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트라우마 (8)
2017.03.16.
***
몸이 녹아내리는 듯 뜨거운 시간을 보낸 후 다시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깨어보니 이미 아침이었다.
“리엘, 잘 잤어? 이번엔 악몽 안 꿨고?”
“네. 덕분에요. 고마워요.”
그의 품에 안겨서 잤더니 마음이 푸근해 푹 잔 모양이었다.
잘 자고 일어난 데다 상쾌한 아침 공기가 유난히 맑아 기분이 좋아졌다. 밖을 보니 바람에 살랑이는 나무 사이로 비쳐드는 햇살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른거렸다.
“날씨 좋은데 우리 산책이나 좀 할까?”
밖을 바라보는 내 시선을 알았는지, 리일이 내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좋아요!”
새들의 지저귐과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깔끔하게 잘 조성된 산책로를 거닐었다. 파릇하게 펼쳐진 잔디를 보니 절로 힐링이 되는 기분이었다.
“요즘 여기에만 틀어박혀 있었더니 지루하지?”
“아니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무언가 색다르게 기분 전환시켜주고 싶은데...”
“정말 괜찮아요.”
“아! 어마마마의 고국이 온천으로 유명한데, 여행 어때?”
“너무 멀잖아요. 마차로 삼일은 걸릴 텐데...”
“어차피 할 일도 없잖아? 매일 놀기만 하는 걸?”
“그래도 그건 좀 곤란할 것 같아요.”
역시나 팔자 좋은 리일다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사실 난 꽤 바빠서 놀 겨를 따위 별로 없었다.
특히 요즘은 내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전념하느라, 연습에만 푹 빠져있는 상태였다.
한 번은 장난이었다 쳐도 황녀를 대상으로 또 실험 해 볼 수 는 없으니, 처형 면제 조건으로 사형수들에게 마법실험 자원자를 받아왔다.
그 덕에 대상에게 직접 실험을 하며 연습에 매진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머리가 핑핑 돌 만큼 혹사당하는 기분이었지만, 그만큼 능력이 향상되는 것도 느껴졌기에 꽤 기분이 좋았다.
새삼 느끼는 것이지만, 리일 대신 황녀가 후계자라서 참 다행이다 싶었다.
리일은 아무것도 모르게 한 채, 심지어 두 분 폐하께도 나에 대해 숨기면서 이런 일을 지원해 줄 수 있으니까 말이다.
물론 두 분께는 나대신 빅토리아를 내세워 실험에 대해 보고하고 있는 상태였다.
황녀와의 연구 뿐 아니라 일반마법도 다시 연습하느라 낮에는 내내 리일을 보지 못할 정도로 바빴다.
스케줄이 꽉꽉 차있는 나 때문에 리일은 상당히 섭섭해 하는 것 같았지만, 사실 뭐라도 집중해야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기에 일부러 그렇게 일정을 짠 것이었다.
내가 바쁜 동안 리일도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 역시 기사단에 찾아가 하루 종일 검을 휘두르며 훈련했다.
그렇게 각자 낮 시간을 보내고 밤에는 함께 만나...
“리엘?”
“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헉, 어쩌다 보니 생각의 흐름이 또 밤의 은밀한 일까지 이르러버렸다.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진 난 아무거나 좋으니 말을 돌리려 했다.
“아니에요!! 그, 그 그보다 저기... 저건 뭐예요?”
“응?”
고개를 돌리다가 눈에 띈 걸 대충 아무거나 짚은 것이지만, 사실 저건 저번에도 물어보려 했었다.
잔디에 웬 테니스 코트 같은 것이 그려져 있기에 궁금했던 것이었다.
“아, 저건... 리엘, 구기 종목 좋아해?”
“구기...요?”
“응 공놀이!”
“정확히 어떤 거요?”
“론볼이라고 어렸을 때 벤자민이랑 많이 하던 건데...”
역시 어느 세계에나 게임은 있는 법! 어쩌고저쩌고 설명을 한참 들어보니 전생의 테니스 같은 걸 말하는 거였다.
앗, 이 단어 굉장히 뚜렷이 기억나네? 요즘 들어 뇌를 많이 자극해서 그런지, 전생이 점점 잘 기억나고 있었다.
아무튼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색 데이트 좋지!! 이곳의 영애들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이지만, 난 어차피 그런 거 신경 안 쓰거든!
무엇보다도 자꾸만 떠오르는 악몽 같은 순간을 잊기 위해 딱 좋은 방법이었다.
원래 몸을 움직이는 동안은 다른 생각이 안 나는 법이고, 녹초가 되도록 뛰어다니고 나면 꿈을 꿀 겨를도 없이 깊이 잠들 테니까.
“재미있을 것 같아요! 같이 해 봐요!”
“역시! 좋아할 것 같았어! 지루하게 춤이나 춰 대는 것 보다 훨씬 신날 거야!”
문제는 스포츠류는 대부분 남자들의 영역이라, 여성을 위한 옷이 제대로 없다는 점이었다.
급한 대로 리일은 재단사를 닦달해 부랴부랴 내가 입을 만한 옷을 만들어 주었다.
다음 날.
“그럼 시작!”
“잠깐! 잠깐요! 이건 너무 불리하잖아요! 리일은 어릴 때부터 하던 게임이고, 전 라켓을 처음 잡아본다고요!”
물론 전생에서 내가 아마추어 치고는 꽤나 날라 다녔지만, 몸이 달라졌다고! 이 몸이 운동신경이 있을지는 장담 못 하는데...
“아, 그러네..?”
“저 마법 써도 돼요?”
“마.. 마법?”
“마법으로 바람을 조금 조절하면 안 돼요? 그냥 하면 제 가녀린 팔로는....”
론볼은 테니스공과 달리 꽤나 야들야들한 편이라, 바람의 영향을 훨씬 잘 받을 것 같이 생겨 제안한 것이었다.
리일은 잠시 당황했지만, 내가 울상을 지으며 불쌍한 척 하자 스르륵 넘어갔다.
“그, 그럼! 당연히 돼!! 아하하하....”
“그럼 우리 내기도 해요! 게임에 내기가 빠지면 재미없잖아요.”
“그럴까? 뭘로 내기할까?”
“으음...”
“아! 그게 좋겠다!”
“어, 어떤 거요?”
“나 리엘이 직접 해 준 요리 먹어보고 싶어.”
“뭐예욧!? 왜 제가 질 거라고 전제를 까는 거죠? 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두고 보라구욧!”
그렇게 수제 요리를 걸고 게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건 사기야!!”
“결과에 승복하시죠!?”
“마법은 사기야!”
“이미 마법 써도 된다고 했잖아요. 훗! 제가 이겼답니다!”
후후후후후. 내가 승부근성 하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
“기대할게요, 요리.”
“다, 다시 한 번 더!!!”
그 후에도 우리는 론볼 뿐만 아니라 온갖 종류의 게임을 해 댔다. 다트에 활쏘기, 심지어 점점 과격해져서 단검 던지기까지...!
온갖 게임류에 접목시켜 바람을 조절한 덕분에 내 마법실력은 쑥쑥 올랐다.
젠장, 진즉에 이렇게 연습할걸! 혼자 처박혀서 재미도 없게 벽에 바람 날리지 말고..!
그리고 일취월장하는 내 마법 덕에, 리일은 더 이상 물러날 곳 없이 조리실에 처박히게 되었다.
***
“.....와..완성!”
“......”
이게 뭘까...? 내 눈앞에 놓여있는 이 썩은 슬라임처럼 생긴 것의 정체는?
“해, 해산물 리조또와 버섯을 곁들인 트리팁 스테이크... 라고 만들어 본 건데...”
차라리 치킨인지 치느님인지 하는 걸 만들어 달라고 할 걸... 하지만 나도 그게 정확히 무슨 요리인지 잘 기억이 안 나, 그냥 알아서 하라고 맡겨버렸다.
그리고 그 결과는...
“...........”
무려 황자가 직접 조리실까지 내려왔으니 온 고용인들이 발칵 뒤집어졌을 텐데... 가엾은 주방장은 이거 만들겠다고 난리치는 리일한테 얼마나 닦달 당했을까.
그런데 온갖 비싼 재료는 다 때려 박고는 ‘음쓰’를 만들어 냈구나.
귀에 쏙쏙 박히는 이 고유명사는 아무래도 이런 실패작을 지칭하는 전생의 단어인 것 같았다.
“마, 마, 마, 맛있겠네요.”
차마 말이 제대로 나오지를 않았다.
같은 무게의 금보다 비싸다는 갖가지 귀한 버섯들은 온통 난도질당해있고, 집 한 채 값이랑 맞먹는다는 향신료들은 엉망진창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소 한 마리를 잡아봐야 몇 백 그램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특수부위 고기는, 바싹 탄 채 기묘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미...안...”
“아니에요! 맛있을 것 같아요! 어서 같이 먹어요.”
“아, 아냐. 난 만들면서 수도 없이 맛 봐서... 괘, 괜찮아!”
“......”
맛없는 거 아는구나...? 하지만 성의가 고마워서라도 난 웃는 얼굴로 애써 포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입에 넣는 순간...!
벌컥벌컥
물을 글라스 가득 원샷했다.
“저기 리엘... 억지로 먹지 않아도...”
“아니요! 맛있어요! 근데 조금 맵고 짜고... 간이 조금 센데... 아! 그래요. 같이 주방으로 가서 살짝 손을 보는 게 어때요?”
“그럴...까?”
“네! 조금만 재료를 더 추가하면 좋을 것 같아요!”
잠시 후.
우리는 함께 새로운 ‘음쓰’를 개발해냈다.
“......똑같이 맛없는데 양만 늘어났어.”
“.....어..어쩌죠?”
버리기엔 서로 미안했다. 내 입장에선 리일이 만들어 준 음식이고, 그 입장에선 내가 도와준 음식이었다.
“...누나 갖다 주자.”
“...........”
아니 갑자기 황녀는 무슨 죄로...?
“리엘 주려고 처음 만들어 봤는데 맛이 어떠냐고, 한 번 먹어봐 달라고 하는 거야. 그럼 먹고 알아서 버려주지 않을까?”
“아니 뭣 하러 그래요. 그냥...”
모른 척 해 줄 테니 실수인 척 지금 바닥에 떨궈도 되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 챈 리일은, 개구쟁이처럼 씩 웃으며 덧붙였다.
“재밌을 거 같아서! 누나한테 먹여보는 거야!”
아... 그냥 누나를 괴롭히고 싶은 거구나. 역시 남동생들이란...
“안 그래도 이제 누나 만나러 갈 시간이잖아. 같이 가자.”
그렇게 난 리일에게 질질 끌려 본궁으로 향하게 되었다.
한 손에는 요리를 든 리일은, 나머지 한 손으로는 나를 붙잡고 휘적휘적 걸었다.
요상한 향을 풍기는 요리를 들고 걷는 황자의 모습에, 시중인들은 어찌할 바 모르는 표정으로 슬슬 물러났다.
이걸 맛본 황녀의 괴상한 표정을 상상이라도 하는 것인지, 리일은 희희낙락하며 휘파람까지 불고 있었다.
“리, 리일... 이건 좀...”
당혹스러운 마음에 그를 불러보았으나, 리일은 참으로 태평했다.
“응? 왜?”
“근데 저도 같이 가면 핑계가...”
이제야 생각해 보니, 리일이 말한 저런 핑계라면 내가 같이 오는 게 이상한 일이다.
늘 붙어 다니는 게 너무 익숙해진데다가, 곧 연구시간이기도 해서 별 생각 없이 따라와 버렸지만 말이다.
“아..? 그러네? 그럼 리엘 먼저 들어가고, 내가 조금 있다가 들어갈게.”
역시 끝까지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 리일은 나를 슬쩍 먼저 떠밀었다.
“아... 네...”
"아니다. 내가 먼저 들어가야 하는 건가?"
몰라! 으휴, 저걸 어떻게 말려? 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앞장서 걸었다.
하지만 그렇게 몇 발자국 채 걷지도 않아 막 복도를 꺾어 도는 순간...!
“..........!!”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덜컥
고장 난 기계처럼 난 그대로 정지해 버렸다. 내가 갑자기 우뚝 멈추자, 바로 뒤따라 코너를 돌던 리일은 미처 보지 못하고 내 등에 부딪쳤다.
철퍽, 땅그랑...
요리가 바닥에 떨어지며, 은제 뚜껑이 나뒹구는 소리가 요란스레 났다.
“어머, 이게 누구인가?”
.....셀리나 공주, 아니 황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