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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낚이면 좋겠어-86화 (86/134)

86. 위기 (8)

2017.03.10.

“비켜라.”

“폐하... 아무리 황후폐하라 할지라도, 리테인의 죄인을...”

“비키라고 했다.”

“이렇게 마음대로 죄인을 데려가실 수는...”

“닥치지 못하겠느냐! 내 언제 그런 걸 요구했더냐! 그 아이에게 할 말이 있으니 보자는 게 아닌가!”

“하지만 이...이곳 별궁은 저의..”

“공주. 그라츠는 나의 나라. 이 황궁 안에 공주 그대의 것은 그 무엇도 없다. 땅 한 줌, 풀 한포기 마저 전부 나의 것이다. 내가 이 제국의 어디에 발을 내딛든, 그건 오롯이 나의 의지이다.”

“.......”

“비켜라.”

서늘한 목소리로 말한 황후는 공주를 밀치며 문으로 다가갔다. 동행한 시녀와 기사들이 재빨리 문을 열어주었다.

“.......!!!”

안으로 들어선 황후는 너무 놀란 나머지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짓을!!!”

리엘의 몰골은 엉망진창이었다. 그 처참한 모습에 황후는 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그게......”

황후가 직접 오는 바람에 들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나중에 돌려보낼 때 치료해서 흔적을 없애고 잡아뗄 계획이기 때문이었다.

혹여 리엘이 일러바친다 해도 상관없었다. 심문과정에서 살짝 험한 일이 있었을 뿐인데, 죄인이 너무 겁에 질린 나머지 과장되게 받아들인 것뿐이라고 둘러대면 그만이니까.

“가벼운 심문이 있었을 뿐입니다.”

공주는 잠시 당황한 게 언제였냐는 듯 뻔뻔하게 변명했다.

“가벼운 심문이라니... 이 꼴을 보고도 지금 그딴 변명이 나오는가!! 분명 황실의 이름으로 요청하지 않았더냐! 함부로 손대지 말라고!!”

“하지만 혐의가 있는지 확인하려면 심문을 해 봐야 했기에... 죄인이 협조적인 태도로 나오지 않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공주는 여전히 태연자약했다. 이 정도 일이 뭐가 어떠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 어떻게 이런 잔인한 짓을..!!!”

“저를 독살하려 했던 몹쓸 계집입니다. 이 정도 대가는 응당 치러야지요.”

“어떻게 같은 사람에게 이런 짓을 하느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황후의 노성이 터져 나왔다.

“폐하. 송구합니다만, 듣기에 황망한 말씀입니다. 같은 사람이라니요. 저런 천한 하녀 계집아이와 제가 어찌...”

짝!!

공주의 얼굴이 거칠게 돌아갔다. 부지불식간에 뺨을 맞은 그녀는 너무 놀란 나머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평생 떠받들려 살아온 공주가 누구에게 얼굴을 맞아봤겠는가. 그녀를 평생 하찮은 여인네 취급하던 부왕마저도 뺨을 때리지는 않았다.

“폐..폐하...”

“공주, 한 가지 똑바로 알아두면 좋겠군.”

“.....?”

뺨을 감싼 공주는 멍하니 황후를 바라보았다.

“지금,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남의 뺨을 내리쳐 봤다는 것을.”

그만큼 자신을 경멸한다는 뜻이었다. 공주는 모멸감에 입술을 짓씹었다.

“........”

그동안 황후는 양국의 협정에 관해 모든 걸 알고 있었음에도, 공주를 아무 이유 없이 미워하지 않으려 노력해 왔다. 리테인의 요구들이 아무리 어처구니없다 해도, 어쨌든 그게 공주의 잘못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국에 온 후 보여준 그녀의 행보는 점점 실망스러웠다. 그러던 차에, 공주를 싫어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었다. 하마터면 엔릴을 죽일 뻔 했던 암살 미수건.

그런데 공주는 이제 그것으로도 모자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짓까지 하고 있었다.

“앞으로 똑바로 처신하기를 바라네.”

“폐, 폐하...”

공주는 분노와 수치에 몸을 바르작 떨고 있었다. 그녀의 반응 따위에 일말의 관심도 없는 황후는, 다시 몸을 돌려 리엘에게 다가갔다.

겉옷을 살며시 벗겨 보니 여기저기 상처투성이가 되어 있는 몸이 보였다.

“아...“

자기도 모르게 비명이 나와 입가에 손을 가져가 막았다. 얼마나 아프고 무서웠을까 싶어 눈물이 핑 돌았다.

화앗!

환한 빛과 함께 힐링마법이 발현되었다.

화앗!!

연거푸 마법이 터져 나왔다. 여기저기 몸을 살피며, 황후는 꼼꼼히 치료해 주었다. 계속해서 마법을 사용하자 머리가 아파져왔지만, 애써 다시 집중해 구석구석을 치료해 주었다.

몇 번이나 힐링을 했다지만, 상처가 곧바로 다 치료되는 건 아니었기에 여전히 상태는 썩 좋지 않았다.

“휴...”

지끈거리는 이마에 손을 올리며 한숨을 내쉰 황후는, 공주를 또렷이 바라보며 경고했다.

“두 번 다시 이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게.”

“..........폐하”

“공주 그대가 본궁에 자리 잡게 된 후의 일을 생각해 봐야 할 것이야. 이 아이에게 또다시 손을 댄다면, 내가 누군가의 뺨을 치는 일이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지는 않을 것 같네.”

흠칫

공주는 그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아무리 황비가 되어봤자, 눈앞의 황후에 비하면 상대할 수조차 없는 낮은 서열이라는 것을 말이다.

황후가 자신을 괴롭히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떠올린 공주는, 공손히 대답했다.

“네, 폐하.”

***

본궁으로 돌아와 황제를 찾아온 황후는 단호하게 말했다.

“엘.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안 되겠어요. 우리가 양보해요.”

“안 됩니다.”

“부탁이에요. 제가 부탁할게요.”

“디트, 어째서...”

“너무 가엾어서 그래요... 흐흑...”

황제를 끌어안은 황후는 갑자기 눈물을 터트렸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황후는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엘... 아무래도 실수한 것 같아요.”

“그게 무슨...”

“공주가... 공주가 앞뒤 안 가리고 그런 짓을 할 줄은 몰랐어요. 리엘을 건드리지 않을 거라고 안심해서는 안 됐는데... 아... 너무...안쓰러워요..”

“........설마!”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황후였다.

“미치지 않고서야 감히! 아무리 리테인 백성이라 해도, 엔릴의 시녀인 아이를 어떻게!! 공주가 드디어 눈에 보이는 게 없는 모양입니다. 어떻게 그런 짓을...!!”

빠드득

리엘에게 한 짓도 화가 나지만, 그 때문에 황후가 그런 충격적인 장면을 겪게 했다는 것 또한 용서할 수 없었다.

과거에 겪었던 사건으로 인해 그런 종류의 일을 보는 것에 유난히 약한 황후였다. 그때를 떠올릴 만한 일에 노출시키지 않으려 얼마나 보호해 왔건만, 그런 모습을 보게 하다니!!

“그러니까... 그만 버티고 우리가 양보해요.”

공주에게 따끔히 경고를 주고 왔다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아무 짓 하지 않을 거라고 믿을 수는 없었다. 흔적이 남지 않는 방법으로 얼마든지 괴롭힐 수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하아...”

“엘...... 저곳에서 저렇게 되어 있는 게 저라고 생각해 보세요.”

“.........”

“한시가 급해 미치겠지요..?”

“그렇..겠지요.”

“엔릴이 지금 그럴 거예요.”

“...........”

“엘”

“......하지만...”

“엘, 다른 방법 알아보고 있다는 거 저도 알아요. 물론 시간은 조금 걸리겠지만, 굳이 황비를 들이지 않더라도 구해올 수는 있겠죠. 어차피 리엘을 죽이지는 못할 테니까요.”

“네.”

“하지만 엘, 우리가 이렇게 시간 끄는 동안 저 아이가 받을 고통을 생각해 보세요. 너무 마음이 아파 도무지 모른 척 할 수가 없어요.”

“...........”

“제가 신신당부를 하고 왔다지만, 상대는 이미 정상적인 행동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잖아요. 몇 시간만 저렇게 되어 있어도 평생의 트라우마가 될 일인데, 벌써 며칠째라니... 저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다 치료해 줄 지도 막막할 정도예요.”

“...........”

“그래도 정 안 내킨다면, 그냥 정치적인 점만 봐요. 저들을 확실히 안심시키고 전쟁을 준비한다는 목적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되잖아요.”

“하아... 디트. 무언가 바뀐 것 같네요. 우리가 디트에게 간청을 해도 모자랄 판에, 디트가 오히려 이렇게 양보하다니.......”

“네. 그러니 양보해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밤새 고민해 보고 내일 아침에 결정하겠습니다.”

황후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 밤에 결정을 내려도 당장 황비를 들이겠다고 발표할 수 없는 노릇이니, 내일 아침까지는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결과는 뻔했다. 황제는 단 한 번도 황후를 이겨본 적이 없었으니까.

***

몇 번이나 사건사고를 몰고 다닌 덕에, 리엘이라는 이름은 꽤나 유명해졌다. 지난 번 황녀 시해혐의 때도 그러더니만, 이번에도 또 해프닝의 중심에는 리엘이 있었다. 독살미수 혐의와 신분에 대한 논란으로 황궁과 제도는 꽤나 떠들썩했다.

“공주, 거래를 받아들이겠네.”

황제가 기껏 마음에도 없는 말까지 연기하며 우세를 점하려 했건만, 저쪽이 리엘을 틀어쥐고 있는 한 다른 방법이 없었다. 결국 황후는 공주를 불러들였다.

“현명하신 판단이십니다.”

‘역시 황자를 들쑤시길 잘했어. 아들의 청을 이기지 못해 황후가 양보한 게 틀림없어.’

“폐하의 황비로 그대를 들일 테니 리엘을 당장 보내거라.”

“알겠습니다. 하오나 지금은 죄인의 심신이 쇠약해져 있는데다가, 스스로 자해를 한 건지 몸에 상처가 많아 우선 치료부터 한 후...”

어제는 가벼운 심문이 있었다고 한 주제에, 오늘의 변명은 또 달랐다.

“그대가 한 짓을 이미 알고 있는데, 눈 가리고 아웅 할 것 있겠는가. 이쪽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엔릴의 시녀에게 함부로 손을 댄 짓은, 우리 그라츠 황실을 능멸한 처사라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겠지. 내 이를 리테인에 정식으로 항의할 것이니 그리 알게나.”

서릿발 내린 듯한 황후의 말에, 공주는 몸이 부르르 떨렸다.

국왕에게 정식으로 항의서를 보내게 되면 그녀의 입장은 퍽 곤란해진다. 분명 일을 또 그르쳤다며 매서운 질책이 날아들 테고, 가엾은 어마마마는 자신 때문에 또 분풀이를 당할 것이다.

왜 욱해서 그런 짓을 했는지... 이제 와서 한탄해봤자 소용없지만 정말 후회스러운 일이었다.

항상 충동적으로 일처리를 하는 게 문제라는 걸 그녀 스스로도 알고는 있지만, 인정하고 싶지도 않고 인정한다 해도 고쳐지지도 않았다.

“........폐.. 폐하. 부디 그것만은... 죄송합니다. 별궁에서 성심을 다해 치료를 해서 보낼 테니 제발...”

“필요 없다. 본궁에는 훨씬 더 뛰어난 힐러들이 있으니 지금 당장 보내거라.”

어제 부랴부랴 나름대로 치료를 해 주었지만, 리엘의 상태는 여전히 엉망이었다. 황후가 어제 힐링을 해 주고 간 덕에 그나마 나았지만, 그래도 당장 보낼 수 있는 모습은 아니었다.

황후가 혼자 와서 그 꼴을 보고 간 것과, 처참한 몰골의 리엘을 본궁으로 보내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이대로 리엘을 보냈다가는 자신이 빼도 박도 못하게 곤란해진다는 생각에, 공주는 어떻게든 시간을 끌려 했다.

“폐하... 그.. 그게.. 아직 책봉에 대해 발표만 했을 뿐, 정식으로 교지를 받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끝나면 그때...”

콰당!

그때 갑자기 엔릴이 들이닥쳤다. 어마마마가 양보했다는 말에 급히 달려온 엔릴은 하필이면 공주를 딱 마주쳤다.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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