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엇갈림(2)
2017.03.24.
황제는 그 후의 일을 아는 대로 다 설명해 주었다.
리엘의 능력에 얽힌 별궁 사건, 공국에 다녀온 일과 관련해 털어놓는 걸 미뤘던 이유, 그리고 얼마 전 독병에 관련해 리엘과 대화를 나누었을 때 느꼈던 무언가 석연찮은 낌새 등등...
“아... 직접 털어놓기 전에 황비가 선수를 쳤겠군요. 줄리를 왜 납치했는가 했더니...”
“그런 것 같습니다. 며칠 전의 일이었던 것 같은데 저도 미처 몰랐습니다. 하필이면 다른 시녀들은 다 내보낸 채였던 모양입니다. 그러니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겠죠. 그 후에는 당사자들이 쉬쉬하는 바람에...”
“휴...”
“미리 솔직하게 말하지 못한 게 잘못이긴 했지만, 리엘이 숨겼던 건 제국의 일을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건 결국 둘의 미래를 위해서기도 했지요.”
“휴우...”
“디트에게 숨겨서 정말 미안합니다. 둘의 일이라 생각해 간섭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괜찮아요. 그보다... 엘은 어떻게 생각해요?”
“제가 나설 일은 아니지요. 하지만... 후회할 만한 결정은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끝낼 때 끝내더라도, 오해는 풀어야죠. 그러고도 납득이 안 되면 그때 헤어지든 말든 해야 할 일 아니겠습니까. 디트는 어떻습니까?”
“잘 모르겠어요. 솔직히 저도 약간 충격이긴 해요. 제가 이런 문제에 조금 예민하니까요.”
“네. 그래서 디트에게 더 말 못했습니다.”
“괜찮아요. 아무튼 그래도... 적어도 제가 본 이후로는, 그 애에게 단 한 번도 가식이나 거짓을 느껴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래도 그 독특한 능력은 아무래도 부담스럽겠군요. 우리야 떠나면 그만이지만, 평생 함께 살 리일 입장에서야 아무래도 신경 쓰이지 않을 수 없겠지요.”
“네.”
“어렵네요...”
“스스로 결정할 일이지요. 지금은 너무 섭섭하고 화가 나 제대로 생각을 못하겠지만, 흥분이 가라앉으면 잘 판단을 내릴 거라 믿습니다.”
“그런데 리엘은 어디로 갔는데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음독으로 쓰러져 있는 동안 순식간에 떠나 버려서... 나나가 알아보고 있을 겁니다.”
“아...어쩌면 좋아요... 리엘도 왜 그렇게 쉽게 떠나버렸을까요...”
“그 일이 터진 후 며칠간 서로 엇갈린 끝에 오해가 깊어진 것 같습니다. 알다시피 그 후 리엘이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았으니까요.”
“우리가 진즉 눈치를 챘어야 하는데...”
“엔릴은 리엘이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고 있더군요. 반대로 리엘은... 잘은 모르겠지만 거부당했다고 생각해 떠난 것 같습니다. 이제 이곳에서 할 일도 다 끝마쳤다고 생각했을 테고요.”
“휴우... 대체 어쩌다...”
“아무튼 지금 사람을 풀어 두었습니다. 엔릴 녀석이 나중에 찾아내라고 땡깡 쓸 수도 있으니까요.”
뒤늦게 리엘의 흔적을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 중이었지만, 이미 만 하루가 지난 시점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으로 사라졌다면, 영영 찾지 못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나마 제국령 내에 있다면 모르겠지만, 만약이라도 제 3국으로 떠났다면...
“후우... 엘이 고생 많네요. 일단 좀 쉬세요. 그 문제는 제가 처리해 둘게요.”
“고마워요. 부탁할게요, 디트.”
가뜩이나 전쟁 준비로 여념이 없는 상황이었기에, 황제는 마다하지 않고 황후에게 부탁했다.
***
“음...”
“리엘, 정신이 들어?”
“...!!”
벌떡!
“오라버니!!!! 제정신이에요!? 이게 대체 무슨 짓이에요!”
“리엘, 널 위해서야.”
“누구 마음대로 이런 짓을 해요! 그보다... 여긴 어디에요?!”
“세이라야. 리테인으로 향하는 길이고.”
뭐? 벌써? 빨라도 마차로 2~3일은 걸리는 거리인데!?
내 눈에 떠오른 의문을 알았던지, 오라버니가 대답해 주었다.
“미안해. 컨디션이 안 좋았던 모양이야. 이렇게 오래 기절해 있을 만큼 손쓰진 않았거든...”
“돌아가야 해요!”
“리엘...”
“돌아가야 한다고요! 더 늦기 전에 솔직히 다 말해야 해요!”
“리엘! 뭘 더 솔직히 말해!? 전하의 신분을 모른 척 했던 것뿐 아니라 네 능력에 대해서도 다 들었어. 알면서도 농락했다는 그 진실이 뭐가 달라져?”
“......하지만...”
“이미 끝이야. 지금은 상처받아 마음 추스르기 바빠 널 당장 어찌하지 않으신 거겠지만, 정신을 차리시고 나면 널 가만 둘 것 같아? 상대는 황족이라고 황족! 그래서 내가 그렇게 누누이 말했잖아. 가까이 가지 말라고. 너만 다친다고!!”
사실 나 역시 겁이 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떠나려 했던 이유에는 그런 것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오라버니 때문이에요! 아직 바로잡을 수도 있었는데!”
“리엘, 돌아가 봤자 소용없다고!”
“그걸 오라버니가 어떻게 알아요! 이렇게 떠나오지 않고 그때라도 잘 얘기했다면!!”
“그랬을 수도 있지. 하지만..... 지금은 이미 늦었잖아.”
"........."
그 말이 맞았다. 이렇게 말없이 떠나버린 이상 오해는 더욱 깊어져 있을 것이다. 이젠... 뭐라 말해도 소용없을 지경이었다.
“리엘...”
“흐흑....”
“헛된 꿈은 버려, 리엘. 황자전하라니... 처음부터 아니었던 거야.”
“흐흑... 흑... 너무해요... 왜 그랬어요... 날 왜 강제로 데려왔냐고요!”
말이라도 해 봤으면,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매달려 보았으면 달라졌을 지도 모르는데...
“너를 지키려 그랬어!!”
“전하의 분노를 사 죽든 말든 오라버니가 무슨 상관인데요!!”
“리엘!!”
마지막 걸고 있던 희망마저 빼앗겼다는 생각에, 오라버니가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어디서 이렇게 끝없이 수분이 생기는지 신기할 정도로 눈물이 계속 흘러나왔다. 난 끝없이 울고 또 울었다.
“비올레티보다 오라버니가 더 나빠요!!!”
“......”
“흑...흑흑...”
지금이라도 돌아가면 안 될까...? 헛된 희망일 게 뻔하다는 걸 알면서도 왜 이렇게 미련이 남는 걸까...
하지만 마음과 달리 몸은 천근만근처럼 무거웠다. 안 그래도 바닥인 컨디션에 너무 울어서 탈진한 건지, 머리도 깨지듯 아팠다.
거듭된 무리로 이미 정상이 아니었던 난, 결국 또 기절하듯 쓰러져 버렸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깨 보니 내 몸은 마차에 실려 하염없이 이동하고 또 이동하고 있었다.
차창 밖의 풍경이 아무 의미 없이 눈에 스치고 지나갔다. 그 무엇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 무념무상의 상태였다.
“미안해 리엘. 하지만 이젠 내가 지켜줄게...”
“......”
“리엘...”
“필요 없어요. 나 혼자 살아갈 수 있어요.”
자꾸만 나를 걱정하는 오라버니를 뒤로 하고, 난 밤에 몰래 떠나버리기로 결심했다.
내 마법 실력이 이 정도로 수준급인지 몰랐던 것인지, 아니면 내가 도망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인지, 다행히 오라버니는 별 경계 없이 나를 내버려 두었다.
덕분에 난 오라버니를 수면 마법으로 재워버리고 조용히 떠나올 수 있었다.
어차피 행선지가 같다면 다시 마주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오라버니의 얼굴을 정말로 보고 싶지 않았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혼자 몇 번이나 마차를 갈아타고, 관문을 넘고 국경을 넘은 끝에 난 드디어 목적지에 다다랐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 레비넌 영지. 그리고 엄마가 묻혀있는 곳...
“엄마... 저예요.”
이미 국적을 포기했다지만, 그래도 내게는 리테인의 귀족 신분패가 남아있었기에 다행히 별 문제없이 리테인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특별히 대역죄로 수배된 신분도 아니었기에, 내가 이미 적국에 귀화했는지 어쩐지 신분패만 보고는 알 리가 없었다.
그래도 그새 전쟁이 시작되어 국경이 폐쇄되었을까봐 조마조마했는데, 다행히 아직은 아니었다.
“엄마...... 나... 나... 흐흑... 미안해요...”
비록 백작가에 죄를 지어 처형되었지만, 내 출생에 얽힌 사건은 비공식적인 일이었기에 엄마의 죽음은 사고사로 처리되었다.
덕분에 그나마 다행히도, 정말 불행 중 다행히도 엄마는 마을의 공동묘지에 묻힐 수 있었다.
하지만 난 바로 수도원으로 쫓겨나는 바람에 한 번도 이곳에 와보지를 못 했다. 그래서 오라버니에게 간신히 전해 들어 알고 있었을 뿐, 직접 와 본 건 거의 이 년이 다 되어가는 시간 동안 이번이 처음이었다.
“엄마... 흑흑... 나 어떻게든 혼자 살아남아 보겠다고 악착같이 발버둥 쳤는데... 엄마의 죽음에 슬퍼할 겨를도 없이, 아니 정확히 말하면 떠올리지도 않으려 일부러 노력하며 죽어라 버텨왔는데... 결국 모든 걸 망쳤어요... 내 한 몸 어떻게든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보겠다고 죽도록 애썼는데... 으흑... 흑... 저 그동안 인생 헛살았나 봐요... 전부... 제가 전부 망쳐버렸어요... 흐어엉...흐윽... 엉엉...”
바보 같이 눈물만 꺼이꺼이 나왔다.
“갈 데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어요... 나 다시 완전히 혼자가 되어버렸어요... 나 이제 어떻게 해요... 흐어어엉... 리일이 너무 보고 싶은데... 나 이제 영원히 미움 받겠죠...? 흐흑... 흑... 그게 너무 슬퍼요... 간신히 가족을 만들었는데... 정말 다들 너무 좋은 사람들이었는데... 내가.. 내가 너무 바보 같아서... 흐흑.. 흑... 엄마...”
툭.. 투둑... 투명한 눈물이 비석에 점점이 흩어졌다.
“이거 봐요. 저 이제 당당한 귀족이에요. 제국의 백작이에요. 리엘 폰 애스틴 백작. 엄마의 이름이에요... 그리고 나 되게 행복했어요... 황제폐하, 황후폐하와 얘기도 많이 나눠 보고, 황녀전하와 친구도 되어 보고, 착하고 아름다운 황자님이랑 사랑도 해 봤어요...”
떠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리일이 너무나 그리웠다.
“그런데... 이제 돌아갈 수가 없어요... 그곳으로 돌아가기는커녕 도저히 제국에서는 살 수가 없어졌어요. 차라리 이젠 두 번 다시 소식도 들을 수 없는 곳으로 멀리멀리 도망가고 싶어요. 다른 여자와 행복하게 결혼하는 그의 모습을 볼 자신이 없으니까요... 흑....흐엉.... 리일... 리일... 보고 싶어... 어흐흑... 흑...”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니 거의 탈진할 지경에 이르렀다.
“엄마... 나 이제 어쩌지...?”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어디로 가야 하지? 뭘 하고 살아야 할까?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주저앉아 버리고 싶었다. 여기서 그냥 돌처럼 굳은 채, 무덤 앞에서 울다 죽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 벼락처럼 황제폐하의 말이 떠올랐다.
-너는 너 자체니까, 엔릴과 잘 안 된다고 해서 모든 걸 놓아버리지는 않았으면 하는구나.
그 따뜻한 말이 떠오르자 오히려 눈물이 퐁퐁 솟아올랐다. 그렇지만 그 말은 내게, 최소한 모든 걸 놓아버리지는 않을 만큼의 아주 자그마한 의지를 채워 주었다. 마치 마법처럼...
하지만... 제국으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이곳 레비넌 영지도 싫었다. 엄마가 묻혀있는 곳이긴 하지만, 그만큼 아픈 기억이 많은 곳이었다.
그래. 멀리 떠나자... 제국도 리테인도 아닌 곳으로...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꼭꼭 숨어 살고 싶어.
***
한편 비올레티에 대한 일은 계획대로 전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세뇌 덕인지, 고문 협박 덕인지 예상대로 비올레티는 황비를 물고 늘어졌다. 비올레티에게 행해진 마법 심문의 결과에서도 역시, 황비가 황후 독살을 사주했던 일이 사실로 밝혀졌다.
뿐만 아니라 황비의 방에서 증거품인 독병도 발견되었다. 비올레티의 품에서 나온 것과 똑같은 종류의 독으로, 당연히 황제가 미리 준비해 둔 것이었다.
이후 황제의 행보는 거칠 게 없었다. 가뜩이나 리테인은 현재 뒤숭숭한 상황, 어차피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이상, 미적댈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황비를 폐위해 지하감옥에 가두어라!”
황비의 처지는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황족으로서의 모든 대우를 박탈당한 그녀는, 일개 죄수 신분이 되어 비천한 대우를 받았다.
그것도 감히 황후를 독살하려 했던 대역죄인. 황후에 대한 제국인의 사랑을 생각해 보면, 감옥에서 그녀가 어떤 고초를 겪을 지 안 봐도 뻔했다. 그 동안의 모든 악행이 수십 배로 고스란히 돌아왔다.
그래도 혹시 전쟁에 쓸모가 있을 수 있으니 아직 죽이지는 않았다.
물론 제 밥그릇 싸움하느라 바쁜 리테인 왕자들이 공주의 목숨을 그다지 중요시 여기지는 않을 것 같지만, 어쨌든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인질로 잡아두고 있는 것이었다.
중요한 포로교환의 카드가 될 수도 있으니까.
비올레티도 마찬가지로, 그녀 역시 아직 죽이지는 않고 둔 상태였다.
물론 그 이유는 황비와 조금 달랐다. 사실 직접적인 시해혐의를 전부 뒤집어쓰긴 했지만, 황제 역시 그녀가 실제로 독살을 시도한 적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또한 예전 엔릴의 사건에 대해 피값을 받아낼 상대는 황비지, 고작 잔챙이인 비올레티가 아니기도 했다.
그리고 혹시 리엘이 돌아오면, 그녀의 의견을 반영해 죄를 묻기 위해서라도 아직 살려두고 있는 것이었다.
별궁 사건도 그렇고, 이번 사건까지 생각해 보면 그녀로 인해 가장 피해를 본 것은 리엘이었으니까.
아무튼 그 덕에 비올레티도 목숨은 부지한 채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나마 황비보다는 조금 나은 처지였지만, 비참한 신세인 것은 매한가지였다.
***
한편 전쟁 준비로 모두가 분주한 사이, 방에 틀어박힌 리일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제 리엘이 없으니 무엇 하나 속 시원하게 물어볼 수도 없어 그저 혼자 생각하고 또 생각할 뿐이었다.
추억에 파묻혀 울다가 웃다가, 배신감에 화도 냈다가... 그러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질 때는 텅 빈 리엘의 방에 우두커니 앉아 몇 시간이고 멍하니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미 리엘이 떠난 지 일주일도 지난 때였다.
그리고 엔릴은 아직까지도 리엘이 털어놓지 못한 그간의 정황을 몰랐다.
들을 준비가 되면 말해주겠다고 황제가 언질을 주고 갔지만, 그 후 둘 다 정신이 없어 대화할 시간도 없이 며칠이 훅 지나가 버린 것이었다.
황제는 전쟁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고, 엔릴은 후폭풍으로 정신이 없었다.
“이건... 뭐지?”
오늘도 리엘이 쓰던 방을 둘러보던 엔릴은, 우연히 서랍 틈에서 편지 한 통을 발견했다.
“편지....? 누나에게만 간단히 편지를 남기고 갔다고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