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덫(6)
2017.03.23.
기운을 차리기 위해, 안 들어가는 입에 억지로 밥을 쑤셔 넣어 먹고 조금 힘을 내 목적지로 향했다.
“그래. 네 말대로 같이 죽자.”
***
“엘. 리일이 연무장에서 너무 무리해서 쓰러졌다면서요?”
황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황제에게 물었다.
“네, 들었습니다.”
엔릴이 컨디션이 안 좋아 못 만난다고 했던 건, 단지 거절하기 위해 둘러댄 말이 아니었다.
사실 리엘이 쓰러진 다음날, 엔릴도 결국 쓰러져 버렸다. 리엘은 그래도 두 번이나 기절하듯 잤었지만, 엔릴은 삼일 내내 한숨도 자지 못한 상황이었다. 당연히 음식도 거부했다.
먹지도 자지도 않고 내내 울며 괴로워했으니, 당연히 탈진해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연무장에 유일하게 출입하던 식사담당 하녀가 그런 그를 발견하였고, 그 덕에 강제로 방으로 옮겨지게 된 것이었다.
리엘이 찾아왔을 때, 엔릴은 정말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진료도 무엇도 거부한 채, 그저 방에 틀어박혀 이불을 뒤집어쓰고 혼자 웅크리고 있던 것이었다.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기에... 식사도 통 거부했다던데...”
“......”
그 동안 엔릴이 아무 말 없이 틀어박혔었기에, 황후 역시 대외적으로 알려진 검술 수련의 이유밖에 모르고 있었다.
황비와 비올레티도 굳이 떠벌리고 다니지 않은지라, 둘 사이의 불화는 더더욱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게다가 엔릴이 쓰러진 일로 궁이 발칵 뒤집히는 바람에, 리엘이 그를 기다리다 쓰러졌던 일은 완전히 묻혀버리고 말았다.
만약 누군가 이상한 기류를 눈치 채고 양쪽의 말을 조금 더 자세히 전달했다면, 이렇게까지 엇갈리지는 않았을 텐데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어느 정도 짐작했다. 이게 단순히 검술 수련에 관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저께 리엘과 대화할 때까지만 해도 혹시나 하는 정도였지만, 엔릴이 저렇게 되고 나니 무언가 낌새를 눈치 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쓰러져있는 엔릴에게 당장 뭘 어떻게 조언해 줄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무엇보다도 이건 일단 둘의 일이라 생각했다.
괜히 끼어들어 오지랖을 부려봤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왜 그런 건지 걱정이네요. 도통 말을 안 해주니 알 수가 있어야죠. 엘은 뭐 짐작하는 거 있는 거죠? 혹시...”
혹시나 리엘과 관련된 일인가 싶어 황후는 슬쩍 떠 보았다. 능력에 대한 걸 얼마 전 막 들은 참이었으니, 무언가 짚이는 구석이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말을 삼갔다.
“깨어나면... 직접 물어보는 게 좋겠습니다.”
똑똑똑
때마침 시종장이 리엘의 방문을 고해 왔다.
“페하, 레이디 애스틴이 뵙기를 청하고 있사옵니다.”
“들라 하라.”
“두 분 폐하를 뵙습니다.”
황제는 리엘을 보자마자 바로 물었다.
“그제 말한 그 일이냐?”
“네, 폐하.”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황후는 그저 의아해 했다. 하지만 일단 잠자코 지켜보았다.
“그래. 준비해 두었다. 지금 부르면 되겠느냐?”
“네.”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밍기적 거릴 틈이 없었다. 리엘의 대답하자 황제는 바로 황후에게 귓속말을 했다.
“.....”
황후의 안색이 살짝 변하며, 더더욱 의외라는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곧 시종을 불러 무언가를 명했다.
“황비의 손님인 비올레티라는 아이를 불러오너라.”
“네, 폐하.”
그 사이 황제는 시녀와 시종들에게 일러 몇 가지를 준비시켰다.
곧 당황스러운 표정의 비올레티가 불려왔다. 갑자기 불려오니 어안이 벙벙했겠지만, 황후의 부름에 감히 안 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황후 폐하... 부, 부르셨... 화,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황후의 부름에 달려온 비올레티는, 황제도 함께 있는 모습에 깜짝 놀라 더욱 황급히 고개를 처박으며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다가 리엘과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리엘.....!?’
며칠 전의 일로 그대로 나락으로 굴러 떨어질 줄 알았던 리엘이 생각보다 멀쩡히 있는 모습에, 비올레티는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니 단순히 멀쩡한 것뿐 아니라, 황제와 황후가 한 테이블에 거리낌 없이 앉아 있었다.
그 날의 일과 상관없이, 리엘이 두 사람에게 저 정도로 환대받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더더욱 충격이었다. 당연히 냉대와 멸시를 받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황비를 견제하기 위해 억지로 그러는 척 하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분위기가 너무 자연스러웠다.
그녀가 혼란에 빠져 있는 사이, 리엘이 재빨리 인사를 건넸다.
“어서 와 비올레티. 널 소개시켜 드리고 싶어서 내가 청했어.”
“.....?”
“황후 폐하, 제 이복자매인 비올레티입니다. 제가 가문을 버린 덕에 비록 성은 바뀌었으나, 여전히 제 하나밖에 없는 자매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황궁에서 함께 지내게 된 것도 다 두 분 폐하의 은덕이니, 직접 뵙고 인사드리게 하고 싶었습니다.”
새빨간 거짓말에 전부 입에 발린 소리였다. 비올레티가 영문을 몰라 하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황제가 있는 이 자리에서 감히 그게 무슨 헛소리냐고 따져 물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리..엘?”
황후 역시 황당해 했다. 리엘이 비올레티를 경계하던 건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게다가 줄리의 일이 바로 엊그제였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지...
황제의 말대로 일단 불러오긴 했으나,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라는 반응이었다.
“황후 폐하, 줄리의 일에 대한 건 오해였습니다. 오늘은 비올레티가 제국에 귀화하고 싶다고 하여 인사시켜드리러 왔습니다. 황제 폐하의 훌륭하신 치세에 감복하여 제국인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기에, 두 분 폐하께 소개시켜 드리고 싶어 이렇게 청했습니다.”
“그래, 그렇구나.”
다행히 황제가 대충 리엘의 말에 장단을 맞춰 주었다. 그러자 황후 역시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황제가 미리 귀띔해준 대로 자연스럽게 차를 권했다.
“반갑구나. 내 며늘아기가 될 아이의 자매라면 나에게도 남은 아니지. 네 비록 황비와 연이 닿아있다고는 하나, 그게 죄는 아니니 너를 탓할 수도 없겠고. 마침 좋은 차가 들어왔으니 함께 들자꾸나.”
“화..황송하옵니다. 폐하.”
황후가 자리를 권하자, 비올레티는 어쩔 수 없이 엉거주춤 앉았다. 내심 불안하겠지만, 신분 앞에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래,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 내가 별궁에서 그렇게 당한 것처럼 말이야. 함정인 줄 알면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런 엿 같은 상황. 입장 바뀔 줄 몰랐지?’
비올레티는 리엘이 황제와 황후를 이 정도까지 움직일 수 있는 줄 당연히 몰랐다.
어쨌든 이제 배역은 다 갖춰줘 있었다. 증인이 되어 줄 시녀장과 시종장, 임페리얼 가드들까지 전부 방 안에 있었다.
이윽고 시녀들이 찻잔을 비롯한 티세트를 내오고는 멀찍이 물러나자, 리엘이 비올레티 쪽으로 다기를 슬쩍 밀었다. 네가 신분이 제일 낮으니 준비하라는 은근한 압력이었다.
백작위를 받았다는 것은 아직 모르지만, 어찌되었건 리엘은 제국 귀족 신분에 황자의 공식적인 약혼녀였다. 예전처럼 감히 발아래로 깔아볼 존재가 아닌 것이었다.
“비올레티, 폐하께 차를 올려야지.”
“......”
그 행동에 비올레티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지금 치욕스럽고 뭐고 따질 때가 아니었다.
‘설마... 별궁에서 있었던 일을 똑같이 꾸민 건가? 이번에는 나를 함정에 빠트리려고? 하지만 어떻게...? 황제와 황후를 속인 건가? 설마 그렇게 쉽게 이용당할 리 없을 텐데... 아니면 함께 짜고?’
진상을 정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어쨌든 위기였다.
“비올레티?”
리엘이 독촉하듯 이름을 불렀고, 황후 역시 은근히 압박을 주었다. 물론 리엘이 막 머릿속으로 전달해 준 대사를 읊은 것뿐이었다.
“네가 차에 조예가 깊다고 리엘이 몹시 칭찬하더구나. 어디 한 번 솜씨를 보여주지 않겠니?”
황후는 처음 겪어 보는 대화 방법에 내심 놀랐음에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인자하게 웃어보였다.
“......”
저렇게 까지 말한 이상 이대로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비올레티는 일단 찻물을 우려 잔에 따라냈다.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인지 아주 느릿한 동작이었다.
마음이 초조해 손이 다 떨릴 지경이었지만, 그랬다간 추후에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더욱 의심이 쏠릴 것이기에 최대한 침착하려 노력했다.
‘아무리 미리 짰다고 해도, 황제나 황후폐하께서 알면서도 독을 마실 리는 없을 거야... 그럼 이건 무슨 상황이지? 설마 나만 죽이려는 건가? 내가 황비에게 둘러댔던 설정처럼, 내가 황후를 독살시키려 하다가 실수로 찻잔이 바뀌어 독을 먹었다고?’
정말 독이 들었는지 냄새라도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들어있는 차는 향이 강하기로 유명한 차이 티로, 다른 냄새 따위는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는 수준의 강렬한 잎이었다.
비올레티는 점점 더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 그녀의 타는 속마음과 상관없이, 이윽고 향긋한 차가 모두의 앞에 놓였다.
“확실히 향이 좋군.”
황제가 별 다른 의심 없이 냉큼 한 모금 마시며 황후에게도 눈짓으로 권했다. 하지만 실상으로는 전혀 달랐다.
-황후 폐하의 찻잔에는 독이 들었으니 절대 마시면 아니 되십니다.
리엘의 신신당부에 황후는 흠칫했으나, 겉으로는 별 동요 없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입에만 댔다 땠다.
황제와 황후 둘 다 차를 마시자 비올레티의 표정이 조금 더 복잡해졌다. 머리는 더더욱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황후폐하는 몰라도 황제폐하의 찻물은 확연히 줄어 있는데... 어떻게 된 거지?’
그녀 상식에, 지고한 황제폐하가 고작 자신을 함정에 빠트리자고 직접 독을 마실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 나만 죽이려는 건가? 아냐, 그럴 리가. 나 하나 쥐도 새도 없이 처리하는 건 일도 아닐 텐데, 굳이 이런 복잡한 방법을 쓸 리 없어. 역시 나를 모함하려는 함정이야. 무슨 수를 쓴 건지 몰라도, 내가 전에 황비를 이용했듯이 리엘도 황제를 조종하고 있는 거야. 사람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나보다 훨씬 쉽게 할 수 있었겠지.’
그런 그녀에게 리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올레티, 역시 네 차 실력은 훌륭하구나. 깊은 맛이 아주 잘 우러나왔어. 너도 마셔 봐.”
차 실력이라니... 비올레티와 하등 관계없는 말이었지만, 리엘은 마음에도 없는 말로 그녀에게 차를 권유했다.
“......”
비올레티가 갈등하며 머뭇거렸다.
그러는 사이, 리엘의 눈을 마주친 황제가 미리 약속한 신호를 보내며 생각을 전달해 왔다. 재빨리 읽어 보니 다급함이 가득 묻어나는 말이 들려왔다.
-리엘, 서두르는 게 좋겠구나...
내색은 안하고 있지만 독 기운이 올라와 힘들었다. 뱃속을 지지는 듯한 통증이 올라오며 손발이 저릿해지기 시작했다.
피를 토하지 않고 버티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지만, 점점 고통이 심해져 참고 있기가 힘들어졌다.
리엘이 다급하게 황후에게 눈짓을 보냈다. 무슨 일인지 정확히 몰랐지만, 황후는 아까 황제가 언질을 준 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 역시 내심으로는 불안했다. 차에 독이 들어있다는데... 설마 황제가 알면서도 마신 건 아닌가 싶어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불안함을 내색조차 할 수가 없었다. 무언가 자신이 모르는 계획이 있는 것 같은데, 괜히 섣불리 티냈다가 일을 망칠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향이 참 좋구나. 한 번 마셔 보렴.”
황후까지 권하자 이제 정말 안 마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별궁에서 리엘이 뒤집어썼던 죄를 똑같이 재현하려는 것일 수도 있으니, 황제가 마신 이상 만약에 정말 독이 들었다 해도 같이 마셔야 하는 상황이었다.
어차피 이 자리에서 혼자만 발을 뺐다가, 황제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곱게 죽지 못할 테니까.
설령 독이 티팟이 아닌 자신의 잔에만 발려져 있어 마시고 혼자 죽게 된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잔에 발려진 독만으로도, 얼마든지 뒤집어씌울 수 있는 일이니까.
‘순순히 당해줄 수는 없지. 죽더라도 마시고 죽는 게 나아.’
황제 시해 혐의를 사게 되면 어떤 지옥이 펼쳐질지 안 봐도 뻔했다. 그런 결심으로 비올레티는 찻잔을 집어들었다.
그런데 막 입에 가져다 대려는데, 자기도 모르게 덜컥 움찔하며 손이 멈추었다. 머리가 찌르르 아프며 ‘마시면 안 돼.’ 라는 의지가 강제로 몰려왔다.
‘내가 왜.. 왜 이러지?’
비올레티는 당황해서 다시 찻잔을 가까이 가져갔다. 하지만 또 다시...
멈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