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회담(1)
2017.03.22.
“방에 갔더니 벌써 없기에 여기로 와 봤어. 리엘, 나한테 따로 인사도 안 하고 갔다 오려 했어?”
“죄송해요. 어차피 조금 이따가 볼 거라...”
“그래도 그렇지! 근데 왜 남장을 했어?”
지금 난 가짜 콧수염을 달고 둥그런 모자까지 푹 눌러 쓴 채 시종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황녀와 함께 떠나는 모습을 보고 황비가 무언가 눈치 챌 까봐, 일부러 그렇게 위장한 것이었다.
“아 그게... 여행 중에 혹시 불미스러운 일이 있을까봐 남장을 했어요.”
“그렇구나. 아무튼 배웅해 줄게. 같이 나가자.”
결국 우리는 다 같이 본궁의 입구로 향했다.
본궁의 앞 너른 뜰에는 황제 행차를 위한 행렬이 끝없이 정렬해 있었다. 제국으로 오면서 보았던 셀리나 공주의 행차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규모와 위엄이었다.
“우와...”
황제가 탈 것으로 보이는 화려한 마차와 호위를 위해 겹겹이 에워싼 기사들, 줄줄이 늘어선 뒤따르는 수행원들의 말과 마차...
양 옆에 사열해 있는 근위대들은 자로 잰 듯 반듯했고, 치켜든 검날에는 햇빛이 반사되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저 너머 뒤쪽에는 황제의 출발을 지켜보기 위해 고위 귀족들이 잔뜩 와 있었다.
여기 따라가는 거 굉장히 영광된 자리였구나... 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이번 일의 배경을 다시 한 번 차근차근 정리해 보았다.
사실 이건 말이 좋아 불가침조약이지, 정확히 말하면 신전이 리테인을 방패막이로 앞세워 자신들의 세력을 보존하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현재 제국의 동부와 북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복잡한 국경문제들이 정리되면, 또다시 전쟁이 시작될지 모른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니까.
물론 리테인 역시 죽기 살기로 저항할 테니 제국 쪽에도 타격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얼마가 걸리든 결국 그 끝은 리테인의 멸망에 가까운 게 사실이었다.
그래서 리테인은 어떻게든 공주가 리일의 마음을 사로잡길 바랐던 것이겠지.
그런데 잘 되지 않으니 초조해졌을 테고, 그러던 중 마침 내 사건이 터지자 재빨리 황비 자리를 요구하도록 지시한 거다.
아비든 아들이든 둘 중 하나라도 마음을 사로잡아 어떻게 해보겠다니...
한심한 생각이지만, 오직 허상에 매달려 의지하는 광신도 국왕다운 발상이기도 했다. 하긴, 애초에 사이비 종교에 물든 사람치고 정상인 사람이 있을 리가 없지.
아무튼, 황비를 들여 자신만만해 진 건지 결혼동맹을 핑계로 리테인은 불가침조약을 원했고, 이쪽 역시 저쪽을 끌어낼 방법을 궁리하던 차였기에 고심 끝에 이를 수락하는 척 한 것이다.
명분은 적당히... 제국 역시 지금 상황에 불필요한 전쟁은 원치 않는다며 말이다.
그리고 논의해야 할 협정사항이 많으니, 각 정상이 직접 만나 조약을 체결하자며 이쪽에서 강력히 요구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대외적인 명분일 뿐, 실제로는 회담을 핑계로 국왕을 끌어내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다.
일 년전만 해도 내가 이런 정치판 한가운데 휘말려 들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멍하니 생각에 빠져있는 나를 황녀가 살짝 불렀다.
“리엘? 긴장한 거야?”
“아뇨... 그냥 그 동안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랬구나. 이제 올라타야지.”
“네.”
이미 준비는 다 되어있기에, 난 그냥 황녀와 함께 마차에 오르기만 하면 됐다. 마차의 문 앞까지 바래다 준 리일은, 직접 문을 열어주며 인사를 건넸다.
“잘 다녀 와. 기다리고 있을게. 사실 꼭 할 말이 있었는데... 돌아오면 할게. ”
아마도 프로포즈겠지...
“네. 다녀올게요.”
저도 돌아오면 해야 할 말이 있어요. 프로포즈는 그 후에 들을게요... 난 속으로만 말했다.
“누나도 잘 다녀와. 리엘 잘 챙겨주고.”
“알았어. 넌 어마마마랑 로렌이나 잘 돌봐주고 있어.”
문을 닫자 호화로운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온갖 마법 장치가 되어있는 화려한 마차는, 푹신하고 끝내주게 고급스러웠다.
“오래 걸릴 테니까, 불편해하지 말고 푹 쉬면서 가. 컨디션이 좋아야 하잖아.”
“네, 전하.”
황제는 저 앞의 마차에 따로 타고 있어 가는 내내 부담스럽게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되었다. 내 입장에서는 황제보다는 황녀가 훨씬 편하니 참 다행이었다.
이윽고 황제도 올라탔는지, 행렬은 천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
거의 자다 졸다 하다가, 중간에 내려서 식사를 하고, 다시 자다 졸다 밤에는 이동경로 중에 있는 영주성에 들러 영접 받으며 하룻밤 머물고...
그렇게 며칠을 이동하다 보니 드디어 세이라의 왕도에 도착했다.
밤늦게 도착한 탓에 환영식은 간단하게 열렸고, 새로운 장소를 제대로 둘러볼 겨를도 없이 난 일단 방으로 안내되었다.
여행의 피로 때문인지, 난 다음날 늦게야 겨우 눈을 떠 비몽사몽 대충 점심을 먹었다. 어젯밤 온천욕을 하고 노곤노곤 해져 잠든 덕에, 다행히 피로는 싹 사라져 있었다.
좋은 나라네. 왕궁에서 온천수도 퐁퐁 솟아나오고...
배를 좀 채우고 나니 이제 조금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겼지만, 일단 황녀에게 찾아가 보는 게 먼저라 생각되었다.
하지만 황녀는 지금 폐하와 함께 협정 내용을 점검하는 중이라 방에 없다는 소식이 되돌아왔다.
어차피 그건 내 영역이 아니었기에, 난 속편하게 방 앞을 산책이나 하며 경치나 감상하기로 했다.
“우와... 경치 좋다.”
제도 그라첸의 풍경도 멋지지만, 이곳 세이라 왕궁의 아기자기함도 참 예뻤다. 황후폐하가 이곳의 공주님이었지? 그럼... 앗! 잠깐 이곳에 시외할머님이 계시다는 거네? 헉...
나도 참... 당장 내일 있을 협정보다 그게 더 신경 쓰이다니, 근데 황당하지만 사실이었다.
슬슬 방으로 돌아가볼까 하는데, 저쪽에서 시녀가 잰 걸음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레이디, 저녁 만찬에 참석하시라는 전갈입니다. 준비를 도우라 명받았습니다.”
“......네.”
저녁만찬이라니... 분명 황제폐하와 황녀전하, 시외할머님이 될 대공비 전하까지 함께하는 자리일 거다. 말이 씨가 된다고, 정말로 그 시외할머님을 보러 가게 되어버렸다.
생각해보니 리일의 가족들과 단 한 번도 격식을 차린 식사자리를 가진 적이 없었다. 내가 불편해 할까봐 배려한 건지, 지난 번 야외에서 했던 소박했던 식사가 전부였다.
시월드와 함께하는 이런 자리도 오늘이 처음인데, 하필이면 초면인 대공비께 인사까지 드려야 한다니! 무려 시어머니의 어머니라고!
내가 혼자 무슨 절규를 하든 간에, 숙련된 시녀들은 순식간에 나를 레이디로 꾸며 주었다. 후다닥 단장을 마친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방을 나섰다.
똑똑똑
“들어가십시오.”
형식적인 노크와 함께 시종이 문을 열어 주었다.
“후우...”
그래도 황후폐하의 어머니니 이상한 분은 아니겠지...? 난 심호흡을 하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긴 테이블이 웅장하게 놓여있을 줄 알았는데, 다이닝룸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건 예상과 다른 둥근 테이블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먼저 와 있는 사람은 대공비였다.
“세이라 대공비 전하를 뵈옵니다. 리엘 폰 애스틴이라고 합니다.”
“리엘이구나. 만나서 반가워요.”
대공비는 황후폐하와 상당히 닮은, 우아하고 기품 가득한 노부인이었다.
한때 찬란했을 은발은 살짝 색이 바랬지만, 보석 같은 바다빛 눈동자만은 또렷이 반짝이고 있었다. 황후가 저 머리색과 눈색을 그대로 물려받은 모양이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부디 말씀 편히 낮춰 주십시오.”
“그래, 알겠다. 네 이야기는 나나에게 많이 들었단다.”
“황송하옵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이어가야 할지 어색해 죽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뻘쭘하다고 해서 윗사람에게 먼저 주절주절 떠들 수도 없고, 그저 얌전한 척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가시방석이었다.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지, 내일의 일에 대해서 어디까지 들었을지도 걱정되었다.
혹시 능력에 대한 걸 알 수도 있으니 일단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게 노력했다.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되니 편하게 있으렴.”
“감사합니다.”
“잘은 모르지만 내일 네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들었다. 그러니 마음 편히 있게 배려해 주라고 폐하께서 단단히 부탁을 하더구나.”
“폐하...께서요?”
“그래. 널 꽤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같더구나. 쑥스러워서 잘 내색은 안하시지만, 따뜻한 분이야.”
그건 나도 느끼고 있었다. 옛날에 리일이 우리 아빠 마음 여리다 할 때는 코웃음 쳤었는데, 겪어보니 예상외로 자상하고 배려심 있는 성격이었다.
리일이 착한 건 엄마를 닮고, 배려심 많은 건 아빠를 닮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전에는 황제의 말이 대체 무슨 의중인지 몰라 당황했었는데, 지금 보니 딱히 파악하려 할 것도 없었다. 그냥 있는 그대로 겉치레 없이 말하는 스타일이었으니까.
“네. 잘 알고 있습니다. 과분할 정도로 좋은 분이십니다.”
“나도 한때는 딸아이를 황후로 만들고 싶지 않아 반대했었는데, 폐하의 됨됨이가 참 올곧아 결국 허락했지. 그런 사위가 마음에 들어 하는 걸 보니, 리엘도 좋은 아이일 거라 생각되는구나.”
“화..황송하옵니다.”
싸늘하게 대하는 것보다는 백배 고마웠지만, 이건 또 이것대로 부담스러웠다. 한 것도 없는데 내가 뭐라고 갑자기 얼굴에 금칠이라니...
어디에라도 숨어들고 싶어지려는 찰나, 다행히도 누군가가 들어왔다.
벌컥
문이 열리고 들어온 건 황제였다. 평소에 그렇게 부담스럽던 황제가 갑자기 이렇게 친근하고 반가워 보일 수 있다니. 벌써 가족 버프 받는 건가 싶었다.
“폐하”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내 인사를 간단히 받으며 황제는 대공비에게 답했다.
“먼저 오셨군요. 나나는 옷을 갈아입고 오느라 늦는 모양입니다.”
“보일 사람도 없는데 무슨 꽃단장은...”
다행히 황제가 오자 둘이 알아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덕에, 난 조용히 청취자 모드가 될 수 있었다.
“드디어 내일이구나. 긴장되느냐.”
하지만 곧 관심은 나에게로 다시 돌아왔다. 내가 가만히 있자 긴장해서 그렇다 생각했는지, 황제는 괜히 말을 걸어주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불편한 건 맞는데, 내일 일도 내일 일이지만 사실 지금 이 자리가 좀... 남친 없이 대면하는 시월드 자리라니, 어휴...!
“중요한 일을 앞두고 긴장되는 게 당연한 거다.”
“네. 사실 조금... 그렇습니다.”
황제가 부탁해서 그런지, 대공비는 나에게 가벼운 산책을 권유했다.
“아나이스에게 일러둘 테니, 왕성를 한 바퀴 구경하고 오는 게 어떻겠느냐. 마음이 많이 느슨해 질 거다.”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구나.”
“황녀 전하께서도 바쁘실 텐데...”
사실 아까 제대로 구경을 못 해 내심 궁금했지만, 미안한 마음에 어떻게 거절하나 싶어 말을 돌리고 있었다.
달칵
그때 마침 황녀가 들어왔다.
“벌써 다 와 계셨네요. 늦어서 죄송해요.”
“나나, 어서 오렴. 마침 네 얘기를 하고 있었단다. 식사 후에 리엘에게 왕성을 안내해 주는 게 어떻겠니?”
“네. 그럴게요, 할마마마. 저도 어마마마의 고국을 보여주며 자랑하고 싶었어요!”
얼떨결에 그렇게 결정되었고, 모두 모이자 식사가 서빙 되기 시작되었다.
정갈하게 플레이팅된 요리들이 코스에 따라 차례로 준비되었고 시종들은 더할 나위 없이 격식을 갖춰 시중을 들었다.
비록 경직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다들 워낙 세련된 예법을 선보였기에 혹시라도 실수할까봐 부담이 되어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도 분위기는 내내 화기애애했다.
그렇게 적당한 대화가 오가는 중에, 황녀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아참, 리엘. 내일 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