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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낚이면 좋겠어-108화 (108/134)

108. 회담(4)

2017.03.22.

“.....네. 괜찮은 것 같아요.”

“정말 괜찮은 거 맞고?”

황녀가 거듭 묻는 말에 다시 한 번 꼼꼼히 머릿속을 점검해 보았다. 일단 정신은 멀쩡한 것 같았지만...

“네.”

사실 후유증이 없지는 않았다. 안개가 낀 것처럼 정신이 멍 하고,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이게 얼마나 갈 지는 모르겠지만, 당분간 두통에 시달릴 것 같았다.

“리엘!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아. 의식이 없어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끙끙 앓으면서 식은땀도 뻘뻘 흘렸어.”

“.......이젠 괜찮은 것 같아요.”

“휴... 무사히 깨어나서 정말 다행이야. 마차로 실려 가는 몇 시간 내내 의식이 없었어. 그런데 치료법을 모르니 힐링 외에는 딱히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니 얼마나 애만 태웠는지...”

“걱정 끼쳐드려 죄송해요...”

“죄송하긴!!”

아무튼 무사했다. 대충 정신을 추스른 난, 가장 먼저 능력을 점검해 보았다.

그대로일까? 아니면 빅토리아처럼 그렇게 되었을까?

“전하.”

“응?”

-그런데 국왕은 어때요?

-어? 왜 갑자기 이걸로?

-.....그냥 여전히 잘 되나 해서요.

-아... 잘 되는 모양이네.

“네...”

안타깝게도 멀쩡했다. 무리한 마당에 또 능력을 썼더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지만, 딱히 문제는 없는 듯했다.

나 생각보다 대단한가 보다. 알고 보니 막 거물급 능력자? 아닌가? 그냥 국왕이 연로해서 심리적으로 많이 약해져 있던 건가? 아니면 교황의 능력 쪽이 많이 쇠했다던가?

간섭은 모르겠지만, 읽고 전달하는 건 여전히 잘 되니 이젠 빼도 박도 못하고 리일에게 털어놓아야 할 때였다.

그래도 한 건 해냈으니 면죄부 좀 생긴 건가...?

“아무튼 국왕은... 쉬쉬하고는 있지만, 떠날 때 상황으로 보니 혼수상태에 빠진 것 같아.”

“네... 그렇군요.”

왠지 조금 미안했다. 그런 표정을 읽었는지 황녀가 단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네가 미안해 할 것 하나도 없어.”

“그치만...”

“어차피 전쟁에서 패하면 창대에 머리가 꽂힐 신세인데 뭐.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그러니 양심이니 도덕심이니 따져서 뭐 하겠어.”

“......”

정말 무서운 세상이다 싶었다.

“죽냐 죽이냐의 차이일 뿐. 엔릴이랑 결혼하면 리엘도 황족이 되니까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야. 우리의 운명은 나라의 흥망성쇠와 함께 하는 거니까.”

“그렇군요... 아, 그럼 이제 황비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곧 끌어내릴 수 있을 거야. 혼란한 시기를 틈타 바로 리테인과 전쟁을 할 테니까. 지금 바로 공격하는 게 효과적이지. 저쪽에서 왕위 쟁탈전이 시작되면 내전까지 일어날 수도 있거든.”

리테인이 멸망하고 나면 황비 하나 처리하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전쟁 중에 고국과 내통했다는 혐의를 씌워 반역죄로 처형해도 되고, 꼭 그게 아니더라도 아무거나 다른 죄목을 만들어 쫓아내도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전쟁이요? 벌써요?”

“물론이지. 이미 여기 오기 전에 준비는 차근차근 해 놓으셨을 거야.”

“하지만 제가 실패했으면 어쩌려고요...?”

“어마마마랑 내가 알아보던 이번 프로젝트는, 사실 여러 계획안 중 하나에 불과했어.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실행가능성을 거의 염두에 두지 않았던 일이었지.”

“아...”

“수도원에서 정말 누군가를 빼내 와, 그 아이를 활용해 무언가를 성공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

그저 교단의 비밀을 파헤친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던 일이,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았다.

생각지도 못한 나라는 존재 덕분에... 빅토리아를 데려온 것만 해도 대단한 소득이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불가능했을 일을 가능하게 한 건 나로 인해서였으니까.

“그렇군요...”

“네 일과 상관없이, 원래 동부와 북부의 일을 정리하면 리테인과 전쟁을 재개할 생각이셨어. 다행히 지금 실로엔 전쟁이 거의 마무리 단계거든.”

“전혀 체감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지금도 제국 어딘가에서는 전쟁이 진행 중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다. 멀리 떨어진 곳이라 아무 위기감 없는 상태였지만, 황제폐하는 내내 신경 쓰고 계셨겠지...

“그래도 다행이지. 리테인이 흔들려 주면 전쟁이 훨씬 수월해 질 테니까. 원래 아바마마께서는 전쟁을 신속히 끝내기 위해 친정까지 고려하고 계셨어. 하지만 리엘 덕분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정말 고마워.”

“제가 뭘요...”

“아냐, 정말이야. 리엘이 아니었으면 진짜 그랬을지도 몰라. 지지부진 항전할 틈을 주지 않고 재빨리 쓸어버리기 위해 진지하게 고심하고 계셨거든. 무력의 상징과도 같은 아바마마가 직접 원정에 나서면, 군사들의 사기진작에 그보다 좋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아... 하지만 황후폐하께서 아주 싫어하시잖아요.”

“물론이지. 나도 싫고. 하지만 황비 사건이 터진 이후에는, 꼴 보기 싫은 그 여자를 빨리 치워버리고 싶은 마음에 솔깃해 하시는 것 같았어.”

하지만 나머지 가족들이 결사반대한 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저도 반대예요.”

“정말? 아바마마가 들으시면 기뻐하시겠다! 아무튼, 어마마마는 절대 못 보낸다며 아예 드러누우셨지. 황비 좀 오래 놔두면 어떠냐고 말이야.”

그 말에 나는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튼 그러던 중 일이 이렇게 진행된 거구나... 그리고 정말로 성공했고.

그런데 정말 이렇게 보란 듯이 해낼 줄이야... 예상 외로 너무 쉽게 풀려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이 정도일 줄이야...

그런데 늘 그렇지만, 일이 너무 잘 되어 가면 오히려 불안하단 말이야... 마치 폭풍 전야 같이...

“리엘, 진짜로 고마워. 정말 큰 도움이 되었어. 덕분에 일이 훨씬 수월해진 셈이야. 아바마마께서도 정말 고마워 하셨고...”

황녀는 내게 진심을 담아 말했다.

“휴, 아니에요. 제가 끼친 민폐를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어 정말 기뻐요. 그나저나 나라를 다스린다는 게 정말 힘든 일이군요. 골치 아픈 일투성이겠어요.”

“그치? 리엘도 고생 좀 할 거야.”

“네? 제가요?”

“응. 엔릴이 분가한다던데? 왕국 하나 독립시켜 나가겠다고.”

“네에에?”

“왜 그렇게 놀라? 너랑 전에 다 얘기 했다던데...?”

“네? 언제요?”

아! 설마. 그때 소궁에서 장난처럼 말하던... 왕비가 더 그럴싸해 보인다는 얘기? 미치겠네... 그냥 장난이었는데!!

“신혼인데... 리엘도 이왕이면 독립하는 게 좋잖아.”

아니 무슨 궁 하나 만들어 주는 것도 아니고, 영지 하나 내려 주는 것도 아니고, 신혼부부라고 나라를 하나 새로 주면... 시아버지가 황제 아닌 사람은 결혼도 못 하겠다! 진짜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스케일이!!

“아, 그게...”

내 속도 모르는 황녀는 방긋방긋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돌아가면 결혼준비와 동시에 제왕학도 배우려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거야.”

“제, 제가요? 근데 왜 그걸 제가...?”

“당연하지. 엔릴을 뭘 믿고... 저 녀석은 그냥 몸 쓰는 일에나 부려먹으면 돼.”

“하지만...”

“고생 좀 할 거야. 그래도 리엘은 똑똑하니까 힘내. 아바마마도 나도 다 겪었던 일이니까, 뭐 힘든 거 있으면 와서 얼마든지 털어놓고.”

“..........”

“리엘?”

“..........”

지금 대체 무슨 소리를 들은 건가 그저 멍했다. 리일과 앞으로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데, 김칫국도 정도가 있지 싶은 생각이었다.

***

난 세이라 왕궁에서 푹 쉬며 회복한 후 제도로 서둘러 출발했다. 내 컨디션이 걱정된다며 모두가 말렸지만, 난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올 때처럼 갈 때도 어마어마하게 오래 걸렸다. 공식 행렬이라는 건 굉장히 귀찮은 일이었다.

황궁으로 향하는 내 마음은 정말 복잡했다. 리일이 보고 싶기도 하면서, 보기가 두렵기도 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털어놓아야 할까?

일단 신분 문제는 다 알고 있으니 다행인데... 역시 제일 중요한 건 이 특수능력이랑 과거의 일이겠지.

황제폐하가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가 주셨다고 해서 리일도 그러란 법 없었기에 난 점점 초조해졌다. 마차가 제도에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미친 듯이 두방망이쳤다.

“리엘!!!”

황궁에 오자마자 누구보다 시끌벅적 나를 반긴 사람은 역시 리일이었다.

“리일!”

“보고 싶었어!!”

“저도요...”

고작 열흘 남짓 떨어져 있었는데 정말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었다.

“엘, 어서 오세요. 나나와 리엘도 고생 많았어. 그런데 리일, 아버지랑 누나는 보이지도 않는 거니?”

역시나 나밖에 모르는 리일답게, 황제는 쳐다보지도 않다가 황후한테 한 소리 들었다.

“새삼 뭘 그러세요. 제가 그렇죠 뭐. 아하하하”

“리일...”

아무튼 거창한 행사 없이 우리는 간단한 인사와 함께 궁으로 들어갔다.

떠날 때는 그렇게 으리번쩍하게 출발했는데, 조약이 무산되어서인지 아니면 황제의 성격 탓인지 매우 조용한 귀환이었다.

안 그래도 무척 피곤했기에 난 내심 잘됐다 싶었다.

“그럼 벌써 밤이 늦었으니, 회포는 내일 풀고 이만 흩어지자꾸나.”

“네. 아바마마, 어마마마 안녕히 주무세요! 누나도!”

“황제 폐하, 황후 폐하. 평안한 밤 보내시옵소서.”

“쿡쿡... 리엘, 언제까지 그럴 거야? 이제 가족 될 건데... 왜 이렇게 딱딱해?”

리일은 절대 모르겠지? 이제 곧 가족이 될 거라는 그 말이, 지금 내 마음을 끝없이 무겁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그래, 리엘. 이제 편하게 대할 때도 되지 않았니? 정 불편하면 차차 나아지면 되겠지만... 아무튼 그럼 다들 내일 보자꾸나.”

황후 역시 아무것도 모르는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

무리해서 능력을 쓴 여파에 여행의 피로가 겹쳐서인지, 방으로 돌아간 난 기절하듯 바로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눈뜨자마자 가장 먼저 불려간 곳은 황제의 내실이었다.

“미안하구나. 더 좋은 걸 해주고 싶었다만, 네 일 자체가 비밀이기에 드러내놓고 치하해 줄 수가 없구나.”

그 말과 함께 나에게 주어진 것은 귀족 작위였다. 무려 애스틴 백작, 리엘 폰 애스틴. 평민고야였던 내가 제국의 백작이라니...

졸지에 한때 아버지였던 레비넌 백작보다도 높은 지위에 올라버렸다. 제국의 백작위는 소국인 리테인에 비할 바가 아니었으니까.

나 정말 인생 역전했구나.

“감사합니다, 폐하”

남몰래 이루어진 수여식이었기에 거창한 의식 대신, 황제폐하의 내실에 단둘이 마주앉아 조용히 전달받는 걸로 끝냈다.

하지만 그런 가족적인 분위기가 오히려 더 좋았다. 정말 테두리 안에 들어온 기분이었으니까.

“그리고 황후가 네 거처를 옮기는 게 좋겠다고 하더구나.”

“네?”

“결혼을 앞두고서 계속 네가 엔릴의 시녀로 있는 건 레이디의 명예에 좋지 않다고 말이다.”

“아...”

“마탑의 연구원 자리를 마련해 놓았다더구나.”

이대로 시녀일을 계속 하면, 마치 곁에 두고 가볍게 끼고 놀던 것으로 비춰질까 우려하는 듯 했다.

연구원은 숙소도 제공받으니, 나로서는 굉장히 좋은 조건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받기만 해서 정말 죄송스러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리일과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마당에 결혼 준비라니...

난 조심스럽게 폐하께 물었다.

“저, 혹시 황후폐하께서는 저에 대해 모르시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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