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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낚이면 좋겠어-81화 (81/134)

81. 위기 (3)

2017.03.08.

“진실이 밝혀지길 원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해야 할 거다.”

보는 눈이 있어 그런지 공주는 에둘러 말했다.

“알겠...습니다...”

별궁으로 돌아간다는 건 죽으러 간다는 뜻이다. 그냥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비참하게 맞아죽을 거다.

내가 내 입으로 그걸 요청하라니... 물론 일단 대답만 해 놓고 시간을 끌 생각이지만, 죽을 자리를 직접 마련하라고 시키는 공주의 잔혹함에 치가 떨렸다.

누가 여기로 돌아올 줄 알아? 리일이 내 신분을 알면 등돌릴까봐 내가 절대 털어놓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모양인데, 결코 그쪽 생각처럼 되지는 않을 거야!!

“내일부터 즐거운 날이 시작되겠구나. 호호호!!”

삐뚜름하게 웃고 있는 공주의 얼굴이 정말 소름끼쳤다. 공주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벽 한구석에 걸려있는 채찍이 눈에 들어왔다.

두려움에 몸이 가늘게 떨렸다.

괜찮아. 여기 돌아올 일 절대 없을 테니까...

만에 하나 일이 최악으로 흘러 별궁에 오게 된다 해도, 리테인으로 끌려가는 것 보단 나을 거야. 어쨌든 이 황궁 안 어딘가에 있으면, 리일이 어떻게든 날 구해줄 테니까...

“나도 별궁에 종종 놀러올 테니, 함께 즐거운 시간 보내자.”

비올레티 역시 한 마디 거들며 내 불행을 조롱했다. 그녀의 말에 매우 흡족한 듯, 공주는 진하게 미소지어며 찻잔을 들어올렸다.

난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아..! 다시 내 밑으로 오게 된 걸 환영하는 의미로, 너에게도 귀한 차를 한 잔 내려주지.”

바짝 기며 백기를 든 내 모습이 기분 좋은지, 공주는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공주의 말에 대기 중인 시녀가 찻잔을 하나 더 가져와 따라 주었다.

“리테인 왕실에서 보내온 아주 귀한 차다. 네년 따위는 입에도 못 댈 상등품이지. 마지막 만찬이라 생각하면 딱 되겠구나.”

“황송하옵니다. 저하”

차 따위 마시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으나, 괜히 비위를 거슬렀다가 손찌검 당할까봐 순순히 일어나서 공주의 곁으로 갔다.

하지만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었다. 설마 차에 무슨 짓을 한 건 아니겠지...?

막 차를 들이키려는데, 맞은편에 있는 비올레티의 의미심장한 표정이 보였다. 그녀의 눈이 나와 마주쳤고, 그 순간 뚜렷하게 들려왔다.

-죽어. 마시고 죽어버려. 이제 우리의 악연도 끝이야.

흠칫

몸이 파르르 떨렸다.

독? 내 잔에만 독을 발라놓은 거야. 어떻게 구한 건진 몰라도, 처음부터 죽이려고 날 부른 거였어. 그래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혼자 오라고...

앞부분 저 협박은 연막이었던 거야. 내가 별다른 의심을 하지 못하도록.

하지만 설마하니 여기서 날 죽여 버릴 생각을 할 줄은... 아, 별궁 하녀로 데려온 후 죽이는 것 보다는, 지금 소리 소문 없이 죽여 없애는 게 더 간단하겠구나.

내 모습을 혹시 누가 보더라도, 몇몇 하녀들 입단속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겠지. 그런데 시녀가 보고 있는데? 설마 시녀도 매수한 건가? 하지만 그녀는 제국 귀족인데?

“왜 마시지 않느냐!!”

내가 당황하는 사이, 공주는 재차 다그쳤다.

손이 덜덜 떨렸다.

저 멍청한 공주가 이걸 생각해 냈을 리는 없으니, 이건 전부 비올레티 짓이다. 능력이 없었으면 그대로 죽을 뻔 했어. 하지만 어쩌지...

“저하께서 친히 내려주신 차를 거부하는 게냐!”

맞은편에 앉아있던 비올레티 역시 계속 차를 권했다.

“..........”

난 찻잔을 들어 올리다가 실수인 척 차를 바닥에 쏟아버렸다. 비올레티의 표정이 꿈틀하는 게 보였다.

짝!!

곧바로 공주의 손이 날아왔다.

“천한 것이 감히!!”

“죄송합니다. 저하. 긴장해서 손이 미끄러져서...”

“저하, 이 아이가 출신이 천해 예법을 제대로 못 배워 그렇습니다.”

그렇게 말한 비올레티는 손수 티팟을 들어 다시 내 찻잔을 채워 주었다.

“자, 여기 다시 따라 줄게.”

“.........”

“마셔 보렴.”

어서 죽으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끔찍하게 들렸다.

“.........”

“마셔.”

비올레티는 우아한 척 차를 홀짝이며 내게 말했다.

“.........”

어쩌지... 또 쏟아 부으면 너무 티날 텐데... 그래도 조금 전에 한 번 쏟아냈으니, 찻잔에 있던 독도 거의 사라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내 손으로 독을 들이키기엔 너무 겁이 났다.

“어서!!”

내가 마시고 죽을 때까지 계속 강요할 게 틀림없었다. 빠져나갈 방법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정신 차려. 어떻게든 살아 나가야 해. 리일에게 쪽지를 남기고 왔으니, 무언가 눈치 채고 와 줄지도 몰라.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해!

“왜 안 마시는 게냐? 독이라도 들었을 것 같으냐?”

“저, 저하 그게...”

차라리 벌을 받을 걸 각오하고 또 찻물을 바닥에 흘려버리려는 찰나,

“쿨럭.. 컥.. 커헉...”

공주가 갑자기 피를 토하며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꺄악! 저, 저하!!”

비올레티는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나더니, 나에게 소리쳤다.

“독이다! 저년을 붙잡아라!! 공주 저하를 시해하려... 아..! 쿨럭.. 컥...”

비올레티 역시 목을 붙잡고 콜록대기 시작했다.

“...............!!!”

이게 진짜 함정이었던 거야...!? 하지만 어떻게...?

깨닫는 순간 이미 늦었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하녀들이 우르르 들이닥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의문을 채 해결할 겨를도 없이 곧바로 결박당했다.

***

"공주저하, 무사하신지요..."

"으..."

부랴부랴 달려온 힐러와 주치의가 응급처치를 잘 해 준 덕분에, 둘 다 생명에 지장이 없었다.

하지만 독기운이 올라왔을 때 느꼈던 통증은 정말 지독했다. 뱃속을 쥐어짜는 듯 고통스럽고, 목이 타는 것처럼 끔찍한 감각이었다.

그 순간을 떠올린 공주는 눈에서 독기를 뿜으며 물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리엘이 마셨어야 할 독이었거늘!! 리엘은, 그 요망한 년은 어디 있느냐!!”

“그게... 일단 별궁에 억류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독은... 아무래도 매수한 하녀가 실수한 것 같습니다.”

“뭣이!!”

“독이 찻잔이 아니라 티팟에서 나왔습니다. 분명 표시를 해 놓은 찻잔 하나에만 독을 타라고 시켰는데... 멍청한 하녀가 잘못 알고 일을 그르친 모양입니다.”

“이런 멍청한 하녀계집 같으니라고!!”

쨍그랑

콰직

분노한 공주는 미친 듯이 물건을 집어던지며 화풀이를 해 댔다.

한참 난동을 부리다가, 제 풀에 지쳤는지 공주는 씩씩대며 의자에 주저앉았다.

“저하, 고정하시옵소서.”

“.....그런데 리엘 그 계집은 어째서 마시지 않고 찻물을 버린 거지? 뭔가 눈치라도 챈 게 아니더냐?”

“그럴 리가 없습니다. 다만, 저하께서 호의를 베풀어주시니 무언가 미심쩍다 생각했겠죠.”

“감히....!!!”

당연한 일이었건만 그 조차도 화가 나는 공주였다.

“일을 망친 그 하녀계집을 끌고 와라!”

“저하, 이미 그 하녀는 자신의 잘못을 두려워한 나머지 목을 매 죽었습니다. 자신의 실수로 저하께서 쓰러지셨으니 겁이 났겠지요.”

의심을 피하기 위해 비올레티 역시 차를 마시긴 했으나, 일부러 조금 덜 마셨다. 덕분에 먼저 몸을 추스른 그녀는 재빨리 하녀를 처리해 놨다.

공주가 무언가 눈치 채면 곤란했기에, 서둘러 죽여 입을 막아놓은 것이었다. 세력 없는 리테인출신 사생아 하녀 하나쯤은 그냥 흐지부지 자살로 처리될 것이다.

비올레티는 이 일로 다른 죄 없는 하녀들이 얼마나 죽어나갈지 따위는 관심도 없었다.

“이이익!! 그년이 일을 다 망쳐버리지 않았느냐!!”

“아니옵니다, 저하. 오히려 잘 된 일입니다.”

“뭣이? 그게 무슨 소리냐!?”

비올레티는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이걸 이용해서 리엘을 저하의 독살미수로 몰고 가면 훨씬 깔끔히 일을 처리할 수 있습니다.”

“오호라...!! 아, 그년을 붙잡아 두었다고 했지!?"

비올레티는 웃음이 절로 나오려는 얼굴을 억지로 굳히며 공주를 달랬다.

"우선 창고에 가둬 두었습니다. 별궁에는 지하감옥이 없으니까요. 지금쯤이면 본궁에도 소식이 전해졌겠군요."

빠드득

“잘했다. 당장 안내해라!"

"네. 저하.“

‘이렇게까지 잘 될 줄은 몰랐는데... 후후후후후! 그래. 그렇게 길길이 날뛰어 주셔야지요. 멍청한 공주님.”

모든 것이 계획대로 잘 풀렸다. 비올레티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완벽한 계획을 다시 한 번 검토해 보았다.

이번 계획을 짜는데 가장 중점이 된 요소는 리엘의 능력이었다.

리엘은 전혀 몰랐지만, 비올레티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이었다니...’

그녀가 처음으로 의구심을 느낀 것은, 외궁 무도회의 일로 그녀와 싸우던 때였다.

-정신 차려. 어릴 때부터 짝사랑해온 건 알겠는데...

그땐 별 생각을 못했는데, 돌아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무언가 이상했다.

‘내가 오라버니를 어릴 때부터 짝사랑한 걸 어떻게 아는 거지?’

그 시절, 내색은커녕 오라버니와 눈도 제대로 마주친 적 없었다.

그냥 자신의 지금 모습을 보고 때려 찍은 거라고 하기엔, 상식적으로 여동생으로서 질투라고 생각하는 게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오라버니조차 모르는 자신의 감정을, 리엘은 정확히 꿰뚫어보고 짝사랑이 시작된 구체적인 시기까지 알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과 함께,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엄마인 줄 알았던 유모도 꼭 그랬었지.’

어린 시절, 항상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엄마, 아니 유모는 확실히 이상했어. 몇 번이나 내 마음을 읽듯, 내가 분명 말하지 않은 내용을 알고 있었어.’

엄마라서 그렇다고 치기엔, 말한 적 없는 세세한 내용까지 먼저 알고 있어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눈이 마주칠 때면 머릿속을 헤집는 듯 낱낱이 탐색하는 눈빛이 느껴져, 마치 발가벗겨지는 기분이 들곤 했었다.

그때도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초능력이라 하기엔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해 그냥 넘어갔었다.

‘하지만 그게 정말이었다면?’

그런 능력이 정말 있다면 헷갈릴 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들은 건지 멋대로 생각을 읽은 건지 말이다. 게다가 상대가 어린아이라면 더더욱 주의하지 않기 십상이다.

하지만 비올레티는 자신이 말했던 것에 대해 정확히 기억하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몇 번이나 의심했었다. 하지만 확인할 방법도 없었고, 유모는 이미 죽었다.

‘그런데 만약 리엘도 그렇다면?’

핏줄이니 영 말이 안 되는 가정은 아니었다. 비올레티는 가정을 조금 더 구체화하기 위해 어릴 적 기억을 더듬었다.

‘내가 거짓말을 할 때면 귀신같이 잡아내 혼냈었지. 하지만 어쩔 때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어. 왜지? 왜지...?’

한참을 고민하던 순간, 불현 듯 무언가가 떠올랐다.

‘눈! 눈빛이야. 눈을 마주치지 않으면 몰랐던 거야. 그래,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듯한 그 기분 나쁜 눈빛!!’

가정이 얼추 세워졌으니 이제는 확인만이 남았다. 그래서 비올레티는 지난번에 일부러 슬쩍 떠 보았다.

그녀에게 으름장을 놓으며, 뒷말은 일부러 자연스럽게 이어질만한 내용으로 골라 마음속으로만 생각했다.

-내가 널 가만히 둘 줄 알아? ‘어머니께서 이 사실을 알면 가만히 안 계실걸? 넌 당장 쫓겨날 거야.’

리엘의 반응은 역시 예상대로였다.

-그래그래. 백작부인께 이르든 말든 마음대로 해. 나도 영원히 백작가에 붙어있을 생각 없다고.

그녀는 그게 머릿속에서 들려온 말이라는 걸 구분 하지 못한 채 덫에 걸렸다. 비올레티는 몰랐지만, 거듭된 연습으로 리엘의 능력이 훨씬 발달되어 있던 점도 한 몫 했다.

그 후에 몇 번은 일부러 시선을 다른 곳으로 한 채 리엘이 반응할 만한 함정을 깔았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역시!!’

의심은 확신이 되었고, 비올레티는 그 능력에 중점을 두고 함정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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