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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낚이면 좋겠어-111화 (111/134)

111. 덫(2)

2017.03.22.

“수락하는 게 이상한 거 아냐? 이런 멍청한 짓거리를 말이야. 그리고 솔직히 나는 네가 이 제안을 거절하는 게 나아.”

난 잠시 멈추었다.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이게 전부가 아닐 거라는 불길함이 스쳤기 때문이다. 그럼 지금 비올레티에게 괜히 무슨 짓을 해서 내 능력을 전부 까발리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어째서...?”

“내가 그걸 말해줄 이유는 없잖아?”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나도 하나는 확실히 알아. 비올레티 너 역시 황비를 이용하고 있다는 걸. 지난번 별궁 사건 때도 그랬고.”

“하! 그래서? 네가 내 약점이라도 쥐고 있다는 거야?”

“아니. 그걸로 널 휘두를 거라고는 기대도 안 해. 증거도 없고.”

솔직히 말하면 황비 쪽에 기대를 안 하는 것에 가까웠다. 머리가 너무 나쁜 황비는, 내가 설명해 줘도 비올레티가 자기를 어떻게 이용했는지도 이해를 잘 못할 것 같았다.

지금 일 역시 뭐가 진짜인지 나도 아직 다 파악이 안 돼서 혼란스러울 정도인데, 황비가 무슨 수로 이걸 간파해서 비올레티가 자길 조종했다고 알아채겠는가. 말해 줘도 모르겠지.

비올레티도 같은 생각인 건지 순순히 시인했다.

“이미 안다니 더 숨길 것도 없지. 그래, 꼭 너 같은 능력이 있어야 사람 마음을 주무를 수 있는 건 아니거든.”

“......”

“네 거절은 잘 알아들었으니까 이만 가 봐.”

이렇게 쉽게 끝내다니 무언가 수상했다. 하지만 미적대봐야 뭘 더 말해줄 리가 없었다. 찜찜하긴 하지만 역시 비올레티에게 강제력을 행사하는 게...

“아참. 황비전하께서 지금 황자 전하 처소에 계셔. 가 보는 게 좋을 거야.”

리일....처소에? 설마...!

“가든 안 가든 네 마음이긴 한데, 무시해서 좋을 건 없을 거야. 지금 네 진실에 대해 말해주고 있는 중일 테니까.”

“.......!!!”

벌떡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 내 두 다리는, 나도 모르게 뜀박질을 시작하고 있었다.

난 정말 바보야!!

이게 다 시간을 끌기 위한 것뿐이었는데!! 왜 그 생각을 못했지? 황후폐하께 독을 타라고 한 건 단지 나를 붙들어 두기 위한 거였어! 거기에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 리일에게 말하려고!

리일이 오해하도록 진실보다 훨씬 악의적인 말을 섞어서... 내가 마녀라서 전하의 생각을 읽고 정체를 알아내, 자신을 좋아하도록 조종한 거라고 말하면...!

***

리엘이 우당탕 떠난 자리에 잠시 남아 비올레티는 흡족한 듯이 웃으며 독을 회수했다. 혹시라도 이게 잘못 흘러 들어가면 곤란해질 테니 끝까지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리엘의 몰락을 구경하러 가 볼까?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비올레티는 진심으로 리엘을 제거하고 싶었다. 아니, 그것만으로는 뭔가 모자랐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가 가진 걸 전부 부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리엘이 가진 것 중 가장 귀한 것인 황자를 빼앗아 주고 싶었다.

이왕이면 빼앗아 차지할 수 있으면 더더욱 좋고.

리엘과 황자가 아무 문제없다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겠지만, 만약 황자가 처절한 배신감에 상처받은 상태라면? 가능성이 있었다.

아니, 설령 자신이 못 가져도 상관없었다. 적어도 리엘이 잘 되는 꼴은 못 보겠다는 게 정확한 심리였다.

게다가 꼭 리엘 때문이 아니더라도, 황자는 그 자체로 매력적인 존재였다.

그녀가 한때 황제에게 혹했던 것도 사실이나, 그건 이미 황비 때문에 물 건너갔다.

사실 황비를 제거해 황제를 차지할까 하는 생각도 잠시 해 보긴 했었다. 하지만 황비가 실각하면 그녀에게 발붙어 있겠다는 계획이 틀어진다.

게다가 황후의 위치가 너무 굳건해 황제 공략은 영 힘들 것 같아 보였다. 그래서 곧바로 노선을 돌린 것이었다. 리엘에게 황자를 빼앗기로.

반면 황비는 황후를 제거하고 황제를 차지하고 싶어 했다. 둘은 그렇게 각기 다른 생각을 품고 함께 모의했다.

실제로는 모의가 아니라 비올레티의 계획에 황비가 놀아난 것에 가깝겠지만...

비올레티는 자신과 황비의 두 가지 입장을 교묘하게 이용해 그럴싸한 계획을 짰다.

사실 리엘에게 요구한 독살 사주는 별 의미 없는 짓이었다. 물론 멍청한 황비가 시킨 건 맞았다. 어처구니없는 명령이었지만, 무시했다가 나중에 들키면 곤란하니까 비올레티도 어쩔 수 없이 따랐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걸 이용해 리엘을 붙잡아 시간을 끌겠다는 계획은 스스로 생각해도 훌륭했다. 역시나 아주 효과적이었다.

어차피 리엘이 황후에게 독을 타지 않을 거라는 것 정도는 그녀도 알고 있었다. 비올레티가 아는 리엘은 그런 뻔한 함정에 걸어 들어갈 만큼 바보가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독을 들고 가 황비의 모략에 대해 일러바칠 확률이 높았다.

그렇게 되면 손 하나 안 써도 황비는 아웃이겠지만, 문제는 이 일에 가담한 그녀 자신도 끝장난다는 것이었다.

돌대가리 황비는 거기까지는 생각도 못하는 모양이었는지, 그저 이렇게 협박하면 리엘이 쪼르르 가서 황후를 죽이고 혼자 다 뒤집어쓰고 죽을 거라 생각하는 것이다.

‘등신’

정말 답답하고 짜증났지만, 마음대로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엄연히 웃전인 황비를 어찌할 방법은 없었다.

비록 자신이 부추기고 조종하고 있긴 하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으니까. 그러니 비올레티 입장에서도 리엘이 거절하는 게 좋았다. 다행히도 리엘은 바보가 아니었고...

거기까지 예측한 비올레티가 이어질 뒷일을 꾸미지 않았을 리 없었다. 한 마디로 황비를 이용해 리엘을 제거할 만반의 준비는 처음부터 되어 있었다.

비올레티는 독살 시도를 이야기하는 황비의 말을 적당히 수긍해 주며, 거기에 더해 리엘에게서 황자의 마음을 떼어놓을 방법을 일러 주었다.

황후 시해의 혐의를 리엘에게 확실히 뒤집어씌우려면 그녀에 대한 황자의 총애를 빼앗아야 한다고 말했더니, 황비는 역시나 예상대로 충실히 움직여 주었다.

‘지금쯤이면 한창 무르익어 있겠지? 그럼 가 볼까?’

***

“그런 헛소리에 제가 흔들릴 것 같습니까?”

“전 그저 아들 같은 마음에 진실을 말씀해 드리는 것뿐입니다. 적어도 확인은 해 봐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이간질 그만 두십시오!”

“이간질이라니요. 저야말로 황자의 약혼을 축하해 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만, 이리도 사랑에 눈이 어두워 그릇된 판단을 하고 계시니 정말이지 너무나도 마음이 아파...”

“그만 하시라니까요! 더 이상 상대해 드리고 싶지 않으니 이만...”

콰당

부서질 듯한 기세로 문을 열고 들어온 건 리엘이었다.

“리일!”

예상대로 분위기는 경직되어 있었다.

“리엘...”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돌아보는 그가 보였다. 조금도 믿지 않으려는 듯 확고한 표정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흔들림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눈이 마주친 그 순간, 엔릴의 눈동자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 분위기를 읽은 것인지, 황비는 의기양양하게 제안했다.

“황자, 제 말을 정 그리 못 믿으시겠다면 당사자가 왔으니 직접 물어보시지요. 아니, 못하겠다면 제가 대신 물어 보겠습니다. 리엘, 전하께서 밝히시기 전에 이미 전하의 신분을 알고 있었지?”

황비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

“대답해 보거라.”

하필이면 딱 저런 질문이라니... 차라리 처음부터 알고 접근한 거냐고 묻는다면 당당하게 아니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질문이 너무 교묘하게 불리했다.

“그게...”

‘어쩌지? 황비를 세뇌해도 내뱉는 말까지 조종하는 건 불가능할 것 같은데... 입을 다물어버리라는 정도로만 간섭을 행해버릴까? 하지만 갑자기 그러면 수상해 보일 텐데... 내가 찔리는 구석이 있다고 인정하는 꼴밖에 더 되겠어?’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모습에, 엔릴의 눈빛이 더욱 흔들렸다.

“그것 보십시오. 대답을 못 하지 않습니까.”

“그리 겁을 주니 무서워서 말을 못 하는 것 아닙니까! 물을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엔릴 스스로도 그녀가 왜 대답을 못 하는지 의아스러웠다.

한 번 생기기 시작한 틈은 자꾸만 마음속을 긁어대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릴은 황비의 말을 무시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무언가가 떠올랐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얼마 전 누군가에게 무슨 얘기를 듣고 난 후, ‘어?’ 하고 이상하다 싶은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한참 대화 중이라 잘 모르고 넘어갔었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무언가 걸리는 게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게 뭐였는지 생각이 바로 안 난데다가, 그 후 바로 까먹어서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냥 ‘뭔가 걸리는 게 있었는데?’ 하고 말았었던 것이....

하필 지금 막 생각이 나 버렸다.

‘전에 어마마마와 대화할 때, 작년 봄에 비원에서 리엘을 만난 적이 있다고 했었지?’ 그때 내가 뭘 의아해했었나 했는데...’

생각해 보니 그때는 리엘이 분명 자신의 신분을 알기 전이었다.

그런데 어마마마의의 얼굴을 봤다면, 누가 봐도 똑 닮은 자신을 못 알아볼 리 없을 거라는 의아함이 무의식중에 있던 것이다.

둘은, 심지어 처음 보는 사람이라 해도 ‘너희 어머니시구나!!’ 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똑같이 생겼으니까...

엔릴의 그 작은 심정 변화는, 표정에 미묘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황비는 그 작은 의혹의 씨앗을 놓치지 않았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그만! 그만 듣겠습니다!”

하지만 엔릴은 단호하게 황비의 말을 가로막았다.

“황자...”

“......”

잠시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연 건 리엘이었다. 지금은 세뇌니 뭐니 그런 걸 할 때가 아니라, 솔직하게 털어놓아야 할 때였다.

“그게... 제가 다 설명할 수 있어요. 사실 전하께 말씀드릴 게 있어요.”

결심한 듯 다 말하려는데... 그때,

똑똑똑

워낙 긴장된 분위기 속이라 그런지, 작은 노크 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

“황자 전하, 황비 전하께서 부르신 손님이 들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엔릴이 멍하니 있는 사이, 황비가 먼저 대꾸했다.

“들라 하라. 고국에서 온 손님이니 황자께서 양해해 주시지요. 참, 여기 있는 리엘과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 잘 되었군요.”

달칵

황비는 직접 문까지 열어주었다.

“황비 전하,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제법 우아하게 인사한 비올레티는 조용히 황비 옆에 시립했다.

“어서 오거라. 황자께서 내 말을 영 믿지 않으시니, 리엘의 자매인 네 증언이 필요하구나.”

미리 짜기라도 한 듯 비올레티는 바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네, 전하. 리엘은...”

멈칫

리엘은 다급한 나머지 결국 비올레티에게 간섭을 행해 버렸다.

자세히 어떻게 할 겨를도 없어서, 입 닥치라는 의사를 겨우겨우 찔러 넣은 정도였다. 그나마도 잘 되지 않아 몇 번을 실패하다가 간신히 성공시킨 것이었다.

지금 리엘은 국왕을 무너뜨릴 때보다 훨씬 더 안절부절 못 한 채 동요하고 있었다. 마음 뿐 아니라 손도 덜덜 떨리고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컨디션은 이보다 최악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리일! 제가, 제가 다 설명할게요!”

비올레티가 움찔한 사이, 리엘은 재빨리 털어놓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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