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트라우마(6)
2017.03.14.
***
그날 이후 매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뻔했다. 이미 고삐가 풀어져버린 리일은, 밤마다 내게 혈기왕성함을 증명해 주었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어두운 밤을 혼자 보내는 걸 두려워하니 날 다독여 주기 위해서라도 리일은 늘 내 곁에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늘 똑같았고...
아무튼, 리일과 불타는 시간을 보내면서도, 낮에는 늘 황녀를 방문했다. 황비가 황녀를 찾아올 일은 거의 없어서인지, 다행히 아직은 마주친 적이 없었다.
“맞다, 리엘. 지난번에 말해주는 걸 잊었네. 네 새 이름말이야.”
“새 이름이요?”
아! 이젠 레비넌이 아니지. 가문에서 내 신분에 문제없다고 보증해주긴 했지만, 이미 귀화해서 국적을 버렸으니 더 이상 저쪽 성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네가 의식이 없는 사이 처리하느라, 성을 어마마마가 마음대로 지었어. 뭐 어차피 엔릴과 결혼하게 되면 바뀔 거니까.”
“괜찮아요! 황후폐하께서 직접 내려주신 성이라니,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지요!”
“그리고 네게 내려진 마법사 서임은 기사와 동급인 준귀족의 신분이야.”
황녀는 그 말과 함께 부연설명을 길게 덧붙여 주었다. 기사들이 능력에 따라 다른 대우를 받듯이, 마법사도 수준별로 다르다고 했다.
기본적으로 최소한의 마법능력을 인정받아 마법사 서임을 받으면, 기사와 마찬가지로 준귀족이 된다.
거기서 더 우수한 능력을 인정받으면 작위 없는 일반 귀족이 되고, 국가에 공을 세우면 그때부터 작위가 주어진다. 남작이니 자작이니 그런 것들...
그리고 지금은 급한 대로 내가 예전에 등록해 둔 내용을 토대로 준귀족으로 인정 받아왔으니, 나중에 꼭 다시 검증받아서 신분을 올리라고 당부해 주었다.
“네. 고맙습니다.”
“성은 ‘애스틴’이야.
“애스틴이요?”
“응. 별이라는 뜻이야.”
뜻도 뜻이지만... 이건...
애스틴은 엄마의 이름이었다. 본명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15년간 알고 있는 이름은 그랬다.
나에 대해 조사했으니 유모의 이름도 알고 있을 테고, 일부러 나를 위해 그 이름을 내려준 게 분명했다.
눈시울이 젖어들었다. 엄마 생각도 나고, 황후폐하의 배려도 너무 고맙고...
“..........”
“리엘?”
난 눈물을 훔치며 환하게 웃어보였다.
“정말 마음에 들어요! 발음도 참 예쁘고요! 애스틴... 리엘 애스틴...”
아직은 준귀족이기에 리엘 ‘폰’ 애스틴 이라고 쓸 수는 없었지만, 성이 생긴 것만으로도 좋았다. 평민들은 아무리 부유해도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게 바로 이 성이었으니까.
“마음에 들어서 다행이야.”
“정말 고맙습니다.”
애스틴... 이제부터 내 성은 애스틴이구나...
그렇게 흐뭇한 마음으로 이름을 되뇌고 있는데, 노크소리가 들렸다.
똑똑
“전하, 빅토리아양을 데려왔습니다.”
아, 이름에 정신이 팔려 잊고 있었다.
요즘 황녀와 난 빅토리아와 함께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었는데,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보거나 간단한 실험을 하는 것들이 주를 이루었다.
나한테 능력을 쓰다가 기절했던 빅토리아는, 다음날쯤 깨어나서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듣더니 자기가 왜 쓰러졌는지 알 것 같다고 말했다.
같은 능력자끼리는 상호 간섭은커녕 생각을 듣는 것도 쉽지 않다는 설명이었다. 역시 내가 엄마의 머릿속을 읽은 기억이 없었던 건, 그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내가 의식이 있는 상태로 빅토리아가 나에게 간섭을 시도했다면, 훨씬 더 위험한 상황이 될 수도 있던 것이었다. 심한 경우에는 약한 쪽의 정신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니 말이다.
“황녀 전하를 뵈옵니다.”
제법 궁에 익숙해진 것인지, 처음에는 ‘안녕하세요‘라고 수줍게 인사하던 빅토리아는 제법 모양새를 갖추어 인사를 했다.
“비키, 어서 와.”
오늘 역시 능력에 대한 가벼운 이야기로 시작했다. 빅토리아는 비슷한 처지의 언니들과 지내면서 들은 내용이나, 직접 경험한 내용들을 말해 주었다.
빅토리아가 함께 지냈던 이들이라면 나와도 반쪽 자매들일지 모른다. 하지만 왜인지 가족이란 느낌은 그다지 들지 않았다.
비능력자라서 버려진 아이들까지 합치면 교황이 뿌려놓은 씨가 얼마나 많을 텐데, 그게 다 형제자매들이라니... 꾸엑. 오싹할 정도였다.
물론 눈앞의 빅토리아는 실제 피가 섞였든 안 섞였든 간에 이미 정이 들어 동생같이 느껴진다. 그렇지만 얼굴도 모르는 이들은 그냥 아무 상관없는 남들 같았다.
“저번에 하다 만 이야기부터 할까?”
“네, 전하.”
며칠 전 빅토리아는, 생각 전달이나 간섭, 세뇌는 눈을 보지 않아도 가능하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렇기에 내가 잠들어 있는 중에도 꿈이라 착각하게 만드는 시도를 해 볼 수 있던 것이었다.
“저번에 말씀드린 대로 본인의 의지, 혹은 기존 세뇌와 정 반대의 생각이 강요되면 대상자가 매우 혼란스러워 해요. 이게 정도가 심해지면 정신이 파괴되기도 하지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말이지?”
내가 요즘 가장 주목하고 있는 점은 바로 이거였다. 이걸 잘 활용하면 분명...
“네. 그리고...”
빅토리아의 말에 의하면, 의지에 합치되는 베이스 없이는 누군가를 세뇌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했다. 기껏해야 일시적 간섭을 통해 짧게 강제성을 행사하는 정도가 한계였다.
그렇기에 교황이 국왕을 꼭두각시로 유지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종교적 베이스를 깔아놓은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교란 건 사실, 그런 특별한 세뇌 능력 없이도 얼마든지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 무서운 것이었으니까.
“그리고 같은 능력자끼리는 정신 장벽이 워낙 높아서 의지의 방향과 상관없이 위험하고요.”
그래서 내가 무의식중에도 그렇게 튕겨낸 모양이었다. 심지어 나 역시 그게 차라리 악몽이기를 간절히 바랐는데 말이다.
“그런데 같은 능력자끼리 하면 약한 쪽이 특히 위험하다고 했잖아. 약한 쪽 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의미야? 능력이 약한 쪽? 아니면 정신력이 약한 쪽?”
“저도 직접 실험해보지는 않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둘 다가 아닐까요?”
“아... 하긴, 이 능력이라는 것도 결국 집중력의 차이니까, 의지가 약하다는 건 둘 다 마찬가지인 셈이겠구나.”
“네. 그럴 거예요.”
주로 우리 둘이 대화하고, 황녀는 그 내용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식이었다.
“그럼 한 번 해 보자.”
“네.”
나는 마음을 다잡고 빅토리아와 눈을 마주쳤다.
여태껏도 늘 위험하지 않는 정도로 살짝살짝 실험을 해 왔었다. 물론 어린 빅토리아가 더 능력이 약할 테니, 내가 간섭을 행사 받는 방향으로 말이다.
아무리 조심해도 늘 긴장되는 일이었다. 그나마 운이 좋으면 능력만 잃는 정도로 끝날 수도 있겠지만, 심하면 정신이 완전히 무너져 버린다니...
무언가 간섭이 들어오는 느낌이 찌르르 났다. 머리가 아파졌지만, 방어하는 기분으로 집중해서 버텼다.
“으...”
결국 튕겨난 빅토리아는 어지러운 듯 머리를 붙잡았다.
“역시 언니 쪽이 훨씬 강해요.”
나도 시도해보고 싶지만, 반대로 하면 빅토리아에게 너무 위험할 것 같아서 할 수가 없었다.
“그런가 보구나. 그럼 다른 걸 해 보자.”
그때 가만히 있던 황녀가 한 마디 불쑥 했다.
“나에게 한 번 해 볼래?”
“네에?”
“일반인에게도 해 봐야지.”
“어떻게 전하께...”
차라리 줄리가 있으면 도와달라고 할 텐데... 아쉽게도 줄리는 없고, 더 이상 비밀을 늘릴 수 없기에 여기엔 우리 셋밖에 없었다.
“가벼운 걸로 하면 괜찮다며. 본인의 의지, 혹은 기존 세뇌와 정 반대되는 것만 아니면 상관없지 않을까?”
“하지만 그래도 감히 전하께 어찌 실험을 하겠어요. 천부당만부당 하신 말씀이세요!!”
“하지만... 저쪽에 해보려는 게 우리 목적이잖아. 일반인의 반응이 궁금해서 그래.”
저쪽. 리테인 왕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열심히 이 짓을 하고 있는 이유는, 그에게 간섭을 행사해 세뇌를 풀기 위해서였다.
“절대 안 돼요!”
“불편해지면 바로 말할 테니까 한 번 해 봐. 리엘 말고 빅토리아가. 나도 리엘은 조금 부담스러운 걸?”
“그래도...”
“어차피 약하게 하면 생각을 전달하는 정도이지, 간섭이나 세뇌 수준이 아니잖아. 고작해야 텔레파시라고.”
“.........”
그 후로도 한참의 실랑이 끝에 결국 빅토리아는 조심스럽게 끄덕였다.
“........”
긴장된 표정으로 황녀와 눈을 마주친 빅토리아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그러자 눈앞에 놓인 찻잔을 가리키며 황녀가 허탈하게 물었다.
“이거 마시라고?”
“네.”
“뭐야 그게... 좀 더 제대로”
“네...”
뭘 하면 이거보단 의미 있는 간섭이면서도, 황녀에게 무리가 안 갈지 한참을 고민하는 듯한 빅토리아였다.
고심 끝에 빅토리아가 다시 눈을 마주쳤다.
“..........”
갑자기 황녀가 움찔 하더니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비키, 뭘 한 거야?”
내가 묻자 빅토리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우리끼리 하게 좀 나가시라고 했어요. 그런데 정말 나가실 줄은...”
“...........사실 지겨워서 나가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럴 지도요?”
어쨌든 난 문밖으로 쫓아가 황녀를 데려왔다. 한참을 부르니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건지, 황녀는 멍하니 나에게 되물었다.
“나 왜 나왔어?”
“..........”
“아!”
“죄송합니다, 전하.”
빅토리아가 눈치를 보며 사과했다.
“풋, 후후훗! 아냐, 아냐. 그런데 나 사실 실험내용이 궁금해서 안에 있고 싶었는데... 나가게 한 걸 보니 이거 꽤 강제성 있었던 것 맞지?”
“네. 죄송합니다. 하지만 위험한 정도는 아닐 것 같아서...”
“응. 괜찮아. 잘 했어. 실험해 보지 않으면 어떤지 영영 모르는 거잖아. 머리도 안 아프고 후유증도 전혀 없고.... 잠깐 몽유병 겪고 깨어난 느낌이랄까?”
“그래도 죄송해요...”
“사과 그만하고, 그럼 저쪽에 뭐라고 강제하면 가장 효과적으로 정신을 무너트릴 있을지 생각해 보자.”
“음... 신전을 적대하라? 교황은 마법사다? 교단은 가짜다?”
“뭐 그런 걸로 적당히 하면 되겠네. 가장 큰 인생 모토를 송두리째 뒤엎는 거니까.”
“하긴, 기본 신앙심도 대단할 테니까요.”
“응. 신앙심이 전혀 없다면 아무리 세뇌해도 저 정도로 광신도로 만들 수는 없을 테니, 세뇌의 용이성을 위해 어릴 때부터 모태신앙을 가지게 해 왔겠지.”
“그렇죠...”
역시 무서워, 굳이 그런 능력 없어도 사람 하나 광신도로 만드는 건 식은 죽 먹기인데, 세뇌까지 해 두면 절대로 벗어날 수 없겠구나...
“아, 그리고 드디어 네가 국왕을 대면할 기회가 올 것 같아.”
“진짜요? 어떻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