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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낚이면 좋겠어-110화 (110/134)

110. 덫(1)

2017.03.22.

“황비 전하께서 네게 전하라는 말이 있어서 왔어.”

“.......”

“무시하고 싶겠지만 듣는 게 좋을 거야. 여기서 나눌 말은 아닐 듯한데, 안으로 들어가는 게 네게도 좋지 않겠어?”

그녀의 말대로 무시하고 싶었지만, 저쪽은 줄리를 인질로 잡고 있는 상태였다. 황후폐하께서 처리해 주시겠다고 했지만, 그건 바로 조금 전의 일. 아직 안심할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다 싶어, 난 주변을 살짝 둘러본 후 비올레티를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무슨 말인지 안 들어 봐도 알 것 같네. 또 무언가 더러운 수작질을 꾸며 놓고 협박을 하는 거겠지.”

하지만 네 마음대로 되지는 않을 거야...!

비올레티가 내 능력을 알고 있다지만, 나 역시 그녀가 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니 피차일반이었다.

“어머, 성급하기도 해라. 난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는데.”

“용건이나 말해. 우리가 이런 대화 나눌 사이는 아닐 텐데?”

내 능력을 경계하는 건지, 비올레티는 아까부터 바닥에만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하긴, 나도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서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백작가 아가씨라 생각했던 네가, 알고 보니 내 자리를 대신 차지했을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으니까.”

“......”

“그렇게 꼬인 우리의 운명이 이렇게 다시 만나다니, 정말 신기하지 않아? 이 먼 타국에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아차, 넌 곧 황자비가 된다며? 소문이 파다하더라.”

“그래서? 네가 무슨 상관인데?”

“인생 역전했는데, 내가 축하 정도는 해 줘야지.”

“필요 없어.”

“그래. 필요 없을 거야. 그 인생 역전, 성공하지 못할 테니까.”

“...뭐?”

“여기까지 얼마나 애써 기어 올라왔을 텐데, 내가 그걸 산산조각 내 줄 거거든.”

“꿈도 야무지구나.”

저 말에 찔끔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스스로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인지, 내 핀잔은 그다지 힘이 없었다.

“내가 빈말하는 걸로 보여?”

“무슨 생각인지는 뻔히 알지만, 소용없을 거야.”

“정말 그럴까? 정체를 알고도 모른 척 유혹했다는 걸 황자 전하께서 아시면, 과연 그래도 너를 버리지 않을까?”

“줄리를 협박해 뭐라도 들었나 본데, 그래봤자...”

“그래봤자가 아냐. 네가 제국에 온 이후의 모든 행보를 낱낱이 알고 있으니까. 특히 황자전하와의 일은 빠짐없이 파악하고 있어.”

“......”

“못 믿겠으면 하나씩 짚어 줄까? 어디서 어떻게 만났고, 언제 정체를 알게 되었고...”

“됐어.”

줄리를 닦달해서 알아낸 걸 거야...

처음에 기사님인줄 알고 축제를 보러 나갔던 것까지 다 얘기했으니, 줄리는 내 연애사를 전부 꿰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정체를 알게 된 시기는 줄리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정말 궁금하지 않아? 네가 전하의 정체를 안 시점이, 줄리가 말한 때와도 다르다는 걸 내가 아는데?”

“....!!”

뭐라고? 대체 비올레티가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무언가 이상했다. 하지만 난 불안한 표정을 내색하지 않은 채 차갑게 말했다.

“마음대로 해 보라니까.”

“자신만만하구나. 사랑이 꽤 깊은 가봐? 그 정도로는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나 보네? 하지만 이건 어때?”

점점 불안해졌다.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비올레티의 미소는 더욱 진해졌다.

“알고서도 시치미 뗀 정도가 아니라, 네 능력을 이용해 전하의 생각을 고스란히 읽어가며 농락했다는 걸 아시게 되면?”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신분을 알고 있던 점, 그리고 내 능력. 두 가지를 하나씩 떼어 놓고 보면, 그리 큰 일은 아니라 이해받을 법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두 개를 합쳐놓으니 그 의미가 남달랐다. 마치 내 행동이, 훨씬 더 악한 의도를 가지고 한 것으로 비춰지는 것 같았다.

두려움에 심장이 쿵쿵 뛰고, 머리가 찌르르 울리듯 아파왔다. 점점 정신이 아찔하게 멀어져 가는 기분이었다.

아직 후유증에서 채 회복하지 못한 내 머리는 정상이 아니었다.

안 돼... 정신 차려야 해.

“것 봐. 괜찮을 거라 자신할 수 없지?”

나 역시 리일에게 털어놓기 가장 망설이는 이유가 저 두 가지의 시너지 효과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걸 내 입도 아닌,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듣게 된다면...?

그래서 줄리를 납치한 거야? 증인으로 삼으려고...?

“......”

대답은 못 했지만, 침묵만으로도 내 대답은 충분했다.

“비올레티, 나한테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왜 이렇게 끝까지 못 살게 구는 거야!! 내가 너에게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정말 몰라서 물어?”

“.....”

“모르면 그냥 죽어. 난 널 철저히 망가트리고 싶어.”

“......”

“하지만 특별히 모른 척 해줄 수도 있어.”

“......뭘 원하는 거야.”

“단도직입적이라 좋네. 나도 돌려 말하지 않을게. 네가 내 말대로 한 가지 일만 해준다면, 모른 척 해 줄 수 있어.”

비올레티가 대체 무슨 말을 할지 겁이 덜컥 났다. 그녀의 입술만 빤히 바라보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다음에 나올 말을 기다렸다.

“아, 오해할까봐 그러는 건데, 이건 내 지시가 아니라 황비 전하의 지시야. 요즘 불안증이 심해지셨는지, 유난히 서두르려고 하시더라고.”

리테인 국왕의 일 때문이겠지. 아직은 쉬쉬하며 안 알려졌지만, 황비는 이미 들었을 것이다. 내가 돌아오는데 며칠이 걸렸으니, 그 사이 리테인 측에서 먼저 급보를 받았을 게 분명했다.

국왕을 무력화시켜 놓은 덕에 우리가 한시름 놓은 만큼, 황비는 반대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고국이 곧 내전에 휩싸일 거라는 걸 예상할 테니까.

만약에라도 리테인이 멸망하면 그녀는 말 그대로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는 것이다.

황비가 대체 무슨 짓을 꾸민 걸까?

내가 한참 머리를 굴리는 사이, 비올레티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건넸다.

“...이게 뭐야?”

“황비 전하께서 원하시는 바야.”

“....?”

내가 상황파악을 못하고 멍 하니 들여다보고 있자, 비올레티가 비웃었다.

“풋... 순진한 척 하긴. 뭔지 감이 안 잡혀?”

비올레티의 핀잔에 난 조심스럽게 병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해 보았다.

이 냄새는....!

극소량을 희석해 사용하면 마취효과가 있어, 리테인에서는 치료용으로 간간히 쓰이는 약이었다.

하지만 희석되지 않은 원액으로는 꽤 치명적인 독이었다. 단숨에 마비시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경악한 내게 비올레티의 빈정거림이 들려왔다.

“우리 중에서 황후폐하께 접근할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잖아.”

“...뭐?”

“네까짓 게 감히 황후 폐하께 독대를 청할 수는 없겠지만, 폐하께서 황자 전하의 처소에 오셨을 때를 노리면 되지 않겠어?”

“......설마...”

“차에 타라고. 향이 티 나지 않게 적당한 차로 골라서.”

“.....!!! ”

황후폐하를 독살할 생각인 거야? 나를 이용해서?

“그것만 성공하면 모른 척 눈 감아 주신다고 하셨어.”

“미쳤어?”

“황자비, 되고 싶지 않아? 너 대신 다른 하녀에게 뒤집어씌울 준비는 해 두었으니 뒷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닥쳐!! 어떻게 이런 짓을 요구해!”

미친 짓인 건 둘째 치고, 황비는 바보인가 싶었다. 아무리 자기 입지가 좁아질 위기에 처했다 해도, 어떻게 황후를 제거할 생각을 하지?

그런다고 황제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혹시... 비올레티가 부추긴 건가?

고국이 위태로워지면 자기 지위도 보장할 수 없다는 그 불안감을 이용해서 조장했을지도... 황후가 없어져야 황제의 사랑을 얻을 기회가 생길 거라고.

내 약점을 쥐고 있으니 나를 이용할 수 있다고 말이야. 그리고 죄는 나에게 다 뒤집어씌우면 된다고 속살거렸겠지.

하지만 비올레티가 이렇게 뻔히 보이는 수작을? 내가 그렇게 쉽게 넘어갈 리가 없잖아.

머리가 너무 복잡해 폭발할 것 같았다. 머리가 어질어질하며 시야는 점점 가물가물해졌다.

“머리 굴리느라 바쁘구나. 선택은 네 몫이야. 어떻게 할래?”

정말 내가 그 정도로 이기적일 거라고 생각한 걸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누구보다 사랑하는 어머니를 빼앗아가면서까지 옆자리를 차지하려 들 거라고?

아무리 내가 황자비 자리에 눈이 멀었다 한들, 바보가 아닌 이상 토사구팽 당할 거라는 걸 모를 리 없잖아. 그리고 비올레티도 그걸 뻔히 알 텐데?

아! 이게 함정의 전부가 아닌 거야.

“......”

함정이든 아니든, 절대 그런 짓을 할 수 없었다. 보나마나 내가 다 뒤집어쓰고 끝장날 게 뻔하기도 했고, 그렇지 않다 해도 황후폐하한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럼 대체 무슨 꿍꿍이지? 혹시 나를 이용해 황후폐하를 독살하고, 그걸 황비에게 뒤집어씌울 생각인가? 비올레티도 황제 폐하의 옆자리를 노렸으니?

아냐, 그렇다고 치기엔... 황비가 혼자 죽지는 않을 텐데? 무엇보다 비올레티도 무사하지는 못할 텐데...? 자신에게 불똥 튀지 않도록 나에게 결백을 증언하라고 시킬 생각인 걸까?

그리고 황비가 몰락하면 나한테 붙으려고? 내 비밀을 아니까 평생 쥐고 휘두를 수 있을 거라 생각할 지도...

하지만 황비도 나에 대해 다 알고 있다면 비밀을 쥐고 있는 의미가 별로 없어. 그럼 황비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그리고 내가 자신을 살인멸구 할 거라는 생각을 못 할 리가 없는데... 비올레티가 그렇게 순진하지는 않으니까.

아... 머리가 너무 아파서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도 잘 모를 지경이었다.

어쩌지? 당장 거절하면... 분명 가만있지 않겠지? 일단 수락하는 척 하고 황후폐하께 털어놓아야 하나...?

아냐, 뭔가 이상해. 어차피 비올레티도 내가 다 간파할거라는 걸 알 텐데...? 게다가 능력에 대해 모르지도 않는데, 그렇게 쉬운 수를 쓸까?

아무리 내 시선을 피하려고 노력한다 해도, 속내를 단 한순간도 들키지 않으리라는 장담은 없잖아.

모르겠어. 생각을 읽을 수 없다는 게 이렇게 답답한 거였구나. 눈, 눈을 마주치면 되는데...

하지만 비올레티의 시선은 바닥에서 꿈쩍도 안 했다. 억지로 고개를 들게 해 봐야, 눈을 감아버리면 그만일 테고...

그리고 듣는 다 해도, 그게 진실일지 알 수가 없었다. 지난 번 별궁 사건 때처럼, 일부러 혼선을 주기 위해 흘려 넣은 정보일 수도 있으니까.

점점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어디까지가 계획이고, 어디까지가 함정이지? 뭐가 진짜지?

잠깐, 내가 왜 이런 걸 고민하고 있는 거지? 얘한테 강제로 간섭을 행사해서 말하게 하면 일이 간단한데?

나 정말 바보인가? 머리를 너무 혹사해서 정말 지능지수가 떨어진 걸까? 아무리 능력을 들키지 않으려 몸을 사려온 게 습관이 되었다 해도, 어떻게 이런 당연한 것도 생각해내지 못했지...?

사실 그동안은, 혹시라도 비밀이 새어나가 리테인 쪽 프로젝트를 망칠까봐 이들에게 무언가 시도할 생각도 못 했었다. 하지만 이미 일이 끝난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자의식에 반하는 세뇌는 불가능하지만, 잠깐의 강제력 행사 정도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리엘, 선택해.”

“내가 그런 짓을 할 것 같아!!?”

믿는 구석이 생기자 자신감이 충만해졌다. 자, 이제 비올레티가 방심한 틈에 간섭을...

“그래. 그럴 줄 알았어. 다행이다.”

하지만 들려오는 비올레티의 대답은 의외였다.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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