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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낚이면 좋겠어-102화 (102/134)

102. 약혼(6)

2017.03.20.

“맞다.”

“..!!!!! 아바마마? 이게 무슨...?”

서슴없이 인정하는 말에 오히려 리엘과 아나이스가 놀라버렸다.

“남의 머릿속에 간섭도 행하는 마당에, 그게 그렇게 놀라운 일이더냐? 아무튼... 비록 너와 같은 능력은 없지만, 마나를 다루는 오러나이트로서 정신이 단련된 만큼 쉽게 읽히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네. 꽤 어려웠습니다.”

“또 해 보거라.”

“네?”

“간섭, 그러니까 간단한 세뇌 같은 것 말이다. 상호간에 위험하지 않은 정도로 말이다.”

“아바마마!!”

“하.. 하지만 어떻게 폐하께...”

아나이스가 대경해 외쳤고, 리엘 역시 눈에 띄게 당황해 버렸다. 황제를 실험대상으로 삼으라니... 지난번에 황녀를 문밖으로 내보냈던 것과 차원이 다른 부담감이었다.

“상관없다.”

“하, 하지만......”

“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리엘은 어쩔 수 없이 무언가를 했다.

“.......”

하지만 아무 변화가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긴장해서 자..잘... 다시 해보겠습니다.”

“......”

황제는 머리가 아픈 듯 잠시 얼굴을 찌푸렸으나, 역시 전혀 변화가 없었다. 아무래도 튕겨낸 모양이었다.

너무 강제성을 띄었다가는 옥체를 해할까 마음이 불안해 집중이 잘되지 않았다. 초조해진 리엘은, 내용을 조금 바꾸어 다시 시도했다. 다행이 이번에는 먹혔다. 그런데 문제는...

“아바...마마?”

“..폐, 폐하?”

“리엘, 아바마마가 왜 이러시는 거야?”

“저, 저도 잘... 전 그냥... 지금 가장 원하는 걸 하시도록 살짝 강제력을 행사했을 뿐인데...”

설마하니 그 강렬한 바람이 ‘자고 싶다’라는 것일 줄이야...

“...지금 주무시는 거야?”

“그런 것 같아요.”

의자에 머리를 기댄 채 그대로 잠이 들어버린 모습에, 둘은 멍 하니 서로 얼굴만 바라보았다.

“......내가 깨울게.”

몇 번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황제는 반짝 눈을 떴다. 그리고는 지금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 잠시 눈을 깜빡였다.

-내가 왜 애들 앞에서 자고 있었던 거지...? 너무 피곤해서 기절한 건가?

“폐하! 송구합니다. 혹시라도 본연의 의지와 반대되는 행동을 강제했다가 폐하께 무리가 갈 까봐 불안하여... 하여, 간단한 것으로 한다는 게...”

“그렇구나.”

“정말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아니다. 내가 그걸 배려하지 못했구나.”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다. 아무튼, 그렇다면 대상을 배려할 필요가 없다면 성공할 확률이 훨씬 높겠군.”

“네, 그렇습니다.”

“그래. 그럼 다행이구나. 하지만 나를 대상으로 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울 것이다. 어느 순간에도 긴장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할 것이야.”

“네, 폐하. 새겨듣겠습니다.”

거기까지 얘기한 황제는 돌연 딸을 내보냈다.

“아나이스, 리엘과 단 둘이 할 얘기가 있으니 잠시 자리를 비켜주겠니?”

“네? 네. 아바마마”

황녀가 나가고 단둘이 남자, 황제는 궁금한 점을 물어보았다.

“이 사실을 왜 밝힌 것이냐?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텐데...”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 비밀을 숨기고 싶다고 은혜를 모른 척 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걸 말씀드림으로 인해 어떤 결과가 생겨도 받아들일 생각입니다. 설령 마녀라고 배척하셔도요... 하지만, 부탁드린 일은 해 볼 수 있게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황비의 일로 미안해서 그러는 거라면, 그럴 필요 없다.”

만약 실패하면 위험부담은 전부 스스로 감수해야 하는 일이니, 겁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그걸 어찌 단순히 죄송하다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 저를 구해주지 않으셨다면, 제가 지금 살아있지도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그런 이유도 맞지만, 저에게도 황비는 적입니다. 그녀를 무너뜨리려는 건 결국 이 일로 귀결되겠지요. 일이 끝난 후 황자 전하께도 전부 털어놓을 생각입니다.”

확실히 엔릴에게 쉽게 밝히기 어려운 이야기일 것이다.

“......음.. 엔릴도 아직 모르는 모양이구나.”

“...송구합니다. 전하께서 저를 꺼려하실까봐 겁이 났습니다. 가끔 마주치는 사이에도 불편할 법 한 제 능력인데, 평생을 함께 할 반려로서 이걸 받아들이는 건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닐 테니까요.”

그에게 알리는 것이 정말로 두려웠다. 그의 신분을 모른 척 하던 시절, 그의 머릿속을 읽어가며 전략적으로 대하던 일들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그럴 만 하지.”

“그래서... 가능하기만 하다면 영원히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평생 속이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약 이 일이 잘 해결되고...”

“거기까지 염두에 둔 것이겠구나.”

“....!!”

역시 황제는 속일 수 없었다.

“국왕의 세뇌를 무너트리고, 너도 그 타격으로 능력을 잃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있구나.”

정확했다.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도 반, 차라리 평범한 사람이 되어 과거의 일만 묻어둔 채 그의 곁에 있고 싶은 마음...

“네. 차라리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전하께 차마 털어놓을 자신이 없어서요... 하지만 일이 다 끝나고도 그대로면 나중에 꼭 직접 다 밝히겠습니다. 선택은 전하게 맡기려고요. 꺼려하시면 제가 떠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말할 수는 없었다. 놀라고 꺼려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능력에 대해 말하면 분명 이번 프로젝트에 대해 눈치 챌 테고, 그럼 절대로 회담장에 따라가지 못하게 할 테니까.

또한 그것만이 아니라...

“신분을 눈치 채고도 모른 척 대했다고 엔릴이 알게 되는 것이 두려운 모양이구나.”

“......!!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

“.......”

“네 태도에서 느껴졌다. 단순히 능력을 들키는 것이 두려운 것이라면, 이렇게까지 절박하게 이 일에 매달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네가 가장 밝히고 싶지 않은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여러 가지 상황으로 생각해 보니 하나밖에 없더구나.”

황제에게 들켰으니 이제는 정말 끝이라 생각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죽을죄를...”

“한 가지만 물어보겠다.”

“네.”

“처음부터 알고 고의적으로 접근했던 것이냐?”

“그건 절대로 아닙니다! 정말로 몰랐었습니다. 다만... 전하께서 말해주시기 전에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차마 내색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째서?”

“제가 전하 곁에 설 주제가 되지 않는다는 걸 너무나 잘 알았기에, 서로의 신분을 아는 채로는 감히 바라볼 수도 없는 분이라 생각했습니다.”

“.......”

“황자 전하라는 걸 알게 된 후 많이 고민했습니다. 제가 감히 넘볼 분이 아닌데 잡아야 할지 접어야 할지 매일같이 혼란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정말 운명이라면 어떻게든 연이 닿을 거라 희망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모른 척 욕심 내어 붙잡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정말, 정말로 죄송합니다.”

“음...”

무슨 생각을 하는지, 황제는 한참 말이 없었다.

“감히 용서해 달라 청하지도 않겠습니다. 일만 무사히 끝마치면 전하의 곁에서 바로...”

하지만 리엘의 말을 끊은 황제의 반응은 의외였다.

“그건 둘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일이니 상관하지 않겠다.”

“.........”

“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의 네 모습이 진심인 걸 안다. 서로 잘 이해해서 해결한다면 문제될 것 없겠지. 하지만 엔릴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구나.”

“........폐하... 너그러우신 말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럼 부디... 부디 따라갈 수 있기를 간청 드립니다.”

“간청은... 우리 쪽에서 해야 할 것이지 네가 청할 게 아니지 않느냐. 어려운 결심 해 주어 고맙구나. 능력에 대해 말하는 것도, 이번 일에 나서는 것도 무엇 하나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었습니다.”

“일단 네 말대로 일을 진행시켜 둘 테니, 결심이 변하지 않는다면 동행해도 좋다. 물론 어디까지나 위험하지 않다는 전제 하에서다.”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거기까지다. 그 후의 교황의 일에는 결코 나서지 말거라.”

“네, 폐하.”

어차피 일의 성패 여부와 상관없이 교황에게는 아무 타격이 없다. 그렇기에 이 일이 성공하면 황제는 신전을 직접 공격할 생각이었다.

교황은 같은, 아니 그 이상의 능력자니 보나마나 너무 위험한 시도일 게 뻔한데다가, 국왕이 반편이가 된 걸 알게 되면 이 쪽이 한 짓을 눈치 챌 것이다.

그러니 비슷한 수는 또 쓸 수 없을 게 자명했다. 자신의 세뇌에 대항할 능력자가 있는 걸 아는데, 그렇게 호락호락 당할 만큼 어수룩하지는 않을 테니까.

아마도 교단 뒤로 꼭꼭 숨어 결코 얼굴을 내비치지도 않을 게 분명했다.

“네. 알겠습니다.”

리엘이 돌아가고 나자 황제는 리테인의 일을 다시 한 번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일이 성공하면 신전은 리테인 전쟁과 함께 무력으로 치는 게 가장 좋겠군.’

현재 리테인 정세로 보건데, 국왕에게 문제가 생기면 내전이 발발할 확률이 높았다.

설령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국왕이 쓰러져 뒤숭숭한 와중에 단숨에 침략하면 된다. 17년 전 리테인이 국상 중에 그렇게 침략해 왔듯이.

리테인이라는 방패막을 잃은 신전은 제국의 대군 앞에 속수무책으로 밀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불가침조약을 맺으러 가면서 하는 꿍꿍이로는 참 아이러니한 짓이었지만, 국익 앞에서 도의 따위는 아무 의미 없는 허상임을 알기에 죄책감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피차에 시커먼 속내는 저쪽도 마찬가지일 것이니까...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황제는 머릿속에 일거리를 하나 더 추가하려 했다.

‘그런데 아나이스가 뭘 얘기하고 갔더라...’

머리가 너무 꽉 차서 생각도 잘 나지 않았다.

‘아, 황비. 이 계획을 황비가 알게 될 수 있으니 주의해 달라고...’

***

다행히도 황비는 그 후로 죽은 듯 잠잠했다. 내가 그렇듯 그 쪽 역시 당장 나를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닐 테니까...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 존재 자체로 신경이 쓰여 마음이 통 놓이질 않는 게 사실이었다.

“리엘!?”

강아지처럼 뛰어와 날 끌어안은 리일은 걱정스럽게 날 갸웃거렸다. 답답하고 불안한 마음에 알게 모르게 어두워진 얼굴이 티가 난 모양이었다.

“네?”

“무슨 걱정 있어?”

“아니요. 그냥 조금 피곤해서요.”

그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내 태도는 내가 봐도 참 못났다. 연인이라면서 서로 기대고 의지하려들기는커녕, 숨기기에 급급하다니...

황녀가 보면 복잡한 내 속도 모른 채 마냥 해맑은 리일이 한심해 보이겠지만, 실상은 그에게 모든 걸 숨기고 있는 내가 문제였다.

“피곤해? 어디 안 좋은 거야? 어깨 결리면 내가 주물러줄까?”

황자와 시녀라는 실제 지위와 상관없이 그저 나에게 헌신적인 리일이었다.

자신이 당연히 나보다 밑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리일은 언제나 나를 받들어 모시다시피 했다. 내가 조금이라도 힘든 것 역시 용납하지 못했다.

“안색이 안 좋아 보여. 요즘 입맛이 없어 보이던데 몸에 좋은 것 좀 먹어야겠어. 아! 내가 맛있는 거 만들어 줄까? 아니다, 이건 좀 아닌가...?”

“..............“

내가 아무 말 없이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리일은 쑥스러운 듯 멋쩍게 웃어보였다.

“왜애? 내가 너무 좋아?”

“네.”

너무 좋아서...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두려워요.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 때 그런 짓 절대 하지 않는 건데... 속이지 말고, 모른 척 하지 말고 그냥 솔직히 다가갈 걸...

“정말? 정말정말? 나도 너무 좋아! 리엘이 정말 좋아! 그래서 더욱 걱정되는 거야. 무슨 일 있나 해서...”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요즘 좀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래요.”

사실 머리가 무겁긴 했다. 일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연습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으니 머리는 늘 아팠고, 긴장되어 밤에 잠도 잘 오지 않았다.

“아.. 혹시? 미안해. 방해 안 할게. 내가 레이디께 큰 무례를 저지를 뻔 했네.”

무얼 떠올린 건지 리일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아마도 그날이라고 오해하는 것 같은데, 차라리 그렇게 생각해 주는 게 낫기에 난 굳이 정정해주지 않았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나와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게 뻔히 보이는데, 내가 피곤해 하는 기색에 내키지 않는데도 억지로 발걸음을 떼는 그였다.

“어서 가서 푹 쉬고 컨디션 회복하면 좋겠다. 그럼 난 방해 안 하고...”

“아니에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우리... 우리 오랜만에 나가서 데이트해요!”

“데이트!? 정말? 괜찮...겠어? 피곤 한 거 아니야?”

“괜찮아요!!”

마지막 데이트가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대로 그를 보내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내 흔쾌한 대답에 정작 리일은 우물 쭈물대기 시작했다.

“저기 근데 리엘... 나가서 데이트 말고... 다른 건 어때?”

“네?”

“그게...”

리일은 무언가 말할 듯 말 듯 계속 망설였다. 답답해서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을 정도였지만, 함부로 보지 않겠다 다짐했기에 가만히 기다렸다.

“그게... 내가 따로 준비한 게 있는데... 함께 가 주지 않겠어?”

“네? 네. 그래요! 전 다 좋아요!!”

***

그 따로 준비했다는 게 이런 것일 줄이야...

“.........”

다짜고짜 황궁 소극장으로 끌려간 난 아연실색해 버렸다. 들어오는 순간 이것이 무엇인지 눈치 채 버렸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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