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구라도 낚이면 좋겠어-84화 (84/134)

84. 위기(6)

2017.03.09.

***

셀리나 공주는 황제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는데...’

분명 일이 술술 잘 풀려가고 있었다.

하녀의 착오로 독을 마신 건 생각할수록 열 받는 일이지만, 그 덕에 처음 계획보다 훨씬 유리한 입장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고작 천한 계집 하나 틀어쥐었다고 저렇게 설설 길 줄이야.’

이대로라면 자신이 원하는 건 모두 요구할 수 있겠다 싶었다. 물론 그녀가 원하는 건 당연히도 엔릴의 옆자리였다. 그 오랜 염원이 드디어 눈앞에 보였다.

하지만 일은 또 틀어졌다.

그것도, 다름 아닌 본국의 지시 때문에.

‘왜 하필이면!!’

그녀의 아버지 리테인 국왕은 독실함으로 유명했지만, 안타깝게도 신앙심과 인격이 비례하지는 않았다.

남들 앞에서 보이는 겉모습은 신실하고 모범적인 군주였으나, 실제로는 왕비를 함부로 대하고 심지어 구타하기 까지 하는 말종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랐지만, 공주는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드레스 안쪽에 가려진 왕비의 여린 맨살은 온통 멍투성이라는 것을.

상품성이 떨어질 것을 우려한 것인지 다행히 공주를 때리지는 않았지만, 그는 여자라는 존재를 그저 팔아치우기 위한 거래 수단 정도로 생각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중 정비 소생의 유일한 딸인 셀리나 공주는 참 쓸모 있는 암말이었다.

그랬기에, 애초에 그녀는 세상을 똑바로 바라보고 사리분별을 할 수 있을 만큼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적도 없었다.

부왕의 생각에 여자란 그저 조신하게 순종하며 아이나 낳는 존재였으니까.

이번 협정에서 제국의 원래 요구를 단칼에 거절하며 공주를 황비 자리로 밀어 넣은 것 역시 국왕의 생각이었다. 그는 공주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가서 황제를 유혹해 네 꼭두각시로 만들어라.’

거리의 창부에게나 할 법한 말에 깊은 굴욕감을 느꼈지만, 거부할 권리 따위는 없었다. 자신이 말을 듣지 않으면, 어마마마가 어떤 꼴을 당할지 뼈저리게 알고 있었으니까.

‘황제의 후궁이라니...’

생각만 해도 두려웠다. 그녀 역시 황제에 대한 소문을 들어본 적 있었다. 살인귀, 전쟁광, 적의 손발을 잘라내는 걸 즐기는 무시무시한 괴물.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후에게만은 자상하다고. 오직 그녀에게만 말이다.

적국에 홀로 내팽개쳐져, 그런 남편의 냉대를 받으며 살 생각에 눈물이 절로 차올랐다. 하지만 도망갈 구석 따윈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 구원의 손길이 내밀어졌다. 황제 대신 황태자와의 약혼 제의가 들어왔던 것이다.

‘황태자가 나와의 약혼을 원했다고? 아...! 나를 보고 한 눈에 반한 거야! 초상화를 보냈을 테니까...’

아버지의 후궁이 되려 했던 여자를 원할 만큼 자신에게 반했다 생각하니, 너무 기뻐 가슴이 뛰었다. 구원의 기사님 같은 황태자를 연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동맹이 체결되었고, 공주는 떨리는 마음으로 제국으로 떠났다.

하지만 직접 와 본 제국의 현실은 상상과 전혀 달랐다. 어째서인지 황태자는 자신에게 냉담했다. 정확히 말하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고 표현하는 게 맞았다.

제국에 오고 한참 후에야 황태자가 아직 책봉을 받지 않아 1황자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을 정도로 좋았다. 그저 푹 빠져버렸다.

하지만 그런 일편단심 마음에도 불구하고, 황태자는 그녀를 피했다. 뿐만 아니라 황제 일가 모두가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다.

‘왜..? 도대체 왜!?’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적국 출신이라고 하나, 이유도 없이 싸늘하게 대하는 건 정말 억울했다.

황후가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거라면 그나마 이해할만했다. 황비의 자리를 노렸다고 생각할 테니까.

하지만 정작 황후보다도 다른 모두가 자신을 불편하게 바라보았다. 너무나 마음 아프고 서러웠다.

아무리 부왕에게 한심하고 쓸모없는 취급을 받았다지만, 고국에서 그녀는 말 그대로 귀한 공주님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가족도 친구도, 심지어 정 붙일 시녀 하나 없었다. 제국인으로만 채워진 시녀들은 사실 감시자들이었고, 고국에서 데려온 시녀들은 전부 하녀로 전락했다.

하녀가 된 영애들은 어차피 대부분 출신이 안 좋긴 하지만, 그래도 그 중 진짜 영애들도 몇몇 있었다. 하지만 공주 체면에 하녀들과 말을 섞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생각했다.

평생을 하찮은 여자 취급을 받으며 무시당하고 산 그녀가 내세울 거라곤 오직 신분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먼 타국에서 그녀는 그렇게 순식간에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고, 그런 상황에서 스트레스를 풀 곳은 오직 천한 하녀들밖에 없었다.

겉으로는 가식을 떨며 뒤로는 약자를 학대하는 짓들은 부왕의 모습 그대로였지만, 자신의 행동이 그렇게 혐오하던 부왕과 똑같다는 것을 공주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분을 삼키며 기다려도, 황태자는 자신에게 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점점 냉담해졌다.

쌓여가는 분노로 화풀이는 점점 심해졌고, 그녀는 몰랐지만 그 행동들은 오히려 역효과를 내며 악순환을 만들어냈다.

‘전하께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거늘, 대체 왜 나를 배척하는 거지...?’

하지만 그걸 모르는 그녀는 그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라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 밑에 있던 천한 하녀 계집이 마탑에서 사고를 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 일이 있고서야 알게 되었다. 그 계집이 자신의 뒤에서 호박씨를 까며, 제 약혼자와 놀아나고 있었다는 것을.

그런데 심지어 황태자는 그 계집을 비호하며 자신을 비난했다. 정말이지 씻을 수 없는 깊은 마음의 상처였다.

정작 그 계집이 친 사고에 말려들어 피를 본 건 자신이었는데 말이다.

자신은 리테인의 입장이 난처해지지 않게 하려고 어떻게든 노력했을 뿐인데, 부왕에게는 멍청하다며 맹비난을 받았고 황태자에게는 온갖 수모를 겪었다.

게다가 그녀의 실수에 대한 분풀이로 어마마마가 두드려 맞았을 거라 생각하니, 자괴감에 죽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아무도 자신의 억울함을 알아주지 않았다.

‘그 천한 계집 따위 때문에!!’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공주는 오직, 황태자를 홀려 자신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든 그년을 반드시 응징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분노의 칼을 갈고 있는데, 그 처절한 비참함 속에서 리엘의 이복자매인 비올레티가 나타났다. 그녀 역시 리엘이라면 이를 가는 동지였다.

‘리엘은 마녀입니다. 저희 부모님도 홀려서 신분을 위장했죠. 황자 전하도 그렇게 홀린 겁니다.’

그 말이 마법처럼 위안을 주었다.

‘그래 마녀. 맞아. 마녀라서 그랬던 거야. 그 계집은 화형당해 마땅한 마녀야.’

그러니 반드시 죽여야 했다.

상념에서 깨어난 공주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런데 하필 그런 요구사항을 말하라니...’

부왕의 지시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유일하게 소중한 존재인 어머니가 인질이나 마찬가지인 신세로 있는 한...

“저하, 심기를 굳건히...”

안절부절 못 하는 공주의 모습에, 비올레티가 오지랖을 부렸다.

“시끄럽다! 누가 긴장된다더냐!”

공주 역시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겁이 나 죽을 것 같았다. 이대로 일이 잘못 돼 전쟁이 터지면, 자신은 적국에서 그대로 인질이 되어버리는 거니까.

“송구합니다.”

비올레티는 조용히 물러났다. 사실 그녀 역시 일이 꼬임에 짜증이 치솟았지만, 차마 공주 앞에서 성질을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꾹 참고 있는 것뿐이었다.

‘막판에 일이 이렇게 틀어질 줄이야...’

원래 비올레티가 원한 건 황제의 옆자리였다.

공주가 필요했기에 그 옆에 딱 붙어서 입안의 혀처럼 비위를 맞추고 있었지만, 그녀 역시 제멋대로인 공주가 정말 싫었다.

하지만 공주가 황자를 가지면, 이 일의 일등공신인 자신이 공주의 시녀로 따라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리고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려 황제의 눈에 들 생각이었다.

황비가 되면 황자비인 공주의 시어머니격이 되는 것이다. 그동안 공주 곁에서 인내하던 세월을 한 방에 보상받을 수 있다. 더불어 황자를 놓치고 붕 뜬 신세가 된 리엘을 마음껏 비웃어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리엘년이 다시 황자 옆에 들러붙을 텐데... 그럼 나는 뭐가 되냐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방법이 없었다. 일단은 칼을 감춘 채 공주 곁에 시녀로 붙어있을 수밖에...

다행히 공주는 자신의 속내를 전혀 모르고 있으니, 적당히 기회를 봐서 공주를 쫓아낼 궁리를 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서로 다른 꿍꿍이를 가진 둘은, 드디어 기다리던 대상을 맞이했다.

덜컥

문이 열리고 황제가 들어왔다. 그의 곁에는 황후도 함께였다.

적막한 기운이 감도는 대전에 뚜벅뚜벅 걸어오는 황제의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까마득히 올려다 보이는 단상 위 황좌에, 황제와 황후가 착석했다.

불쾌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 본 황제는 공주일행을 흘끗 일별했다.

긴장 속에서 공주와 비올레티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황제폐하, 황후폐하를 뵈옵니다.”

“.........”

황제도 황후도 대답이 없었다. 조심스레 황후를 살펴 본 공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하필이면 왜 황후도 함께...’

의례적인 안부인사도 없이, 황제는 차갑게 입을 뗐다.

“바쁘니 짧게 말하도록.”

하지만 정작 공주는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살벌할 정도로 위압감이 느껴지는 얼굴 앞에서 그저 입술만 달달 떨렸다.

“이, 이번 사건은 본국에서도 많이 관심을 가지는 일로...”

“용건만”

황제는 길어지기 시작하는 공주의 말을 뚝 끊었다.

“본국의 요, 요구를 들어주신다면 죄인의 신병을 제국 쪽에 양도해 드릴 수 있습니다.”

“.......”

‘물론 어디까지나 자국민인 리테인 백성에 관한 것이지만 제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황궁에 볼모로 와 있는 상황을 고려해......“

공주의 횡설수설은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

그런 그녀의 모습을 황제는 가만히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이쯤 말했으면 요구조건이 뭐냐고 물을 법도 한데, 아무 반응 없는 그 모습에 공주는 점점 당황스러워졌다.

더듬거리며 설명하던 말은 어쨌든 결론을 맺었다.

“하여, 저희 쪽의 요구만 들어 주신다면, 소환장도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황제는 들은 건지 만 건지 한참이나 반응이 없었다.

“재미있군. 내가 왜 죄인의 신병을 원할 거라 생각하는 거지?”

공주를 한껏 초조하게 만든 황제는, 한참 후에야 나른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 그야 황자 전하께서...”

“타국의 왕족을 시해하려 한 대역죄인을 데려다 뭐에 쓰라는 건가. 대신 처벌이라도 해 주길 바라는 건가?”

“그.. 그게 아니라... 그 계집을 황자 전하께서...”

엔릴이 리엘에게 얼마나 진심인지, 혹시 황제가 미처 모르는 건가 싶어 공주는 자세히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채 설명하기도 전에 황제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설마하니 황자를 그런 대역죄인과 맺어주기 위해, 공주 그대의 헛소리를 들어줄 거라 생각하는 건가?”

“......”.

“우습군.”

황제는 정말로 재미있다는 듯이 낮게 웃었다.

공주는 입술이 바싹바싹 타는 기분이었다. 리엘을 쥐고 상대의 약점을 흔들면 요구를 관철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먹히지 않았다.

‘어쩌면 좋지... 리엘에게 목매는 건 황자인 거지, 황제까지 그 뜻에 따라줄 리 없는 것을...’

일단 상대를 최대한 설득해 보기로 결정한 공주는, 내키지 않는 말까지 꺼냈다. 자신이 가진 패가 쓸모 있으려면, 아이러니하게도 리엘의 가치를 드높여 주어야했다.

“독살 미수 혐의는... 제가 벗겨 주겠습니다. 이 일에 관련되어 이미 죽은 하녀가 있으니, 조건을 수락해 주신다면 그 하녀에게 전부 뒤집어씌우고 풀어주겠습니다.”

공주는 하녀가 자살했다고 알고 있었지만, 굳이 그 사실을 대외적으로 발표하지는 않았다. 차를 준비한 하녀가 자살했다고 하면 리엘에게 누명을 씌우는 데 방해만 되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한참 대답이 없었다. 황제는 침묵 속에서 상대를 움츠리게 하는 법을 아는지, 시종일관 차가운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뻔한 발상이군.”

“......”

이번에 말문이 막힌 쪽은 공주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황제는 조롱하듯 입을 열었다.

“귀족사칭죄라 했던가. 그게 사실이라면 죄인의 본래 신분은 평민이라는 뜻이겠지.”

‘아차, 어리석었어... 소환장을 까발리는 게 아니었어! 리엘을 원한다는 황자의 요구를 황제가 들어주게 하려면, 적어도 귀족 신분은 유지시켜 놨어야 하는 건데...’

자신의 한심함을 자책했지만 이미 늦었다.

“죄질과 상관없이 거래할 일말의 가치도 없군.”

“그... 그게... 하, 하지만 죄인은 이미 제국민의 신분을 취득했다고 들었사옵니다. 과거의 신분이 어찌했든 간에...”

“제국민의 신분?”

처음 듣는 얘기라는 듯한 황제의 반응에, 황후가 옆에서 일부러 들리도록 설명해 주었다. 어차피 공주는 마법능력 인증이니, 의무복무니 등을 잘 몰랐다.

“죄인이 예전에 신청해 놓았던 귀화 건이, 마침 이 즈음 통과된 모양이에요.”

“그런가 보군.”

“그..그러하옵니다. 그러니 죄인은 이미 제국민으로...”

“공주, 머리가 안 돌아가나? 비록 천출이나 쓸 만한 재능이 있다면 얼마든지 귀화시켜 받아줄 수 있겠지. 하지만 내 아들의 짝으로 들이는 것과는 별개의 이야기인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아무리 새 신분을 가졌다고 하나, 그 태생이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닐 터.”

황제가 일부러 연기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공주는, 점점 궁지에 몰려 속이 타들어갔다. 게다가 리엘을 직접 귀화시켜 놓은 게 황제라는 걸 모르고 있으니 더욱 할 말이 없었다.

“마... 많은 것을 요구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침을 꿀꺽 삼킨 공주는, 드디어 가장 중요한 말을 결국 내뱉어 버렸다.

“다만... 저를 황비로 맞이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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