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회담(3)
2017.03.22.
한 번에 성공할 것이라고는 기대도 안 했기에, 일단 차근차근 천천히 시도하기로 했다. 다짜고짜 수상한 말을 전달하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까.
그것도 저렇게 견고하게 세뇌의 벽이 가로막혀 있는 상황에, 그런 말을 전해봤자 내게 세뇌 당하기는커녕 누가 이런 개소리를 하냐고 벌떡 일어나겠지.
그러니 일단은 저 단단한 정신 장벽을 말없이 허무는 게 먼저였다.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천천히 야금야금 반쯤 무너트리다가, 한방에 팡 날려버리고, 그 순간 기존 이념에 상반되는 강렬하게 세뇌를 불어넣어 무너트리는 게 계획이었다.
하지만 손에 땀이 나고 입안이 바싹바싹 말라갈 정도로 애타는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리고 그러는 중에도 회담은 조금씩 진행되고 있었다.
“제국 땅에서 신전이 완전히 철수할 것을 요구하는 바이며...”
“그렇다면 제국은 리테인 내 교황청에 대해서, 교단에 대한 신성불가침 영역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줄 것을...”
“.....을 약속한다면 제국 역시 앞으로 교단을 탄압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고...”
실제로 체결할 생각은 전혀 없겠지만, 내가 작업할 시간을 끌기 위해 황제는 진지한 표정으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런데 으음... 이거 되고 있는 거 맞을까? 난 점점 불안해졌다.
하지만 겉으로는 아무 표정변화 없이 자연스럽게 황녀 전하의 빈 물잔을 채워주었다.
어쨌든 난 지금 시녀로 와 있으니, 수상해 보이지 않으려면 적당히 시중을 드는 행동도 필요한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리엘, 잘 되고 있는 거야?
눈이 마주치자 황녀가 재빨리 물어보았다.
-아직은요... 꽤 걸릴 것 같아요.
-알았어. 시간을 끌어 볼게.
덕분에 아까부터 논의하던 신전의 이야기가 더 지지부진 늘어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건 실제로도 중요한 이야기였기에, 황제는 꽤나 공들여 이 부분을 진행해 나갔다.
“내 땅에서 마녀사냥을 비롯한 그 어떤 종교행위도 불허하는 바요. 또한 제국 내에서는 사제들의 어떤 지위도 인정하지 않겠소.”
“리테인 내에서 행하는 활동에 대해 참견하지만 않는다면 그 또한 받아들이겠소. 하지만 그러려면 불가침조약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아! 저 얘기를 가만히 듣고 있는데 갑자기 깨달은 게 생겨, 황제에게 급히 말을 전했다.
-폐하. 신전의 이야기가 중심이 될 때마다, 국왕의 장벽이 단단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화제를 전환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대답 대신 황제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끝내려던 참이었는지 황제는 더 물고 늘어지지 않았고, 신전 문제는 곧 일단락되었다. 이제 회담 내용은 국경 문제로 넘어가 있었다.
저들이 열심히 국경선을 정하는 동안, 난 본격적으로 국왕을 공략했다. 지성이면 감천인지, 슬슬 무언가 반응이 왔다.
국왕은 점점 머리가 아파오는 듯 이마를 짚었다. 그런데 이게 나 때문인지, 골치 아픈 회담 내용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자국이 한창 밀리는 중에 강화를 맺은 탓에, 우리 리테인 측 영토가 많이 축소된 감이 있소.”
“전쟁 중에 굳어진 국경은 지금 이 일과는 무관한 일이오.”
“무관하다니요. 이제 양국이 남남도 아닌데, 상생 협력하여 서로 함께 발전해 나가는 게 좋지 않겠소?”
빼앗긴 땅 좀 돌려달라는 징징거림을 참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말한다 싶었다. 역시 우리 황제님은 단호박으로 들은 척도 안 했다.
“못 들은 것으로 하겠소. 황비에게 지참금을 요구해도 모자랄 판인 것을, 그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인지 모르겠군.”
새파랗게 어린 황제에게 비웃음을 당하자, 리테인 국왕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난 재빨리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심리적 동요야말로 빈틈을 공략하기에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나와 황제의 합동공격에 국왕은 이제 뒷목까지 잡으려 하고 있었다. 내 눈빛을 받은 황제 역시 계속해서 국왕을 흔들어 놓았다.
“그뿐이겠소? 황비가 내 며늘아기 될 아이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사죄의 의미로 영토를 더 할양받아도 부족하오.”
헉, 이거 내 얘기? 내 얘기를 무기로 쓸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그 황자비가 될 아이라는 게, 여기 별 존재감 없이 서 있는 나라는 건 생각도 못 하겠지?
“그 일에 대해서는 이미 공식적으로 사과 서한을...”
당황한 건 나뿐이 아니었는지, 국왕은 헛기침까지 해 대며 허둥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어진 내 공격!
잠깐이었지만 정신이 아찔한 듯, 국왕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는 게 보였다.
자의식에 배척되지 않는 자연스러운 세뇌만 당해봤지, 이런 공격은 겪어본 적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의아해 하면서도 눈치 채지 못하는 듯했다.
난 모르는 척 시치미 뚝 떼고, 차를 조르르 따르며 황녀 옆에 딱 붙어있었다. 어지러운 듯 국왕 역시 차를 마시며 주위를 환기했다.
“흠흠... 머리가 조금 아파서...”
어쨌든 그럭저럭 되어 가는 듯 싶었다. 하지만 조금 먹히는 느낌일 뿐, 드라마틱한 효과는 아직 보이지 않아 초조했다. 사실 저쪽 뿐 아니라 나 역시 점점 지쳐가는 중이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세뇌가 꽤나 굳건한지, 작업 중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도 몇 번이나 느꼈었다. 하지만 이제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기에, 난 마음을 다잡고 집중했다.
내 표정을 알았는지 황녀가 걱정스러운 듯이 바라보았다.
-리엘 괜찮아? 무리하지 마. 어떻게 할까? 시간 더 끌어? 아니면 그만 둘래?
-괜찮아요. 시간이 좀 더 필요해요.
황녀 뿐 아니라 황제에게도 같은 내용을 전했다. 그래서인지 대화는 이윽고 무역 및 관세에 대한 세세한 협의로 넘어갔다.
집중. 집중...!
다행히 점점 흐름을 타고 물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집중도도 높아졌는지, 대화소리는 거의 배경처럼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마냥 쉽지는 않았다. 처음보다 많이 허물어졌으니 뒤로 갈수록 수월해져야 하는 일이었지만, 나 또한 지쳐가기 때문에 난이도는 계속 비슷비슷했다.
잠시 머리를 식힐 겸, 황녀를 흘긋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질문이 바로 들어왔다.
-이제 거의 마지막이야. 하이라이트인 불가침조약에 대해 논하고 있어. 상황은 어때?
벌써 그렇게 시간이 흘렀나 싶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 손에는 온통 땀이 흥건했고, 대화에 귀를 기울여 보니 이제 거의 막바지다 싶었다.
이대로 포기하고 저 쓰잘데기 없는 조약에 서명을 하게 할 수는 없었다.
-조금만 더요...
-이대로 끝내도 상관없어. 잘 안 들려서 모르겠지만, 우리 쪽이 손해 볼 내용은 전부 뺐으니까.
-아뇨. 정말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알았어. 조약은 알아서 마무리 할 테니,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말고 집중해 줘.
-네.
상황은 이제 서명을 하고 국새를 찍기 직전이었다. 집중하느라 꼼짝도 못 하는 나를 대신해 다른 시녀가 잉크와 깃펜을 대령하는 게 보였다.
진짜 막판이야. 아직 반 정도밖에 못 허물었지만, 이판사판이라 생각하고 난 승부수를 던졌다.
드디어 찌르듯 강렬하게 간섭, 아니 세뇌를 시도했다. 신전을 적대하는 내용을 주로 하여 강제로 생각을 불어넣었다.
움찔
서로 전혀 다른 관념이 충돌하며 정신적 혼란을 느끼는 듯, 국왕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멀리 떨어진 내 눈에 다 보일 지경이었다.
한편으로는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이 생각이 대체 무슨 소리인가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이대로 수상함을 눈치채 무언가 행동으로 옮기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그러니 그 전에 꼼짝도 못 하도록 계속 공격해야 했다.
난 머리가 아파 죽을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사활을 걸고 초인적으로 집중했다. 같은 내용을 계속 반복하며 박차를 가했더니, 끝없는 내 압박에 국왕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
다행히 국왕의 뒤쪽에 서 있던 기사와 시녀들은 상황을 잘 모르는 듯, 펜과 잉크를 대령한 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전하, 서명을..."
국왕이 가만히 협정문만 노려본 채 움직이지 않자, 곁에 있던 3왕자가 조심스레 재촉했다.
하지만 국왕은 여전히 멍하니 굳은 채, 눈빛이 흐리멍텅해져 있었다.
이에 난 아예 대놓고 압박하기 시작했다.
-교황은 가짜다. 모든 것은 마법일 뿐이다.
-교단은 허상이다. 신전은 적이다.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단순한 전달이 아니라, 강제성을 듬뿍 띈 채 세뇌를 걸었다.
머릿속에서 연쇄적인 폭발이 일어나기라도 하든 듯, 국왕은 이제 눈을 까뒤집으며 덜덜 떨고 있었다.
지금이야, 한 번 더!
-교황은 가짜다. 신전은 적, 교단의 모든 것은 허상일 뿐이다.
“전하! 옥체 미령하시옵니까?!”
드디어 이상반응을 눈치 챈 듯, 국왕 뒷편에 서 있던 왕자가 다급히 그를 살펴보았다. 기사들은 비상사태에 다급히 경계를 강화하기 시작했고, 시종들은 허둥댔다.
아... 마지막으로 타격을 주면 정말 끝장낼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나도 이제 한계였다. 더 이상 서있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비틀 쓰러지려는데, 누군가의 손이 허리를 재빨리 받치는 게 느껴졌다.
단단한 손의 주인은 황제였다.
그 온기에 힘입어, 마지막으로 머리를 쥐어짜냈다.
-교황을 적대해라!
그 순간, 국왕은 입에 거품을 물며 졸도했다.
“전하!!”
국왕이 쓰러지자 협정은 흐지부지되어버렸다. 눈앞에서 쓰러진 왕의 모습에, 다들 비명을 지르며 난리를 피웠다. 그 소란스러움에 가려, 내 상태는 다행히 아무도 알지 못했다.
여전히 등 뒤로 내 몸을 받친 채, 황제는 담담하게 위로를 건넸다.
“연로한 몸으로 먼 길을 오느라 피곤했던 모양이오. 진심으로 유감이오. 일단은 안정이 필요할 것 같으니 오늘은 이만 하는 것이 좋겠소.”
진실을 모르는 저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저 상황을 수습하느라 바빴다. 그리고 만약 뭔가 수상함을 눈치 챈다 해도 어차피 증거도 없었다.
하지만 나도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겨우 정신만 붙들고 있을 뿐, 몸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황제가 손을 놓으면 곧바로 쓰러질 것 같았다.
다행히 황녀가 빨리 알아채, 시녀들에게 눈짓하며 명령했다.
“모두 자리를 비우고 이 일에 대해 함구하라. 그리고 너희들은 의사를 불러 와!”
“네, 전하.”
명령을 받은 시녀들이 자연스럽게 나를 양옆에서 이끌고 나갔다. 난 거의 질질 끌려가다시피 하며 회담장을 나가게 되었다.
다행히 우리 측 기사들이 떠나는 내 뒷모습을 우르르 가려 주어, 아무도 나에 대해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그게 그날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난 나가자마자 쓰러져버린 것이었다.
***
“.....음..”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좁은 천장이었다. 몸이 불규칙하게 흔들리는 것으로 보아, 마차 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리엘!! 정신이 들어!!?”
“아!!”
황녀의 말에 벌떡 일어났더니 머리가 찌르르 하고 아팠다.
“괜찮은 거야!? 한참 기절했었어!”
“여긴...”
“세이라 왕궁으로 돌아가는 길이야. 에커 영지에 남아있는 건 아무래도 불안해서”
“아...”
“머리는 괜찮아? 무리해서 그런 거지!?”
황녀의 물음에, 난 몸 상태를 한 번 점검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