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약혼(7)
2017.03.21.
원래는 적갈색 인테리어였을 듯한 극장의 전 좌석은 온통 새하얀 시트와 리본으로 화사하게 꾸며져 있었고, 구석구석에는 핑크빛 꽃들이 한가득 장식되어 있었다.
게다가 어디서 구해왔는지, 반딧불처럼 은은하게 떠다니는 마법 조명들은 그 로맨틱함에 정점을 찍어주고 있었다.
그 중 특히나 내가 안내된 중앙의 박스석은 프러포즈 분위기의 결정체라 할 수 있었다.
아담한 2인용 러브시트 앞에 놓인 테이블에는, 마법 촛불이 일렁이고 있었고, 그 앞에 앙증맞은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 모를 수가 있겠는가. 돌아오고 나면 이제 진짜 그에게 다 털어놓으려 했는데, 갑자기 얼떨결에 프러포즈라니...!
솔직히 아직은 받고 싶지 않았다. 일종의 자기방어의 기제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기껏 로맨틱한 프러포즈를 받고 ‘좋아요!’ 라고 외쳤는데, 나중에 비밀이 들통 나고 헤어지게 된다면 몇 배나 정말 비참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 이벤트를 받아 놓고, 이제 와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기도 뭐했다. 내가 그러는 이유를 모를 테니까...
차라리 영원히 숨길 수 있다면 좋겠는데... 비올레티가 아는 이상 그건 힘들겠지...
모른 척 일부러 꼬셨던 일이라면 몰라도, 능력 문제는 확실히 들킬 거다. 적이 이미 알고 있는데 아군이 모르게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황제가 대번에 유추했듯이, 리일도 나머지를 전부 눈치 챌 수도 있고...
“..........”
“리엘?”
내 굳은 표정을 뭐라고 오해했는지 리일은 수줍게 나를 불렀다. 아마 내가 너무 감동해서 말도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
“우리의 이야기를 담았어.”
“......저 리일...”
“리엘, 잠시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주지 않겠어?”
거절하기도 힘든 정중한 요청이었다. 안 그래도 이제 와서 박차고 나갈 수도 없었는데, 점점 더 곤란해졌다.
그때였다.
벌컥
“형!!”
의외의 구원군은 예상치 못한 막내황자였다. 박스석 문을 와락 열고 뛰어 들어온 로렌은 폴짝 뛰어들며 리일에게 안겼다.
“로, 로렌? 네가 여긴 어떻게?”
“나도 볼래!”
그리고 그 뒤로 곤란한 듯 서 있는 황제와 황후가 보였다.
“리일... 그게, 미안하구나. 난 이런 줄도 모르고... 우린 그냥 로렌이랑 있었는데, 알록달록한 배우들이 지나가는 걸 봤다고 보고 싶다며 쫓아가자고 해서...”
황후는 크게 당황해 허겁지겁 변명했고,
“엔릴... 이건...? 아, 로렌. 오늘은 끼어들면 안 된다. 나가자꾸나.”
황제는 다짜고짜 아이를 질질 끌고 나가려했다. 하지만 난 재빨리 로렌을 붙잡았다.
“황자 전하! 같이 보셔요. 아주 재밌을 거예요!!”
눈치도 없는 척, 나는 해사하게 웃으며 꼬맹이를 자리에 앉혔다.
“리엘!! 왜 그래!!”
“전하께서 보고 싶어 하시잖아요.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 돌아가시라 해요?”
“상관없어! 너 빨리 가!”
리일은 아무것도 모른 채 눈만 끔뻑이는 황자를 말없이 부라리며 쫓아내려 들었다.
“형아, 왜 그래!? 나 미워?”
“전 괜찮아요. 다 같이 보고 싶어요! 그럼 더 재밌을 거예요. 그쵸? 황자 전하?”
내가 기껏 분위기를 유도했지만, 리일은 단호박이었다.
“아냐. 나중에, 나중에 따로 보여줄게. 오늘은 안 돼.”
“그래. 렌, 일어나렴.”
황후도 아이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소파를 붙잡고 늘어진 아이는 요지부동이었다.
“싫어! 왜!? 다들 나빠! 두 분 다 오늘 나랑 놀아주기로 했잖아요! 같이 재밌는 거 하려고 몇 달을 기다렸는데!!”
워낙에 바쁜 황제황후인지라, 둘이 동시에 로렌과 하루를 보내기 위해 겨우겨우 시간을 쪼갠 모양이었다.
황녀는 없는 걸 보니, 업무까지 대행시켜놓고 어렵게 나온 것 같은데 하필 로렌이 끌고 온 곳이...
“그래도 안 돼. 렌, 다른 거 하고 놀자. 여긴 안 돼.”
“그래. 이건 다음에 보자.”
아니 그러니까 더더욱 아이가 실망하지 않게 하고 싶은 거 하게 해 줘야지! 황제의 저 퀭한 눈을 보라고! 얼마나 무리해서 시간 냈겠어! 다음은 무슨 다음이야!
이건 절대 사심에 의한 것이 아니고...!
“괜찮아요! 전 정말 괜찮아요!! 저 아이들 아주 좋아해요!”
이대로 프로포즈가 진행되면 곤란했기에, 리일에게 정말 미안했지만 난 날름 아이를 안아들고 무릎에 앉혀버렸다.
“꺄아! 누나 좋아!”
응. 나도 너 좋아!! 요 깜찍한 꼬맹아, 나 이제부터 너 정말 좋아하기로 했어! 리일이 어릴 때 너처럼 귀여웠겠구나?
결국 우리 다섯 명은 다 같이 한 편의 연극을 감상하게 되었다.
사정을 눈치 챘던 황제와 황후는 정말로 미안한 표정으로 딴청을 피웠고, 로렌은 신나서 꺅꺅대며 연극을 보았다.
그리고 리일은... 말 그대로 똥 씹은 표정이었다.
나? 나는...
연극이 시작되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리엘, 그러게 내가 쫓아내자고 했잖아...”
“이런 내용일 줄 몰랐죠...”
왜 하필 연극 내용이 우리의 연애사냐고! 진짜 내가 이걸 알았으면 저 꼬맹이 안 사랑했지!!!
아... 내 흑역사를 시월드의 모두와 함께 감상하는 기분이라니...
이 끝엔 원래 프로포즈를 계획했겠지? 제발 하지 마! 하지 마!!! 안 할 거지? 이 분위기에서 그런 짓 할 만큼 너 바보 아니지?
아... 울고 싶다...
“.........보면 몰라요? 하녀잖아요. 그러는 댁은 누구에요?”
“응? 난 뭐 아무것도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내 멘붕에 아랑곳없이 극은 진행되었다.
“근데 초면에 왜 반말이죠? 아무리 제가 하녀라지만 좀 무례하잖아요!”
으악, 내가 이런 짓을 했었다니! 너 왜 이렇게 기억력이 좋니!! 이런 거 기억하지 마!!!
배우들의 저 입을 진심으로 틀어막아버리고 싶었다.
이쯤 되니 순수한 관객의 시선으로 관람중인 세 명은 정말 재미있는지, 중간중간 웃음까지 터트리며 몰입하고 있었다.
그에 비례해 나와 리일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어 갔고...
다행히 장면은 곧 전환되어, 리일은 정의의 사도처럼 멧돼지를 무찌르고 날 구해냈다.
그때 난 실제로 눈을 꾹 감고 있었기에, 저렇게 악룡을 물리치는 용사처럼 리일이 나타났었는지는 모른다. 모르긴 모르지만, 아마도 열배쯤 오버한 거겠지?
“운하에서, 나 기억 안나?”
“어엇! 아... 그 반말!? 그런데 이름 안 알려 줄 거예요? 계속 반말남이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요.”
“나, 난... 리일이라고 해!”
“리일? 제 이름이랑 비슷하네요?”
“너무 고마워서 선물이라도 드리고 싶은데 어디로 찾아가면 되나요?”
“ 밖에서 따로 만나는 건 어때?”
이렇게 우리의 첫 외출이 시작되었고...
에헤헤. 이거 보다 보니 재밌네? 처음엔 시부모들이 초롱초롱 관람하는 게 부담스러웠는데, 어느새 나도 같이 몰입하면서 추억을 새록새록 떠올리게 되었다.
“그런데 리일. 리일은 황궁의 시종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럼 기사인가요?”
“쿨럭쿨럭!! 아, 미안... 실례를 해 버렸네. 흠흠... 뭐라고 물어봤더라?”
“어 그게... 으응. 시종은 아니고, 기사라고 하기도 뭐한데... 어쨌든 검을 익히고 있어! 오러나이트가 되기 위해서 말이야.”
원래 이쯤 레스토랑 씬에서 황제황후가 까메오로 등장해 주어야 하는데 온데 간데 사라져 버렸다.
불쌍한 황제님 황후님. 이 넓은 대륙에서 가장 고귀하신 분들이 순식간에 생략되어버리다니... 심지어 엑스트라조차 되지 못했어.
장면은 이제 축제 거리로 전환되었다. 리일의 기억력은, 참 대단히도 좋았다. 좋아하는 사람의 일이라 세세히 기억하는 건지는 몰라도, 정말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리엘, 저기 불꽃놀이 한다! 마법으로 만든 불꽃이야!”
“와... 정말 예뻐요...”
“황궁에서 축제 마지막 날 성대한 불꽃놀이가 열릴 거야. ....그때도 같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리엘.”
잠시 로맨틱했던 게 언제냐는 듯, 곧 나에게 작은 위기가 닥쳐왔고, 리일은 실제 그때의 기억보다 100배쯤 멋지게 각색되어 나를 구해냈다.
몇 번이나 목숨을 구해 준 답례로 내가 별 촛대를 선물했고...
“응! 아주 마음에 들어! 방에 꼭 장식해 놓을게!!”
“푸훗... 하하하. 리일, 은근히 귀여운 구석이 있네요?”
“으응? 정말? 내가 귀엽다고? 정말? 진짜로?”
그리고 키스할 뻔 하다가...
“리엘...”
“.............”
이상한 아줌마가 버럭 하는 바람에 날아가 버렸지. 앗, 그 다음에는 점쟁이인데! 이건 나오면 곤란한데..!!
다행히 점쟁이는 리일의 머릿속에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었는지,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았다.
그 후에도 우리의 연애스토리는 쭉쭉 이어졌다. 서로 봤으면서도 몰랐던, 혹은 아는 척 못했던 검술대회에 이어, 드디어 내가 정체를 알게 된 후인 빨래터 내용이 나왔다.
사실 그 사이에 내가 그의 정체를 눈치 채게 된 중대한 사건이 있었지만, 이건 리일은 전혀 모르는 일이니 극에 나올 리가 없었다.
“......어?”
“너무 오랜만이어서 나 까먹었어? 이렇게 우연히 또 만나다니, 우리 운명인가 봐!”
“이런 걸로 운명은 무슨 운명이에요!? 우연히 세 번 만나야 운명이죠. 일부러 왔으면서... 안 그래요?”
난 조마조마해지기 시작했다. 그때는 나름대로 모른 척 연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면 작위적인 티가 날 까봐 겁이 났다.
그런데 다시 봐도 내 대처는 흠잡을 데 없이 매끄러웠다.
하지만 난 순수하게 기뻐할 수가 없었다. 저때부터 다 가식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저 완벽한 연기는 오히려 내 발목을 잡을 테니까.
그 만큼 닳고 닳은 꽃뱀처럼 느껴지기밖에 더 하겠나 싶었다.
난 이 자리가 점점 불편해졌다. 그리고 이렇게 제 3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나는... 정말 나쁜년이었다...
“사실, 그다지 잘 지내지는 못했어요. 얼마 전에 감기몸살로 끙끙 앓았거든요. 아! 리일, 만나서 반가웠어요. 그럼 전 일이 많아서...”
“자, 잠깐만!”
“왜요? 저 정말로 이거 안 해 놓으면 공주저하께 벌 받아요... 저하는 정말 무서우세요... 화도 잘 내시고...”
“설마, 하녀들한테 손찌검도 함부로 하고 그래?”
“....그래도 뺨 정도는 괜찮아요... 하지만 어쩔 땐.... 손가락을 흐흑... 너무 너무 무서웠어요... 흑흑...”
저기서 연기가 아니었던 부분은 저 눈물밖에 없겠지...
“어, 어떻게... 같은 사람에게 그런 짓을...!”
“아, 아녜요. 누가 들으면 리일도 큰일 나요. 전 괜찮으니 화내지 말아요. 이젠 다 나았어요.”
“....제국에 아무것도 모르고 온 거였어? 힘들었겠구나...”
“처음엔 많이 그랬죠... 지금은 그래도 익숙해져서 버틸 만 해요. 맞지만 않으면요. 고마워요. 정말 큰 위로가 되었어요. 그런데 전 이제 정말 가봐야겠어요.”
“휴... 미안. 그래도 다음에 또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때까지 혼나지 말고 잘 버티고 있어!”
“아차! 손수건! 돌려주는 걸 잊었네요!!”
내 어두워진 표정을 힘든 시절의 기억 때문이라 오해했는지, 리일은 다정하게도 내 손을 따스하게 잡아 주었다.
미안해요. 이렇게 진심이 될 줄 알았으면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 정말 미안해요.
내 마음이 어떻든 간에 연극은 쭉쭉 진행되었다. 다음 장면은 외궁의 무도회였다.
“리엘! 이쪽이야 이쪽!!”
“리....일? 여긴 어쩐 일이에요?”
“아, 그게... 지나가다가 발코니에 네가 보이기에... 우리 역시 인연? 자, 이리 내려와 볼래?”
“아니죠!! 그런 건 인연이 아니라... 운명이라고 하는 거죠! 운명이란 거... 정말 있겠죠?”
“없으면 만들면 되지.”
“그렇구나... 사실 오늘, 입고 갈 옷이 없어서 오라버니가 드레스를 보내 주셨는데, 누군가가 갈가리 찢어놓았어요. 너무 속상한 나머지 다 포기하고 있었는데, 일하고 돌아와 보니 제 방에 새 드레스가 놓여있는 거예요! 집에서 절 챙겨줄 리는 없는데... 오라버니가 알고 다시 보내주신 걸까요? 그것도 아니면......
“그, 글쎄....? 동화 속 요정이 나타난 걸까?”
“에이, 아! 혹시...! 검술대회에서 기사님?”
“뭐어?”
“근데 리일, 옷이 참 좋아 보이네요. 누가 보면 황태자 전하라도 되는 줄 알겠어요.”
“케헥... 쿨럭.. 화, 황태자 전하라니... 그럴 리가. 절대 아냐. 그건 정말 아냐!”
아악!! 내가 미쳤지! 저 때 저 말을 대체 왜 했었지!?
황제는 내가 신분을 모른 척 했다는 걸 알고 있으니, 그게 늦어도 이때쯤이라는 걸 분명 눈치 챘을 것이다.
저렇게 어색한 대처가 팍팍 티가 나는데 모를 리가 없었다.
난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마음에 곁눈질로 황제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그런데 하필 그 순간, 딱 눈이 마주쳐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