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트라우마(1)
2017.03.11.
“깨어난 후에는 불가능하다면 그 전에 결정해야 한다는 건데, 본인의 동의도 없이 우리끼리 해도 될까?”
정확한 조절이 어려우니, 두루뭉술하게 그 날 아침의 일부터 전부 꿈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할 텐데... 그걸 마음대로 해도 좋을지 망설여졌다.
“음... 저 역시 결정할 권리가 있는 게 아니니... 아, 어마마마! 엔릴을 불러다가 불어보는 게 어떨까요? 리엘이 가장 의지하는 사람이니까요.”
“리일을?”
“네. 내일이면 치료가 거의 끝날 테니 그렇게 난동 피우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래야겠구나. 세뇌가 아니라 착각하게 만드는 거니, 깨어난 후의 일도 준비시키려면 불러야지.”
***
한편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황비의 침소에 든 황제는,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공주를 바라보았다.
“폐.. 폐하. 오셨습니까.”
속이 훤히 다 비치는 하늘하늘한 가운을 입은 공주는, 요염한 몸짓과 교태 가득한 목소리로 그에게 다가왔다.
솔직히 그녀 역시 원해서 온 자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각 같이 잘 생긴 황제의 얼굴을 보니 나쁘지 않은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어느 정도 자신도 있었다. 아무리 황후만을 사랑하기로 유명한 목석같은 남자라지만, 젊고 싱싱한 육체가 덤비는데 안 넘어올 수 있겠나 싶었다.
황후가 대단히 아름답다고는 하나, 십대의 싱그러움과 풋풋함을 가진 자신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황제의 눈빛에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공주, 아니 이제 황비라고 불러야겠군.”
“네, 폐하.”
“내 몸에 손대지 말아라.”
“.....네?”
“내게 손끝 하나라도 대면 손목을 잘라버리겠다.”
“............”
그 살벌한 말에 공주는 겁에 질려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말 뿐 아니라 정말로 줄줄이 쏘아져 넘치는 살기에, 오줌을 지릴 정도로 몸이 덜덜 떨렸다.
“알아들었으면 조용히 자도록.”
“폐하...! 하지만 초야를 치르지 않고서는 혼인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대를 보는 게 심히 불쾌함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들지 않았는가.”
“허면...”
“하지만 내게 안길 생각은 하지 말도록.”
“......”
“어찌되었든 이 방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에 나가면 되겠지.”
모멸감에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여자로서 자존심도 너무 상했다. 공주, 아니 황비는 표독스럽게 외쳤다.
“어떻게든 저를 내치고 싶으시겠지만, 이미 황비로 책봉된 이상 결코 그렇게 쉽게...”
“황비, 머리가 잘 안 돌아가나 보군.”
“네...?”
“그라츠 제국은 신전과의 결속을 끊었지.”
밑도 끝도 없는 신전의 이야기에 공주는 눈만 둥그렇게 떴다.
“그게 무슨...”
“원래 귀족 이상의 결혼과 이혼에는 황제의 허락과 사제의 증명이 필요하지. 하지만 신전에 등을 돌린 그라츠 제국은 그럴 필요가 없어. 내가 그대를 들이는 것도 내치는 것도 오직 황제인 나의 의지로 가능하다는 뜻이다.”
“하.. 하지만... 아무 사유 없이 정식으로 들인 황비를 내치실 수는...”
“사유라... 그래. 그게 좋겠군. 오늘 우리는 공식적으로 초야를 치룬 것으로 알려지겠지.”
“.......”
“하지만 혈흔이 없으니, 공주 그대가 순결하지 않다는 소문이 나겠군.”
실제로 처녀라 할지라도, 첫날밤 혹시 혈흔이 비치지 않을까 조마조마 마음 졸일 수 밖에 없는 게 현실이었다. 그런데 심지어 저렇게 되면...
솔직히 황제도 치졸하게 이런 것으로 협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금 방법의 졸렬성 따위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어..어떻게 제게 그런..!! 전 한 치의 더러움도 없는 순결한 처녀의 몸입니다!”
“내 알 바 아니지 않는가.”
“페하... 제발...”
“정절을 잃은 채 혼인한 황비라...”
잔인한 말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눈앞의 공주로 인해 황후가 상처받을 것을 생각하니 조금도 미안하지 않았다.
“폐하... 그렇게 되면 제 명예는...”
가뜩이나 적국 출신의 황비였다. 게다가 온 제국민이 사랑해 마지않는 황후 곁에 끼어든 셈이었으니, 존재 자체만으로 모두의 미움을 사는 위치였다. 오늘 일이 알려지면, 황비는 황궁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죽은 듯이 살아야 하는 입장이 될 것이다.
“게다가 영원히 아이도 못 가질 테니, 시간만 지나면 사유는 충분하겠군.”
황제가 두 번 다시 찾지 않는다면, 공주가 회임할 일은 당연히 없을 것이다.
“......”
비참한 미래가 절로 그려졌다. 자신 역시 좋아서 이런 위치가 된 게 아니었는데, 서러움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황비의 지위 따위 단 한 번도 원한 적 없었거늘... 단지 부왕의 요구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다. 그런데 모두들 자기에게만 비난의 화살을 돌리다니 너무나 억울했다.
“이 관계가 오래 갈 것 같지는 않아 다행이군.”
하지만 황제는 그녀의 비통한 심정에 조금도 아랑곳않고, 그저 차갑게 할 말을 내뱉고 등을 돌려버렸다.
***
다음 날.
밤새 열심히 힐링을 받은 리엘은 마법으로 깊이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감금에서 풀려난 엔릴이 바람처럼 날아서 도착했다.
“어마마마, 리엘이 대체 무슨 짓을 당했기에 기억까지 지워야 하는 건가요!? 공주가 대체 무슨 짓을!!”
역시나 엔릴은 설명을 듣고는 미친 듯이 난리를 쳤다. 짐작은 가지만, 일단 눈앞의 리엘의 모습은 멀쩡했기에 정확한 내막을 알 수 없는 그였다.
“리일, 지금 화를 내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잖니.”
“그래. 일단 진정 좀 해. 네 결정이 필요해서 부른 거야”
“...........”
일단은 리엘의 일이 우선이었기에, 엔릴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화를 눌러 참았다. 그리고는 한참을 고민했다. 자신이 그럴 권리가 있는지 말이다. 하지만 역시 끔찍한 기억을 가진 채 깨어나서 힘겨워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긴 고민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저도 동의해요. 나중에 리엘이 혹시 알게 되어 원망하면 제가 다 책임질게요.”
그렇게 일사천리로 결정한 셋은, 앞으로의 계획을 짰다.
“일단 현실의 개연성이 맞아야 할 것 같구나.”
“개연성이요?”
“그래. 날짜가 안 맞잖니.”
“아! 깨어났더니 3일 후인 걸 알면 안 되겠네요.”
“그건 일주일에 하루 정도씩 요일을 헷갈리게 해서, 아주 천천히 날짜를 맞추면 돼.”
아나이스의 아이디어였다.
“그래. 그럼 전날 가면무도회를 갔던 걸 실제의 마지막 기억으로 생각하도록 말을 맞출게요.”
“어? 그럼 나랑 그날 만나서 연구한 것도 꿈이라 생각하겠네?”
“음 그러니까... 그날 일어나서 나와 점심 때 만난 것, 누나를 만난 것, 별궁으로 가서 그 일을 겪은 것이 전부 꿈인 거야. 길고 긴 끔찍한 꿈을 꿨고, 눈을 떠보니 다행히 악몽이었다. 눈을 뜬 날은 가면무도회의 다음날. 숙취 때문에 한참 자고 일어난 것으로 설정. 맞죠?”
끄덕끄덕
황후와 아나이스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데 공주는 어떻게 해요?”
엔릴의 질문에 아나이스도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요. 그게 문제네요. 어쩌죠?”
공주가 황비가 되었다는 걸 알게 되면 분명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챌 테니, 그 점이 가장 걸렸다.
“정보도 차단하고 마주치지도 않게 해서 최대한 늦게 알게 해야지. 어차피 영원히 착각하게 만들 수는 없어. 하지만 시간이 충분히 지나면 트라우마도 많이 무뎌질 테니까 조금 낫지 않을까?”
“그렇겠...죠?”
“그래. 그럼 그렇게 결정하고 하자. 빅토리아, 부탁할게. 혹시라도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그만두고.”
“네!”
***
누군가의 말소리인 듯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흠칫
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냥 기절해 있고 싶은데, 또 깨어난 모양이었다.
이제 또 지옥이 시작되겠지...
“사..살려주세요.. 제발...”
갑자기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졌다. 뻑뻑한 눈이 잘 떠지지 않아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두려움이 밀려들어왔다.
“으으... 으으으...”
겁에 질린 몸은 경련에 가까울 정도로 덜덜 떨렸다. 어떻게든 보호하기 위해 몸을 있는 대로 웅크리며 구석으로 숨어들었다.
“리엘, 리엘!! 나야, 나.”
“으흑... 제발... 그만... 제발요...”
“리엘. 악몽을 꾼 거야? 나야, 리일.”
“으... 흐윽...”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따스한 체온이 느껴졌다.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아주며 안심시켜주는 누군가가 있었다.
“........”
“리엘. 무슨 안 좋은 꿈 꿨어?”
“......리..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왜 눈앞에 그가...?
영문은 모르겠지만 가장 먼저 드는 건 미친 듯한 안도감이었다. 지금 상황에 대한 의문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흐흑... 흐윽.. 리일... 너무 끔찍했어요... 흑.... 흐어엉... 흐흑... 흑흑...”
“리엘, 악몽을 꿨나 봐."
다정하고 자상한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리일은 펑펑 우는 나를 한참을 다독여 주었다.
“흐흑... 리일... 리일... 흑... "
"무슨 꿈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악몽이었을 뿐이야...”
꿈...? 그럴 리가...
"....네?"
“ 꿈이 너무 생생했나봐...무슨 꿈이었는지 몰라도... 이제 괜찮아. 금방 사라질 거야. 꿈은 원래 깨어나면 잘 생각 안 나잖아.”
꿈이라니, 생각이 안 나다니... 이렇게 온 몸에...
“.......!?”
상처가 하나도 없다니?
“가위라도 눌린 거야?”
“.....아... 그게...”
“숙취가 너무 심해서 그런 가 보다.”
“네?”
“어제 가면무도회 기억 안나? 우리 엄청 많이 마셨잖아.”
“네? 그게 무슨...”
“엄청 많이 잤어. 벌써 대낮이야.”
“.........”
지금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끝도 없을 것 같은 지옥 같은 순간들이었는데... 꿈?
정확히 며칠간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이 가면무도회 다음날이라니? 내가 별궁에 간 날인데? 어떻게 된 거지?
“꿈...?”
“리엘? 얼마나 긴 꿈을 꿨기에 아직도 멍한 거야.”
리일이 낮게 웃으며 핀잔을 주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미소였다.
“아니에요. 꿈이 아니라... 제가 실수해서... 바보 같이.... 리일... 나 너무 무서웠어요... 아직도 떨려요. 정말 너무 아프고 두렵고... 흐흑...”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리일이 다독여주었다.
“리엘, 아무 일도 없었어. 나쁜 꿈은 그냥 잊어버리면 돼.”
“꿈....”
“휴, 와 보길 정말 잘했네. 점심때가 다 됐는데도 안 일어나서 와봤는데, 악몽을 꾸고 있어서 깨웠어.”
“.......”
대체 무슨 소리인지, 난 여전히 어리둥절했다.
그때 갑자기 노크소리가 들렸다.
똑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