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구라도 낚이면 좋겠어-94화 (94/134)

94. 트라우마(7)

2017.03.15.

“응. 그때 말한 협정이 진행되고 있거든.”

“언제쯤으로요?”

“다음 달 쯤...?”

내가 국왕을 만날 유일한 기회는, 바로 양국이 맺기로 한 협상의 회담장이다. 그리고 그건 마침 리테인 쪽에서 요구한 사항이었다.

물론 황제가 리테인의 개소리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그것도 황비를 들여 양국이 혼사를 맺은 김에, 상호 불가침 조약을 맺자는 그딴 소리를.

곧 전쟁을 앞두고 있는 것도 모르고 불가침 조약은 무슨...

정말 어이가 없어도 정도가 있지, 멍청한 황비 하나 들여놓고 대체 무슨 배짱으로 저리 자신만만한 건지 모를 지경이었다.

뭘 믿고 저러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황후에 대한 애처가 소문이 문제인 듯싶었다. 황제가 일단 여자에게 푹 빠지면 앞뒤 분간 못하고 꼭두각시가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소문과 현실은 전혀 다른 법. 황제는 그 말도 안 되는 요구를 코웃음도 치지 않고 무시했다.

그런데 그때, 내 부탁을 받은 황녀가 나서서 설득했다. 연구하던 게 성과가 보이는 것 같다며, 수도원 쪽 아이에게서 무언가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했다고 말이다.

물론 진짜로 빅토리아를 이용해 뭘 어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빅토리아가 아니라... 내가 직접 국왕에게 세뇌 파훼를 시도해 볼 생각이니까.

하지만 나에 대한 건 아직 밝히지 말아달라고 부탁했기에, 황녀가 나 대신 빅토리아를 내세운 것이었다.

“얼마 안 남았네요...”

원래라면 응할 이유가 없는 협정을 이런 꿍꿍이로 인해 마지못해 수락하는 척 했고, 결국 이 황당한 협상은 실제로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물론 그러면서도 수상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황제는 신전이 그라츠 제국에서 완전히 철수하는 걸 조건으로 내걸었다.

뭐 어차피 이건 저쪽이 먼저 요구한 것이니 수상해 보일 구석은 없겠지만, 속내는 숨기면서 잇속은 챙기는 일타쌍피랄까?

그 결과 신전은 리테인으로 완전히 물러나기로 했고, 제국은 그런 리테인을 공격하지 않기로 불가침조약을 맺기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회담 자리에 양국 정상이 직접 나오기로 했고, 황제를 따라가기로 한 황녀는 나를 대동하기로 했다.

“긴장되네요...”

“부담가지지 마. 힘들 것 같으면 언제든지 그만 둬. 네가 더 중요하니까.”

“하지만...”

국왕이 갑자기 망가져버리면 당연히 휘청할 수밖에 없겠지? 그렇게 되면 이보다 좋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니 충분히 모험해 볼 가치가 있었다. 아직 연습할 시간도 많이 남아 있고...

문제는 빅토리아의 간섭을 방어하는 연습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거다. 내가 어느 세월에 교황이 걸어놓은 세뇌를 풀 수 있을 만큼 발전할까?

“아무튼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다들 머리 아프겠다.”

“네, 전하.”

“네.”

황녀는 빅토리아를 거처로 데려다 주라고 명하고는 나와 단둘이 남았다.

“전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응?”

“국왕이 무너진다 해도 다음 왕은 또 생기는 법이고, 교황은 똑같은 짓을 또 할 텐데 의미가 있을까요?”

“그 생각도 안 해 본건 아니지... 교황도 제거하면 좋겠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너무 어렵잖아.”

“그건 그렇죠. 교황은 신전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는다 하니까요. 만약 나온다 해도 우리 쪽에서 만날 명분이 없죠.”

“맞아. 그리고 교황을 없애봐야 그 후계자가 있을 테고... 누군지도 모르는 꼭꼭 숨겨진 후계자까지 찾아내 죽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빅토리아를 데려온 비밀의 수도원을 습격하면요?”

“아냐. 후계자는 따로 데려다 키우는 것 같더라고. 거기에 있는 여자애들은 그냥... 씨받이로 키워지는 거야. 끌려온 아이든 태어난 아이든 상관없이 모두. 그나마도 안 되는 능력이 아예 없는 애들은 또 따로 모아서 대충 버리는 것 같아.”

“..........끔찍하네요. 제가 교황이랑 붙어서 멋지게 무너트려주고 싶은데... 소설처럼 그런 멋진 일은 안 일어나겠죠?!”

“....리엘, 절대 생각도 하지 마! 너무 위험해. 같은 능력자 정도가 아니라 저쪽은 노회한 너구리라고. 분명 능수능란할 거야.”

“네. 무모한 짓 안 할게요.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난 어떻게든 도울 방법을 궁리할 생각이었다.

“아무튼 그냥 잠시 혼란기를 만들어서 전쟁에 유리한 입장을 만드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지.”

“하지만 고작 이런 일로 그렇게까지 잘 될까요?”

“마침 리테인이 후계구도가 엉망이거든. 국왕에게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기면 내전이 발발할 지도 모르지. 아니면 적어도 왕위가 결정되는 동안의 혼란스러움을 노릴 수는 있을 것 같아.”

“아...”

세뇌만 풀어도 감지덕지인데, 만약 국왕이 쓰러진다면 확실히 혼란기가 올 것이다. 그리고 그건 전쟁을 위한 최적의 타이밍이다.

사실 불가침조약을 맺는다 해도 전쟁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건 아니다. 그깟 조약이라 해봤자, 아무 명분 없는데도 미친놈처럼 무작정 쳐들어가지는 않겠다는 뜻 정도니까.

어차피 전쟁 명분이야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는 법이다.

황비가 고국과 내통한 혐의가 발견된다든가, 질투에 미쳐 황후를 독살하려 한다거나 등등... 저 미친 공주라면 진짜 그런 짓을 하고도 남지 않을까 싶다.

“휴. 어렵다... 그나저나 엔릴과는 요즘 잘 지내?”

화제를 돌린 황녀는 역시나 리일의 일을 물어보았다.

“아... 그게....”

난 차마 대답을 할 수가 없어 계속 머뭇머뭇 미적대기만 했다.

“왜? 무슨 일 있어?”

“.....그게 사실... 약혼하자고 하셔요.”

“어머, 잘 됐네!!”

“하지만 제가 어떻게... 염치도 없이...”

“아직도 그 일 때문에 걸려하는 거야? 그런다고 지난 일이 달라지는 게 아니잖아. 둘이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오히려 더 좋은 거야.”

“그치만...”

내가 계속 몸을 빼려하니, 황녀는 여러 방향으로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황비가 된 공주가 본궁에 자리를 틀고 있으니 그에 대항하려면 나도 비슷한 지위를 가지는 게 나을 거다, 내 안전을 위해서라도 당당히 약혼녀로 나서야 한다, 귀족들의 견제는 걱정하지 마라, 고작 볼모출신 시녀일 때는 쉽게 암살시도를 했었지만 마법사가 되어 귀화한 황자의 공식 약혼녀를 노리기는 힘들 거다, 지난번과 차원이 다른 파장이 있을 테니 그걸 알기 때문에라도 몸을 사릴 거다 등등....

“난 아바마마처럼 저 녀석 뒤치다꺼리 평생 해 줄 생각 없으니 얼른 치워버려야겠어. 그럼 좋은 소식 기다릴게!”

한참 이야기한 결과는 한 마디로 이것이었다.

으악, 마음은 정말 감사(?)하지만... 생긋 웃는 황녀가 오늘따라 엄청 부담스러웠다.

***

철썩

채찍이 매섭게 날아들었다.

‘으윽... 흡...’

쉬익 철썩, 철썩

‘드디어 네년을 내 손아귀에 넣었구나.’

‘저.. 전 아무 짓도... 제발 그만... 저하... 제발...’

쉬익 철썩

‘흐읍...’

철썩 철썩

‘아으윽...!’

‘제발 살려주세요... 저하! 제발... 독 같은 거 모릅니다.!!’

‘알고 있다.’

‘.....그런데 왜...’

‘혐의를 밝히기 위해 널 심문해야 한다는 명분만큼 좋은 게 또 어디 있겠느냐?’

‘.......저, 저하...’

쉬익 철썩

‘아아악!’

채찍자국이 늘어남에 따라 점점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공주는 즐거운 듯 채찍질을 계속할 뿐이었다.

저항하지도 못한 채 그저 덜덜 떨며 맞고만 있어야 하는 절망감, 이대로 죽을 지도 모른다는 공포...

철썩, 철썩

‘아아아악!’

‘걱정 말거라.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눈물이 저절로 뚝뚝 흘렀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만큼 아파서 아무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아쉬울 따름이구나. 황실의 요청 때문에 더 심한 짓을 할 수 없다는 게 말이다.’

흐릿해져가는 정신 속에서도 그 말이 또렷이 들려왔다. 리일이... 리일이 힘써 준 건가? 나에게 손대지 말라고...

‘네까짓 게 뭐라고 그리 신경을 써 주는지...’

그래서 그나마 손속에 자비를 두는 거구나. 힐링으로 급히 흔적을 지우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까...

리일... 많이 걱정하고 있을 텐데...

‘아무튼 언제 거래를 할지 모르니, 그전까지라도 확실히 벌을 줘야하지 않겠느냐? 호호호호!!!’

거래라니...? 무슨 소리지...?

제대로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계속 이어지는 채찍질에 까무룩 의식이 넘어가 버렸다.

몇 번이나 기절했다 깨어났다를 반복했던 것 같다.

아파... 리일 나 너무 무서워요...

철썩

‘아아악!’

철썩

‘아아아악!!’

“아아아아악!!”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깨어보니 또 꿈이었다.

“....하아...하아...”

놀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호흡이 거칠게 새어나왔다. 내 비명소리에 깬 건지 리일이 다급히 나를 돌아보았다.

“리엘!!”

“........”

“리엘, 괜찮아?”

괜찮다고 대답을 해야 하는데... 그저 덜덜 떨렸다.

“........”

“괜찮아, 리엘. 꿈이었어. 아무 일 없어.”

리일은 몇 주 동안 조금씩 날짜를 비틀어서 결국 며칠간의 간극을 메워주었다. 뿐만 아니라 그때의 일을 그저 악몽이라 생각하며 잊을 수 있도록 날 항상 보듬어주었다.

그 노력이 눈물겨워서라도 더더욱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네. 악몽이 너무 생생해서... 꼭 진짜 같아서... 착각하게 만드네요.”

결국 내 대답은 이거였다. 비올레티와 황비가 영 신경 쓰여서인지, 스트레스로 인해 악몽을 꾼 건 맞았다.

하지만 이 악몽이 실제에 기반을 두었다는 게 문제였다. 황비와 비올레티가 남아있는 한, 이 악몽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옆에 있잖아. 이제 다 괜찮아.”

“...고마워요.”

그런 그가 너무 좋아서 나도 모르게 와락 달려들어 안겼다.

“맞다. 편지 와 있던데?”

“네? 편지요?”

황급히 받아 펼쳐보니,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쁜 소식이 쓰여 있었다.

“아싸!!”

황녀의 편지에는 비올레티가 리테인으로 돌아갔다고 쓰여 있었다. 행정학부라 아직 두 학기가 더 남은 이튼 오라버니를 남기고, 그녀는 혼자 돌아갔다고 한다.

아마도 빨리 치워버리도록 황녀 쪽에서 압력을 행사한 것 같았다.

근데... 오라버니 설마 나 때문에 안 돌아간 건 아니겠지?

“리엘, 뭐 좋은 일 있어?”

황녀의 편지에 펄쩍 뛰며 신나하는 나를 보며, 리일이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황녀전하의 편지예요. 연구가 잘 된다고...”

자꾸 비밀을 만들어 미안하지만, 비올레티의 일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물론 리테인으로 돌아갔다고 해서 결코 안심할 수는 없지만, 일단 같은 제도에 없다는 것만으로도 한시름 놓였다.

“흐음.. 그렇구나?”

“네.”

마법에는 별 관심 없는 듯 리일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고, 아무튼 홀가분해진 난 그에게 폴짝 매달리며 다짜고짜 키스를 퍼부었다.

“읏.. 리, 리엘.. 갑자기...”

말은 필요 없었다. 난 모든 것을 잊고 싶은 마음으로 그에게 적극적으로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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