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약혼 (8)
2017.03.21.
황급히 눈을 내리깔려는데, 황제가 작게 웃는 모습이 보였다.
으아아아악! 눈치 챈 거 맞아! 맞다고!!! 난 이제 어쩌면 좋아!!!
그 사실을 단순히 알고 있는 거랑, 이렇게 세세한 내막을 보이는 거랑은 전혀 대미지가 다르다고!!!
산산 조각나 허공에 흩어지고 있는 내 멘탈에는 아랑곳없이, 극은 계속 진행되었다.
“그럼 다음에 또 봐! 난 정말 가봐야겠다!!”
다행히 이제 외궁무도회는 끝났고, 이후에는 우리 모두 서로를 알게 된 일이었다.
한 마디로 절대로 잊을 수 없던 처형 순간... 리일 역의 배우는 숨이 턱까지 차올라 헐떡이고 있었고, 내 역의 배우는 그의 이름을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리...일...? 정말 리일....? 흐흑... 으흐흑... 흐어엉... 리일... 리일... 저... 너무 무서워서... 흐으으윽...”
“리엘, 괜찮아. 이제 괜찮아. 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
“흐흑...흐흐흑... 리일... 나... 나....”
“전하, 아무리 황자 전하라 하셔도 집행명령을 이렇게 방해하실 수는 없습니다.”
그 초치는 말에 두 배우들은 움찔 놀랐고, 리일의 배우는 허겁지겁 변명을 했다.
“리엘... 그게 있잖아... 내가 다 설명할게... 속이려 한 게 아니...”
“괜찮아요.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리일은 리일이니까요. 구해줘서 정말 고마워요... 정말 무서웠어요... 흑... 흐윽...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리일은 이 때가 내가 정체를 알게 된 때라 아직도 알고 있겠지... 난 차마 낯부끄러워 황제폐하를 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 후에는 별 문제 없이 쭉쭉 진행되었다. 딱 한가지만 빼고는...
탈탈 털린 정신을 겨우 회복하며 멍하니 극을 보다가, 화들짝 놀라며 그동안 놀란 것만큼의 데미지를 한꺼번에 받고야 말았다.
아니, 이건 나보다는 리일이 오그라들어야 할 일인가?
“리엘, 마, 많이 아파? 그만할게! 미안해. 내가 그것도 모르고...”
“괜찮아요. 처음엔 다 그렇대요. 어차피 언젠가 아플 거잖아요... 어서요... 부드럽게 하면 안 아파요.”
으아아아아악!!! 그만!! 그만하라고!! 저 입을 당장 틀어막아야 해!!!
리일이 가족들 쫓아내려 한 이유가 다 있었던 거야!! 자식놈의 16금 생활 따위 알고 싶지 않으실 텐데, 강제로 알게 해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엉엉엉...
“리엘... 너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겠어...”
우리의 민망함과 상관없이 배우들은 그저 열연했다. 리일 역의 배우는 심지어 이 대사까지 고스란히 내뱉었다.
“리엘, 나... 어땠어?”
“조..좋았어요...”
다행히 극 속의 나는, 실제와 달리 조금 수줍은 소녀였다. 그의 눈엔 내가 아직도 그렇게 보이나 보다.
“헤헤 기쁘다! 앞으론 더 잘할게! 아무튼 리엘,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나랑 결혼해야 해!”
난 이제 얼굴을 푹 숙여버리고 망부석인 척 연기하고 있었고, 리일은 시뻘게진 얼굴을 연신 부채질하고 있었다. 그러다 황제와 눈이 마주쳤는지, 황급히 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그래도 아, 아이는 안 생겼으니... 아..아바마마 죄송해요! 겨, 결혼하면 되잖아요!!”
“.............”
황제는 민망한 듯 말없이 로렌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며 딴청을 했다. 그리고 황후는... 조는 척을 하고 있었다. 아, 그나마 가장 감사합니다!
다행히 극이 계속 진행되는 덕에, 분위기는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 후 수많은 해프닝들이 있었고, 내 인생의 똥밭 하이라이트인 별궁 사건도 있었다. 하지만 그 사건은 고작, 그가 나에게 결혼을 서두르는 이유 정도로 휙 지나가 버렸다.
아마도 내 트라우마를 배려한 것인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의 연애사는 흘러흘러 현재까지 왔고, 드디어 마지막인 지금에 이르렀다.
리일 역을 열연하던 배우는, 잠시 멈추더니 리일에게 살짝 시선을 보냈다. 어떻게 하겠냐고 묻는 듯 했다.
아마도 이 타이밍에서 리일이 직접 내려가 나에게 프로포즈를 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리일은 이건 아무래도 아닌 듯 싶었는지,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그걸 용케 알아들은 배우는, 직접 극을 마무리했고, 그렇게 대단원의 막은 내려갔다.
다섯명의 박수소리가 장내에 조용히 울려 퍼졌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죄인이 된 기분인 우리 둘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푹 수그리고 있었다.
그 적막을 깨트린 건 역시나 로렌이었다.
“아바마마 어마마마! 나도 배우가 될래요! 너무 멋있어요!”
그 황당할 정도의 폭탄 발언에, 황제는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그래. 로렌, 역시 피는 못 속이나 보구나.”
피라니? 선조 중에 누가 배우였나? 내가 멍하니 생각하는 사이, 황후도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엘, 왜 절 봐요? 연기력은 엘이 더 뛰어나잖아요.”
“네? 제가요? 제가 무슨...”
“어머! 드레스 입고 호호호 하면서 조신한 레이디 연기도...”
“으악, 디트! 제발!!”
레, 레이디? 황제가 레이디? 설마 여장? 아... 그래서 그때 어쩌고 후작이 레이디라고 놀렸던 건가? 근데 황제가 대체 왜 그런 짓을?
“어머, 미안해요. 우리끼리 있는 것 같은 기분에...”
황후가 부채를 부치며 딴청을 피웠지만 이미 늦었다. 두 아들은 눈을 땡그랗게 뜬 채 일제히 황제를 바라보았다.
“아바....마마?”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 프로포즈 해프닝은, 끝까지 해프닝을 남긴 채 끝나버렸다. 정말 민망한 순간순간들이었지만, 그래도 재미있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끝내 프로포즈를 하지 못해 리일은 아쉬워하는 눈치였지만, 난 꽤나 만족했다. 함께 했던 알콩달콩한 시간들을 반추해 보는 건 정말이지 마음 따뜻해지는 일이었다.
만약 나와 그의 인연의 끝에 기다리는 것이 설령 이별이라 할지라도, 오늘의 연극 덕분에 이 즐거웠던 순간을 두고두고 추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고마워요. 잊지 않을게요...
***
다음날, 협정에 동행하겠다는 리엘의 마음이 변하지 않자 아나이스는 엔릴을 찾아가 적당히 둘러대며 말했다. 어느덧 협정 날짜가 열흘 후로 훌쩍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엔릴, 부탁이 있어.”
“응? 뭔데?”
“이번에 리테인과 불가침조약을 맺기로 한 거 알지? 협정을 논하는 회담장에 리엘을 데려가려 하는데, 잠시 빌려가도 돼?”
“응? 리엘을? 거기에 왜?”
“나도 아바마마와 함께 가기로 했거든. 근데 리엘이 거기 출신이니, 아무래도 제국 시녀보다는 그쪽 물정에 대해 이것저것 아는 게 많을 거 아냐. 사실 줄리를 데려가려 했는데 아직 돌아가지 않아서.”
“아... 그렇구나. 치잇, 잠시라도 떨어지기 싫은데...”
“으이그, 한심하기는... 아무튼 이주일만 빌릴게!”
“으음... 리엘이 괜찮다면... 나한테 물어볼 게 아니라 본인한테 물어봐야지.”
“이미 물어봤어. 흔쾌히 찬성하던데?”
그 말에 엔릴이 누나를 찌릿 노려보며 타박했다.
“누나가 압박준 거 아냐? 리엘 입장에서 어떻게 딱 잘라 거절하겠어!”
“아냐! 정말 아냐!”
“알았어. 대신 고생시키지 말고 잘 챙겨줘야 해! 아, 근데 위험한 건 정말 아니지?”
순간 찔끔 했지만, 아나이스는 모른 척 둘러댔다.
“아바마마랑 동행하는데 일은 무슨 일이 있겠어?”
“하긴... 그럼 언제 출발하는데?”
“내일. 마차로 3~4일은 걸리는데다 만일을 위해 하루 이틀 여유를 생각하면 넉넉히 일주일은 잡아야지.”
장소는 세이라 공국과 리테인의 접경지역으로 잡혔다.
제국 황실의 분가인 세이라는 리테인과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였다. 그렇기에 세이라 역시 이 조약과 무관한 입장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돌아올 때도 그 정도 걸리잖아! 너무 길어! 대충 말 타고 휘리릭 갖다 오지 뭘 그렇게 느릿느릿...”
아나이스는 찡찡거리기 시작하는 엔릴을 어이없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황제의 공식 행차인데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뒤따르는 의전행렬만 해도 줄줄이 사탕이라고!”
“아, 네, 네. 근데 누나, 이제 후계자인 거 알려도 되는 거야? 그런 중요한 자리에 아바마마랑 동석하면 누가 봐도 딱 티 나지 않겠어?”
“아... 어차피 곧 슬슬 알릴 때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정말? 폭탄선언과 동시에 양위 하시려는 거 아니었어?”
“원래는 그랬지만... 네 입장에서는 차라리 빨리 알려지는 게 낫지 않아? 리엘과의 일을 무난하게 진행하려면.”
“그렇긴 하지... 하긴, 어차피 귀족들도 뇌가 있다면, 눈치 챌 사람은 이미 눈치 챘겠지? 솔직히 놀기만 하는 나랑, 석학들을 초빙해 후계자 수업을 받고 아바마마를 따라 정무에까지 참석하는 누나랑 딱 봐도 다르잖아. 그런데 그냥 고정관념 때문에 끝까지 나에게 목매고 있는 것뿐이지. 현실을 보지도 듣지도 않으려 하는 한심한 작자들!!”
“이 나라가, 특히 귀족들이 앞뒤 꽉 막힌 걸 걸 어쩌겠어. 멀쩡한 황자를 두고 여제를 세우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거품을 물 게 뻔히 보이네. 에휴... 내가 이놈의 고리타분한 편견을 싹 뜯어고쳐놓겠어!”
“누나 파이팅! 아무튼 잘 다녀와. 근데 정말 위험할 일은 없는 거지?”
“응... 걱정 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아나이스는 굉장히 불안했다. 외부적 위험이 아니라 리엘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협상 자체는 위험하지 않지만 그녀가 하려는 짓이...
‘잘 하는 짓일까...?’
아무것도 모르는 엔릴은 손을 휘휘 저으며 누나를 쫓아냈다.
“알았어. 그럼 내일 배웅할 때 봐!”
***
큰소리 탕탕 치며 말했지만, 솔직히 겁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이런 것 정말 준비하고 싶지 않았지만, 혹시 모를 미래에 대비해 어젯밤 난 리일에게 남길 편지를 썼다.
떠나기 전 이렇게 해 놓으니까 왠지 유서 같아서 기분 묘하네...
아냐, 유서는 무슨 유서야!? 그냥, 이건 그냥... 그냥 편지야!
아무튼 난 편지를 방에 잘 숨겨두고, 간단한 짐을 챙겨 방을 나섰다.
똑똑
“황녀 전하, 리엘입니다.”
방 안에 들어서자, 우아하게 차려입은 황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짐이야 어차피 아랫사람들이 알아서 다 챙겨 주니, 별로 준비할 게 없는 황녀는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었다.
“어서 와. 엔릴이랑은 인사 하고 왔어?”
“이따가 배웅할 때 볼 건데 뭘요.”
“하지만...”
“만났다가 제가 괜히 감상적인 소리라도 하게 되면 이상하게 생각하실까봐요.”
“그래도...”
“그냥 별 거 아닌 여행이라 생각하실 텐데, 걱정 끼쳐 드리고 싶지 않아요.”
“정말 괜찮겠어?”
그런 일은 절대 없어야겠지만,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니 조금 더 둘만의 시간을 가지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듯 했다.
“네. 무사히 돌아올 테니까요.“
“......그래. 알았어. 다시 한 번 당부하는 거지만, 절대 무리하지 마. 잘 안 된다 싶으면 바로 그만 두고...”
“감사합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괜찮아. 무사히 돌아올 거니까, 안 보고 가도 돼...
하지만 그런 다짐도 무색하게, 황녀와 함께 막 방을 나서려는데 마침 리일이 찾아와 있었다.
“어? 리엘?”
“리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