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트라우마 (5)
2017.03.13.
“네...?”
“저기, 그럼 우리 아예 소궁으로 가서 단둘이 지낼까? 내가 밤에 늘 함께 있어 줄게.”
“네!!?”
본궁에서는 남의 눈이 있어서 차마 같은 방을 쓸 수가 없었다. 리일의 처소에서 내가 사는 것도 말이 안 되고, 그렇다고 시녀의 방에 그가 오는 건 더더욱 말도 안 됐다. 그래서 리일이 이런 제안을 하는 것 같았다.
“아, 아니! 이상한 뜻이 아니라... 난 그냥 정말 순수하게 걱정되어서...”
“알아요. 하지만 어떻게 그래요...”
“뭐 어때. 어마마마한테 말해서 빌릴게. 거기로 거처를 옮겨서 함께 지내자. 마음껏 데이트도 할 겸!”
내 곁에 있어주기 위함 뿐 아니라, 공주를 마주치지 않게 하려는 배려인 것 같았다. 리일은 아직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아직까지 안 마주친 게 신기할 정도로, 난 한 번도 셀리나 공주를 만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숨기려 해도 본궁에 계속 머물다가는 언젠가 황비 소식을 듣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 역시 공주를 마주치지 않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흔쾌히 승낙하기엔 너무 죄송스러웠다.
지금 이 순간 누구보다도 공주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건 황후폐하일 텐데...
“어때?”
“저 리일... 소궁은 황후폐하의 것인데, 가끔 놀러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아예 눌러 사는 건...”
꺼려하는 진짜 이유를 말할 수 없었기에, 난 적당히 둘러대며 거절하려 했다.
“아냐, 어차피 두 분은 정무로 너무 바쁘셔서 거의 오지도 못하셔. 어쩌다 한 번 들르시는 게 전부인 걸?”
그러니 더 미안해졌다. 싫어도 마주칠 수밖에 없으실 텐데 나만 쏙 몸을 빼다니... 이게 다 나 때문인데...
실은 다 기억하고 있다고, 차마 죄송해서 그럴 수 없다고 털어놓을 수도 없어 그냥 계속 거절만 했다.
“그건 너무 죄송해서 안 될 것 같아요.”
“괜찮다니까!? 사실 이미 허락도 받아 왔어.”
“그래도요... 안 내켜하실 거예요.”
“어마마마도 좋아하시던데?”
“.........정말...요?”
솔직히 공주를 마주치는 게 너무 두려웠다. 그 얼굴을 보면 그때의 악몽이 생생히 떠오를 것 같아 괜찮을 자신이 없었다.
“응. 가자. 오늘 바로 옮기자.”
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을 차려보니 정말로 얼떨결에 소궁으로 이사와 버렸다. 소수의 시중인들만 대동한 채 단둘이 이곳에 오니, 마치...
“이야, 우리 꼭 신혼살림 차린 것 같다!”
“....풉!"
사실 나도 그 생각 했는데...
아기자기한 작은 궁에서 둘이 생활할 생각을 하니, 마치 소꿉놀이 같기도 하고 신혼살림 같기도 하고... 싫을 리가 없었다.
“리엘, 우리 별궁 어디다 지을까?”
“네? 무슨 별궁이요?”
“여기 어마마마의 소궁처럼, 황궁 부지에 리엘 전용으로 하나 짓기로 했잖아.”
“네?”
대체 언제...?
“그때 밥 먹으면서 아바마마가 지으라고 한 거 기억 안 나?”
그, 그냥 지나가듯 하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그게 진짜였다고..?
“괘, 괜찮아요! 별궁이라니요! 어떻게 그런 심한 사치를...”
“이미 내가 건축가도 다 불러 놓았어. 마음에 드는 위치 정하고, 원하는 건축양식 고르고...”
“으악! 몰라요! 너무 과분한 일이라고요! 나, 나중에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래도 정말 기쁘긴 했다. 집 한 채 마련이 평생의 꿈이었는데 내 전용 궁이 생긴다니... 진짜 안 믿겨질 정도였다.
아차,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조금 전까지 우울해 했던 주제에 이렇게 좋아서 헤헤거리다니...
게다가 두 분께 그런 거대 똥을 투척해놓고는 나만 이렇게 신나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자꾸만 드는 죄책감에 난 순수하게 기뻐하기도 어려웠다.
“리엘... 별로 안 좋아?”
“아니에요! 좋아요. 너무 좋아서...”
“그럼 좋아하기만 하면 되지, 왜 그렇게 어두워. 자, 얼굴 펴고! 아무튼 그럼 이제 가실까요, 레이디?”
리일이 과장된 동작으로 우스꽝스레 손을 내밀었다.
“꺅!!”
그 손을 살짝 잡자, 리일이 확 끌어당기며 번쩍 나를 안아들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마나님!”
“으앗, 내려 놔 줘요!!”
등을 팡팡 쳐 봤지만, 신이 난 리일은 나를 빙글빙글 돌리며 궁 안으로 데리고 갔다.
미안한 마음은 여전했지만, 소궁에서의 생활은 너무나 좋았다. 평화로운 나날 속에 아무 방해 없이 그와 단둘이 즐기는 시간들...
소궁의 뒤편에는 아주 예쁜 유리온실이 지어져 있었다. 색색이 가득 피어 있는 귀한 꽃들은, 심란했던 내 마음을 마법처럼 녹여 주었다.
이곳에서 늦겨울의 햇살을 비스듬히 받으며, 달큰한 꽃향기와 함께 리일과 매일 데이트를 즐겼다.
그러던 어느 날, 리일은 뜬금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리엘, 우리 약혼하자!!”
“네?”
“리엘도 16세 지났으니, 이미 성년이잖아. 결혼이든 약혼이든 다 할 수 있는 거 아냐?”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맞다, 근데 리엘은 생일이 언제야? 여태 그것도 모르고 있었네?”
“.....3월 달이요.”
“3월 며칠?”
사실 나도 잘 모른다. 내가 알던 내 생일날은 사실 비올레티의 생일이다. 그 애와 내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긴 했지만 날짜까지 똑같을 리는 없으니, 나는 내 정확한 생일을 모르는 셈이었다.
“모르겠어요.”
“그렇구나...”
리일은 역시나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하지만 난 그에게 직접 털어놓고 싶었다.
내게 신분 문제가 있었다는 걸 이미 알긴 하겠지만, 어디까지나 전해들을 것뿐 나에게 직접 들은 건 아니었다.
사실 지금 그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간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게 뻔했다.
어떻게든 버티고 살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을 뿐이지, 솔직히 그 때의 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비참한 기분이었다.
15살 어린 나이에 하루아침에 집에서 내처지고, 엄마를 잃고, 바닥으로 떨어져 하루하루 비참하게 살아가고,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불안한 미래에 떨며 매일을 울었다.
그러던 중 백작가와 계약을 하게 되었고, 똑바로 처신하지 않으면 곱게 죽지 못할 거라는 협박을 들으며 강제로 제국으로 오게 되었다. 그 후 겪었던 지옥 같은 나날들...
그러니 지금은 그 때의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다. 가뜩이나 이번 사건의 트라우마를 억지로 잊으려 노력하며 겨우겨우 버티고 있는데, 힘들었던 기억을 떠올리면 완전히 무너져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내 입으로 말해야 할 때였다.
“있잖아요, 리일... 사실 전부터 말하려 한 건데요... 저요...”
“알아. 리엘 이미 다 알아.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
“알고 계셨군요...”
“응. 괜찮아. 전혀 신경 안 쓰니까.”
역시나... 황제가 내 신분을 직접 처리해 줬으니 리일도 모를 리가 없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하지만... 제가 직접 말해야 될 것 같아서요. 그 동안 숨겨서 죄송하다는 말도 해야 하고요.”
“리엘, 정말 괜찮아. 이미 지난 일 아무 상관없어. 무슨 일이 있었든 간에, 리엘은 리엘이야. 우리 그런 힘든 일 떠올리지 말자.”
“감...사해요. 흐흑... 리일... 정말 고마워요. 그래서... 그래서 제가 정확한 생일을 모르는 거예요. 정말 죄송해요. 미리 말씀드렸어야...”
“리엘!”
그가 와락 안겨오는 바람에 끝없이 추락하려던 생각이 뚝 끊겼다.
“리엘, 혼자 고생 많았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어.. 내가 그것도 모르고 아무 도움이 되어주지 못했다니... 정말 미안해. 정말...”
“고마워요. 이제 괜찮아요...”
그 중 한줄기 빛이었던 리일이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겠지... 그를 속였던 건 정말 미안하지만, 정말로 난 그만큼 절박했었다.
“그래서... 그걸 말 못해서 혼자 그런 일을...”
별궁에 가게 된 이유까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 설명만으로도 리일은 내가 왜 그랬었는지 이해하는 눈치였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궁지에 몰렸다는 걸 추측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 일은 모른 척 해야 했기에, 리일은 차마 나를 제대로 위로하지도 못하고 말을 삼켰다.
“고작 평민 고아인 제가 리일의 곁에 서는 게 너무 두려웠어요...”
“그런 거 걱정하지 않아도 됐는데... 이제 아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다 해결 됐.. 해 줄게.”
이미 해결되었다는 걸 리일도 나도 알고 있었다. 내가 안다는 사실을 그가 모를 뿐...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리엘, 우리 이렇게 하자!”
“네? 뭘요?”
“우리 약혼하고, 그날을 리엘의 생일로 정하자. 곧 리엘의 생일에 가까운 3월이니까, 어때?”
“약혼...이요?”
당연히 망설여졌다. 이렇게 물의를 일으켜놓고, 내가 무슨 염치로 리일과 약혼을 하겠는가...
“응!”
“안 돼요. 우리 비밀연애중이잖아요. 공주가 알았다간...”
지금 설정 상 둘러댈 핑계는 공주밖에 없었다. 이미 비밀이 비밀이 아니게 된 지 오래 되었지만 말이다.
“이제 괜찮아.”
괜찮다니? 아... 어차피 황비가 되어 동맹이 완성되었으니, 리일이 누구와 결혼해도 상관없는 건가? 하지만 그렇다 해도 내가 어떻게 뻔뻔하게...
“....괜찮을 리가 없잖아요.”
“아냐. 괜찮아. 복잡한 건 알 필요 없고, 아무튼 이제 괜찮아.”
“.......”
“이제 내가 항상 지켜줄게. 내 곁에 있어 줘.”
나를 와락 끌어안은 그의 팔이 등을 힘껏 감싸왔다. 눈물로 얼룩진 눈가에, 뜨거운 그의 입술이 화인처럼 닿아왔다.
빠알간 혀가 눈물을 날름 닦아주었다. 부드럽게 눈가를 쓰다듬는 그 촉촉한 감촉에 몸이 저릿할 정도로 떨려왔다. 닿는 부위 부위마다 타오를 듯 뜨거워졌다. 짜릿함에 몸이 점점 달아올랐다.
어차피 여긴 아무도 간섭하지 않는, 누구의 눈도 없는 둘만의 장소였다. 리일의 행동은 점점 거침없어졌다.
입술은 눈가를 지나 아래로 살짝 내려와, 살그머니 벌어진 채 거친 호흡을 내뱉는 내 입으로 침투해왔다. 그가 퍼붓는 키스를 나 역시 거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혀가 얽히며 질척하고 야릇한 소리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츠읍
“으응...“
입술을 잘근 깨물고 강하게 빨아들이고, 입천장을 사르륵 훑어댈 때마다 몸이 움찔거렸다.
숨도 못 쉴 정도로 나를 괴롭히던 리일의 입술은, 다시 위로 올라와 내 귓가로 향했다.
“리엘... 내가 지켜줄게.”
나직하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심장이 떨려왔다.
“고마워요...”
귓가에 뜨거운 바람을 불어넣던 리일은, 목덜미를 따라 타고 죽 미끄러져 내려왔다.
“아...”
온 몸에 털이 다 곤두서는 듯, 치명적인 자극에 부들부들 떨렸다. 보드라운 내 피부에 하나하나 느껴지는 그의 숨결이 너무 좋았다.
어느새 내 가슴은 리일의 손에 붙들려 있었다. 단단하고 거칠지만 자상한 그의 손길이, 내 가슴을 희롱하며 곤두세웠다.
“리일.. 아... 으읏...”
손만으로는 만족이 되지 않았는지, 목덜미를 탐하던 입술이 점점 내려오기 시작했다. 점점 가까이 다가오던 그의 입술은, 결국 고지를 점령해 버렸다.
“아...아아아...”
아주 맛있는 사탕을 먹듯이 달콤하게 굴려대는 혀 때문에, 나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기분이 붕 떠버렸다. 부드럽고 섬세하게 애무할 때마다,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가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게 되었다.
“하...하아... 흐읍...“
리일의 호흡도 거칠어져있었다. 아니, 거칠다 못해 굶주려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가 아까부터 단단해져있었다는 걸 진즉에 느끼고 있었다.
“리일... 사랑해요.”
가벼운 마음으로 저질렀던 지난번과는 전혀 다른 기분으로 그에게 빠져들었다. 그에게 몰두해 엉망진창이 된 마음을 말끔히 지워버리고 위로받고 싶었다.
자그마한 내 목소리에, 리일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나에게 거칠게 안겨들었다.
“리엘.. 리엘...!”
“흐읏...!”
정수리가 관통되는 듯한 자극이 시작되었다.
***
“리엘. 약혼이 문제가 아닌 것 같아.”
“네? 왜요?”
“이젠 자제할 자신이 없어. 당장 결혼해야겠어!”
“풋. 뭐예요.”
“결혼도 전에 사고 치면 큰일 나잖아. 그러니 어서...”
“자제도 안 하고 사고도 안 치면 되잖아요.”
미약하나마 나름 이 시대에도 가능한 피임법이 있다고. 마지막에만 좀 조심하면 그나마 조금 안전하단 말이지..?
“그..그런가?”
“아잇! 몰라요. 아무튼 전 리일만 믿어요!”
“그래! 나만 믿고 얼른 결혼! 결혼할 거니까 괜찮지?”
그 말과 함께 리일은 또다시 나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