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엇갈림(1)
2017.03.24.
혹시라도 꿈에서까지 그리던 리일의 목소리인가 반색하려다가, 소리가 들린 방향이 바깥쪽이라는 걸 깨닫고 도로 실망해 버렸다.
“....오라...버니?”
“리엘...”
날 부른 건 이튼 오라버니였다. 제도에 남아있는 건 알았는데 왜 여기에...?
“오라버니가 어떻게...?”
“비올레티에게 들었어.”
“......”
“내가 대신 사과할게....”
나와 리일 사이를 망가트린 일을 비올레티에게 전해들은 듯싶었다. 하지만 조금 전에 비올레티가 겪은 일까지는 모르는 눈치였다.
“......”
오라버니는 상당히 지쳐 보이는 기색으로 나에게 말했다.
“타. 고향으로 돌아가자.”
그러고 보니 옆에는 마차가 한 대 서 있었다. 언제부터 며칠이나 기다린 건지는 몰라도, 내가 나오길 이제나 저제나 애태우고 있던 모양이었다.
“아니요. 안 가요. 저 아직 못 가요. 오라버니, 저...”
“리엘, 현실을 봐.”
“......”
“나도 다 들었어. 전하를 속여 가며 만났었다니... 제정신이야? 그걸 다 알고 나셨으니 얼마나 진노하시겠어!”
“아니에요. 지금이라도 잘 말하면...”
“그 후에 만나주시지도 않는다며!”
비올레티가 참 자랑스럽게도 떠벌리고 다녔나 보다. 오늘 음독사건 전까지만 해도 의기양양했겠지...
“그래도 한 번만 더 매달려 보려고요...”
“리엘! 네가 위험하다고! 이건 더할 나위 없이 황족모독죄라는 걸 몰라!?”
나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더없이 사랑했던 만큼, 배신감에 돌아서고 나면 얼마나 냉정해질지...
나에게는 늘 강아지 같던 리일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대하는 모습으로 유추해 보건데 그는 그렇게 유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다.
오라버니가 걱정하는 것도 그런 것일 거다. 그가 화를 참지 못하고 나를 처벌하라고 명령할까봐...
황족의 분노를 샀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나 역시 솔직히 그랬었으니까...
그래. 우리의 신분 차라는 게 이렇게나 까마득한 거였구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마음은 고마워요. 하지만 오라버니, 제 인생이에요.”
난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그런데...
탁
오라버니가 내 팔을 잡아챘다.
“리엘”
“놔 주세요.”
하지만 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미안, 리엘. 난 너 잘못되는 거 못 보겠어.”
...뭐?
“........!!”
무슨 소리인가 마저 생각할 틈도 없이, 코에 느껴지는 알싸한 마취약 냄새와 함께 나는 쓰러져 버렸다.
털썩...
***
다음 날.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한 황제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엔릴의 방이었다.
“엔릴”
“......”
“몸은 좀 괜찮니?”
“네...”
다행히 하루 종일 푹 자고 일어난 엔릴 역시 컨디션을 거의 회복해 있었다. 하지만 이미 리엘이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지라, 다시 한 번 심리적 충격을 받아버린 상태였다.
사실이 아니길, 이 모든 게 오해이기를 그렇게 간절히 바랐는데 리엘은 끝끝내 말도 없이 떠나버렸다.
그 수많은 엇갈림을 모르는 엔릴은 그저 지독한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그는 리엘이 자신을 기다리다 쓰러졌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저 전해들은 거라고는, 리엘이 말없이 떠났다는 사실뿐이었다.
“아나이스에게 들은 모양이구나.”
쪽문 앞에서 이튼과 있었던 일 또한 아무도 몰랐다. 워낙 순식간에 지나간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황녀 역시 단지 리엘이 스스로 떠났다고만 알고 있었다.
“......네.”
얼마나 운 건지, 엔릴의 눈은 온통 발갛게 퉁퉁 부어 있었다.
“무슨 사연인지 나도 대충 알고 있었다.”
“.......네?! 아바마마가 어떻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이제 어찌할 생각인 게냐?”
“어찌할 거나 있겠어요!? 제가 믿던 것이 전부 거짓이었는데...”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보려 충분히 노력해 본 것이냐?”
“기다렸어요! 계속 기다렸다고요! 하지만... 리엘은 절 속인 걸로도 모자라, 끝끝내 사과 한 마디 없이 절 버리고 혼자 떠나 버렸어요!!”
“엔릴. 네가 아는 게 전부가 아냐.”
“......”
“오해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드는 것이야?”
마지막 이튼의 일은 몰랐지만, 그간의 사정을 대충 알고 있는 황제였다.
“오해요... 그래요. 리엘도 하루 종일 저만 기다릴 수는 없었겠죠. 비록 전, 혹시라도 리엘이 찾아올까봐 삼일 내내 한 숨도 자지 않고 기다렸지만요!! 저와 달리, 그 애에게는 제가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생각해서 이해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런 가정이 정말 비참하고 슬펐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에요.”
“......”
“제가 피한 것도 사실이에요. 상처받은 마음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요. 들키고 싶지 않아서 그랬어요! 하지만 정말 사실이 아니라면, 오해였을 뿐이라면 어떻게든 제게 와서 말했어야죠! 리엘은 나만큼 절박하지 않았던 거예요. 그렇게 쉽게 포기하고 떠날 만큼이요! 그 모든 진실보다도, 절 버리고 떠났다는 사실이 더 큰 충격이었어요.”
“엔릴, 내가 정확히는 모르지만 요 며칠 동안 리엘은...”
“아바마마. 죄송해요. 하지만, 하지만... 요 며칠 정도는 엇갈림이 있었을 수 있다 해도, 그 긴긴 오랜 시간동안 제게 한 번도 솔직히 털어놓지 않았다는 건 도저히 설명이 안 돼요. 대체 왜...!”
“휴우... 엔릴, 그것 역시 네가 모르는 게 많아. 물론 나도 정확한 사연을 아는 건 아니다만, 너보다는 정황을 아는 편이다.”
하지만 엔릴의 얼굴은 조금도 듣고 싶어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
“말해 주고 싶다만, 네가 들을 준비가 조금도 되어 있는 것 같지 않구나.”
둘의 일이라고만 생각하고 가만히 놔두는 게 아니었다 싶었다.
음독 사건 직후에 이렇게 바로 떠날 줄은 몰랐기에, 말릴 새도 없었다. 쓰러졌다 눈을 떠 보니, 이미 리엘은 아나이스에게만 편지를 남기고 떠나 있는 상태였다.
“...네. 저 이제 두 번 다시,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온 마음을 다했는데, 조금의 계산도 이기심도 없이 그저 사랑했을 뿐인데... 어떻게 이렇게 잔인하게 배신당할 수가 있는지...
자신이 그동안 헌신을 다해왔던 대상은 그저 허상이었다니...
“정말 후회 없을 거라 확신 하는 것이냐. 이대로 영영 떠나보내도 괜찮다고?”
“......”
“쉽사리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신중해야 해.”
“신중이라... 신기루를 사랑했을 뿐인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요. 이젠 정말 끝이에요.”
“적어도 엇갈린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근본적으로 그 애에게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아니요.”
황제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컨디션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아들에게 그간의 일을 알려주며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지금 엔릴의 귀에는 그 무엇도 들어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하아...”
“죄송해요, 아바마마. 못난 모습 보여서...”
“엔릴, 내가 한 가지 해주고 싶은 얘기가 있구나. 리엘의 일은 아니니 거부하지 말고 들었으면 한다.”
“....네.”
“나도 너처럼, 상대방의 말을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고 그대로 마음을 닫았던 때가 있었다.”
“네.”
“그리고 뒤늦게 후회했지. 왜 조금 더 이해해 보려 노력하지 않았을까. 어째서 더 이상 대화를 나누려 들지 않고 그렇게 뒤돌아섰을까...”
“......”
“그리고... 왜 그대로 끝내버렸을까. 나는 지금 후회하고 있구나... 되돌릴 수도 없거늘...”
“왜요? 왜 되돌릴 수가 없어요...?”
“이미... 죽었으니까...”
“아...”
되돌릴 수 없을 만 했다. 하지만 더 충격적인 이야기는 그 뒤에 흘러나왔다.
“내가... 내 손으로 죽인 셈이다. 내 입으로 직접 처형을 명령했으니까.”
“......”
“그러니... 너도 마찬가지란다. 나중에 후회해봤자 늦어. 그럼 부디 신중했으면 한다.”
“네......”
“그래. 이만 가 보마. 듣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언제든지 찾아오너라.”
더 이상 버티기 힘들었던 황제는, 그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
침소로 돌아오니 이번에는 황후가 울며 기다리고 있었다. 어째 가는 곳마다 울음바다인지, 아픈 건 이 몸인데 환자 주제에 여기저기 위로하고 다녀야 하는 처지라니 왠지 황당했다.
“엘... 흐흑... 또 나를 위해 엘이 희생하다니요...”
“별 일 아니었으니 울지 말아요. 이제 정말 괜찮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안색은 백짓장 같이 하얬다. 엔릴이야 자신의 일에 몰두한 나머지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지만, 황후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제가 얼마나 놀랐는데요. 독인 줄 알면서도 마시다니요...!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황제의 부탁으로, 리엘은 일부러 황후에게 사실을 반쯤 숨겼었다.
그래서 당부의 말을 전할 때 일부러 ‘황후 폐하의 찻잔에는 독이 들어 있으니 마시지 말라.’ 라고 말한 것이었다. 마치 그 찻잔에만 독이 들어있다는 것처럼...
황제가 독을 마시는 걸 그녀가 찬성할 리 없었으니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괜찮습니다.”
“괜찮다는 말은 이제 그만! 금지어 지정해 버려야겠어요! 맨날 괜찮대요!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황후는 곱게 흘겨보면서 황제에게 다시 한 번 힐링을 퍼부어 주었다.
“고마워요. 우리 디트의 눈앞에서 황비 얼른 치워 주려 그랬습니다. 오래 고생시켜 미안합니다.”
“미안하다는 말도 금지!”
연거푸 힐링이 몇 번 더 터져 나왔다. 한결 나아진 컨디션을 느끼며 황제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제가 고생은 무슨 고생을 했다고요...”
“마음고생도 고생이지요.”
“하나도 안 고생이었어요. 남편이 한눈 한 번 안 파는 데 무슨 걱정을 했겠어요.”
“아무튼요...”
“아참, 엘! 둘이 대체 왜 그렇게 된 건가요? 나나가 한 말이 정말이에요? 정말 리엘이 영영 떠난 건가요?”
“......”
“엘은 뭔가 알고 있죠?”
“...네. 미리 말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대체 무슨 일인데요?”
“디트, 그건 엔릴에게 직접 듣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입 꾹 다물고 아무 말도 안 하는 걸요! 엄마인 저한테도 전혀 얘기해 주지를 않아요. 방에 틀어박혀서 저러고 있는데 제가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후우...”
“어서요.”
“큰일이라면 큰 일일 수도 있고, 별 일 아니라면 별 일 아닐 수도 있는 그런 일입니다.”
“네.”
황후는 계속 말해보라는 듯 뚫어지게 황제의 입만 쳐다보았다.
“리엘이 엔릴에 대해 알게 된 시기가, 엔릴이 생각하던 것보다 조금 먼저였던 것 같습니다.”
“네?”
“그러니까... 엔릴이 황자라는 것을, 그 애가 직접 말해 주기 전에 리엘이 먼저 알아버린 것 같습니다.”
황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조금 꺼림칙할 수는 있겠지만, 그게 그렇게 파탄 낼만 한 일인가 싶었다. 하지만...
“잠깐만요, 혹시 처음부터 알고 일부러 접근했다는 건가요? 그래서 그것 때문에 저러는 거예요?”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처음엔 정말 몰랐다가 우연한 계기로 중간에 먼저 알게 되었는데, 알면서도 내색하지 않았던 듯합니다.”
“아... 혹시! 능력을 이용해서 알아 낸 건가요? 그리고 마음을 읽어가며 대응해 간 거고요?”
“글쎄...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우리도 리엘을 보아 와서 알지 않습니까.”
“네...”
“아무튼 그러다 나나가 다치는 사건이 일어나는 바람에 결국 신분을 밝히게 된 거겠죠. 더 이상 숨기기 어려웠을 테니까요. 엔릴은 그 후 내내 그렇게 알고 있었겠죠. 그리고 리엘은... 아무래도 말할 시기를 놓쳤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