 원래 전체가 흔들리는 법이잖아요.”
사소한 말실수 같은 거에 별 신경 쓰지 않는지, 황녀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귀를 쫑긋했다.
“하지만 어떻게?”
“조금 더 알아봐야겠지만, 아까의 추측대로라면 무언가 시도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정말 그게 맞는다면, 교황보다는 일반인인 국왕 쪽을 건드리는 게 훨씬 수월하겠지,..’
“글쎄... 알아본다 한들...”
“일단 제가 더 알아볼게요!”
끝끝내 털어놓지 못한 채, 일단 그렇게 얼버무릴 수밖에 없었다. 아직 이 추측들에 대해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것이 없으니, 조금 더 고민해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
한편, 리엘을 보낸 엔릴은 띵한 머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똑똑똑
“전하. 벤자민 도련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리엘인가 싶었는데, 노크소리와 함께 시종이 알린 것은 익숙한 누군가의 방문이었다.
“벤자민이? 아, 들어오라고 해.”
“형!”
“벤지, 오늘 떠난다고 하지 않았어? 웬일이야? 아, 가기 전에 아바마마한테 인사하려고 온 거야?”
공식석상에서는 깍듯이 전하라고 부르지만, 사석에서는 형이라고 부를 정도로 친한 둘이었다.
어제의 가면무도회를 마지막으로 마가렛도 벤자민도 영지로 떠나기로 한 걸로 알고 있는데, 갑자기 그가 찾아오니 무슨 일인가 싶었다.
“형, 부탁 하나만 해도 돼요?”
“응? 무슨?”
“오늘이 영지로 내려가는 날이잖아요. 근데... 가기 전에 마가렛 고모를 한 번만 보러 와 주면 안 돼요?”
“마가렛? 마가렛 왜?”
“........고모가 사실 어제 형한테 할 말이 꼭 있었는데... 끝끝내 말하지 못 했나 봐요.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내내 울고만 있어요.”
“뭐? 왜? 무슨 일 있어?”
“...........제 입으로 말하긴 좀 그래요. 형, 한 번만 부탁해요. 가서 고모를 딱 한번만 만나 주세요. 고모는 용기가 없어서 절대 제 발로 먼저 오려 하지 않을 거예요.”
벤자민은 이미 오래전부터 마가렛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어제 가면무도회를 왜 열었는지도 짐작했었다. 가면과 술의 힘을 빌려서라도 말하고 싶었던 게 틀림없다. 하지만 결국 말하지 못해버렸고, 엔릴은 무심하게 휙 가버렸다.
식음을 전폐하고 틀어박혀 울고만 있는 고모가 너무 안쓰러워서, 보다 못한 벤자민이 나선 것이었다.
둘 사이를 어떻게 해주겠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말은 해 보고 끝내야 미련 없이 털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제 영지로 떠날 테니,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기회는 없을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
“가서 직접 들으면 안 돼요? 형, 이러다 고모가 죽겠어요...”
“으응.. 알았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배웅도 할 겸 가 볼게. 지금 같이 일어나자.”
어차피 지금 리엘도 누나한테 가 있으니, 할 일도 없던 참이었다. 내친 김에 엔릴은 곧바로 방을 나섰다.
***
리일에게 가기 전, 잠시 처소에 들른 나에게 편지가 와 있다는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편지요? 누구한테서요?”
“가족이라는데?”
“가족?”
또 이튼 오라버니인가? 우리 다 정리한 거 아니었나?
어쨌든 난 편지를 건네받았다. 발신인의 이름은 비올레티였다.
비올레티가 나한테 왜...?
어쨌든 용건은 읽어 봐야 알기에, 뜯어서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
“.............!!”
툭...
평온하던 일상은 편지 한 통에 깨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