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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낚이면 좋겠어-106화 (106/134)

106. 회담(2)

2017.03.22.

아까 의논하는 자리에 없었던 건 나뿐이었으니, 대강의 일을 말해주려는 듯 했다.

"네."

황녀는 내일 있을 일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함께, 누가누가 동행할 지도 알려 주었다.

“공식적으로 회담에 참석하는 사람은 나와 아바마마, 그리고 할마마마야. 거기에 더해, 두분께서 각각 한명씩 시녀를 대동하실 거야. 믿을 만한 최측근들로 신중히 골라서 데려왔어.”

대공비 역시 세이라 대표로서 협정에 참석한다고 들은 적 있었다.

리테인과 딱 붙어 있는 건 세이라 공국이니, 이번 조약에서 국경선을 논하려면 당연한 일이었다. 전쟁으로 오락가락 하던 국경선은, 현재 양국의 강화협정 덕에 임시로 굳어져 있는 상태였다.

“두 명이나 더요? 그럼 시녀는 저까지 세 명이네요.”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황제에서 들려왔다.

“그래. 시녀를 한 명만 대동하면, 리엘 네 존재가 너무 눈에 띌 지도 모르니까.”

“아... 깊은 배려,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폐하, 참 살뜰히 챙겨주시는 군요. 며느리감이 퍽 마음에 드시는 모양입니다.”

“어머, 아바마마 내색을 잘 안 하셔서 전 몰랐어요.”

대공비와 황녀가 눈을 반짝이며 말하자, 황제는 민망한 듯이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호호호. 예뻐하는데 어찌 대해야 할지 어색해서 그러시나 봅니다.”

“......”

한술 더 떠 놀리듯 짓궂게 대공비가 말하자, 이젠 숫제 음식에만 집중하려는 듯 열심히 스테이크만 썰어댔다. 그리고 그건 황제 뿐 아니라 민망해진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작게 웃은 대공비는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폐하를 아끼듯, 그냥 그렇게 해 주면 되는 겁니다.”

음... 역시 사위 사랑 장모님, 며느리 사랑 시아버지인가?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황제 역시 살짝 미소 지으며 답했다.

조금 더 부드러워진 듯 분위기 속에, 식사는 무난하게 끝났다. 디저트까지 다 마친 후, 대공비를 제외한 우리 셋은 황제의 방으로 올라가 내일의 일을 마저 의논하기로 했다.

***

“대공비께 네 얘기를 자세히 하지는 않았다.”

“감사합니다.”

앞뒤 다 잘라먹고 말하는 황제의 말에, 황녀가 덧붙여 설명해 주었다.

“리엘, 네 일이 성공하면 내일 국왕에게 무언가 문제가 생길 거라는 뜻이니, 조약이 실제로 체결되지 않을 거야. 하지만 국왕에게 아무 타격을 줄 수 없다면 협정은 진짜 협정이 되겠지. 그러니 어떤 방향으로 회담을 이끌지 사전에 의논했어. 하지만 그쪽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아무 신경 쓰지 마.”

“네. 그럼 이제 무얼 준비해야 할까요?”

“내일 리엘 네가 계획을 실행하고 있을 때, 우리와 신호를 주고받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시간을 더 끌어 달라든가, 상대방의 위치를 바꾸어 달라든가 등등...”

“그렇겠죠?”

“어설픈 눈짓 손짓을 했다가는 티가 날 거야. 차라리 네 능력을 이용해서 텔레파시처럼 주고받는 게 어떨까?”

아... 새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전에 줄리가 했던 소리였다.

“네! 가능해요. 두 분은 저한테 생각을 전달하실 수 없지만, 제가 읽으면 되니까요! 전 전달하는 것도 가능하고요!”

단순 전달은, 강제성을 띄는 간섭이나 세뇌에 비하면 훨씬 간단한 일이었다.

“그런데 다른 대상에게 간섭을 행하는 중에 병행할 수 있겠어?”

“잠시 멈추었다가 하면 될 괜찮을 거예요. 어차피 저쪽 세뇌가 꽤 튼튼하다면 한 번에 성공 못 하니까요. 여러 번에 걸쳐가면서, 잠시 쉬었다 다시 공략하고 그런 식으로 하려고요. 그 틈틈이 상황을 전달 드릴게요.”

“그래. 좋아. 그럼 한 번 지금 해 보자.”

“네! 지금부터 마음속으로만 전할게요.”

-들리세요?

-....! 신기하네? 근데 들리긴 하는데, 내 생각이 전달되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답답해.

-잘 전달되었는지 알 수 있으시도록 제가 잘 피드백 드릴게요.

이번에는 황제를 바라보며 해 보았다.

-폐하.

-그래.

역시나... 말로 할 때와 똑같이 아주 짧고 간단한 말이 오갔다. 난 다시 황녀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지 않으면 제가 이걸 할 수가 없으니, 중간중간 저를 가끔 바라봐 주세요.

생각을 전달하거나 간섭을 행사하는 건 마주보지 않고도 가능했지만, 상대방의 생각을 읽어 들이는 건 신기하게도 꼭 눈을 마주쳐야만 했다.

눈은 마음의 창구라더니... 생각의 방향성을 만들어 주는 건가?

아마도 강제성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즉 내가 생각을 전달하는 건 강제로도 가능하지만, 저쪽의 생각이 흘러나오게 하는 건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나와 눈을 마주쳐 생각의 방향을 내게 향하도록 해야 하는 것 같았다.

-알겠어. 그런데 이거 참 유용하구나! 중간중간 상황을 조절해 나갈 때 정말 좋겠어.

신기하다는 듯이 몇 번 더 해보다가 이내 시들해져, 이제 각자 내일의 준비를 하기로 했다.

“그럼 리엘, 우린 별로 준비할 거 없으니 왕궁 정원이나 한 바퀴 돌고 오자. 내가 안내해 줄게.”

“네, 감사합니다!”

“아바마마, 저희 가볼게요!”

먼저 나간 황녀를 따라 막 나가려는데, 황제가 나직하게 나를 불렀다.

“리엘”

“네, 폐하.”

잠시 머뭇대던 황제는, 어색한 듯 다가와 다짜고짜 나에게 포옹을 했다.

“......!”

난 깜짝 놀라 굳어버렸고, 황제는 한참 말이 없더니 이윽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큰 일 해주어 고맙구나. 엔릴과의 일도 잘 해결되길 바란다.”

“폐..폐하?”

하지만 난 여전히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를 뿐이었다. 내가 너무 굳어 있자, 변명하듯 황제가 말했다.

“이렇게 해주라 하지 않았느냐.”

“네?”

무슨 말이지? 언제 뭘? 아! 아까? 대공비가 말한 게 이건가? 황제 폐하 예뻐하듯 날 예뻐하라는 게 이 소리?

근데 꼭 똑같이 하라는 뜻은 아닌 것 같은데... 역시 곧이곧대로 듣고 말하는 황제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맙...습니다.”

갑자기 겪은 일이라 당황했었지만, 이내 참 아늑하고 포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꼭 아빠 품이 이런 걸까 싶었다.

생각해보니, 한 때 아버지였던 레비넌 백작에게 기억도 잘 안 나는 어린 시절 몇 번 안겨본 게 전부였다. 주책없게도 갑자기 눈물이 나버릴 것 같았다.

“정말 고맙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황제는 나를 놓아주며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최선을 다해 무사하도록 하거라.”

***

아침에 일어나니 정신이 멍 했다. 어젯밤 잠을 잔건지 안 잔 건지도 잘 모르겠는 기분이다.

내 상태가 어떻든 간에 시간은 잘만 흘렀다.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시녀복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난, 떨리는 마음으로 황녀 전하의 방에 방문했다.

“리엘, 드디어 오늘이네. 긴장되지?”

“조금요...”

“마음 편히 먹으렴. 성공해야 한다는 부담 가지지 말고. 네가 위험해지지만 않으면 그것만으로도 성공이야.”

“하지만 실패하면, 괜히 쓸데없이 조약만 맺게 되는 거잖아요.”

“걱정 마. 아바마마께서 그렇게 쉽게 손해 보는 짓을 당할 리가 없잖아. 어디까지나 우리가 갑인 입장이라고. 계획과는 상관없이, 협정은 알아서 잘 진행하실 거야.”

“네.”

또다시 마차를 타고 한참을 이동했다. 겁 많고 소심한 리테인 국왕이 적진 한복판인 세이라 왕궁에 올 리가 없으니, 회담 장소는 양국의 접경지역인 에커 영지로 정해졌다.

에커 영지는 한참 국경이 오락가락 하다가 멈춰선 지역으로, 중간의 회담 장소 양 뒤편으로는 양국의 군대가 살벌하게 주둔하고 있다고 들었다.

일이 틀어지면 바로 자국군 쪽으로 내빼겠다는 리테인 왕의 속내가 반영된 듯 했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이동하니, 그동안 조금도 와 닿지 않던 양국의 전쟁 상황이 피부로 느껴졌다. 새삼 내가 황궁에서 얼마나 평화롭게 살아왔는지 깨달았다.

끼이익

드디어 마차가 멈춰 섰다. 다 온 건가? 새벽처럼 출발했는데, 벌써 시간은 오후가 다 되어 있었다.

점점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해 이후의 일은 잘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저 멍하니 황녀를 따라 갔고 정신을 차려 보니 어딘가 커다란 내부에 들어와 있었다.

안은 살벌하고 긴장된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회담장 내부에는 그 어떤 무기도 허용되지 않는 것인지, 황제도, 왕도 심지어 호위 기사들도 전부 빈손이었다.

서로 무장병력을 잔뜩 대동하면 황제 본인이 오러나이트인 제국 측이 당연히 유리할 테니, 리테인 왕으로서는 당연한 요구일 것이다.

수틀리면 언제든지 기사의 검을 빼앗아 자신의 목을 딸 수 있다 생각하면 오싹하겠지.

이제야 조금 침착해진 난 시선을 들어 내부의 광경을 살펴보았다. 아주 기다란 테이블 양 끝에는 리테인 국왕과 우리 쪽 황제가 멀찍이 마주보고 앉아있었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난 제국을 우리 쪽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이젠 정말 리테인이 적국으로 느껴지다니 참 아이러니하네...

슬쩍 살펴본 리테인 국왕은, 황제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게 눈에 띌 정도로 확연히 보였다.

한참 떨어져 앉은 걸로도 모자라, 국왕은 주변에 기사들을 수십 명 세워 두었다. 안전 문제에 정말 민감한 듯, 정말이지 아주 겹겹이 둘러싸여 있었다.

비록 비무장상태인 기사들이지만 그조차 없으면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지 않는 듯했다.

대충 파악을 마친 난, 왕을 유심히 몰래 살펴보았다. 국왕은 그냥 초로의 노인이었다. 그 평범한 모습은 내 긴장을 풀어주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그러니까... 저 할아버지를 공략하라는 거지?

황녀 시해미수사건 때 나에게 재빨리 사형선고를 내린 사람이라 생각하니, 죄책감 따위는 들지 않았다. 그리고 황비자리를 요구한 것도 다 저 자가 배후일 테고!

한때 내 모국이었던 나라의 왕을 직접 보게 될 날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그런데 더 대단한 사람들을 항상 보고 살아서인지, 정작 별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옆에 동석한 학자 타입의 젊은 남자가 더 눈에 들어왔다. 3왕자를 대동해 왔다더니, 저 사람인 모양이었다.

리테인은 후계자를 정하는 데 따로 법이 있는 게 아니라, 가장 우수한 자질을 가진 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게 원칙이었다. 여기에 대동한 걸 보니 아마도 3왕자가 가장 유력한 모양이었다.

그러니 만약 이 자리에서 국왕에게 무슨 문제가 생기면, 리테인이 내전에 휩싸일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3왕자가 왕궁으로 채 돌아가기도 전에, 수도 없이 많은 다른 왕자들이 이미 궁을 장악하고 있을 테니까.

그러니 국왕이 저렇게 안전 문제에 민감한 것이고... 하지만 기사의 검도, 황제의 검도 아닌 일개 시녀의 정신공격에 당할 거라고는 꿈에도 모르겠지.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회담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뭐라뭐라 떠드는 말이 드문드문 들려왔다.

“양국의 화친과 동맹을 위해...”

“그 전에, 불가침 조약에 앞서 선결되어야 할 것은 신전의 문제로...”

그 말을 배경삼아, 일단 긴장을 풀고 집중하기 위해 스스로 마인드 컨트롤에 들어갔다. 그러면서 중간중간 곁눈질로 황제와 황녀를 바라보았다.

나는 아무 때나 말을 걸 수 있지만 황제와 황녀는 그게 안 되니, 할 말이 있을 때는 내 쪽을 바라보고 눈을 마주치기로 약속해 두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차분해지자 이제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갔다. 황녀 뒤에 다소곳이 시립해 있던 나는 시선은 살짝 바닥으로 내리깐 채, 맞은편에 있는 국왕에게 정신을 집중했다.

드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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