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엇갈림(3)
2017.03.24.
뭐가 싶어 황급히 열어 보니, 리엘이 남긴 편지였다.
단, 이번에 떠나며 남긴 게 아니라 지난 번 공국에 다녀오면서 쓰고 갔던 편지였다. 마치 유서 같은 마음으로 썼던 편지.
미처 말로 못 다한 그동안의 마음을 가득 담아, 모든 사연과 솔직한 심정, 그에게 전하는 사과까지 전부 구구절절 적은 그런 내용이었다.
-리일. 직접 털어놓을 자신이 없어서 이렇게 글로나마 전하는 제 마음을 용서하세요.
해야 할 말이 너무 많아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모르겠네요.
리일, 제가 리일에게 말하지 못했던 게 사실 신분만이 아니었어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오랫동안 꼭꼭 숨겨온 게 있었거든요.
정말 미안해요... 너무 미안해서 차마 말할 수조차 없었지만.... 언젠가는 꼭 털어놓으려던 비밀이었어요. 그런데 너무 많은 걸 숨겨 와서인지, 어디부터 말할 지도 모를 정도로 막막하더라고요.
그렇게 시작된 편지는 별궁 사건의 진상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진상을 설명해 주기 위해서는 숨겨온 능력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바로 함정에 빠진 원인이었으니까.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아마 이런 짐작을 하고 계시겠죠. 그런 능력이 있었으니 처음부터 내 신분을 눈치 채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하고요.
네. 그런데... 반은 맞고, 반은 아니에요.
저 사실 리일이 말해주기 전에 알아버렸어요. 처형장에서 극적으로 구해주기 전부터요. 하지만 다 알고도 모른 척 했죠... 정말 죄송해요.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정말 죄송해요.
처음에는 리일이 누구인 줄 몰랐을 때는 저도 가벼운 마음이었어요. 제 처지가 너무 절박한 나머지, 뭐라도 붙잡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그러다 점점 리일에게 끌리기 시작했고, 어쩌다 보니 신분을 알게 되었어요.
하지만 결코 능력으로 읽어낸 건 아니었어요...!
리일의 처소에서 밤을 샜던 그날 우연히 황후폐하께서 리일의 이름을 불러버리는 걸 들었던 거였거든요. 그 후에 리일의 초상화를 보고 다시 한 번 확실히 알게 되었고요.
사실 정말 많이 고민했어요... 어마어마한 신분 차에 자신도 없어졌고요. 감히 나 같은 게 하면서 물러나려고도 했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일이 자꾸만 생각나기도 했다가...
그렇게 갈팡질팡 끝에 결국 욕심을 부려버리고 말았어요. 정말 운명이라면, 모른 척 붙잡아 보자고...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그 후의 일은 아시죠...? 마탑의 사고...
차가운 지하 감옥에서 그제야 깨달았어요. 내가 정말 진심이었다는 것을... 하지만 제가 한 짓이 너무 미안해서, 그리고 저에게 실망할까봐 차마 살려달라는 말조차 쉽게 안 나왔어요.
그래서 황녀 전하께서 찾아오셨을 때도, 머뭇거리다 끝끝내 리일의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던 거예요.
결국 그렇게 모든 걸 포기했고 죽음을 앞두게 되었고... 그런데 그 마지막 순간에 기적적으로 리일이 나타나 저를 구해 주었어요.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던 그 순간에요.
그런 리일에게 어떻게 온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겠어요.
하지만... 이미 진심이 된 저는 오히려 리일을 밀어내기로 결심했어요. 죄책감, 자격지심, 앞날에 대한 두려움 등등... 너무 많은 것이 제 발목을 잡았죠.
그런데 그러면서도 동시에 갈등했어요. 이미 깨달은 제 진심이 저를 끝없이 흔들리게 하더라고요. 거기에 더해 리일이 적극적으로 다가오다 보니...
변명같이 들리겠지만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어요. 저도 리일을 정말 좋아했으니까요...
그렇게 우리 사이는 시작되었고, 전 행복해 하면서도 늘 불안했어요. 그래서 더더욱 제가 숨겨온 모든 것들을 말할 수가 없었어요. 저에게 얼마나 실망할지 알았으니까요...
그래서 또 모른 척 가만히 있었어요. 어차피 제가 리일의 신분을 알게 된 게 처형 때라고 다들 알고 있을 테니, 말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비겁한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네... 변명이죠.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그때라도 말했어야 하는 건데... 그런데 리일에 대한 마음이 커질수록 더욱 말할 수가 없더라고요.
너무 미안한 마음에, 그 대신 리일에게 평생 잘하겠노라고 다짐했어요. 그리고 연인에 대한 예의로써 마음을 읽지 않으려 노력했었고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제 불안정한 신분이 내내 걱정되었어요. 마법에 집착했던 것도 그래서였어요.
하지만 결국 그 일 때문에 별궁 사건까지 겪고야 말았죠. 그리고 제 신분 문제는 온갖 폐를 끼치며 해결되었고요. 끝끝내 제 입으로 먼저 털어놓지 못한 채로요...
그 때라도 다 털어놨어야 하는데... 너무 두려웠어요.
별궁에 갇혀 있던 그 지옥 같은 시간들이 제 마음에 너무 깊은 상처를 남겨버렸나 봐요.
깊게 새겨진 공포와 트라우마가 또다시 제 발목을 붙잡았어요. 일종의 방어기제라고 해야 할까요...
유일하게 의지할 존재였던 리일이 돌아설까봐 너무 무서웠어요. 리일에게 버림받을까봐... 그래서... 차마 말할 수가 없었어요. 그럼 도저히 버틸 수 없을 테니까...
대신...그 미안한 마음을 담아, 리테인의 일을 돕는 데에 집중했어요. 어떻게든 갚고 싶어서, 돕고 싶어서...
하지만 리일이 알게 되면 위험하다고 반대할 게 뻔했기에 또다시 말할 수가 없었어요.
물론 그것 역시 변명이었죠. 사실 진심으로 두려웠던 건, 능력을 알게 됨으로서 숨겨왔던 제 비겁한 짓들까지 눈치 채 버릴까 하는 걱정이었으니까요.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 이제 드디어 그 날이 왔네요. 무사히 돌아오면 좋겠지만 솔직히 위험하지 않을 거라고는 저 역시 확신할 수가 없네요.
차라리... 무리한 나머지 후유증으로 능력이 사라져버리길 바라는 마음도 조금 있었어요. 이렇게 불편한 능력을 가진 존재로 리일 옆에 서는 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니까요.
물론 거기에는 숨겨온 사실을 영원히 덮어버리고 싶은 마음도 들어있고요. 하지만... 그 무엇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리일 곁에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가장 간절해요.
두 번 다시 리일을 보지 못하게 된다는 건... 상상만 해도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니까요.
만약 제가 그렇게 되면... 그래서 언젠가 리일이 이 편지를 발견하게 된다면... 이게 마지막 작별인사가 되겠네요.
하지만 제가 무사히 돌아오게 된다면, 그때는 전부 다 털어놓을게요. 저를 용서하지 못해 받아들여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원망은 하지 않을게요. 다 제 잘못이니까요.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제가 항상 리일에게 진심이었다는 것 하나만은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다녀올게요.
무사히 리일 곁으로 돌아와 모든 걸 말하고 이해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리일을 사랑하는 리엘이.
툭...
이걸 왜 이제야 발견했나 싶었다. 리엘이 혼자 이런 마음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어떤 각오로 목숨까지 걸고 그곳에 다녀온 줄도 모르고 자신은 혼자 희희낙락하고 있었다니...
자신은 정말 바보였다. 이렇게 진심이었는데... 게다가 이미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는데 왜 믿으려 하지 않았을까. 왜 얘기를 제대로 들어보려 하지도 않고 도망쳐 버렸을까...
“리엘... 리엘... 리엘 미안해... 난 정말 몰랐어... 왜 그랬어... 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에게 진작 말하고 의지하지... 우리의 일을 위해 왜 너 혼자 그런 희생을 하려 한 거야... 리엘.. 미안해...”
한참을 소리죽여 울던 엔릴은 벌떡 일어나 황녀의 방으로 달려갔다.
콰당
“누나!!”
“엔릴?”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뭐?”
“왜 다들 나한테만 숨겼냐고!!”
“....공국에 다녀온 일 말하는 거야?”
“그래! 어떻게 그렇게 위험한 일을 리엘에게 시켜!! 다들 어떻게 그래!!!”
“그게 아니라...”
“나 다 알아. 너무 늦었지만, 리엘이 남긴 편지를 봤어. 마치 유서처럼 남기고 간 편지를 말이야!”
“뭐?”
리엘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숨겨 두었기에, 황녀 역시 모르는 일이었다.
“정말 실망이야!”
“엔릴! 그게 아니라... 우리도 몰랐어. 위험한 줄 몰랐다고. 리엘이 한사코 안전하다고 안심시켜서... 일이 다 끝나고 리엘이 쓰러지고 나서야 알았어. 그 애가 어떤 마음으로 결심했던 건지...”
“......”
“이용할 생각 같은 거 했을 리가 없잖아.”
“......미안. 아무것도 모르고 쫓아내듯이 떠나보낸 내가 할 말이 아닌데...”
“알긴 하는구나. 엔릴, 너야말로 리엘의 말을 들어볼 생각도 안 하고 어떻게 그렇게 쉽게 돌아섰어!?”
“......내가 쓰레기였네.”
“........”
“누나, 리엘이 어디 있는지 알아?”
엔릴이 다급히 물었지만, 황녀는 왠지 모르게 주저하는 기색으로 시선을 피해 버렸다.
“그게...”
“어서!!!”
“휴우...”
“누나!! 어서 말해 달라니까!”
“리테인에 있어.”
“....뭐? 리테인은 곧 전쟁터가 되잖아! 오늘 이미 1차 원정군이 떠났잖아!”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으면서도 알긴 아는 구나.”
“당연하지!”
“그래. 당연하지. 지금을 놓치면 안 되니 당연한 일이었어. 후계가 불안한 이 기회를 이용해야 하니까.”
뿐만 아니라, 새로 왕이 옹립된 후에는 또다시 교황에게 세뇌당할 위험이 있었다. 신전이 또 꼭두각시 왕을 만들어 방패막이 삼아 숨어버리면, 더욱 상대하기 곤란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리엘이 리테인에 있다니...!
"그걸 그냥 가게 내버려 두면 어떻게 해!”
“엔릴! 네가 지금 화낼 자격이 있어!?”
“아니, 화내려는 게 아니라...!”
“시끄러워! 화내고 있잖아!!”
“...미안. 그냥 너무 다급해서...”
“아바마마가 쓰러진 사이 리엘이 말없이 떠나는 바람에, 우리도 뒤를 쫓느라 한참 걸렸어.”
“뭐?”
“너 아바마마가 독을 마시고 쓰러진 줄도 몰랐지?”
“뭐? 언제?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어휴... 모든 건 리엘이 떠난 날 있던 일이야. 아바마마가 그 몸을 하고 네 뒤치다꺼리 해 주느라 얼마나 고생하신 줄 알아!?”
“......미안... 자세히 좀 말해 줘.”
깊은 한숨과 함께 황녀는 그날의 일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해 주었다.
“......덕분에 전쟁이 더욱 속전속결로 진행될 수 있었던 거야. 마침 선전포고를 위한 명분도 아주 적당했으니까. 리테인 측에서 보낸 황비가 황후를 독살하려 했으니, 이보다 더 좋은 건수는 없었거든.”
“그걸 왜 이제 말해!!”
“네가 들으려고 하지도 않았잖아!”
너무 화가 뻗친 나머지 황녀는 엔릴의 발을 있는 힘껏 즈려 밟았다.
“아!”
“넌 좀 맞아야 해!!!”
한참 두드려 패던 황녀는, 어느 순간부터 엔릴이 말없이 맞고만 있자 의아함에 발을 멈췄다.
“엔릴?”
“응. 안 때려?”
“.......”
“나 세상에 둘 도 없을 바보 천치잖아. 그리고 누나가 맨날 그랬잖아. 바보는 맞아야 정신 차린다고...”
“......됐다. 아무튼 국경을 넘어 리테인으로 간 것까지만 겨우 확인했어. 알다시피 리테인 내에서의 행적은 알 수가 없지. 가뜩이나 전쟁 중이라 뒤숭숭하니...”
“리엘이 위험해...!”
전쟁터 한복판에 당장 휘말리기라도 할 것 같은 불안감에, 머리털이 쭈뼛 서는 듯 했다.
“조용한 곳에 가만히 있으면 별 일 없을 거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전쟁통에 힘없는 부녀자들이 어떻게 되는지 몰라? 누나, 어디 짐작 가는 데 없어?”
“있다 한들 어쩌려고? 전쟁 중인 적국에 찾아가기라도 할 거야?”
“어디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