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위기 (2)
2017.03.07.
자신이 이런 짓을 했다는 걸 알면 오라버니가 얼마나 화를 낼지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리엘을 용서할 수 없었다.
‘어떻게 네까짓 게 감히 오라버니께!! 절대 용서할 수 없어!’
눈에서 시퍼런 안광을 뿜어내며 분노하던 비올레티는, 꾹꾹 묻어 둔 오래 전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십년 전.
비올레티는 동화 속 왕자님 같았던 이튼 오라버니를 어릴 적부터 좋아했다.
엄마인 줄 알았던 유모의 심부름으로 처음 백작저에 들어섰던 날.
마치 다른 세계인 듯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그 공간에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사 같이 아름답던 도련님을 마주쳤다.
“아.....!”
황금을 녹여놓은 것 같은 빛나는 금발, 따스해 보이는 다갈색 눈동자. 천하고 비루한 자신 따위는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는 태양같이 눈부신 존재였다.
하지만 백작가 도련님인 그의 눈에, 자신 같이 보잘 것 없는 아이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냥 심부름 온 고용인의 아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이었기에 혼자만 애태우며 언감생심 넘보지도 못했지만... 그저, 그냥 가끔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리고...
‘비올레티...’
정말 부럽던 그 이름. 역시나 다른 세계에 사는 듯한 그녀는, 꾀죄죄한 자신과 비교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아... 이런 게 바로 귀족 아가씨구나 싶어서, 감히 질투도 나지 않았다. 고작 평민출신 유모의 딸인 그녀와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신분차가 있었으니까.
그런 그녀는, 자신은 감히 넘보지도 못하던 이튼 도련님의 곁에 아무렇지도 않게 늘 함께였다. 그리고 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언제나 부러웠다. 여동생으로서 사랑받는 그녀가 너무나도 부러웠다. 자신은 감히 가질 생각도 못하는 그런 존재였는데, 그녀는 당연한 듯이 애정과 관심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알고 보니 내 자리였다니!!’
15년 만에 간신히 제자리를 찾게 되었지만, 그 긴 세월을 누가 어떻게 보상해 주겠는가... 너무 억울했다.
사실 아이를 바뀌게 한 죄로 죽어야 하는 건 유모만이 아니었다. 원래대로라면 감히 귀족 영애의 자리를 대신 꿰차고 있던 리엘 역시 처형당했어야 했다.
그녀의 잘못이건 아니건 간에 말이다. 귀족의 위엄이란 그건 것이니까.
그걸 필사적으로 막아준 게 이튼이었다. 그 덕분에 리엘은 수녀원으로 쫓겨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던 것이다.
보상받을 수 없는 세월이 너무 억울하고 분했지만, 그래도 그 증오스러운 얼굴을 두 번 다시 보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잊고 살려고 했다.
하지만 그 후 겪은 비참한 굴욕의 나날들...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건만,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다. 쏟아지는 멸시와 비웃는 시선들...
‘이건 다 그 가짜 때문이야...!’
결국 도망치다시피 제국 아카데미까지 쫓겨 오게 된 비올레티였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건, 그녀가 빡빡 우긴 덕에 가문에서 보호자로 붙여 준 이튼 오라버니였다.
평생 바라던 존재, 하지만 이제는 혈육이 되어버린 탓에 아무리 귀족이 되었어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였다.
‘처음부터 바뀌는 일 없으면 이런 마음 아픈 사랑 따위 겪지 않았을 텐데... 내 자리도 내 거고, 오라버니는 그냥 다정한 오라버니로만 느껴졌을 텐데...’
리엘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그래도 마냥 좋았다. 그저 오라버니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잘못된 마음이니 어서 접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누군가를 좋아하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그렇게 잊고 적응하고 살려던 그때, 제국에서 다시 그 애를 마주쳤다. 자신의 모든 것을 망친 그 애를...
그런데 그녀는 너무나 쉽게 다시 백작 영애가 되어 있었다. 이유가 어찌되었든 간에 도저히 용서되지 않았다.
자신의 것을 전부 빼앗았던 주제에, 이제 뻔뻔하게 가족이라며 오라버니에게 달라붙는 모습이라니!
오라버니 역시 오직 리엘만을 챙겼다. 어떻게 그 애의 편을 들면서 자신의 뺨을 때릴 수 있는지... 그때 느꼈던 모멸감, 분노, 서러움... 정말 억울하고 분했다.
심지어 그녀는 오라버니의 자상함에 기고만장해지기라도 했는지, 자신이 정말 백작영애라도 된 듯 자꾸만 끼어들었다.
그렇게 경고해도 끝끝내 무도회에 나타나더니, 고작 드레스 한 벌 찢어놓은 일 가지고 길길이 날뛰었다. 그리고 그걸 또 눈앞에서 황자에게 일러바치다니...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그러는 본인은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망가트린 주제에 말이다.
‘미워... 네가 너무 미워...! 제발 내 눈앞에서 영원히 사라져 달란 말이야!!’
그렇기만 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는데, 리엘은 사라지기는커녕 끝없이 민폐를 끼쳤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황녀전하 시해사건에 리엘이 연루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눈앞이 새까매지는 기분이었다.
‘멍청한 년! 죽으려면 혼자 죽을 것이지, 가문을 말아먹으려고 작정을 했어!’
저 암덩어리 같은 년 때문에 자신과 오라버니의 앞날까지 끝장날 거라 생각하니 너무나 화가 났다. 리엘은 언제나 자신의 인생을 말아먹는 악의 축이었다.
기숙사에 강제로 구금되어 있는 동안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그런데 그 와중에도 오라버니는 오직 리엘만을 걱정했다. 그 애 때문에 이런 꼴이 되었는데 말이다.
그래도, 잘은 모르겠지만 다행히 일이 잘 풀려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무슨 아양을 떤 건지, 사고를 친 리엘은 정작 황족의 측근 시녀가 되어 있었다.
‘아아악!! 왜!! 왜! 세상은 항상 리엘의 편이야! 왜!!!! 나를 이렇게 매번 나락으로 빠트리는 못된 년인데, 왜 하늘은 벌을 주기는커녕 승승장구 행운만을 안겨주는 거야!!! 아아아아악!!’
심지어 현실은 점점 더 잔인해졌다. 얄미운 리엘은 대체 어떻게 한 것인지 황자마저 낚아 의기양양하게 본궁의 파티에 나타났다. 그리고 둘 사이를 보란 듯이 과시했다.
‘기회주의자! 백작영애의 자리도 그렇게 재빨리 잡아채더니...! 대체 어째서 저 애에게만 저런 행운이 연달이 일어나는 거지? 왜 난 영원히 행복해 질수 없는 거야!’
오라버니에게 꼬리칠 땐 언제고, 훨씬 나은 선택지가 나타나니 재빨리 노선을 바꾼 모습이 혐오스러울 정도였다.
정작 자신은,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오라버니에 대한 마음을 포기 못해 애달파 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그날, 예전에 잠시 스쳐지나가듯 봤던 황제를 다시 마주칠 수 있었다.
마탑에서 우연히 봤을 때, 눈 돌아가게 멋진 황제의 모습에 잠시 혹했던 게 떠올랐다.
물론 잠시 넋을 잃고 바라봤던 건 사실이지만, 황비 운운한 건 그저 말 뿐이지 진심도 아니었다. 자신 따위가 감히 꿈도 꾸지 못하는 자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저 천한 리엘도 황자를 잡았는데, 나라고 황제를 못 잡을 게 어디 있어!? 내가 반드시 리엘보다 더 높이 올라가 짓밟아 줄 거야. 무려 황제를 잡는다면, 오라버니에 대한 마음도 접을 수 있을 거야.“
그 다음 일은 간단했다. 파티장에서 홀로 버려져 수모를 겪고 있는 셀리나 공주에게 접근해 감언이설로 환심을 샀다.
공주의 목표는 황자, 자신의 목표는 황제. 어차피 목적이 충돌하지도 않는데다가, 리엘이라는 공통의 적을 두고 있었다. 손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리엘을 제거할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도 무심하게, 결코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들어버렸다.
오라버니가 리엘에게 고백하는 장면을 보게 된 것이었다. 그를 평생 좋아한 건 자신이었는데, 정작 오라버니가 마음을 준 건 리엘이었다.
‘이젠 내가 여동생인데! 오라버니는 여전히 너만을 바라 봐!! 내가 그토록 바랐던 연인으로서 말이야!!’
눈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는 듯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그 천한 계집은 주제도 모르고 오라버니의 마음을 산산이 부숴버렸다.
분노에 몸이 다 떨렸다. 당장 뛰쳐나가 난동을 부리려던 찰나, 자신 말고도 듣는 귀가 있다는 걸 알아챘다.
‘황자 전하? 들은 거야?’
회심의 미소가 피어올랐다. 굳이 자신이 나설 필요도 없었다.
황자가 호기심에 시녀인 리엘을 한 번 데리고 논 것뿐이라는 소문에, 안 그래도 즐거워하던 참이었다. 이걸 다 들었으면 설령 진심이었다 하더라도 둘 사이에 저절로 금이 갈 것이다.
그렇게 리엘의 몰락을 기다리던 어느 날, 황자전하에 대한 암살 미수 사건으로 온 황궁이 떠들썩해졌다. 연일 피바람이 불고 발칵 난리가 났다.
공주가 자신에게는 말해주지 않았지만, 리엘을 노리기 위해 벌인 일인 일이라는 걸 대충 짐작 했다. 멍청한 공주는 수작질이 표정에 훤히 드러났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정작 리엘은 죽지도 않고 멀쩡했다. 그래도 그녀 때문에 황족이 다쳤으니 그것만으로도 리엘이 끝장 날 줄 알았는데, 황자가 감싸주었는지 일은 또 흐지부지 넘어갔다.
그리고 셀리나 공주는 황자 앞에서 굴욕을 당하고 왔다며 발광을 했다. 이게 다 리엘년 때문이라며 자신에게 화풀이를 했다.
“네 가문에서 그런 망할 계집을 하녀로 딸려 보내 이런 사달이 났지 않느냐!!”
공주에게 뺨을 맞을 때마다 분노가 치솟았지만, 이건 단순히 화가 나고 어쩌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왕족의 진노를 사면 가문조차도 한순간에 끝장날 수 있는 일이다.
이젠 정말 리엘을 없애기 위한 계획이 필요한 때였다. 더 이상 그 애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이 풍비박산 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실연의 아픔에 마음 앓이 하는 오라버니의 모습은 차고 넘칠 만큼의 동기를 그녀에게 부여해 주었다. 슬픔에 빠진 그는 비올레티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리엘이 죽어 없어지지 않고는, 연인으로서든 동생으로서든 내 자리는 없어...! 네가 내 모든 걸 빼앗아갔으니까! 언제나 항상 그랬어! 절대로,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야!’
절대로 리엘 혼자 행복하도록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할 행복이라면, 차라리 함께 파멸을 선사해 주고 싶었다.
***
결국 리일은 돌아오지 않아서, 난 간단히 쪽지를 남기고 긴장된 마음으로 별궁으로 향했다.
이미 공주가 시중인들을 다 치워 놓았는지, 별궁의 입구에서부터 공주의 처소까지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똑똑똑
“들어와라.”
문을 열고 들어서자 티테이블에 거만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둘이 보였다. 시중인들을 다 내보냈어도, 감시역인 시녀 한 명은 절대 떠나지 않는 모양인지 한 구석에 가만히 서 있었다.
“공주 저하를 뵈옵니다.”
나는 말없이 인사를 올리며 얌전히 섰다.
“그래. 제 발로 기어온 걸 보니 상황 판단이 빠르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저하. 어서 와, 리엘. 오랜만이야.”
언제 그렇게 측근이 되었는지, 비올레티는 공주 곁에 찰싹 달라붙어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 나를 보고 비릿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모습이 영 꺼림칙했다.
“저하, 차를 올릴까요?”
“그래. 목이 마르구나.”
비올레티가 가만히 서 있는 내게 눈짓했다.
“시녀가 되어가지고 뭐 하고 있는 거야!”
공주의 시녀도 아니건만, 어쨌든 잘나신 신분의 비올레티는 손도 까딱 할 리가 없었다.
잔은 두 개. 당연히 내 잔은 있지도 않았다. 네 위치를 깨달으라고 일부러 하는 짓이라는 티가 유치할 정도로 뻔히 보였다.
쪼르르르
별궁의 시녀들이 이미 준비해 두고 간 건지, 찻물을 잔에 따르기만 하면 됐다. 맑은 찻물이 흘러나왔다. 난 잔을 준비한 후 다시 조용히 서서 공주의 말을 기다렸다.
공주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의아함에 슬쩍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짜악!
아니다 다를까, 바로 손바닥이 날아왔다
“건방지게 어딜 감히 고개를 들어!”
리일이 너무 편하게 대해 주어 내가 벌써 느슨해진 모양이었다. 별궁시절 생활수칙을 까맣게 잊고 고개를 들어버리다니...
공주는 언감생심 눈도 마주쳐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걸, 비릿한 피맛과 함께 절실히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꿇어.”
“..........”
입술을 꾹 깨물며 조금 떨어져 꿇어앉았다.
나를 무릎 꿇려놓은 채 일부러 더 초조하게 만들 생각인지, 둘은 가만히 차만 홀짝거리고 있었다.
시간이 꽤 흐른 후에야, 공주는 흡족한 듯한 표정으로 내 비굴한 모습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 약혼자에게서 떨어져라.”
“........”
“전하의 시녀라는 핑계 따위 댈 생각도 말도록.”
“...네.”
“내 말을 어겼다간, 곧바로 이걸 공표해 널 리테인으로 보내 주지.”
공주는 소환장으로 추정되는 서류를 슬쩍 보여주었다.
“명심하겠습니다.”
“하지만 난 너그러우니 자비를 베풀어 주겠다. 널 리테인으로 보내는 것보다 더 좋은 생각이 났거든.”
“......”
“넌 다시 별궁의 하녀로 오게 될 거다.”
“....네?”
“전하께 돌아가서 네가 직접 별궁으로 보내달라고 청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