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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낚이면 좋겠어-114화 (114/134)

114. 덫(5)

2017.03.23.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줄리의 일로 잠시 잊고 있었다. 비올레티가 말했던 독살 계획, 정말로 시행하지는 않겠지만 혹시 모르니 알려 두기는 해야 하는 일이었다.

멈칫

하지만... 자꾸만 리일의 일이 미뤄져서는 안 되는데... 어떻게든 빨리 오해를 풀어야 하는데...

아냐, 일단은 이게 더 먼저야.

만약 내 일로 인해... 황비와 비올레티 때문에 황후폐하께서 잘못되시기라도 하면 정말 용서받을 수 없어질 거야.

잠시만 시간을 내서 얼른 다녀와야겠어.

***

리엘이 이런 저런 일로 바쁜 사이, 연무장에 틀어박힌 엔릴은 심란한 마음에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한참을 망연자실 우두커니 벽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내가 지금 대체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이 마치 꿈처럼 아득했다. 신분을 알고 그랬었다니, 마음을 읽는 능력이라니... 말도 안 될 정도로 잔인한 진실들이었다.

‘아냐... 아닐 거야...’

엔릴은 혼미해지려는 정신을 간신히 붙들고 아까의 대화들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았다.

‘내 신분을 알고도 모른 척 했냐는 질문에 리엘이 분명히 긍정했어.’

충격이었지만,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중간에 알게 됐는데 먼저 말하기 곤란했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호의를 이용하려 한 적이 있냐는 질문에 부정했을 때, 감지기가 울렸었다. 그 말은 즉,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리엘... 정말 나에게 거짓이었던 거야...?’

분명 작년 봄이라고 했었다. 별궁에서 그의 초상화를 보고 신분을 알게 된 시기가...

‘거의 처음쯤이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잔인했던 마지막 질문... 정말 신분을 알고 생각을 읽어 마음을 이용하려 해냐 물었을 때, 리엘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비웃기라도 하듯 감지기는 울렸다. 날카로운 비수로 마음이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리엘이...”

돌이키고 또 돌이켜 봐도 아까 들은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리엘이 어떻게 나한테 그래...”

얼마나 온 마음을 다했는데... 얼마나 순수하게 좋아했는데... 그저 리엘에게는 뭐든지 다 해주고 싶었고, 그녀가 아파하면 자신은 더 아팠다.

부모님에게 미안한 짓임을 알면서도, 번번이 리엘을 편들고 상처를 드렸다. 그만큼 너무 좋아서, 너무 사랑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그게 만약 자신만의 감정이었다면?

사랑한다고 믿었던 그 모든 것들이 사실 연기였다면? 자신의 애절한 마음을 손바닥처럼 들여다보면서 가지고 놀았던 거라면...?

어머니 마음에 대못까지 박으며 선택한 리엘이었는데, 그게 다 자신의 신분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니... 황자인 걸 알고 호의를 이용하려 했다니, 생각을 읽고 있었다니...

"아냐,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말도 안 돼...!"

너무 충격적이어서 오히려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 아닐 거야. 뭔가 잘못된 걸 거야...’

아까는 너무 상처를 받아 뒤도 안 돌아보고 뛰쳐나왔는데, 지금 생각하니 후회가 들었다.

‘얘기를 자세히 들어보지도 않고...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리엘이 나한테 그럴 리 없어.’

그동안 함께 했던 일들이 머릿속에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다. 얼마 전 연극을 만드느라 꼼꼼히 되새겨봐서 그런지, 더더욱 기억이 생생했다.

그 오랜 만남 동안 그게 다 거짓일 수는 없는 것이었다.

‘리엘... 와서 제발 아니라고 말해 줘. 다 오해라고, 황비가 농간을 부린 거라고 설명해 줄 거지?’

쫓아와서 자신을 붙잡을 거라고, 그게 아니라고 사랑한다고 말해줄 것이다. 그럼 속아서 미안하다고 웃으면서 사과하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을 추스른 엔릴은, 조금 나아진 기분으로 기다렸다. 먼저 찾아가 다시 한 번 잔인한 진실을 확인할 용기는 없었기에, 그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정말 자신에게 떳떳하다면, 분명 찾아와 말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리엘은 오지 않았다.

달칵

결국 기다림에 지쳐 문을 열고 나온 엔릴은, 문 앞을 지키던 기사를 붙들고 물어보았다.

“혹시.. 리엘이 찾아온 적 없어?”

“아까 다녀가셨습니다. 하지만 전하께서 누구도 들이지 말라 하시어...”

“뭐? 나한테 말을 했어야지!”

“죄송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깨우침에 방해가 된다 하셨기에...”

‘아차, 내가 그렇게 둘러대고 여기 틀어박혔었지...!’

이 일을 아무한테도 말하고 싶지 않아 도망치듯 처박혔기에, 기사들에게 뭐라고 말해뒀는지도 잊고 있었다.

“리엘이 남긴 말 없었어? 나 꼭 만나야 된다는 말은 안 했고? 안 기다리고 그냥 돌아간 거야?”

그래도 찾아왔었다는 사실에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엔릴은 다다다 빠르게 물었다.

“잠시 기다리시다 바로 돌아가셨습니다.”

그새 교대해서 그때의 상황을 대충 전해 듣기만 한 기사는, 앞뒤 자르고 간략히 보고했다. 게다가 둘 사이의 일에 대해 아무것도 정보가 없는 상태였으니, 더 이상 첨언해 줄 말도 없었다.

“바로...?”

“네.”

‘......리엘. 나만 기다린 거야?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발걸음 돌린 거야...?’

상처받은 엔릴은 또 다시 틀어박혀버렸다.

그리고 또 다음 날.

달칵

“저기... 혹시 그동안 리엘 안 왔었어?”

“네. 온 적 없습니다.”

“......정말로, 한 번도?”

“네.”

“...알았어. 이젠 정말 아무도 안 만나고 싶으니까, 내가 나올 때 까지 절대 방해하지 마.”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래도 리엘이 찾아와 불러내길 바랐다. 꼭 할 말이 있다고 고집을 부려서라도 불러내 주길 기다렸다. 정말 다 오해였다면, 스스로 떳떳하다면 어떻게 해서든 설명하려 할 테니까...

마음과 다른 모순적인 말이었지만, 도망치고 싶은 마음과 리엘이 찾아와 주길 바라는 상반된 마음은 그런 행동을 만들어 주었다.

***

“....! 여기는..?”

아... 줄리의 침대 맡이었다.

줄리에게 작업을 하다가 잠시 황제폐하께 다녀온 것까지가 마지막 기억이었다.

아까 폐하께 다녀온 후, 다시 연무장에 가보려던 길에 줄리에게 잠시 들렀었다. 일단 깨어버린 후에는 작업을 할 수가 없으니, 줄리가 아직 잘 잠들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는 너무 피곤한 나머지 기절하듯 잠이 든 모양이었다.

가뜩이나 무리한 능력사용으로 지쳐 있는 와중에, 리일의 일로 심적 타격이 커서 그런지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대로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니었다.

원래 이것만 하고 다시 리일에게 가보려 했었는데... 이런 저런 일로 늦어져 버렸다.

더 이상 오해의 골이 깊어지기 전에 미루지 말고 지금이라도 얼른 가봐야지.

두렵지만... 받아줄 지 모르겠지만,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간에 내 솔직한 심정을 모두 털어놓고 싶었다.

휘청

갑자기 일어났더니 머리가 핑 돌았다. 아침 이후 종일 먹지도 자지도 못한 채 무리한 몸은 엉망진창이었다.

생각해보면 정말 파란만장한 하루였다. 돌아와 눈 뜨자마자 황제를 만나고, 황후에게 줄리의 일을 듣고, 그다음 비올레티와 황비를 차례로 만나고... 리일과 이렇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또 쉬지 않고 곧바로 줄리에게 달려가 일을 처리하고 황제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또 줄리에게 돌아왔다가...

“휴우...”

나 기절할 만했네. 지금 몇 시지...?

밖을 보니 아직 한낮이었다. 음? 낮? 그럴 리가...?

벌떡

뭐!? 벌써 다음날이 된 거야? 내가 하루 넘게 잠들어 버린 거야?

리일은..!? 리일은 나왔을까? 어서 가 봐야 하는데!

난 한달음에 그에게 달려갔다.

“전하께서는 처소에 안 돌아오셨습니다.”

“......”

아직도 나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난 힘없는 발걸음으로 다시 연무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전하께서 그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다 하셨습니다.”

“기다릴게요.”

“언제 나오실지 모르니 다음에 다시 오시는 것이...”

“괜찮아요. 여기 있게 해 주세요.”

“후우, 알겠습니다.”

야속했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동안 리일이 너무 편하게 모든 걸 허락해줘서 그렇지, 그는 결코 아무 때나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이게 보통의 당연한 상황인 것이었다.

난 굳게 닫힌 문 앞에 쭈그려 앉아 기다렸다. 하염없이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기사들도 시종들도 만류하며 돌아가길 권했지만, 나는 버티고 또 버텼다.

하지만 하루가 꼬박 지나도 그는 나오지 않았다.

“레이디, 급한 용무이시면 안에 전갈을 넣을까요?”

“절대 방해하지 말라고 하셨다면서요...”

“하지만 레이디께서는 예외이지 않습니까.”

......내가 아직도 그 예외인 특별대상에 해당될까? 그에게 이렇게 상처 준 주제에?

“아니...예요. 기다릴게요...”

결국 다음날까지 자리를 뜨지 않은 채 꾸벅꾸벅 졸고 기다리던 난,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지 못해 결국 쓰러져 버렸다. 삼일 째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

“음... 여긴...!?”

내 방이었다.

요즘 왜 매번 이런 식으로 정신을 차리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질어질한 머리를 겨우 털어 내며, 난 곧바로 또 리일의 처소로 달려가 보았다.

“전하께서는 돌아오셨나요?”

“네. 안에 계십니다.”

“네?”

연무장에서 아직 나오지 않았을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리일은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더 충격이었다.

내가 쓰러졌다는 얘기를 들었을 텐데... 이젠 들여다보지도 않을 정도로 마음이 떠났구나...

이 문 안쪽에 그가 있는데, 드디어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용기가 나질 않았다.

“레이디, 고할까요?”

망설이는 나를 보며 시종이 물어봐 주었다.

“.......네.”

한참의 망설임 끝에 결국 눈을 질끈 감고 끄덕였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레이디, 지금 저하께서 컨디션이 안 좋으셔서 만나실 수 없는 상태이십니다.”

쿵....!

심장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기분이었다.

명백한 거절이었다. 내 방문을 단 한 번도 거절한 적 없던 리일이었는데... 아니, 거절이고 허락이고 필요도 없이 난 내 집처럼 그의 처소를 들락날락거렸다.

그런데 그랬던 그곳이, 이제는 너무나 까마득히 멀게 느껴졌다. 두터운 문은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을 것 같이 굳게 닫혀 있었다. 마치 나를 영원히 거부하듯...

“네, 알겠어요.”

하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 난 꾸벅꾸벅 졸며 하염없이 방문 앞에서 기다렸다.

한참 후,

“레이디, 오늘은 곤란하니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

“전하께서 정말 몸이 안 좋으셔서... 기력이 쇠하신 듯 심하게 탈진하신 상태라...”

솔직히 저 말을 곧이곧대로 믿기는 힘들었다. 아까 주치의가 단칼에 쫓겨나는 걸 봤기 때문이었다. 정말 아픈 거라면 그럴 리가 없을 테니까...

누가 봐도 이건 나를 외면하는 태도였다.

“네...”

결국 나는 힘없이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리일은 나를 온 몸으로 거부하고 있었다. 더 이상 무슨 해명도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많이 실망했겠지.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나라도 그랬을 거야.

제 마음 고스란히 읽으면서, 신분을 알고도 모른 척 가지고 놀았다고 생각할 테니... 나중에 진심이 되었다고 해도, 그때의 그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으니까...

솔직히 지금의 내 마음이 진심인지 조차도 믿기 어렵겠지...

신분을 알고도 모른 척 하고, 호의를 이용하려 하고, 생각을 읽어 마음을 가지고 놀았다는데 어떻게 그 외의 다른 결론이 나오겠어...

“...으흑...흑.. 흐흑...”

끝인 거야...? 정말 이렇게 끝나는 거야?

난 방으로 돌아와 멍하니 한참을 울었다. 이러다 탈수로 죽겠다 싶을 때 쯤 겨우 눈물이 그쳤다. 더 이상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울고만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 떠날 때 떠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고 떠나고 싶어.

비올레티, 너도 내 전부를 알고 있는 건 아냐. 네가 알아낸 내 능력, 그토록 날 엿 먹인 그 능력으로 이번엔 내가 널 망가트려 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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