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회담(5)
2017.03.22.
“능력이라면 그녀도 이제 알고 있다. 돌아와서 다 말해주었다.”
“......”
그걸 알고도 결혼을 엎지 않으신다니, 사실 조금 놀랐다.
“내가 잘 설명해 두었다. 엔릴과 내 판단에 맡긴다고 하더구나. 물론 처음에는 조금 불편해 할지도 모르겠지만 너 자체를 보면 반대할 이유는 없겠지.”
“....감사합니다. 저 그런데...”
“네가 걱정하는 모든 바를 전부 말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놀라서 그런지, 아직 거기까지는 연상하지 못하는 듯싶더구나. 그 능력이 꼭 그것과 연관되는 건 아니니까.”
마음을 읽는 능력은 아무래도 내가 아닌 황제 쪽인 것 같았다. 눈빛만 봐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다 알아들으시다니, 정말 신기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하온데...”
신분을 모른 척 했던 일은 왜 이야기하지 않은 건가 싶었다. 두 분 서로 비밀 같은 거 안 만드실 줄 알았는데, 굳이 내 일을 숨겨주신다는 게 이상했다.
역시나 의아해하는 표정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는지, 묻지 않았는데도 황제는 답해 주었다.
“디트는, 황후는 나보다 그런 일에 민감하다. 누군가를 속인 채 감정을 위장하며 접근하는 행위를 아주 싫어해.”
“하지만 왜 저를 위해 그렇게까지... 누구보다 사랑하시는 황후폐하이시지 않습니까. 나중에 혹여 언짢아하실 수도 있습니다.”
“너에게 빚을 졌으니까.”
“......”
“잘 해결되기를 바라겠다.”
“.....고맙습니다.”
“도와주고 싶다만, 엔릴에게 털어놓고 이해 받는 건 내가 어떻게 나서서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구나.”
“말씀만이라도 너무 감사해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네.”
“너는 너 자체니까, 엔릴과 잘 안 된다고 해서 모든 걸 놓아버리지는 않았으면 하는구나.”
작위, 그래서 서둘러 챙겨주신 거였구나. 내가 돌아오자마자 리일에게 털어놓을 생각인 걸 아셨기에...
그와의 모든 것이 망가질 지도 모르니, 최소한 스스로를 지킬 수단을 만들어 주신 거였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폐하. 언제나 따뜻하게 대해 주셔서... 그동안 정말로 많이 고마웠습니다.”
마치 끝을 말하는 듯한 내 인사에 황제는 살짝 안색을 흐렸다.
황제의 내실을 나선 난, 이제 드디어 리일을 찾아갈 결심을 했다.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꺼내면 좋을지 고민이 되어, 어젯밤 내내 잠을 뒤척였다. 밤새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았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솔직하게 전부 다 털어놓는 것.
언제 어떻게 눈치 챘는지, 그러면서도 왜 모른 척 했는지,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행동했는지, 그때의 내 상황과 절박했던 마음과 함께 모두 말할 생각이었다.
물론 그게 면죄부를 줄 순 없겠지만, 적어도 왜 그랬는지 변명거리는 되겠지...
하지만... 겁이 났다.
이해해 줄까? 자신의 머릿속을 읽으면서 그에 맞게 이리 저리 대응해 왔다는 걸 알면... 과연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을까?
나중에야 거의 안 그랬다 하지만, 처음의 행동들은 정말 변명의 여지가 없는데...
차라리 진즉 말할 걸. 이런 건 오래 지나면 지날수록 풀기 어려운 일인데... 영원히 덮어두고 싶었던 이기적인 마음에 여기까지 와 버렸다.
사실 못돼 처먹은 나는, 비올레티에게 들키지 않았다면 평생 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황녀에게 먼저 능력을 털어놓은 것도, 적에게 이미 들킨 이상 아군에게 숨겨 봐야 소용없다는 판단에서였으니까.
바보 리엘. 어쩌자고 그랬어. 영원한 비밀은 없는 건데...
“휴......”
땅이 꺼지겠다 싶을 만큼 깊은 한숨이 끝도 없이 나왔다.
그래도 더 늦기 전에 말해야지...
가슴에 돌이라도 얹은 듯 마음이 무거웠다. 그리고 머리는 더더욱 무거웠다. 아직도 후유증이 남은 건지, 두통이 심해 자꾸만 생각이 뚝뚝 끊기며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마음과 머리에 이어, 심지어 발걸음까지 무거웠다.
하지만 난 본드라도 발라놓은 듯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발걸음을 억지로 떼며, 리일의 방을 향해 걸었다.
그런데 그때,
“레이디 애스틴”
시녀 한 명이 조용히 다가와 나를 불렀다.
“네?”
몇 번 본 적이 있는 낯익은 얼굴이다 싶었는데, 황후폐하 처소의 시녀였다.
“황후폐하께서 급히 찾아계시옵니다.”
“폐하께서요?”
나를 갑자기? 무슨 일이지? 설마 리일의 일로?
머릿속에 온통 그 걱정밖에 없어서 그런지, 모든 게 그쪽으로 연관되었다.
“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
리일이고 황후고 사실 누굴 만날 컨디션이 아니었지만, 난 어쩔 수 없이 안내에 따라갔다.
똑똑
문 앞까지 안내해 준 시녀는 살짝 목례 후 자리를 떴다.
“리엘입니다.”
“어서 오렴. 피로는 좀 풀렸니?”
“네.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 앞으로 더욱 눈을 마주치지 않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폐하.”
“..........”
“미리 직접 말씀드리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사실 좀 많이 충격적인 이야기라, 당장 뭐라 해 줄 말이 생각나지 않는구나. 그건 일단 차차 논하기로 하고, 지금은 다른 중요한 일이 있어서 불렀단다.”
“네, 폐하.”
“리엘 네가 말했던 일을 그동안 내가 알아보고 있었단다. 그이가 너무 바빠서 나에게 부탁했었거든.”
“네? 폐하, 실례지만 무슨 일을 말씀하시는지요.”
“황비를 눈여겨 달라 부탁하지 않았니?”
아...! 그 일이 황후한테까지 떠넘겨진 줄 몰랐다. 나도 이제 저 두 분에게 떠넘기고 비벼대는 사람 중 하나가 된 모양이었다. 휴, 나까지 이렇게 귀찮게 굴어도 되나...?
“ 감사합니다. 바쁘실 텐데 그런 일까지...”
황비가 비밀을 알아 프로젝트를 훼방놓을까봐 주시하고 있던 것이었는데, 일단 일을 성공시키고 나니 마음이 놓여 잠시 잊어버렸다.
어? 그런데 다 끝난 마당에 왜 이제 와서? 내 눈빛에서 의문을 읽었는지, 황후가 이어 설명해 주었다.
“물론 리테인 일을 성공시켰다는 건 며칠 전 미리 급보를 받아 알고 있었어. 그래서 나도 황비를 더 이상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단다.”
“네.”
“그런데 그러던 중 뭔가 이상한 보고가 들어오더라.”
“네?”
“꼭 리테인 일에 관해서 뿐 아니라 황비 자체를 주의해서 나쁠 것 없다 생각해서, 일단 자세히 알아보라고 했지.”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줄리라고... 알아보니 네 친구라던데, 맞지?”
“네? 줄리요? 네, 맞아요! 그런데 줄리가 왜...”
갑자기 불안해졌다. 여기서 줄리의 이야기가 왜 나오는 거지?
“우선 놀라지 말고 들으렴.”
“네...”
“황비의 행적을 조사하던 중에...”
이어지는 황후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주, 줄리가 납치되어 강제로 억류되어 있다고요?”
황비도 비올레티도 제정신인가? 줄리는 황녀의 시녀로 제국의 귀화하기로 약속된 몸인데 어떻게 이런 짓을..!?
리테인에 다녀온다고 한 지가 언제인데, 왜 이렇게 안 오나 싶었더니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 아니 그보다 대체 왜?
“그게 네가 돌아오는 동안 있었던 일이야. 그리고.. 비올레티가 지금 황비의 손님으로 와 있어.”
“네에? 어떻게요?”
분명 황녀가 비올레티의 신상에 대해 알리며 조취를 취해 놨을 텐데...?
“황실이 보증해 주는 신분 자격으로 어떻게든 들어온 모양이야. 황비가 수를 쓴 거겠지.”
“아...”
“내가 미처 언질을 받지 못해 비올레티를 경계하는 걸 놓쳐버렸구나... 그이에게 전해 받은 이야기는, 황비가 리테인 프로젝트에 대해 무언가 눈치 채지 않게 주시해 달라는 거였거든. 그리고 난 사실 거기에 리엘 네가 관련되어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고...”
나에게서 황녀, 황녀에게서 황제, 황제에게서 황후로 말이 넘어가다 보니, 어느새 처음과는 조금 다른 양상으로 일이 진행된 듯싶었다.
비올레티와 황비가 신경 쓰인다는 말이, 어쩌다보니 프로젝트의 기밀을 주의해 달라는 것으로 바뀐 것이었다.
하긴, 심지어 나조차도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내 능력을 황후에게 숨겼으니, 황후가 엉뚱한 곳에 초점을 맞춘 것도 어쩔 수 없었다.
“이만큼 신경써 주신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합니다, 폐하.”
“휴우... 아냐. 아무튼 그래서 좀 뒤늦게 알게 되었단다. 일이 성공했다는 연락을 받고는 마음을 잠시 풀어놓는 바람에 말이야. 벌어진 지 얼마 안 된 일이기도 하고... 게다가 정식으로 시녀를 들이는 건이라면 모를까, 고작 손님을 초대하는 일까지 나에게 일일이 윤허를 받을 필요는 없거든... 따로 주시하라고 해 두지 않았으면, 이마저도 놓쳤을 거야.”
“괜찮습니다. 알아봐 주신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합니다.”
“그래... 그보다, 당장 구해올까 하다가 우리가 눈치 챘다는 걸 저들이 알면 오히려 일이 더 복잡해 질까봐 일단 두었단다. 무슨 짓을 꾸민지는 모르겠지만 다짜고짜 나섰다간 네가 대응하기 더 곤란해질 수 있으니까. 그래서 다른 곳으로 끌고 가려 하지는 않는지 몰래 감시만 하고 있었어. 비올레티도 그대로 두었고.”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체 무슨 일을 계획하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네 친구를 납치한 걸 보니 너에 대한 일 같은데...”
“.......저도 잘 모르겠어요.”
나 역시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한가하게 이유를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당장 어떻게든 해야 했으니까.
“일단 어떻게 하는 게 좋겠니?”
“음...”
“역시 데려오는 게 좋겠지?”
꿍꿍이가 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둘 수는 없었다. 난 자꾸만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야 할 것 같아요.”
“그래 바로 사람을 보내 해결해 둘 테니, 일단 기다리고 있으렴.”
“감사합니다. 폐하.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줄리를 무사히 데려오고 난 후에는, 비올레티도 어떻게든 트집 잡아 내보내는 게 좋겠구나.”
황비의 손님을 황후가 억지로 내쫓다니, 썩 보기 좋은 모양새는 아닌 일이라 차마 부탁하지도 못 하고 있었다. 그런데 먼저 저렇게 말씀해 주시니 너무 죄송하고 감사했다.
“폐하,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너무 죄송하고요...”
***
밖으로 나온 난 한참을 고민에 휩싸였다.
황비와 비올레티가 그동안 잠잠했던 이유가 이거였나? 무언가 일을 꾸미는 걸 들키지 않으려고?
하지만 줄리를 왜...? 무슨 짓을 한 거지? 무엇을 알아내려고?
줄리를 족쳐봐야 나오는 것도 없을 텐데...? 대체 뭘 알아낸 거지?
어차피 줄리는 내가 리일의 정체를 알고도 시치미 뗐던 걸 모르는데... 줄리가 아는 거라고 해 봐야 내 능력...
“...!!!”
설마!? 내 능력에 대해 증언을 받아내려고 납치한 건가?
너무 놀라서 그런지, 머리가 띵 하며 어지러웠다. 정처 없이 방으로 돌아왔는데, 문 앞에 누군가 서있는 게 보였다.
“어서 와. 오랜만이야.”
“비올레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