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구라도 낚이면 좋겠어-85화 (85/134)

85. 위기 (7)

2017.03.10.

“......!!”

처음으로 황제의 눈빛이 흔들렸지만, 워낙 찰나의 순간이라 아무도 보지 못했다. 황제는 황후의 손을 꾹 잡으며, 마음의 동요를 감추었다.

협상에 유리하도록 기껏 해 놓은 기선제압도 무색하게, 상대방의 요구는 역린을 건드리는 직격타였다.

“들어줄 가치도 없는 헛소리로군.”

“폐하... 송구하옵니다만, 이것 외에 다른 안은 없습니다. 거절하신다면 리엘은...”

“그딴 헛소리를 하자고 감히 접견을 청한 건가.”

“.......”

쏟아지는 살기에 공주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용건이 끝났으면 돌아가 보도록.”

황제는 더 이상 듣지 않고 휙 떠나버렸다.

***

‘전혀 통하지 않다니...‘

통하지 않는 것뿐 아니라 일말의 고려할 가치도 없다는 태도였다. 리엘의 목숨과 황비자리를 거래하는 일 따위, 굳이 저울질 해볼 필요조차 없다는 듯...

‘황비를 들이는 걸 싫어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너무 무리수였어.’

차라리 리엘을 이대로 제거해버리고, 황자의 옆자리를 노리는 게 나을까 싶기도 했다. 거래만 아니라면, 리엘 따위야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일이었다. 리테인으로 보내 화형시켜도 되고, 심문을 빙자해 자신이 직접 때려죽여도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리엘을 죽인 자신을 황자가 용서할 리 없었다. 게다가 본국의 요구도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황제가 통하지 않는다면, 황자를 공략하면 되겠지.’

한참을 고민하던 공주는 결심한 듯 엔릴의 처소로 발걸음을 돌렸다.

“황자 전하를 뵈러 왔다. 안에 고하게나.”

하지만 기사들은 공주의 출입을 막았다.

“돌아가십시오. 두 분 폐하 외에는 아무도 전하를 만나실 수 없습니다.”

별궁으로 가지 못하도록 막으라는 명령은, 달리 해석하면 공주와 접촉하지 못하게 하라는 뜻이다. 당연히 들여보낼 수 없었다.

“........”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돌아갈 수는 없기에 공주는 패악을 부리려 했다.

막 소리를 지르려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너!!”

엔릴이었다. 문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할 수는 있었지만, 문을 여는 것까지는 미처 막지 못한 것이었다. 게다가 엔릴은 문이 닫히지 않게 하려고 문틈에 팔을 밀어넣은 상태였다.

“전하를 뵈옵니다. 그간 무탈하셨는지요.”

여우처럼 생긋 웃은 공주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엔릴을 바라보았다.

열린 문틈 사이로, 분노한 엔릴의 고함소리가 터져 나왔다.

“리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막 발악하며 뛰쳐나가려는 엔릴을 기사들이 막아섰다. 반쯤 열린 문 앞에 기사들을 가득 세워 둔 채, 공주와 엔릴은 마주보고 대치하게 되었다.

“무슨 짓을 하다니요. 어찌 그런 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무슨 짓은 리엘이 제게 했지요. 제가 독살을 당할 뻔했다는 소식을 못 들으셨나 봅니다.”

“닥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너그럽게 그 애를 용서해 줄 생각이었습니다.”

언제 끌려 나갈지 몰라 불안해진 공주는, 빠르게 할 말을 해 나갔다.

“뭐?”

“하지만 폐하께서는 그리 원치 않으신 듯해서 참으로 마음이 아플 따름입니다.”

“너 아바마마께 무슨 소리를 지껄인 거야!!”

“어머, 저는 단지 리엘을 살려주고 혐의까지 전부 벗겨주겠다고 제안을 드렸을 뿐입니다. 아, 소환장 문제도 전부 없던 일로 하고요. 헌데...”

“무슨 조건을 내민 것이지?”

“별 것 아닙니다. 그저 저를 황비로 들여주시면 된다고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

눈앞이 새까매지는 기분이었다. 왜 하필 황비의 자리를... 아버지가 얼마나 분노했을지 안 봐도 알았다.

“용건은 다 말씀드렸으니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어서 가서 죄인을 심문해야지요.”

“리엘에게 손대지마!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널 갈가리 찢어 죽이겠어!!!”

그 절박한 모습에 공주는 생긋 웃어보였다.

“그리 걱정되시면, 제 제안을 받아들이시라 청하면 될 일 아니십니까?”

“감히!!”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공주!! 공주!!!”

공주를 붙잡기 위해 미친 듯이 몸부림쳤지만, 철벽처럼 막아서는 기사들 때문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

바깥이 유난히 소란스러웠다.

“밖에 무슨 일인가?”

가뜩이나 머리가 아픈데, 궁이 시끄러우니 황제는 더욱 짜증이 났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무슨 일인지 바로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황제의 언짢은 표정에 시종장은 재빨리 나섰다.

하지만 시종장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나가기 위해 살짝 열린 문틈으로 엔릴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아바마마!!”

“......엔릴 녀석이었군.”

“아바마마! 제발요!!”

벌떡 일어난 황제는 저벅저벅 문을 향해 걸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방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막으라 하지 않았더냐!!”

황제의 호통에 기사들은 찔끔하며 수그렸다. 하지만 상황을 보아하니 기사들의 잘못이 아니었다.

지고한 황자가 제 목에 단검까지 들이대며 물러서라 협박하는데 비키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별궁으로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황제를 만나러 가겠다는 거였기에, 강하게 말리지도 못했다.

“아바마마!”

“후우... 다들 물러서라. 엔릴, 들어오너라.”

방으로 들어온 엔릴은 일단 용서를 빌었다.

“죄송합니다.”

“알긴 아느냐.”

부모 앞에서 목에 칼을 들이밀고 협박하다니... 해서는 안 되는 짓이라는 걸 그 역시 알고 있었다.

“아바마마. 부탁드립니다. 제발요... 리엘을 살려 주세요.”

“공주가 무얼 요구한 줄 알고나 하는 말이더냐?”

“.........네.”

그 대답에 황제의 표정이 돌변했다.

“그걸 알면서 어떻게 그걸 요구해!!”

“죄송합니다.”

“네가 어떻게 네 어머니에게 그럴 수가 있느냐!!!”

“..........”

엔릴은 말없이 무릎을 꿇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시끄럽다!!!”

한 번도 화낸 적 없는 황제였지만, 이번만큼은 도저히 참기 힘든 듯 했다.

“아바마마... 제발...”

“엔릴!!”

“......”

“정말 실망이구나. 네가 이럴 순 없는 거야! 언제나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전부 다 하며 살게 해 주었다. 오직 네가 자유롭고 행복하기만을 바랐기에! 그런데 네가 어떻게 네 어머니께 이러느냐! 어떻게 나에게 그런 걸 요구해!!!”

“아바마마. 저도 알아요. 정말 죄송해요. 그런데 어쩔 수가 없잖아요...”

“안 된다.”

“제발요...”

“엔릴. 난 네 아버지이기 전에 네 어머니의 남자다. 그리고 이 제국의 황제이기도 해. 그런 요구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어!”

“아바마마...”

“안 돼.”

“그럼 차라리 무력으로 해결하고 전쟁을 해요! 어차피 하게 될 거, 조금 당긴다고 별 일 있겠어요?”

“그래. 나도 차라리 그러고 싶다. 그런데 네 어머니가 뭐라고 할지 뻔히 알잖아! 무분별한 전선의 확대로 제국을 위태롭게 하느니, 차라리 자신이 황비를 참아주겠다 하고 말 것이야! 애초에 강화협정을 왜 맺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저 역시 황비 따위 용납할 수 없어서 결국 공주를 받아들인 거였어요!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상황이 다르잖아요. 아바마마, 제가... 제가 직접 군사를 이끌게요. 저 옛날처럼 약하지 않아요!”

“네가 무슨! 자그마한 전투조차 한 번 해본 적 없는 주제에 전쟁이라니! 넌 나와 달라. 나처럼 전쟁터에서 커온 아이가 아니라고! 네 어머니가 얼마나 걱정할 줄 알면서 그게 무슨 헛소리냐!!!”

“그럼 어떻게 해요!!!”

미친 듯한 자괴감이 들었다. 충분히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왜 아직도 제 여자 하나 지킬 수가 없는 건지... 검이나 조금 휘두를 줄 알지, 무엇하나 할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걸 처절하게 느꼈다. 지닌바 무력뿐 아니라, 진짜 힘이 필요하다는 걸 새삼 깨달은 것이다.

“.......”

“그러니 한 번만 양보해 주시면 안 돼요? 제발 부탁드려요. 앞으로 두 번 다시 속 썩이지 않을게요. 마지막으로 한 번만...”

“엔릴!!!!”

“아바마마, 제발...”

“나가거라. 내가 더 이상 화를 참을 자신이 없구나.”

“아바마마......”

엔릴이 애타게 불렀지만, 황제는 기사들에게 명령해 그를 끌어냈다.

***

시간만 속절없이 흘렀다. 다른 거래조건이라도 제시해 주면 좋겠건만, 공주는 차일피일 시간을 끌 뿐이었다.

엔릴은 황제의 처소 앞에서 하루 종일 빌었다. 먹지도 자지도 않고 문 앞에 꿇어 앉아 시위하듯 빌고 또 빌었다. 꼼짝하지 않는 황자 덕분에, 그를 겹겹이 둘러싼 기사들도 덩달아 내내 그곳을 지켰다.

결국 보다 못한 황후가 나섰다.

“엘... 어떻게 할 건가요?”

황제는 괴로운 듯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어떻게 하긴요, 묻고 자시고 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엘, 마음은 알겠지만...”

“.......”

“그렇게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잖아요. 게다가 엔릴이 얼마나 슬퍼할지 생각해 보세요.”

“저도 이대로 모른 척 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무언가 다른 방법을...”

황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달래듯이 그의 말을 끊었다.

“엘... 그냥 좋게 생각해요. 황비까지 들여 놓으면 저쪽은 더욱 방심하게 되지 않겠어요?”

“......”

“드디어 양국의 화친이 안정적인 궤도에 올랐다고 생각하겠죠. 정략결혼이란, 고금을 막론하고 늘 가장 손쉬운 동맹수단이 되어 왔으니까요.”

“하지만 이건...”

“그러니 잠시 원하는 대로 놀아나 주는 척 한다고 생각하면 되잖아요. 우린 그 사이 더욱 든든히 전쟁을 준비하고요. 잘된 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황비 하나 억지로 들여 어떻게든 총애 받게 할 심산이 뻔히 보여 어처구니가 없지만, 이게 딱 저들 수준이라면 오히려 다행인 셈이었다.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아 베갯머리송사를 해보겠다니... 어차피 조금도 의미 없는 짓일 게 뻔했으니까.

“디트, 다른 일도 아니고 감히 황비의 자리를 원하는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저도 아무렇지 않지는 않아요. 좋을 리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안 된다는 겁니다!”

“저야 그 일이 좋지 않은 정도지만, 엔릴은 어떨지 생각해 봐요.”

“......”

“우리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제가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래도 안 됩니다.”

“입장 바꿔서 생각해 봐요. 우리 일이었다면, 저 때의 우리였다면 엘은 나를 살리기 위해 어땠을 것 같아요?”

“......그건...”

“부모님께 미안하다고 날 버릴 수 있었겠어요? 만약 그분들이 뜻을 굽히지 않아 끝끝내 내가 죽었다면 어땠을 것 같아요?”

조실부모한 황제였기에 저 가정이 잘 공감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결과는 뻔했다.

“.......디트를 살리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의절했겠지요.”

“저도 그래요.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고요. 어머니께 미안한 말이지만, 이게 제 상황이라면 엘을 택할 거예요.”

“하지만 이건 그것과 경우가 다르잖습니까.”

“다르지 않아요.”

“아무리 그래도 이런 요구를 들어줄 수는 없습니다. 차라리 다른 협상안을 조율해 보는 게 낫겠습니다. 다른 거라면 얼마든지 내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걱정돼서 그래요. 함부로 손대지는 못하겠지만, 계속 시간을 끌다가는 심문을 핑계로 심한 짓을 할지도 몰라요.”

“.......”

황제 역시 그 점이 걱정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리엘을 고이고이 모셔둘 거라고 순순히 믿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쉽게 죽이지는 못할 거라는 건 확실하기에, 그 점을 믿고 있을 뿐이었다.

“제가 별궁에 좀 다녀오려고 해요.”

“디트가 직접요?”

“아무래도 걱정돼요. 그렇다고 엔릴을 보낼 수는 없고, 황제인 엘이 직접 가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되잖아요.”

“.....그렇군요.”

“상황이 어떤지 확인도 하고, 공주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 볼게요.”

“알겠습니다.”

***

“뭐? 황후폐하께서 와 계시다고?”

갑자기 들이닥친 황후의 소식에, 셀리나 공주는 혼비백산하여 명령을 내렸다.

‘그 계집을 보러 온 건가? 곤란한데...’

“너, 너! 당장 창고에 내려가 죄인의 몰골을 다듬어 두어라. 당장!!”

그리고는 황후를 만나 시간을 끌기 위해 직접 입구로 달려갔다.

그 사이 하녀들은 리엘에게 달려가 급히 처치를 했다. 엉망이 된 몸을 가리기 위해 급하게 외투를 덧입혔다.

그 과정에서 상처가 쓸리고 벌어져 피가 배어 나왔지만, 하녀들은 아랑곳도 하지 않았다. 의식을 잃고 있는 리엘은 다행히 아픈 것도 몰랐다.

피로 지저분해진 얼굴을 거친 천으로 박박 닦아내고 머리카락에 엉겨 붙은 피딱지도 떼어내며 급히 상태를 감추려 했다. 하지만 전부 숨기기도 전에 문밖이 소란스러워졌다.

황후가 들이닥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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