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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낚이면 좋겠어-100화 (100/134)

100. 약혼 (4)

2017.03.19.

티파티의 분위기는 꽤 괜찮았다.

난 당당함과 겸손함을 적당히 버무린 재치 있는 화술로 뭇 귀부인들의 환심을 샀고, 대화가 어색해지거나 할 말이 없어지면 마가렛이 타이밍 좋게 나서서 도와주었다.

게다가 적당히 능력을 사용해 상대방이 원하는 대답을 시기적절하게 들려주니, 분위기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단 황후가 직접 주선한 자리이니, 적어도 눈앞에서 내게 함부로 대할 사람은 없는 게 당연한 듯했다.

그나저나 나 많이 컸다. 예전 같으면 이런 불편한 자리에서는, 긴장된 나머지 생각을 하나도 못 읽을 텐데...

하긴, 겨우 이런 자리에 쫄아서 능력을 못 쓰면, 국왕은 어떻게 상대하겠어! 만족하지 말고 더 강해져야지!!

아무튼, 그 덕에 대화는 아주 자연스러웠다.

“어머, 리엘양은 참 사려 깊고 마음씨 착하군요.”

“물론이지요. 그래서 우리 엔릴의 짝으로 참 잘 어울린답니다. 더구나 마법적 재능까지 갖췄으니, 황실의 큰 복이지 않겠나요?”

잔뜩 긴장했건만 이런 분위기는 전혀 생각도 못 했다. 정말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호호호. 물론입니다. 감축드리옵니다. 황후 폐하.”

“리엘의 마법 실력에 대해서는 가르치는 교수도 놀랄 정도랍니다. 아나이스도 어찌나 칭찬하던지...“

“정말이지 황실의 홍복이옵니다. 폐하”

황후 폐하께서는 내 얼굴에 금칠이라도 하듯 칭찬하며 챙겨 주셨다. 덕분에 손발이 오그라드는 대화 몇 번으로, 나는 순식간에 고명한 레이디라도 된 듯 추켜세워졌다.

정말 감사하긴 한데, 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 아닌 걸 스스로 알기에 너무 민망했다.

그래서 더더욱, 저 과분한 칭찬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말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황후 폐하, 사람을 당근으로 조련할 줄 알아...

“맞습니다. 황후 폐하. 역시 황실에 들일 사람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인품이지요. 헌데 황비 자리에 그런 드센 여인이 들어왔으니...”

나에 대한 아부와 함께, 셀리나 공주에 대한 디스도 슬며시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게요. 심성이 곱지 않아 황자비 자리에도 영 어울리지 않았는데 황비라니...”

“그동안도 하녀들에게 함부로 대한다는 소문이 자자했지요.”

“신분이 그럴싸하면 뭐합니까. 역시 여성이라면 온화한 성품이 가장 중요하지요.”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나오던 이야기였지만, 점점 과해지며 거침없어졌다. 황비를 깎아내리고 싶은 의도일 테지만, 어떻게 보면 꽤나 눈치 없는 발언인 셈이었다.

황비에 대한 이야기 자체가 황후의 심기를 상하게 할 수 있는 것인데, 대화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미처 생각을 못 한 모양이었다.

“자자, 그만들 하세요. 어쨌든 황비도 황실의 사람, 이러쿵저러쿵 말이 나와 좋을 것 없습니다.”

결국 보다 못한 황후가 나서 귀부인들을 진정시켰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저희가 그만 실언을...”

“송구하옵니다.”

“이제 되었으니 다들 다과를 즐길까요?”

엉뚱하게 흘러가려던 주제는 다행히 곧 갈피를 잡았고, 다시 부드러워진 분위기 속에 난 어색하게 차를 마셨다.

그렇게 모든 게 잘 흘러갔다. 황후의 측근 중 측근이라는 황실 마법사에, 어쩌고 백작부인에, 어쩌고 누구 등등에게 눈도장을 성공적으로 콱 찍었다.

슬쩍 읽어본 생각들은 다들 조금 떨떠름 당황해 하는 눈치였지만, 어쨌든 겉으로는 별 문제 없는 소개자리였다.

갑자기 불청객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폐하, 차를 즐기고 계셨습니까?”

“......황비. 황비가 여긴 어쩐 일인가.”

초대도 하지 않았건만 멋대로 끼어든 것에 대한 질책이었다.

“며늘아기를 선보인다 하셔서, 축하할 겸 선물을 드리러 왔습니다.”

“마음은 고맙지만, 필요 없네.”

“폐하, 섭섭하옵니다. 황후폐하의 며늘아기면, 제게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

뻔뻔하게도 황비는 자신도 리일의 어머니뻘이라는 걸 강조하며 끼어들려 했다. 보다 못한 귀부인 중 한 명이 입을 열었다.

“황비전하, 이게 무슨 무례한 일입니까. 폐하께서 가까운 이들만을 따로 초대해 모인 자리이거늘!”

그 말에 황비는 눈을 표표히 내리깔며 입을 열었다.

“무례라니, 축하를 건네기 위해 온 것이 어찌 무례라는 말인가! 그리고 황자 전하의 비가 될 이는 나와도 무관한 영애가 아닐세. 그렇지 아니한가?”

“........”

황비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묻자, 그 시선에 몸이 흠칫 떨렸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황비를 보며 겁에 질려 떨고만 있고 싶지는 않았다.

난 떨리기 시작하려는 몸을 꾹 누르며 지지 않고 눈을 마주보았다.

눈을 마주쳤다고 예전처럼 뺨을 후려칠 수 없게 된 내 위치가 거슬린 모양인지, 황비는 삐뚜름히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구나. 내 밑에 데리고 있던 아이가 며늘아기가 된다니, 이 또한 인연이 아니겠는가?”

“.....오랜만에 뵙습니다, 황비.. 전하.”

마지못해, 정말로 마지못해 인사를 했다.

내 표정을 감상하듯 지켜보던 황비는 뒷말을 이었다.

“네 이복 자매라는 비올레티에게 이야기 많이 전해 들었네. 사생아지만 나름 잘 교육을 받았다지?”

사생아라는 단어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지난번 내 신분에 대한 논란 때 내가 백작가의 반쪽 핏줄이 맞다는 것으로 인정되었기에, 우습게도 나는 빼도 박도 못하게 사생아가 되었다.

내가 국적과 가문을 버렸을지언정, 그 사실은 영원히 남아버린 것이었다.

소문으로만 쉬쉬하고 있던 것과 공식적으로 듣는 건 또 다른 모양인지, 사람들이 은근히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사생아 어쩌고 하는 소리가 내 귀에도 드문드문 들려왔다.

다행히도 분위기를 읽은 건지, 황후가 재빨리 막아주었다.

“더 이상 아무런 의미 없는 과거의 일에 관심 둘 생각 없네. 나는 제국에 귀화한 리엘 폰 애스틴 영애를 가족으로 들이는 것이지, 적국인 리테인의 백작가와 혼사는 맺는 게 아니니 말일세. 또한 이미 귀화해서 마법사 서임을 받은 이상, 저쪽의 신분은 무의미하네.”

휴... 얼마 전 재빨리 마탑에 가서 신분을 확보해 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작위는 없었지만, 천재적인 마법실력 덕에 나도 이제 준귀족이 아닌 당당한 귀족이었다! 나중에 제국에 적당한 공만 세우면 작위까지 받을 수 있고!

사이다처럼 일침을 날린 황후는, 내 신분에 대해 왈가왈부 하는 것을 단칼에 막아주었다.

나는 고마움을 가득 담에 폐하를 바라보았다.

“맞습니다, 폐하. 게다가 이렇듯 완벽한 예법과 교양이라니, 어릴 적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아왔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답니다.”

마가렛도 지원사격을 해 주었다. 오락가락 날뛰던 불안정한 신분과 상관없이, 따뜻한 가정에서 좋은 교육을 받으며 커 온 그녀가 익히 공감할 만한 내용이었다. 물론 내 진짜 사정과는 조금 많이 달랐지만 말이다.

“이익...”

황후의 앞이라 더 이상 쏘아붙이지도 못하는 황비는 억울하다는 듯이 입술만 짓씹었다.

호기롭게 등장했던 황비는 별 말을 해보지도 못한 채 순순히 물러갔다.

황비가 떠난 후 티파티는 다시 제 분위기를 찾아 이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어찌어찌 무난한 대화 속에 잘 끝이 난 것 같았지만, 정작 난 황비가 신경 쓰여 그 과정이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

한편 리엘을 티파티에 보낸 엔릴은, 오늘도 역시 프로포즈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사실 리엘을 구해온 직후부터 내내 프로포즈를 계획한 그였다. 그 동안 티를 안 냈을 뿐, 리엘과 함께 지내면서도 혼자 있을 틈만 나면 시도 때도 없이 궁리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묘책이 떠오르지를 않아 전전긍긍했다. 그런데 그러던 중, 마법처럼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 사랑은 운명이야! 운명이었니까, 이 세기의 러브스토리를 극으로 만들어 리엘과 단둘이 관람하는 거야!’

라는 깜찍하고도 유치한(?) 발상이었다.

그렇게 결심한 리일은, 유명한 극단을 수소문해 닦달하기 시작했다. 원래는 오페라로 만들려 했는데, 노래로 말하는 대사는 아무래도 연극보다 전달력이 떨어질 것 같아 연극을 선택했다.

하지만 연극은 오페라와 달리 주로 평민들이 많이 즐기는 장르라는 게 문제였다.

고심 끝에 그는, 단순히 대사 뿐 아니라 중간중간 음악도 섞어서 만들어 달라고 했다. 오페라와 연극의 중간 정도 느낌으로 말이다. 그렇게 하면 그다지 초라해 보이지는 않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벌써 극단을 불러 연습시키기 시작한 지 몇 주째.

아무것도 모르는 엔릴은 오늘도 그저 열심이었다. 신이 나서는 쉴 새 없이 배우들을 닦달하며 스토리를 점검해 나갔다.

“첫 만남을 조금 더 임팩트 있게! 황궁 대운하에서 뉘엿뉘엿 지는 석양을 배경으로 우리의 운명적인 첫 만남!! 그래, 그거야!”

“잠깐잠깐, 이 부분 대사는 이렇게! 리엘이 이때 이렇게 말했어. ‘근데 초면에 왜 반말이죠? 무례하잖아요!’ 라고 말이야.”

“그 다음에는... 아! 이 부분을 넣어!”

“아니, 여기선 내가 조금 더 멋지게 나와야지! 멧돼지한테 치여 죽을 뻔 한 걸 구해줬다니까!?”

“그렇게 말고! 한 팔로 번쩍 들어 올려야지!”

가끔은 연극배우 수준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동작도 빡빡 우기며 지시했다.

“키스할 뻔 한 순간은 조금 더 긴장감 있게! 하지만 절대 내가 가벼운 남자로 보여서는 안 돼!”

“아! 아냐아냐! 우리 부모님은 등장시키지 마! 재미없어지잖아!”

“이 부분이 정말 중요해!! 내가 백마 탄 왕자님처럼 나타나 도끼를 막아내며 리엘을 구해야지!”

“잠깐! 리엘은 여신처럼 예쁘다고! 특히 드레스자락을 휘날리며 춤을 출 때는...! 아무튼, 다른 여배우 없어?”

“진짜 첫키스는... 음 그래. 주변에 특수효과를 좀 넣어. 꽃이 흩날리고, 종소리도 좀 들리고! 그리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잔소리에 극단원들은 모두 녹초가 되어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그 후에도 엔릴의 지시사항은 도통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그 후에, 어쩌고저쩌고, 그 다음에, 그리고는 등등등... 길고 긴 이야기는 풀어도 풀어도 한이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하이라이트로, 스토리의 엔딩엔 배우 대신 그가 직접 무대에 올라 리엘에게 청혼할 생각이었다.

“자, 그럼 모두 힘내도록! 내일도 또 점검하러 오겠다.”

해맑게 격려한 엔릴은, 널브러진 단원들은 뒤로 한 채 뿌듯한 얼굴로 떠났다.

***

“휴우...”

황비가 날 경계하는 건 당연했다. 나한테 여태 한 짓을 생각하면, 내가 공식적인 지위를 얻는 걸 어떻게든 방해하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훼방 놓겠다고 나선 것 같은데, 그 어설픔은 역시 황비다웠다.

하지만 난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사실 황비가 신경 쓰이는 이유는, 리테인 프로젝트에 관한 일 때문만이 아니었다.

황비가 내 능력을 알고 있다고 가정했을 때 걸리는 점은.... 내가 능력을 이용해 리일의 신분을 알아내 조종했을 거라 생각하는 것이었다. 혹시라도 리일에게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하아...”

물론 그걸 터트리려면 내 능력을 입증해 내야 할 테니 쉽진 않을 것이다. 아마도 멍청한 황비는 비올레티 없이는 제대로 된 계략을 짜지도 못하겠지. 그럼에도 너무 신경이 쓰였다.

게다가 이 고민은 황녀한테 털어놓고 도와 달라 말하기도 어려운 내용이었다.

그러니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건 리테인 프로젝트를 빨리 성공시켜 황비를 눈앞에서 치워버리는 것뿐이었다.

그런 마음으로 오늘도 난 황녀에게 달려갔다.

“전하. 아무래도 제 능력이 새어나갈까 봐 걱정 돼요. 간섭이나 세뇌능력까지는 비올레티도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저쪽이 무언가를 눈치 챌까봐서요. 기껏 계획해 놓은 일이 허사가 될 수 있잖아요. 한시 바삐 리테인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고 싶어요.”

“그렇겠구나. 이미 리테인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그래도 신경 쓰이겠구나."

"네..."

말 그대로 엄청 신경에 거슬렸다. 오죽하면 확 암살해 버리면 안 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황비가 내 능력을 알고 있다면, 비올레티를 죽여 봤자 별 소용 없었다. 괜히 황비에게 경각심만 심어 주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지금 황비를 처리하는 것도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어차피 그녀는 찌끄레기, 진짜 중요한 건 국왕이다. 괜히 황비한테 손을 쓰다가, 저쪽에서 무언가를 눈치채면 곤란했다.

그렇기에 황비가 고국과 주고 받는 연락을 철저히 감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혹시 비올레티가 돌아올까봐 걱정인 거니? 내가 잘 조치해 놨단다."

"아.. .감사합니다. 다행히 그게 아니더라도 비올레티는 쉽게 제국으로 돌아올 수 없는 상황일 거예요."

"응? 왜?"

"백작가가 저를 대신 사생아로 위장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비올레티를 볼모로 보내지 않은 이유가 있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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