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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낚이면 좋겠어-97화 (97/134)

97. 약혼(1)

2017.03.17.

“리일... 꼭 그렇게 서둘러야겠니?”

“동맹은 어차피...”

“리테인 쪽이 문제가 아니라...”

황후는 곤란한 표정으로 리엘을 돌아보았지만, 잠시간의 고민 끝에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이제 리엘도 알아도 괜찮을 것 같으니, 말해도 될 것 같구나. 대신 이 이야기는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게 부디 조심해 주었으면 하는구나.”

“네, 폐하.”

“리일이 황태자 책봉을 받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다지?”

“네. 전하께 들었습니다.”

“그래. 알다시피 아나이스가 다음 황위에 오를 거야. 하지만 그에 대한 반향이 만만치 않을 거라는 건 우리 역시 알고 있어.”

“네.”

“그렇기에 아직 발표하고 있지 않는 상태였고. 사실... 후계자

발표와 동시에 양위를 해서, 뭐라 반론을 제기할 여지가 없도록 할 계획이었단다.”

리엘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생각을 읽어 멋대로 알아버린 것이었기에 내색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

하지만 그렇다고 이해가 가는 건 아니었다. 아직 저렇게나 젊은 황제인데, 왜 어리디 어린 황녀에게 황위를 넘겨주고 물러나려는 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어딘가 건강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지 않는 한, 결코 일어날 법 하지 않는 일이었으니까.

“의아한 모양이구나.”

“......네. 외람되오나 황제 폐하께서 존체강녕하신지 심려도 됩니다.”

“그런 이유가 아니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차마 그럼 왜 그러려는 거냐고 묻지는 못해, 리엘은 그저 멍하니 황후를 바라보았다. 장난스럽게 씩 웃은 황후는, 농담처럼 답해주었다.

“우리 그이의 오랜 꿈이 놀고먹는 거라서.”

“.....예?”

“삼십 몇 년 동안, 한 번도 쉬어본 적 없이 무거운 어깨를 짊어지고 힘들게 살아왔거든. 그래서 아이들이 태어나자마자 나와 굳게 약속했단다. 이 아이들 성년만 되면 얼른 떠넘기고 도망가자고 말이야.”

“.........”

갑자기 말투도 동네 언니처럼 바뀐 황후의 모습에, 리엘은 적응하지 못해 그저 정신이 아득했다.

한편으로는 황후라는 부담스러운 타이틀을 집어던지고 나면, 그녀에게도 저런 편안한 모습이 나오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제국의 상황이 안정되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자꾸 늦어지고 있는 거란다. 어린 나나에게 엉망진창인 나라를 물려주고 갈 수는 없잖니.”

“아......”

“아무튼 아직은 다들 리일이 황태자로 책봉될 거라고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런 상황에서 둘이 약혼하면 황태자비, 나아가 미래의 황후라고 모든 관심이 쏠리겠지.”

가만히 듣고 있던 엔릴이 불쑥 끼어들었다.

“어마마마, 저도 그걸 생각 못 한 게 아니에요. 하지만 공식적으로 약혼녀라고 발표한 이상 전처럼 쉽게 제거할 생각은 못할 거예요. 그 파장이 어마어마할 테니까요. 그보다는 리엘이 황궁에서 황비를 마주치는 게 훨씬 더 마음에 걸려요. 얼마나 충격이 크겠어요.”

안 그래도 그때 리엘을 노렸던 일이 황자 시해 혐의로 번지는 바람에 단단히 혼쭐이 난 귀족들이었다. 그러니 웬만해서는 더 이상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위험을 감수하는 건...”

“전하, 저도 황후폐하의 말씀에 동의하는 바예요. 아직까지는 공표하고 싶지 않아요.”

“리엘 왜...?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 너를 지켜주지 못할 것 같아?”

둘에게는 말하지 못했지만, 사실 리엘은 비올레티와 황비가 걸려서라도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적어도 리테인 프로젝트를 끝마친 후에 일을 진행하고 싶었다. 다행히 이제 곧 멀지 않았으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런 게 아니라...”

“리일, 양위와 후계발표 후에는 너에게서 관심이 멀어질 테니, 그때는 아무래도 상관없을 거야. 그러니 조금 기다리는 게 낫지 않겠니?”

하지만 그게 대체 언제쯤이나 될 일인지, 까마득히 멀게 느껴졌다. 엔릴은 절로 표정이 부루퉁해졌다.

“그럼 어마마마, 약혼만이라도 먼저 하면 안 돼요? 그 정도는 상관없죠? 미리 다 준비해 놨다가, 괜찮다 싶으면 바로 날짜를 발표하면 되잖아요.”

“휴... 그렇게 급하니?”

“네!”

“그럼... 언제든지 발표하고 약혼식을 올릴 수 있도록, 둘이 조용히 준비만 다 해 두렴.”

“고맙습니다!! 역시 우리 어마마마가 최고예요!!”

다 큰 아들이 와락 끌어안았음에도, 황후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태도로 엔릴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

“그런데 약혼 준비라는 게, 뭘 해야 하는 거예요?”

“글쎄? 드레스 고르고, 보석 고르고.. 뭐 그런 거?”

“.......꼭 해야 해요?”

헐. 난 돈이 없는데... 일 년간 하녀 및 시녀 생활하면서 모아놓은 월급 탈탈 털어봐야 20골드나 될까?

이정도면 나름대로 평민의 이 년 치 생활비쯤 되니 적은 돈은 아니지만, 그래봤자 무도회용 드레스 한 벌 맞추기 힘든 돈이었다.

“왜? 그런 거 싫어해?”

싫어할 리가. 돈 좀 펑펑 써보고 사는 게 소원이라고!

“그게.. 제가 국적도 가문도 버리고 나왔는데...”

지참금을 받아올 곳이 없다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어, 뒤로 갈수록 목소리가 작아져 결국 들리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리일은 다 알아들은 눈치였다.

“황실에다가 청구하면 되는데 무슨 걱정이야? 내가 전에 그랬잖아. 부모님꺼 내꺼, 내꺼도 내꺼라고.”

“.......”

아냐, 너 정확히는 ‘어마마마껀 내꺼. 내꺼도 내꺼‘ 라고 했어. 그런데 더 업그레이드 되었구나... 멋지다 리일!

“그러니 신경 쓰지 말고, 원하는 걸로 고르면 돼!”

그 말을 시작으로 소궁에는 매일같이 보석상과 재단사가 줄줄이 들어왔고, 그렇게 약혼준비를 빙자한 쇼핑은 끝도 없이 계속되었다. 나중에는 아주 지겨울 정도였다. 이게 웬 행복한 비명?

매일 물밀 듯 밀려오는 드레스와 구두, 모자, 부채, 보석 등등의 향연은 결국 나를 질리게 만들어 버렸다.

약혼준비를 빙자한 쇼핑에 시큰둥해진 덕에, 요즘 우린 전에 하다 말았던 론볼에 다시 빠져들었다.

악몽도 잊는 데 도움이 되는데다가, 마법 연습에도 효과적이었기에 아주 훌륭한 취미생활이었다.

리일의 요리실력도 제법 늘어서, 이제 그럭저럭 먹어줄 만한 걸 만들어 오곤 했다. 가끔은 나도 일부러 져 주기도 하면서 그에게 직접 요리를 해 먹였다.

결혼만 안 했다 뿐이지, 정말 신혼부부 같은 즐거운 일상이었다.

“근데 리엘, 요즘 영 시큰둥한 것 같은데... 보석상을 부르지 말고 밖으로 나가서 고를까?”

“시내에요?”

“응.”

문득, 그때 홀린 듯이 바라보았던 예쁜 원피스가 떠올랐다.

가질 수 없어 바라만 보았던 기억...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훨씬 비싼 드레스도 얼마든지 주문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때의 갈망 때문인지 그 옷이 생각났다.

물론 지금은 없겠지만...

하지만 그렇게 희희낙락 쇼핑 다니기는 좀 그랬다. 비록 눈엣가시 같은 비올레티가 사라져 마음이 편해지긴 했지만, 그냥 왠지 찔렸다.

“그건 좀...”

“가자! 가지고 싶은 거 다 사줄게!!”

하지만 리일은 적극적으로 나를 이끌었다. 결국 난 그에게 질질 이끌려 얼떨결에 밖에 나와버렸다.

***

리일은 로브를 꾹 눌러쓰고, 나는 커다란 모자로 얼굴을 가렸다. 어라 그런데, 이러고 있으니 마치... 전에 레스토랑에서 만났던 황제랑 황후의 모습 같네?

나까지 가릴 필요는 없을 것 같기도 했지만, 지난 번 사건 이후 극도로 소심해진 나는 괜히 오버해서 경계했다.

막 론볼을 하다 와서 가뜩이나 후줄그레한 모습이었기에, 얼굴만 잘 가리니 그가 황자라는 티는 어디에도 나지 않았다.

황궁에서 출발한 마차는 오래 지나지 않아 어디선가 멈추어 섰다. 별 문양 없는 평범한 마차였기에, 우리는 이목을 끌지 않고 상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지배인은 어디 있...”

기껏 정체를 숨기고 나온 보람도 없이, 리일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지배인을 찾았다.

내가 옆구리를 쿡 찌르자, 그제야 제 꼬락서니를 인지한 것인지 헛기침을 하며 말끝을 흐렸다.

“우리 조용히 쇼핑해요!”

귓속말이 간지러운 듯 몸을 틀며 리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조용히 쇼핑하려는 내 예상과 달리 상황은 조금 묘했다. 이건 뭐랄까... 우리 지금 찬밥신세 받고 있는 거 맞지?

생각해보니 아무 문양 없는 마차에서 내린데다가, 옷도 후줄근한 상태였다.

이런 고급 의상실에 드나드는 사람은 전부 귀족이거나 혹은 매우 부유한 평민일 텐데,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고객으로 보이지도 않는 건 당연했다.

쫓겨나지 않고 들어온 것만 해도 다행이랄까? 그나마 타고 온 마차가 영업용 마차가 아닌, 문양은 없지만 꽤 그럴싸한 4두 마차였기에 겨우 들여보낸 것 같았다.

하지만 따질 상황이 아니었기에, 난 조용히 물건을 구경했다.

투명한 빛을 푸르스름하게 내뿜고 있는 사파이어 세트에 이끌려,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사파이어는 전생부터 내가 제일 좋아하던 보석이었다. 별로 비싼 원석은 아니지만, 그 시리도록 청명한 색이 유난히 마음에 들기 때문이었다.

아쉽게도 현생의 내 비주얼과는 별로 안 어울린다는 게 함정이지만... 리치블론드에 오렌지빛 눈동자를 가진 나에게는 영 미스매치였다.

어쨌든 내 시선을 알았는지, 리일이 점원을 불러 물건을 꺼내볼 것을 명했다.

리일이 부르자 딱 봐도 말단인 것 같은 점원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이건 예약이 되어 있어서...”

예약품이면 애초에 전시하지 않을 텐데, 우리가 구매력이 없다 생각해서 대충 떨궈 보내려는 눈치였다.

“너와 거래할 일이 아니니 지배인을 불러오거라.”

열 받은 리일은 결국 또 지배인타령을 해 버렸다.

“네? 지배인님은...”

“불러오라면 불러올 것이지, 무슨 말이 많은 게냐!”

수수한 차림이었지만 왠지 모를 포스가 느껴지는 리일의 말투였다. 점원은 주뼛거리더니 그나마 조금 더 높은 사람 불러왔다.

“저, 손님 무슨 일이신지요. 지배인님께서는 지금 다른 VIP 때문에 오실 수가 없습니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여기 이거 꺼내보아라.”

맘에 들지 않는 듯 눈썹을 움찔했지만, 어쨌든 리일은 순순히 물건을 가리켰다.

“손님, 이 물건은...”

이건 비싼 건데... 라며 머뭇거리는 생각이 들려왔다.

“꺼내보라지 않느냐!”

리일의 압박에 점원은 나를 위아래로 슬쩍 훑어보였다. 내가 쓰고 있는 모자가 꽤나 고급품이라 판단한 건지, 그럭저럭 고개를 끄덕이더니 목걸이를 꺼내 주었다.

점원에게 목걸이를 받아든 리일은 손수 나에게 시착해 주었다.

“자, 여기 거울.”

목걸이는 정말 예뻤다. 펜던트가 아닌 초커 형태의 목걸이로, 중앙에 박힌 사파이어는 정말로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유색석이지만 디자인도 올드하지 않아 더더욱 마음에 들었다. 사파이어와 같은 색의 공단 천 위에 작은 다이아몬드들이 마치 레이스처럼 수놓아져 있었다. 목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착용감도 좋았다.

“예쁘네요. 정말 예뻐요.”

하지만 나한테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게 문제였다. 스스로 알고 있었기에, 다른 걸 착용해 보려고 목걸이를 다시 내려놓았다.

그때 옆에서 작은 비웃음 소리가 들렸다.

“어울리지도 않는 주제에...! 어떻게 한 번 만져보기라도 하고 싶었나 보네.”

명백한 조롱이었다. 수수한 차림의 내가 고가의 물건을, 그것도 잘 어울리지도 않는 걸 만지작거리니 한심해 보였나 보다.

“뭐? 지금..”

리일이 발끈 하려는데 내가 재빨리 말렸다. ‘우리 지금 신분을 숨겨야 하잖아요!‘ 라는 눈빛을 찌르르 보내자, 불만스러운 듯 리일은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참자, 참아. 어디에나 저런 것들은 있는 법이니까!

“별로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 우리 다른 걸로 봐요.”

“그래. 아무데나 어울리는 무난한 다이아몬드로 하는 게 낫겠어.”

이번에는 단순한 디자인의 다이아몬드 세트를 요청했다. 디자인은 단순했지만, 가격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심플하게 박혀있는 만큼, 가격은 어마어마해 보였다.

리일의 닦달에 마지못해 점원이 다이아 세트를 꺼내 주었고, 내가 막 가까이 보려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손이 먼저 휙 낚아채 갔다.

“이거 예쁘네. 이걸로 하겠어.”

뭐지 이 여자는? 옆을 보니 화사하게 차려입은 웬 영애가 고개를 치켜든 채 도도하게 주문했다.

“이봐요,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뭐?”

“제가 먼저 보고 있었잖아요.”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시작하자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물건을 꺼내준 점원은 당황하며 말리려 했다. 하지만 고작 한다는 것이 저 영애의 편을 드는 것이었다.

“이쪽의 레이디께서 먼저 말씀하셨으니 양보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뭐라고요? 분명 내가 요청한 물건인데 그게 무슨 말이죠?”

“그래서 뭐? 그쪽이 이걸 살 수나 있어?”

으으 빡친다! 대체 왜 이런 것들은 꼭 한명씩 있는 거냐고!! 나 역시 지지 않고 톡 쏴 주었다.

“그건 그쪽이 판단 할 일이 아니죠.”

“뭐? 그쪽? 건방지게 어디서 감히!!“

우와, 반응까지 어떻게 이렇게 뻔한지. 얘네들은 단체로 어디 가서 교육이라도 받고 오나?

“그쪽을 그쪽이라고 하지 그쪽을 뭐라고 불러요? 아무튼 제가 먼저 보던 거니 물러나시죠.”

“이게 감히!!“

손 올라올 줄 알았다. 내가 이런 일 한두 뻔 당해보겠니. 다음 수순은 안 봐도 비디오거든!

느릿하게 날아오는 손을 막 낚아채려는데, 리일이 빨랐다.

“......후우. 리엘, 나 진짜 많이 참았는데, 안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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