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트라우마(9)
2017.03.16.
“..........”
애써 잊고 있던 악몽이 순식간에 밀려들어왔다. 두려움이 차올라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예법도 모르는 건방진 시녀구나. 웃전을 봤으면 인사를...”
나를 질책하려던 황비는 뒤이어 나타난 리일을 보고 멈칫 했다. 리일은 한 팔로 나를 감싸며 마지못해 까딱 목례를 했다.
“......황비 전하”
리일이 황태자가 아닌 이상, 애석하게도 황비가 그보다 서열이 높았다. 물론 그렇다 해도 황비가 감히 리일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법도 상으로는 그랬다.
날 발견하고 눈을 희번뜩거리던 황비는, 리일의 등장에 못마땅한 듯 답했다.
“오랜만입니다, 황자”
“.....”
리일은 대답하지 않은 채, 몸을 가늘게 떠는 날 이끌고 재빨리 그 자리를 벗어났다.
바닥에 엎어져버린 우리의 음식은, 하녀들이 재빨리 다가와 정리하는 바람에 자동으로 처리되어 버렸다.
아무리 음쓰라고 부르며 구박했다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함께 만든 음식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으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 그것도 황비의 발치에서 쓰레기처럼 굴러다니면서 말이다.
마치... 황비의 발 아래에서 비참하게 맞던 내 모습 같았다. 꾹꾹 눌러두었던 트라우마까지 함께 폭발하며, 서러운 울음이 쏟아져 나왔다.
“흑.. 흐윽...”
***
그의 손에 의지한 채 걷다보니, 어느새 황녀의 처소 앞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황녀가 놀란 눈으로 다가왔다.
“리엘? 무슨 일이야!?”
“전하,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런 모습 보여서 죄송합니다...”
“누나 그게...”
막 설명을 하려던 리일은, 내가 진실을 눈치챌까봐 멈칫했다. 하지만 더 이상 감출 수 없다고 판단한 나는, 작은 한숨과 함께 돌발선언을 했다.
“더 이상 숨기시지 않아도 돼요. 저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뭐? 리엘, 지금 뭐라고..?”
“리일. 저 다 알아요.”
“..........”
“저를 빼오려고 셀리나 공주를 황비로 들인 거죠? 기억... 다 하고 있었어요. 꿈이 아니라는 것도요.”
“리엘!! 왜 말을 안했어!”
리일은 꼭 울 것만 같은 표정으로 나를 다그쳤다. 너무나 마음 아파하는 그 눈빛에, 내 마음이 더 아팠다.
“이럴 것 같아서요.”
“...뭐?”
“걱정하시잖아요.”
“.....지금 그게 문제야!?”
화내듯 소리친 리일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혼자... 혼자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어... 나한테 말을 하지 그랬어..!”
“.....저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는데, 무슨 낯으로 위로를 받고 있겠어요. 그리고 이제 많이 괜찮아 졌어요. 정말이에요. 이미 마주친 이상, 계속 모른 척 하는 것도 우스운 것 같아서 말씀드린 거예요.”
“괜찮긴! 너 지금 울고 있잖아.”
“......아...”
난 재빨리 소매로 슥슥 눈물을 닦았다.
“얼마나 아프고 무서웠을까. 너 혼자 그곳에서... 내가 대신 아팠어야 하는 건데... 리엘, 지켜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날 안고 있는 리일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니에요. 다 제가 자초한 일인걸요. 게다가 모든 걸 망쳐놓기까지 했는데...”
“그런 말 하지 마! 네가 더 중요하다고!”
“리일...”
“미안해. 내가 더 신경 써 줬어야 하는데... 기억과 상관없이, 그 여자를 마주치지 않도록 조금 더 조심했어야 하는 건데...”
리일의 한탄 어린 말에, 황녀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둘이 같이 오길 진짜 잘 했네. 리엘 혼자 마주쳤으면 어쩔 뻔 했어.”
그 말에 퍼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하는 듯 했지만, 늘 티 안나 게 늘 배려하는 그였다.
“일부러... 같이 와 줬던 거예요?”
“...으응. 사실... 황비의 교육기간이 끝났다고 해서 신경이 쓰여서...”
“네? 교육기간이라니요?”
내 의문에 황녀가 대신 설명해 주었다.
“황궁에 새로 들어왔으니, 황실 예법을 배우는 적응기간을 거쳐야 하거든...”
아, 어쩐지...
그동안 마주치지 않은 게 신기하다 했더니만, 황비가 교육일정 때문에 자리를 비우지 못하는 타이밍에 맞춰, 내 방문시간을 잡아준 것이었다.
나 따위가 뭐라고 이렇게 잘 해 주시는 건지...
그녀에게 너무 미안해졌다. 후계자로서 국정을 도우랴, 리테인 쪽 신경 쓰랴, 부모님 챙기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텐데 나까지 신경 써 주고 있었다.
그러니 고작 내가 황비를 마주치기 싫다는 이유로, 바쁜 황녀를 소궁까지 오라 가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하필 오늘 이렇게 딱 마주칠 줄이야. 황비가 누나를 찾아올 일은 거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전 괜찮아요. 두 분 다 위로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잠깐 놀랐던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있다면 힘들었던 기억도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그들에게 내가 뭐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건 당연했다.
하지만 리일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안되겠어.”
“네? 뭐가요?”
“우리 결혼하자.”
“네에에에?”
“결혼해서 분가하자.”
“리일,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널 그 여자와 계속 마주치게 둘 수 없어.”
“갑자기 어떻게 그래요.”
“갑자기가 아냐. 약혼을 생략하고 바로 결혼하자. 약혼식 대신에 결혼식을 하면 되잖아.”
“그걸 어떻게 우리 마음대로 해요. 어차피 소궁에서 지내면 거의 만날 일도 없으니 괜찮아요.”
“하지만... 아무리 소궁에서 지낸다 해도, 같은 황궁 안에 있는 이상 몇 번은 마주칠 수밖에 없어.”
“상관없어요.”
“허락 때문에 그래? 그런 걱정 마.”
“아니에요. 그것 때문만이 아니에요. 그렇게 무책임하게 떠나버릴 수는 없어요. 저 할 일이 있어요.”
“할 일? 뭔데? 누나랑 뭐 하는 거?”
“네. 황녀전하와 준비하고 있는 게 있어요.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미안해요, 하지만 나 신데렐라는 싫어요. 내 힘으로 꼭 해결해 보이고 싶어요...
“그럼 일단 약혼만이라도 하자. 그건 괜찮지?”
“....리일. 저를 챙겨주시는 건 정말 고맙지만... 황후폐하의 입장도 생각해 보셔야죠.”
“......”
역시나... 나밖에 안 보이는 리일은, 황비를 들인 어머니의 마음까지는 배려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난 솔직히, 그런 짓을 해 놓은 주제에 리일만 쏙 빼서 떠날 수가 없었다.
“휴...”
옆에서 한숨을 내쉬고 있는 황녀가 눈에 들어왔다. 아마도 리일을 몫까지 황녀가 대신 위로해드리고 있겠지...
“일을 이렇게 만들어놓고 제 한 몸만 빠져나갈 수는 없어요.”
“리엘, 전에도 말했다시피, 약혼 자체는 나도 찬성이야. 부모님도 반대하지 않으실 거고. 그런데 엔릴, 그 사건 후에 어마마마께 가서 제대로 이야기 나눠본 적은 있어?”
“...........“
“넌 리엘밖에 안 보이지? 그런데... 어마마마가 어떤 마음으로 양보하셨는지 한번이라도 깊게 생각해 본 적 있어?”
“...........“
“네가 리엘을 챙기는 게 나쁘다는 게 아냐. 하지만 그런 태도는 오히려 리엘에게 좋지 않을 거라는 뜻이야.”
“미안, 누나. 내가 생각이 짧았어. 두 분께 정말 죄송하네. 정말 섭섭하셨겠다.”
“으휴... 이제라도 알았으면 다녀와. 약혼에 대해서도 정식으로 말씀드려야지.”
***
둘은 황후에게 찾아가기 위해 본궁의 정원으로 향했다.
황후가 워낙 꽃을 좋아했기에, 쌀쌀한 계절에도 불구하고 잘 가꾸어진 정원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아직 추위가 채 가시기도 전인 이른 봄이지만, 벌써부터 사철나무에는 연초록의 새잎이 돋아나고 있었다. 덕분에 이 아름다운 정원은 항상 푸르름을 간직했다.
뿐만 아니라 정원의 곳곳에는, 아름다운 꽃잎을 자랑하는 겨울 꽃들이 색색의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 가운데 심란한 듯 거닐고 있는 황후가 보였다.
“어마마마, 뭐 하고 계세요?“
정원 한 켠에 조용히 피어있는 수선화를 바라보고 있던 황후가, 엔릴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돌아보았다.
“리일이구나. 그냥 옛날 생각 하고 있었단다.”
마침 바람이 살짝 불어오자, 달콤한 꽃향기가 바람결을 타고 날아왔다. 살짝 눈을 감은 황후는, 무언가를 떠올리듯 미소 지었다.
“방해해서 죄송해요. 드릴 말씀이 있어서...
방해라니, 그럴 리가.”
아, 리엘도 같이 왔어요.”
뒤에 조용히 서있던 리엘을 발견한 황후가 살짝 웃어 보였다.
“리엘이구나.”
엔릴이 보는 앞이라 대놓고 물어볼 수 없었기에, 황후는 눈빛으로 말을 걸었다.
“황후폐하를 뵙습니다. 염려해 주신 덕분에 몸은 많이 좋아졌습니다.”
“리엘?”
황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리엘을 바라보았다.
“...전하께 말씀드렸습니다.”
“아...”
“오늘 ......를 마주쳤거든요.”
대상을 얼버무렸지만 황후는 바로 눈치 챘다.
“많이 놀랐겠구나. 마음의 상처는 좀 어떠니?”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늘 죄송할 따름입니다. 저 때문에...”
돌아가던 상황을 지켜보던 엔릴이 황당한 듯 물었다.
“어마마마도 다 알고 계셨어요?”
“그래.”
“저만 몰랐군요... 가장 의지가 되어 주었어야 할 제가...”
“죄송해요, 전하. 차마 말씀드릴 수가 없었어요.”
“탓하려는 게 아냐, 리엘. 그냥 내가 너무 모자란 것 같아서 그래.”
“아니에요!”
엔릴이 잘못한 게 아니었기에, 리엘은 딱 잘라 외쳤다.
“그래도... 그래도 다행히 공주가 그렇게 심하게 하지는 않았어요. 폐하의 배려 덕분입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리엘은 자신을 절대 건드리지 말라고 황실에서 강력히 요청한 덕에, 그나마 이 정도에 그쳤음을 알고 있었다.
심문을 핑계로 리엘을 건드렸던 것도 공주뿐이었고, 그조차도 자리를 비울 때가 많아 하루 종일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을 수 있었다.
나중에 멀쩡한 몰골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걸 알았기에, 너무 심한 짓까지는 못 했던 것이었다.
공주 밑에 제대로 된 고문기술자가 없었던 것도 천만다행 중 하나였다. 외상은 최소화한 채 고통만 극대화시키는 전문적인 방법을 모르는 공주는, 그저 마구잡이 분풀이 식으로 손을 휘둘러댔다.
그러니 얼마 못 가 리엘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렸고, 어쩔 수 없이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씩씩하구나... 하지만 괜찮지 않은 거 알고 있단다. 힘들면 꼭 얘기하렴.”
황후는 정작 그녀를 위로하고 있었다. 같은 궁을 쓰면서 황비를 수도 없이 마주칠 테니, 자신의 일만으로도 힘들 텐데 말이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다 저 때문인데...”
정말 죄송스럽고 부끄러워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는데, 엔릴이 따뜻이 손을 잡아 주며 황후를 불렀다.
“어마마마”
“응?”
“죄송해요. 제가 어마마마의 마음을 미처 살피지를 못했어요...”
“......”
“정말 죄송해요.”
“우리 떼쟁이 아들이 많이 컸구나.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어, 어마마마... 리엘이 듣는데...”
부끄러운 나머지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런 줄 모르고 좋아하는 것도 아닐 텐데 뭐 어떠니?”
“그래도요...”
사뭇 정겨운 모자의 대화였다.
“네 그런 점을 리엘이 많이 보듬어 줄 거라 생각했단다. 원래 사랑이란 그런 거야. 서로 부족한 점을 채워 완전하게 만들어 주는 것. 둘 모두 서로가 가지지 못한 것을 상대방에게 나누어 주었으면 좋겠구나.”
“네! 어마마마!”
“황후 폐하. 폐하 앞에서 언제나 죄인인 접니다. 너무 죄송해서 차마 죄송하다는 말도 입에 못 올리는 저를 부디 용서해 주세요...”
진중하게 사과하는 모습에 엔릴 역시 거들었다.
“어마마마, 황비 때문에 마음이 많이 안 좋으시죠...”
아무리 황제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을 거라지만, 여자로서 좋을 리가 없었다. 리엘 역시 자신이라도 정말 받아들이기 힘든 일일 거라 생각했다.
“걱정해 줘서 고맙구나. 괜찮아. 어떻게 보면 별 일도 아닌 걸. 그런 것보다, 네가 행복한 모습 보여 주는 게 가장 큰 선물이야.”
“고맙습니다, 어마마마. 저 좀 더 철 들게요. 누군가 한 사람을 온전히 책임질 수 있을 만큼요.”
자식이 천천히 어른이 될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려 준만큼, 황후는 그 성장에 더더욱 기쁜 마음이 들었다.
“기특하구나.”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저...”
“며칠 전에 나나에게 들었어. 약혼 말하는 거지?”
결국 나오게 된 약혼 이야기에, 리엘은 고개만 푹 수그렸다.
“알고 계셨어요? 어마마마, 그럼 허락해 주시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