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약혼(5)
2017.03.20.
나는 황녀에게 내가 아는 바를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아마도 비올레티는 가문에 돌아가자마자 정략결혼을 할 확률이 높았다. 비올레티, 즉 나에게는 어릴 때 부터 정해진 혼처가 있었으니까.
만약 지금 내가 진짜 백작 영애였다면, 그 자리는 바로 내가 갔어야 할 혼처였다. 할아버지뻘의 늙은 귀족.
사실 쫓겨났을 때, 그 암담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그게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저 늙은 할아버지랑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
그러고 보면 비올레티도 참 불쌍하다.
영애로서 호의호식은 내가 다 했는데, 가문의 일원으로서 의무는 비올레티가 대신 짊어지어야 한다니...
여기서 신부수업 (?) 받았으니 이제 정말 팔려가는 일만 남았다. 가문의 이득을 위해...
아무튼, 갑자기 신부가 바뀐 셈이지만, 첫 초상화 교환은 아주 오래 전인 기억도 잘 안 나는 꼬꼬마 시절 약혼하던 때였다.
그러다 16세 성년을 앞두고 다시 초상화를 그려 보내려던 찰나에 출생의 비밀이 터진 것이다. 덕분에 저쪽 집안에 이 사실을 숨길 수 있었고, 나는 무사히(?) 쫓겨났다.
예상외로 볼모들이 빨리 되돌려 보내졌지만, 당시에는 몇 년이나 붙들려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던지라 중대한 결혼을 앞둔 비올레티를 보낼 수가 없던 것이었다.
완전 가짜인 나를 결혼시킬 수는 없는 노릇일 테니...
“아... 그렇구나... 그래도 혹시 모르니 주시하고 있을게.”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리엘, 정말 위험하지 않겠어?”
“괜찮아요. 이미 빅토리아와 충분히 실험해 보았어요. 죄수들을 상대로 연습도 많이 해 봤고요.”
다른 일로 바쁜 황녀는 더 이상 연구에 참여하지 않았고, 비키와 나 단 둘이 그 동안 수도 없이 실험을 많이 해 보았다.
주로 대상의 세뇌당한 상태를 깨는 연습이었는데, 비키가 세뇌 해 놓은 것을 내가 무너트리는 식이 보통이었다.
비키가 해 둔 미약한 세뇌를 깨는 정도는 내게 조금도 위험하지 않았다. 나이로 인한 정신적 성숙도 때문인지, 내 능력이 월등히 강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걱정이었다. 능력이 나이에 어느 정도 비례한다면, 늙을 대로 늙은 교황의 세뇌력은 얼마나 대단할지 예측도 잘 되지 않을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내가 대상의 세뇌상태를 깨트려도 선 시전자인 비키에게는 아무 영향이 없었다. 다만 대상이 되었던 죄수에게 문제가 생겼을 뿐.
작게는 의식을 잃고 기절, 심한 경우에는 퇴행이나 의식불명에 이르기까지 후유증은 꽤 다양했다.
죄책감이 들기도 했으나, 그들은 어차피 인신매매 및 불법 노예거래를 일삼던 자들로 극형을 언도받은 자들이었다.
실험의 대가로 처형이 면제되었으니, 감옥에서 얌전히 버티다보면 언젠가 특별사면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니 그들 입장에서도 꽤 괜찮은 거래였다.
또 반대의 경우도 실험해 보았다. 아무래도 교황 쪽이 나보다 능력이 월등할 테니, 더 상위의 시전자가 해 놓은 세뇌를 깨려 할 때의 반작용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해 놓은 세뇌를 빅토리아가 깨려는 실험은 상당히 위험했기에 조심스러웠다. 난 극구 반대했으나, 위험하다 싶으면 멈추겠다는 약속을 단단히 하고 비키는 강행했다.
하지만 무리한 시도인데다 조절을 잘 못해 제때 멈추지 못한 것인지, 비키는 코피를 주르륵 흘리며 기절해버렸다.
비키가 쓰러지자 한바탕 난리가 났지만, 덕분에 역효과가 어느 정도인지 알게 되었다. 과도한 능력 사용으로 뇌에 무리가 온 건지, 비키는 깨어나 보니 능력을 거의 잃은 상태였다.
그래도 천만 다행히 그 외에는 아무 문제없이 무사했으나, 정말 가슴을 쓸어내린 사건이었다.
아무튼, 실패의 여파가 그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었다. 하지만 꼭 그렇다고는 장담할 수 없었기에, 일말의 불안감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흐음... 정말 괜찮은 것 맞지?”
이 내용을 이전에도 몇 번이나 설명해 주었지만, 황녀는 못내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 듯 했다.
물론 실험 내용을 정확히 말해준 건 아니었다. 대충 두루뭉술하게, 능력자와 직접 맞서는 것만 아니면 아무 문제없이 안전하다고만 거듭 강조했다.
살짝 남은 내 불안감 - 능력만 사라질 뿐 아무 일 없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면, 황녀는 분명 결사반대할 테니까...
안전하다고 계속 안심시키는 지금도 저렇게 걱정하는데, 그 사실을 어떻게 이야기 하겠는가... 그래서 비키에게도 단단히 입단속을 시켜 놓았다.
“네. 정말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녀는 무언가 석연치 않은 표정으로 떨떠름하게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근데 진짜 할 생각이면, 이제는 정말 아바마마께 털어놔야 해... 괜찮겠어?”
황제에게 이 일을 밝히면 더 이상 리일의 곁에 있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괜...찮아요.”
긴장감에 침이 꿀꺽 삼켜졌다.
***
“폐하, 북쪽에 새로 들어선 페텔 왕국의 약탈이 날로 심해지는 상황이라...”
“국경관리에 소홀함이 없도록 북부의 경계를 강화해야...”
넓은 제국을 통치하려면 신경 써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무슨 문제가 이렇게 끊임없이 터지는지...
전쟁이니 외교니 하는 굵직한 문제 외에도 정말 하루에도 수도 없이 많은 보고가 올라왔다.
세금이나 무역 문제는 일상이었고, 자연재해로 인한 농업 문제 및 구휼에 관한 일도 몇 년에 한 번씩 크게 터지곤 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와중에 동부와 북부의 일까지 겹쳐 미친 듯이 복잡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황제는 북부의 일로 급한 보고를 받는 중이었다. 요즘 들어 가장 이슈가 되는 안건이었다.
“다음 안건은 방어를 위한 성을 신축하는 것에 대한 것이옵니다.”
“폐하... 북부의 일을 조속히...”
“페텔 왕국과의 외교 협정을...”
정말이지 지긋지긋했다. 가끔은 너무 지쳐서 소리를 버럭 지르고 다 때려 쳐 버리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딸에게 안정된 나라를 물려주려면 얼른 정리해놔야 했다. 자신처럼 고생하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
‘피곤하군...’
황제는 짜증을 꾹꾹 눌러 담으며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애써 떴다. 뭐라도 대책을 세워야 하는데 잠이 모자라서 그런지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그래도 옛날엔 꼬박꼬박 5~6시간은 잤던 것 같은데, 지금은 하루에 3~4시간이 평균 수면시간이었다.
‘차라리 그 지옥 같았던 어린 시절이 더 여유 있었던 듯하군...’
사람이란 원래 제 몸뚱이 하나 건사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제국의 모든 일들을 신경 쓰면서 애들 문제까지 챙겨야 하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얼른 때려치고 떠나겠다며, 그는 오늘도 같은 다짐을 되뇌었다.
“폐하”
“폐하?”
대신들의 보고는 끝이 없었다. 평생 할 일만 꾸역꾸역 하고 살아온 게 습관 되지 않았다면, 정말이지 어떻게 버텼을까 싶었다.
“.........계속하게.”
“네.
그렇게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중, 그때, 시종이 조용히 다가와 작게 귓속말을 속삭이고 갔다. 황녀전하께서 뵙기를 청하고 있다는 전달이었다.
회의를 마치면 딱 5분만 자려던 작은 소망이 산산 조각나 버리는 소리였다.
“아나이스?”
조용히 할 말이 있다면서, 리엘을 함께 데리고 찾아온 딸의 모습에 황제는 의아한 듯이 불렀다.
“아바마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어요.”
잠시 리엘과 딸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황제는, 무언가 눈치 챈 듯이 운을 떼었다.
“...리엘에 관한 이야기인가 보구나.”
“......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사실 지난번 사건 때...”
아나이스는 리엘의 능력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며, 그때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갔던 독살미수 사건의 진실을 낱낱이 설명했다.
그리고 그 사건을 모의했던 비올레티라는 이복자매가 능력에 대해 대충 알고 있는 것 같다는 것도 이야기했다.
비올레티가 황비와 꽤 가까이 지냈으니, 이 일을 황비가 알게 되어 비밀이 새어나갈 수도 있다는 우려 또한 털어놓았다.
“........후우...”
황제는 머리가 아픈 듯 잠시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 것이냐!?”
“죄송합니다. 아바마마. 크게 중요한 일이라 생각을 안 해서...”
사실은 리엘이 비밀로 부쳐 달라 했기에 그런 것이었지만, 아나이스는 변명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잘못을 시인했다.
“고작 얼마 전에 그런 일을 겪어놓고 또 똑같은 실수를 하다니! 너희들끼리 해결하려 들지 말라고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건만!”
듣기만 해도 일이 꼬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황제는 그답지 않게 살짝 화를 냈다. 차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리엘은 애써 용기를 끌어내 솔직하게 말했다.
“폐하. 전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제가 숨기고 싶다고, 나중에 때가 되면 직접 말씀드리겠다고 간곡히 부탁해서 그러셨던 겁니다. 황녀 전하를 야단치지 마시고 저를 벌해 주십시오.”
“......둘 다 똑같구나.”
왜 이렇게 매번 뒷목 잡을 일만 만드는 것인지... 황제는 답답한 듯 이마를 찌푸렸다.
골칫덩어리 아들을 얼른 며느리에게 떠넘기려던 바람은 어디로 가고, 오히려 뒤치다꺼리해줘야 할 애들만 더 늘어난 기분이었다. 이젠 그냥 팔자려니 싶었다.
“폐하. 정말 죄송합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늘 자상하기만 하던 황제였는데, 아나이스를 질책하는 모습이 제법 매서워 보였다.
엔릴에게는 잔소리 한마디조차 하지 않는 것에 비해, 후계자로 키워야 하는 황녀에게는 엄할 때는 엄한 모양이었다.
“죄송해요. 아바마마...”
“....됐다. 이제라도 말했으니 다행이구나. 아나이스, 잘 말해 주었다.”
딸에게 쓴 소리 한 것이 마음이 좋지 않은지, 황제의 표정 역시 영 좋지 않았다.
“그래서... 얼마 전 보고 드린 빅토리아 건이요, 그게 사실은...”
리엘의 능력을 밝혔으니, 프로젝트를 위해 보고해 오던 내용도 사실은 빅토리아가 아닌 리엘의 일이었다고 이실직고했다.
그 말에 황제는 다시금 고민하기 시작했다.
“...”
그가 무엇을 고민하는 지 잘 아는 리엘은 거듭 안심시켰다.
안 그래도 반작용이나 후유증 여부를 점검하던 차였을 텐데, 하물며 리엘의 일이라 하니 더 근심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안전 문제라면 제가 직접 실험해 보아 가장 잘 압니다. 능력자끼리 직접 맞대응하는 게 아닌 이상, 실패해봤자 제 능력을 잃는 정도에 그칩니다. 저에 대해 알고 있는 비올레티의 일도 걸리기에, 서둘러 실행했으면 하는 간청입니다.”
“음.... 알았으니 일단 고개를 들어라.”
능력을 밝힌 후라서인지, 말을 하면서도 리엘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좋아서 그렇게 태어난 것도 아닌데, 이걸 말하고 날 때면 매번 왠지 모르게 죄인이 되는 듯한 기분이었다.
“감사합니다, 폐하. 부디 동행을 부탁드립니다. 빅토리아는 이미 미약한 능력밖에 남아있지 않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겁니다.”
“........”
이런 상황이 되어버린 데다가 저렇게까지 말하니, 당연히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혹여, 제 능력을 믿지 못하시는 거라면...”
“아니, 그런 건 아니다. 쓸데없이 그런 거짓을 고하지는 않겠지.”
“네...”
“하지만 네가 일을 성공시킬 수 있을 만큼 능숙할지는 모르는 일 아니더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엔릴의 약혼녀였다. 괜히 잘못되기라도 하면 큰일인 것이다.
능력을 잃는 정도로 끝난다고는 하지만, 사람의 일이란 건 혹시라도 모르는 것이니까. 어설픈 능력으로 괜히 시도했다가 다치게 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빅토리아보다는 제가 월등합니다. 불안하시면 사람을 불러 몇 가시 보여드리겠습니다.”
“........생각을 읽을 수도, 간섭할 수도 있다고 했지? 정신적으로 장벽이 높은 사람이나 피세뇌자, 같은 능력자에게는 쉽지 않고?”
“네.”
“그럼 나를 어쩌지 못한다면 교황의 세뇌를 받고 있는 리테인 국왕은 더더욱 어쩌지 못하겠구나.”
“네? 네... 그렇겠지요.”
“나에게 해보거라.”
“...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말해 보아라. 생각을 읽지 못한다면 절대로 알아낼 수 없는 일을. 네가 절대 상상할 수 없는 무언가를 떠올릴 테니까.”
“제가 어찌 그런 결례를...”
“어서”
“.....네”
“하였느냐?”
쉽지는 않았지만, 읽기는 읽었다. 그런데 그녀조차 믿기 힘든 너무 놀라운 내용에, 이걸 말해도 될지 망설였다.
“황녀 전하 앞에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래.”
아이들조차 모르는 황후와의 비밀이었지만, 알아도 별 상관없었기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는, 시간을... 되돌린 적이 있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