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구라도 낚이면 좋겠어-98화 (98/134)

98. 약혼(2)

2017.03.17.

진상녀의 손을 잡아챈 리일은, 그대로 그녀를 밀쳐버렸다.

“아얏!”

그러자 진상녀 곁에 있던 호위기사가 그녀를 부축하며 분노해서 외쳤다. 널찍한 바깥이었다면 당장 검이라도 뽑아들었을 흉흉한 기세였다.

“이게 무슨 짓이냐! 이분은 텐디 백작 영애시다! 당장 용서를 빌지 못하겠느냐!!”

발광하기 시작하는 기사를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리일은 나에게 양해를 구했다.

“리일...”

우리 그런 뻔한 전개 하면 안 돼! 사고치면 곤란하다고!!

“내가 성질이 못돼 먹어서 그런지, 더 이상 못 보겠어. 미안.”

“이것들이 지금 당장 사과하지 않고 뭘 하는...”

거기까지 말한 리일은 거칠게 망토를 벗어던졌다. 벌컥 화를 내던 호위기사는 그대로 얼어버렸다.

눈이 달려있다면 그의 옷 곳곳에 수놓아져있는 황가의 문양을 몰라볼 수가 없는 일이었다.

진상녀의 새된 목소리가 확인사살 하듯 들려왔다.

“.....화, 황자 전...전하?”

무도회에서 얼굴을 봐서 아는 건지, 어쩌고 진상 영애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알량한 신분만 믿고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죄..죄..죄송합니다! 전하, 제가 미처 몰라 뵙고...!”

“틀렸어.”

“...네?”

“사과 받을 사람은 내가 아니지 않는가.”

그 말에 진상영애가 멍하니 나를 돌아보자, 쐐기를 박듯 단호하게 리일이 말했다.

“내 약혼녀에게 사과하지 않고 뭘 하고 있는가.”

........아... 또 사고 쳤구나. 황후폐하 뒷목 잡으시겠네.

이 와중에 황당하게도 난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두 분이 리일에게 왜 잔소리를 안 하는 지 알 것 같았다. 해 봐야 소용없으니까... 두드려 패서 정신 차리게 하지 않는 이상, 말로는 안 통하는 것이었다.

“....야, 야, 약혼녀시라고요?”

이미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더 하얘질 수도 있다니... 인체의 신비를 보는 기분이었다.

달달 떨기 시작한 영애는 고개를 조아리며 더듬거렸다.

“죄..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부디 무례를...”

“됐어요. 앞으로는 겉모습만 가지고 사람을 무시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적당히 넘어가려는 내 말에도 영애는 거듭 사과를 했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괄시하던 점원들도 쩔쩔매며 빌어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다지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이 상황에 있어서 내 힘으로 얻어낸 건 하나도 없으니까... 결국 모든 건 신분 탓이라는 생각에 오히려 마음이 싸했다.

“죄송합니다. 뭐라 사과를 드려야 할지...”

“한 번만 용서해 주시면...”

“두 번 다시 심기를 상하지 않게...”

용서를 비는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씁쓸한 마음에, 나가기 위해 리일의 옷을 잡아당겼다.

“리일, 나가요. 기분만 망쳤어요.”

내가 그의 애칭을 부르자, 모두의 눈이 더욱 휘둥그레지며 더욱 고개를 조아려 댔다.

“전하! 부디 한 번만 기회를...!!”

리일 역시 기분이 상한 모양인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를 데리고 나섰다.

하지만 문을 나가는 순간까지 저들은 필사적이었다. 황자에게 밉보였다는 소문이 났다가는 그대로 끝장 날 까봐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다 공개해도 돼요? 황후폐하께서 아시면 기겁하실 텐데...”

“헤헷,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서 약혼을 진행해야겠구나...’ 라고밖에 더 하시겠어?”

“.........”

성질 부린 것도 반쯤은 의도였구나! 무엇보다... 나오자고 한 것도 처음부터 계획적이었어! 약혼 발표 오래 걸릴 것 같으니까 일부러!!

하아... 하긴 우리 사이라는 게, 리일이 이렇게 무대뽀로 밀어붙이지 않았다면 애초에 여기까지 오지도 못할 일이었다.

생각해보니 맨 처음 사귀기 시작한 것도, 전부 다 리일이 막무가내로 우긴 덕분이었다.

그러니 정말 고마운 일이긴 한데... 황후폐하께 너무 죄송하다는 게 문제였다.

으휴... 너도 꼭 너 같은 아들 낳아봐!! 이 순수한 계략남아!

“어쨌든 이미 알려진 거, 이젠 얼굴 가리지 말고 편하게 돌아다니자. 나 어디 가서 한 번도 이런 대접 받아본 적 없었는데, 기분 되게 나쁘더라. 리엘도 마음 상했지?”

“전 익숙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걸요.”

“......미안, 리엘... 내가 생각이 짧았어.”

“......”

“하지만 괜찮아. 이제 절대로 그런 일 겪지 않아도 되니까.”

“네. 고마워요.”

하지만 왜인지 그다지 기쁘지가 않았다. 그토록 꿈꾸던 신분상승이 이루어졌는데... 그저 좋기만 하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이건 무슨 기분이지...?

아, 그렇구나.

내 한 몸 겨우 신분상승 한 것뿐이지, 달라진 건 하나도 없어서 그래. 이 세상은 계속 이럴 테니까...

전생에서도 언제나 차별은 존재했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공식적인 신분차가 있지는 않았는데...

“리엘?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에요. 우리 이제 옷 보러 가요.”

언젠가 리일 곁에 당당히 서게 될 날이 오면 그에게 내 생각을 꼭 말해보고 싶었다. 그 역시 앞뒤가 꽉 막힌 답답한 황족은 절대 아니니 분명 날 지지해 줄 거야!

신분을 밝힌 후에는 모든 것이 쉬웠다. 의상실에 들어간 우리는 말 그대로 귀빈 중의 귀빈 대우를 받으며 편안히 쇼핑했다.

“전하!!”

굴러 내려올 듯이 달려와 발치에 인사하는 지배인부터 시작해서...

“이쪽의 아름다운 레이디는 혹시... 전하의 연인이십니까?”

입에 꿀이라도 바른 듯 아부해대는 사람들...

“흠흠. 그렇다. 잘 챙겨 주도록.”

물론, 그 입에 발린 말에도 리일은 바보같이 그저 헤벌쭉 좋아했다. 덕분에 이때다 싶은 점원들은 나를 마구 공략해댔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여기서 가장 자신 있는 제품으로 내오도록. 내 약혼녀에게 잘 어울리는 것으로 골라서.”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어마어마하게 비싸 보이는 옷이 자동으로 입혀졌다.

디자이너들이 다 뛰쳐나와 내 발치에 쭈그려 앉아 레이스를 덧대 보고, 리본을 달았다 떼었다 난리를 쳤다.

온갖 귀한 원단들이 줄줄이 선보여졌으며, 수도 없이 많은 패턴북이 눈 앞에 오락가락했다.

이어 온갖 레이스와 자수 샘플을 들고 와서 고르라며 권유했다. 나중에는 눈이 다 팽팽 돌 지경이었다.

딱히 이렇게 갑질하려고 나온 건 아닌데... 솔직히 기분 좋긴 좋네.

그나저나 황제고 황후고 요즘 하도 일상적으로 자주 봐서 나도 많이 무뎌졌나본데, 역시 이 사람들이 세상의 정점에 서있는 사람들이 맞긴 맞구나 싶었다.

이렇게 다들 난리법석을 떠니 새삼 그 위치가 느껴졌다.

난 좋으면서도 부담스러워졌다.

그렇게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네 번째 가게를 들어갈 때쯤에는, 우리 둘 다 이미 질릴 대로 질려 버린 상태였다.

게다가 뒤로 갈수록 리일도 불편해하는 기색이 보였다. 황궁에서도 늘 귀하게 자랐다지만, 이 사람들의 반응은 황족을 매일 보는 시녀들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전하!! 누추한 저희 샵에 친히 왕림해 주시다니, 대대로 가문의 영광이...”

“한 점 불편함도 없이 모시겠습니다!”

“부디 저희 샵의 한정판 컬렉션을 보여드릴 기회를 주십시오. 어서 VIP 실로 안내를...”

“필요 없다.”

이제 쇼핑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얼른 나와 단 둘이 꽁냥거리고 싶은 건지, 리일은 귀찮은 듯이 한 마디 내뱉었다. 그 단호박 같은 말에 지배인은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댔다.

“전하 부디...”

“그냥 여기부터 여기까지 전부 다 황궁으로 보내도록.”

“네? 리일...”

난 당황해서 조그맣게 그를 불렀다. 결혼도 하기 전에 펑펑 돈 쓴다고 시어머니한테 혼날 각이라고!

“왜애?”

“이렇게 사치하면...”

“응? 뭐가 사치야? 다 해봤자 얼마 안 해.”

“.......”

뭐라 말릴 새도 없이 이미 물건들은 차곡차곡 포장되고 있었다.

내가 못 살아!!!

***

그 날의 사건 때문에, 난 황자의 연인으로 소문이 쫙 났다. 리일의 계략대로 더 이상 숨길 수 없어진 우리는, 그냥 약혼 사실을 공표하는 걸로 결정했다.

사실 비올레티와 황비가 걸렸을 뿐, 나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는 일이었다. 황후폐하께 죄송스럽다는 것만 빼면...

결국 황후 폐하는, 나를 공식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티파티를 열기로 했다. 약혼식 일정도 의논할 겸 리일도 함께 본궁으로 향했다.

“세상에... 진짜 산더미네요. 이걸 다 샀다니... 다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본궁으로 가는 김에, 물건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리일의 처소에 들렀더니 이런 진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샵에 따로 말을 해두지 않았더니 물건들이 전부 그의 처소로 와 있던 것이었다.

“이거 뭐가 많아. 필요한 걸 전부 하나하나 사려면 지금부터 매일매일 이만큼씩 사들여야지.”

“......말도 안 돼요!”

남의 돈으로 그게 무슨 미친 짓이야. 다들 날 뭐라고 생각하시겠어!!

“왜? 누나는 훨씬 더 많이 사대던데...”

“..........”

나랑 같냐!!

그렇게 리일과 한참 옥신각신 하고 있는데, 뒤에서 황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일?”

“어? 어마마마. 저희가 막 그쪽으로 가려 했는데...”

“아냐. 괜히 들렀다가 황비를 마주칠 필요 없잖니. 여기서 얘기하자꾸나.”

각각 동관과 서관 끝에 자리 잡고 있는 리일과 황녀와 달리, 황제와 황후는 본궁 중앙부에 머문다. 그리고 그곳에는 애석하게도 황비의 처소도 함께 있었다.

그래서 내가 마주치지 말라고 일부러 찾아와 주신 것이었다.

나 때문에 굳이 몸소 발걸음을 해 주시다니... 그러고 보니 한 번도 황비에게 횡포를 당한 적이 없었다.

소궁에서 지내니 만날 일이 거의 없다고는 하지만, 가끔 본궁에 올 때 역시 전혀 마주친 적이 없었다.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친 첫 번째 만남을 제외하면, 그 후 두 번 다시 만난 적이 없는 것이었다.

따로 불러다 패악이라도 부릴 줄 알았는데... 내가 모르는 사이 다들 막아준 모양이었다. 정말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엄청 감격스럽고 황공해 해야 할 이 타이밍에, 눈앞에 널브러져있는 쇼핑품목들이었다. 정말 민망해 죽을 것 같았다.

“어머!”

역시나 황후의 감탄사가 들려왔다. 제 발이 괜히 찔린 나는 황급히 변명하기 시작했다.

“폐, 폐하, 이건 그저... 전하께서 마음대로...”

“리엘은 참 검소하구나?”

“정말 본의가 아니었지만 죄송... 네?”

“황실이 갈수록 근검절약한다고 칭송이 자자하겠어. 나도 검소하다는 말을 내내 어마마마께 들었는데 말이야.”

“.....네?”

녹음기 마냥 네? 소리밖에 안 나는 내가 황당했지만, 저 말의 의미가 도저히 파악되지 않았다. 반어법인가?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황후는 진심인 듯 했다.

“그쵸? 고작 시중에서 흔하게 파는 이런 보석이라니... 솔직히 조금 격이 안 맞는 것 같긴 해요.”

한술 더 뜬 리일의 맞장구에, 황후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 하긴, 그 동안 보석상이 황궁으로 가져와서 보여주었던, 전설에나 나올 법한 세기의 보석들과 비교해 보면 저 반응이 이해 가기도 했다.

물론 난 전부 거절했었다. 너무 커다래서 대관식용 왕관에나 박아 넣어야 할 것 같은 그런 보석들을 어떻게 낼름 고르겠는가.

“리일, 네가 신경 써서 좋은 것들로 잘 챙겨주렴.”

“네! 걱정 마세요!“

이렇게 좋은 데 바보같이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나 진짜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

“리엘 왜 울어? 갑자기 무슨 일 있어?”

“아니에요... 그냥, 그냥 너무 감사해서... 기뻐서 그래요. 저 같은 걸 받아주신 걸로도 모자라, 이렇게 아껴주시다니... 정말 제가 뭐라고...”

내가 눈물을 뚝뚝 흘리자, 리일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손수건을 건네고 달래주었다. 쩔쩔 매는 리일 덕에 위로는 황후의 몫이었다.

“리엘, 이젠 한 가족이잖니.”

“엉엉...흐어엉...”

그 따뜻한 말에 눈물보는 더욱 더 터져버렸다. 내가 가족복은 없었지만, 다른 의미의 가족복은 있는 모양이야...

“내가 지켜본 넌 참 굳세고 강한 아이더구나. 우리 리일이랑 잘 어울릴 거야.”

“감...사합니다... 흐흑...”

“하지만 그 자리가,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지낼 수 있는 즐겁기만 한 자리는 아닐 지도 몰라. 짊어져야 할 것도 많고, 생각보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을 거란다. 하지만 너희 둘이 함께 꿋꿋이 헤쳐 나갈 거라 믿어.”

“네..!!”

“앞으로 꽃길만 걸을 거라고 장담해주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언제나 등 뒤를 지키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걸 알아두렴.”

“고맙습니다. 제가 평생 잘하겠습니다.”

“후훗. 우리 어리광쟁이 아들 녀석도 지키고 싶은 여자가 생기니 조금 철이 들었더구나.”

“아하하... 어마마마...”

“빨리 철들어서 너무 일찍 성숙해봐야, 본인은 서럽기만 하지 좋을 거 하나도 없어. 그렇기에 그동안은 그냥 두었지만... 사실 걱정 많이 했단다. 그런데 잘 커줘서 다행이구나. 리엘 덕분이겠지? 그러니 둘이 평생 행복하렴.”

“고맙습니다, 폐하. 정말 고맙습니다!”

“어마마마... 감사해요...”

“리엘이 우리 아들 좀 꽉 고삐 쥐고 정신 차리게 하고.”

“풉... 네!”

“리일, 넌 앞으로 리엘을 잘 보듬어 주고. 여태 혼자 버텨 오느라 힘들었지? 그 동안 고생 많았다고 들었어. 공주가 시중인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줄 진즉 알았으면 어떻게든 막아줬을 텐데... 정말 유감이야.”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똑똑

“황후폐하. 티파티가 준비되었습니다.”

그때 시간이 되었는지, 시종 고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내려가 봐야겠구나. 아참, 아는 또래가 하나도 없으면 외로울까봐 내가 사촌동생 마가렛을 초대했어. 둘이 구면이라지?”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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