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위기(4)
2017.03.08.
그동안 당했던 건 리엘을 너무 우습게 봐서였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리엘은 생각보다 강적이야. 예전처럼 감정적으로 해코지 하는 정도로는 안 돼. 철저한 계획을 짜야 해...’
멍청한 공주를 꼬드기는 건 손쉬운 일이었다. 리엘을 끝장낼 수단을 손에 쥐고 있다는 말에 공주는 크게 반겼다.
그녀의 비호를 받아 백작가는 무사하게 둔 채, 리엘을 꼼짝 못하게 만들 본국의 소환장을 받아냈다.
물론 공주는 그녀의 진짜 계획을 몰랐다. 그녀는 비올레티가 말해준 계획대로, 정말로 리엘을 독살한다고만 알고 있었다.
아무리 리엘을 파멸시키는 일이라도, 지고한 신분의 그녀가 스스로 독까지 먹어가며 이 일에 동참할 리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비올레티는 그저 한 가지만 신신당부했다. 혹시라도 공주가 일을 그르칠까봐 저어되어서였다.
“저하, 절대 리엘과 눈을 마주치시면 아니 되십니다.”
“그 천한 계집이 감히 내 눈을 바라봐서는 안 되는 게 당연하지만... 그런데 어째서지?”
의아해하는 공주에게 그녀는 진짜 계획은 숨긴 채 간단히 설명했다. 리엘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마녀이니, 마법으로 우리의 계획을 전부 알아챌 수 있다고 말이다.
리테인 왕족답게 마법은 사악한 것이라고 믿어온 공주는, 비올레티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비올레티는 이어 단단히 당부를 주었다. 리엘을 죽이기 위해서는 절대 의심스럽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며, 처음부터 차를 권하면 수상쩍어 할 테니 마지막에 자연스럽게 권유하라고 부탁했다.
“진짜 계획을 모르도록 연막을 쳐 놓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야 의심 없이 차를 마실 겁니다. 리엘은 별궁으로 자신을 데려오는 게 진짜 목적인 줄로 생각할 겁니다. 찻잔에 하녀를 시켜 미리 독을 발라놓았으니, 그것만 들키지 않으면 쉽게 죽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리엘이 죽으면 곤란해지지 않는가.”
“상관없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오라고 했고, 만에 하나 누군가 목격자가 있더라도 오히려 리엘에게 뒤집어씌우면 됩니다. 리엘이 저하를 시해하려고 독을 탔다가 실수로 찻잔이 뒤바뀌어서 본인이 죽었다고요.”
“아...! 그런 신묘한 계획이!”
“독살이란 보통 지고하신 분들에게나 일어나는 일, 일개 시녀 나부랭이가 타깃일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구나. 네 말이 맞다.”
예상대로 시녀가 떠나지 않았지만,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비올레티의 진짜 계획은 리엘을 이 자리에서 죽이는 게 아니었으니까.
독살미수로 체포하는 게 진짜 목적. 그래서 리엘의 찻잔에 독을 타는 대신, 티팟에 독을 탔다.
그라츠에서는 독을 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만, 비올레티는 공주를 통해 손쉽게 구했다.
왕족인 공주는 유사시를 대비해 독침이 들어있는 반지를 끼고 있었다. 리테인에서 올 때부터 지니고 온 것으로, 그녀의 개인 소지품이었기에 딱히 감시에 걸리지도 않았다.
독이 필요하다는 말에 공주는 스스럼없이 반지의 독액을 빼서 내주었다.
비올레티는 아주 조금씩 동물에게 실험해 보며 양을 조절했다. 자신도 마실 텐데 죽기라도 하면 곤란했으니까.
그렇게 적당히 죽지 않을 만큼, 그리고 지연된 반응이 나오도록 양을 조절해서 준비를 마쳤다.
리엘은 매우 훌륭히 예상대로 움직여 주었다. 능력 역시 사실이었다.
마시고 죽어버리라고 일부러 뚜렷이 떠올렸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멈칫했다. 리엘의 반응은 예상했지만, 그렇게까지 일이 잘 풀릴 줄은 몰랐다. 타이밍까지 완벽했다.
진짜 함정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찻물을 바닥에 흘려가며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이 우스웠다. 그런 제 모습이 오히려 목을 죌 거라는 것도 모르고...
그렇게 행동해주지 않았다 해도, 자신과 공주의 차를 따른 건 리엘이니 어차피 도망갈 구석은 없었다. 적당히 시간을 끌다가 피를 토하면, 그것만으로도 독살미수로 옭아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제 정말 너를 영원히 안 볼 수 있겠구나. 후후후!’
***
이 충격적인 소식은 쏜살같이 본궁에 전해졌다.
“뭐라고!? 리엘이 독살 미수라니!!”
막 처소로 돌아와 리엘의 쪽지를 발견한 엔릴은, 불안한 마음에 곧바로 별궁으로 향하려던 차였다.
“그렇습니다. 전하.”
“말도 안 돼!! 함정이야! 리엘은!? 리엘은 어디 있는가!”
자신이 있었더라면 절대 못 가게 했을 텐데... 뒤늦게 자괴감이 몰려왔다.
“그게... 공주 저하가 죄인을 억류하고 있다고...”
“당장 그녀를 풀어주라 전해라! 아니, 내가 직접 가겠다!!”
“전하. 아니 되십니다!”
“비키지 못하겠는가!!”
“전하! 황제 폐하의 명령이십니다.”
“아바...마마가? 왜? 어째서! 비켜라, 아바마마를 뵈러 가야겠다.”
“엔릴”
굳이 찾아갈 필요도 없이, 황제는 이미 엔릴의 처소에 도착해 있었다.
“아바마마!!”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세요! 리엘이 억울하게 잡혀 있는데!!”
“엔릴! 흥분해서 섣불리 나섰다가는 일을 망친다는 걸 왜 몰라!!”
저 혈기 가득한 나이에, 사랑에 눈 먼 남자가 앞뒤 물불 가리지 않고 무슨 짓을 벌일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신 또한 그렇게 일을 망쳐본 적이 있으니까.
“아바마마... 얼른 도와주세요. 제발...”
“일단은 저쪽이 무슨 요구를 할지 지켜봐야 한다.”
“안 돼요! 그사이 리엘이 무슨 짓을 당할지 알고요! 당장 데려와야 해요. 우리 쪽에서 마법으로 심문한다고 하면 바로 누명을 벗겨줄 수 있잖아요!!”
“왜 이렇게 상황 파악을 못 해! 우리가 리엘의 신병을 요구할 명분이 없다는 걸 모르느냐!”
“네? 어째서요!?”
“그 아이는 제국민이 아냐. 리테인 사람이지. 그런 그 애가 제 나라 왕족을 시해하려한 혐의를 받고 있어. 그런데 우리가 끼어들 곳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아...... 하지만 제국에 고용되어 있잖아요. 제 시녀이고요!”
“볼모 신분으로 황궁에 잠시 고용되어 있다고 해서, 제 나라 왕족을 해치려 한 일에 대한 처벌권을 우리가 행사할 수는 없는 법이야.”
“그럼... 그럼 이대로 가만 두고 보자는 건가요? 그럴 수는 없어요! 누명이라고요!”
“아무것도 안 한다고 하지 않았다. 이런 짓을 벌였다는 것은 무언가 요구하려는 게 있다는 뜻이지. 분명 먼저 거래조건을 내밀 거다.”
“하지만 그 사이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엔릴은 당장이라도 별궁에 쳐들어가 리엘을 빼내 오고 싶었다.
“멋대로 나서지 말거라. 그래도 황족의 시녀이니 그쪽에서도 함부로 대하지는 못할 게다.”
“그래도요...”
“혹여 그 애를 강제로 데려올 생각은 하지 말거라.”
“.......”
“네가 이렇게 나올 것을 예상하고, 전쟁의 빌미를 위해 벌인 일일 수도 있어.”
물론 미치지 않고서야 리테인이 먼저 도발할 것 같지는 않지만, 광신도에 가까운 리테인 국왕이라면 언제 무슨 짓을 할지 종잡을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차라리...”
“그만. 엔릴, 그건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말이야. 전쟁은 애들 장난이 아니야.”
“대체 왜 리테인의 눈치를 보시는 건데요!?”
“엔릴!!”
“...죄송해요.”
아무리 세상 무서울 거 하나 없는 엔릴이라지만, 조금 전 말이 도가 지나쳤음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휴우... 엔릴, 아무튼 그런 게 아니다. 어차피...”
“네. 어차피 이제 리테인 일을 정리하려 하셨잖아요! 실로엔의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전쟁을 하려고 이미 준비하고 계신 거 알고 있어요!”
“그래. 말 그대로 ‘준비’를 하고 있었지. 최적의 타이밍을 재면서.”
사실 현재 제국의 군사배치 상황은 썩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동부전선에 군사를 대대적으로 파견해 놓은 탓에, 리테인과 전면전을 벌이기에 썩 좋은 시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바마마. 제발 도와주세요!”
“네가 그렇게 난리치지 않아도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으니, 제발 가만히 좀 있거라.”
“아바마마...”
“하아... 하지만 일이 복잡해. 이미 리테인 측에서 소환장이 날아와 있어.”
“네? 벌써요?”
“이 일 말고, 그 애의 신분 문제에 대한 조사로 본국에의 송환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아... 설마 귀족사칭죄인가요?”
“그래.”
“안 돼...! 아바마마! 어떻게든 해 주실 수 있죠!?”
“후우...”
황제도 엔릴도 리테인에서 보내 온 소환장의 내용에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이미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리엘 쪽에서 숨기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일단 모른 척 해 주던 중이었을 뿐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자기도 나름 어른이랍시고 날뛰어봤자, 십 수 년을 제국을 지배해 온 황제 앞에서는 한낱 어린아이였다.
황제가 바보가 아닌 이상 아들의 짝을, 그것도 적국의 사람을 들이는 데 기본적인 조사를 해보지 않았을 리 없는 일이었다.
레비넌 백작가에서 아무리 감춘다고 해봤자, 제국의 정보력 앞에서는 아무 소용없는 짓이었다. 다만 황제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는 걸 리엘이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결국 황제와 황후는 리엘의 출생과 성장에 얽힌 사연을 전부 알게 되었다. 물론 특수 능력에 관한 출생의 비밀은 몰랐지만, 그 외 백작가에 얽힌 모든 일은 이미 다 파악하고 있었다.
이튼과의 일을 목격한 엔릴 역시 결국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
엔릴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곧바로 황제를 찾아갔었다. 어차피 아버지가 모를 리 없으니 억지로 숨길 필요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예상은 정확했다. 황제는 알게 된 사실을 확인시켜 주며, 문제 삼지 않고 눈 감아 주겠다고 결정했다.
그에 더 나아가, 엔릴은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해결해 달라는 요청까지 했다. 아무 문제 안 생기면 그냥 영원히 모른 척 넘어가면 될 일이었지만, 혹 무슨 일이 생길 지도 모르니 뒷일을 부탁해 놓은 것이었다.
당시에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었다. 가뜩이나 신분 차이로 그를 끝없이 거부하려던 리엘이었기에, 차마 평민이라는 걸 안다고 내색할 수가 없던 것이었다.
그게 바로 부상당한 엔릴이 며칠 만에 깨어나 리엘과 함께 밤에 황제를 찾아간 날의 일이었다. 리엘을 먼저 내보낸 후 나눈 대화였기에 그녀만 몰랐을 뿐...
“아바마마!”
“일이 복잡하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말없이 처리해 놓았을 것을...”
하지만 양국은 명백한 적국. 제국민으로 귀화를 요청하면 그와 동시에 리테인 쪽 국적포기 신청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혹시나 아직 그쪽에 미련이 남아있을지도 모르는데, 본인의 의사도 묻지 않고 멋대로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당부했건만... 알아들은 줄 알았는데 어째서......’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 올 수 있을지도 몰라 따로 불러다 분명 신신당부를 해 두었다. 절대 혼자 해결하려 들지 말고, 무슨 일이 있으면 꼭 의논하라고.
본인이 먼저 말하지 않는 걸 멋대로 아는 척 하기 뭐해서 에둘러 말했지만, 그 정도면 충분히 이해한 줄 알았다.
그리고 스스로 밝히거나 도움을 요청할 때를 대비해, 원하면 언제든지 귀화시켜 주려 준비까지 다 해 두었다.
황제는 설마하니 리엘이 그걸, 아이가 생기지 않게 조심하라는 당부로 알아들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리테인으로 강제 송환시키지 않으실 거죠??”
“일단 이번 일에 대한 수사 협조를 핑계로, 귀족사칭죄에 대한 송환 요구는 막을 생각이다.”
“협조요?”
“사건 당사자들 외에, 유일한 목격자가 다행히도 제국출신 시녀이다. 그녀에게 증언을 받아낼 권리가 있는 건 우리 제국 측이지. 그 핑계로 조사를 함께 진행하고, 그동안 리엘의 발을 이곳에 묶어둘 생각이다.”
“일단 그나마 다행이긴 하지만... 별궁에서 당장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르잖아요!”
“이미 공식적으로 요청을 해 두었다. 그 아이가 리테인 백성이긴 하지만, 네 시녀이기도 하니 혐의가 확정될 때까지는 함부로 손을 대지 말라고 말이다.”
“그것만으로는...”
“그렇다고 해서 그 아이의 신병을 강제로 확보해 올 수는 없어.”
“제발요...”
“넌 괜히 나서서 일을 망치지 말고 무조건 가만히 있거라.”
“아바마마!!”
“경들, 엔릴이 별궁으로 가지 못하도록 잘 감시하도록. 멋대로 행동하려고 하면 손을 써도 좋으니 무조건 막아라.”
“아바마마!!!”
엔릴이 다급히 불렀지만, 황제는 착잡한 표정을 한 채 떠났다.
***
또 여기구나...
춥고 좁은 창고. 리일 덕분에 이곳에서 기적적으로 탈출했는데, 내가 어리석어서 또 여기로 돌아왔어.
처음부터 전부 함정이었던 거야... 내게 독을 먹이려는 게 아니라, 독살 미수로 몰고 가려고.
그런데 비올레티가 날 똑바로 쳐다보면서, 마시고 죽으라고 뚜렷이 생각했는데...? 그것도 전부 계획된 것이었나? 하지만 대체 어떻게...? 내가 그걸 들을 줄 어떻게 알고?
설마... 내 능력을 알고 있었던 거야? 언제부터? 어떻게?
“하아......”
지금은 일단 연유 따위 파악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 봐야 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처지가 너무 막막하기만 했다.
피를 토하며 쓰러진 공주가 아직 회복중인 것인지, 지금까지는 별 다른 일 없이 잠잠한 상태였다. 하지만 언제 누가 들이닥쳐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너무 떨리고 두려웠다.
이젠 두 번 다시 이런 일 겪지 않을 줄 알았는데...
리일의 옆에서 너무 안이해졌나봐. 그 무엇도 안정되지 않은 상태였는데 너무 마음 놓고 살았어...
한참 자책하고 있는데, 끼이익 하고 문소리가 났다.
“윽...”
갑자기 들어온 빛에 잠시 눈을 찡그렸다. 눈이 익자, 이윽고 시야에 공주의 모습이 잡혔다.
두려움이 엄습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