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엇갈림(6)
2017.03.24.
다행히 구세주 같은 말이 들려왔다.
“요즘은 마법 덕에 다행히 그럴 필요가 없다. 너에게 힐링용 마도구를 빌려줄 테니 꼭 가지고 가거라.”
“휴... 네. 감사합니다.”
마법이 발전했다고는 하지만, 지금의 기술로는 마도구를 개발할 수 없었다. 마법진을 그리는 건 몰라도, 그걸 작게 축약해서 마도구를 만드는 건 아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존하는 마도구들은 전부, 드물게 발견되는 고대의 유물들이었다.
그 중 딱 하나 발견된 힐링반지는 늘 황후의 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다. 스스로 힐링을 할 줄 알아도, 위급한 순간에 필요할 수 있기에 늘 끼고 있는 것이었다.
“마도구도 있고 하니 실제로 이거보단 상황이 나을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전쟁이라는 게 워낙에 통제할 수 없는 요소가 많다보니, 그것 또한 알 수 없는 일이야. 웬만한 각오로는 부족할 거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쉬어라.”
그 말에 드디어 엔릴은 기다렸다는 듯이 기절했다. 가엾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된 아들을, 황제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직접 안아들었다.
“아프게 해서 미안하구나...”
***
“하아...”
벌써 지친다...
난 산맥을 통해 북부로 이동할 생각에 서부 산맥으로 들어섰다. 서부 산맥은 리테인과 세이라의 국경을 만들어 주고 있는 큰 산맥이었다.
이 산맥을 따라 올라가다가 북부산맥으로 들어가, 제국령까지 이동한 후 그 너머로 올라갈 생각이었다.
아무리 국경이 막혀 있다지만, 딱히 국경선도 없는 험준한 산맥 속의 작은 마을은 아무도 막지 않았기에 떠올린 생각이었다.
“헉...허억...”
하지만 이게 잘하는 짓이려나...? 힘든 건 둘째 치고, 여자 혼자 겁도 없이 산맥을 넘겠다니 미친 짓 같다는 생각이 벌써 들기 시작했다.
고생이라고는 한 번도 안하고 자란 주제에 이게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는지...
내가 해 본 고생이라 봤자 하녀노릇하며 노동한 게 전부였다. 진짜 화전민이나 유목민들처럼 떠돌이 생활을 하며 고생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난, 부실한 체력으로 유명하다는 바로 그 마법사였다.
“에고고.. 리엘 죽네...”
그래도 몸이 힘든 덕에,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던 슬픈 생각들을 할 겨를이 없어서 참 다행이었다.
어쨌든 전쟁 통인 나라에 있고 싶지는 않았기에, 난 열심히 걷고 또 걸었다. 대책 없는 산행으로 내 몰골은 이미 거지꼴에 가까웠다.
“아 진짜 얼마나 더 걸어야 해!?”
벌써 이 지긋지긋한 산에 들어온 지 몇 시간 째인지...! 내가 미쳤지!
생각해 보니 이 세상에 태어난 후 단 한 번도 걸어서 장거리를 이동해 본 적이 없었다. 최소한 마차를 타고 다녔으니까.
평민들은 왕도에 한 번 올라가기 위해 몇 달을 걸어간다던데, 난 적어도 그런 경험을 해 본 적은 없던 것이었다.
그래서 걸어서 이동한다는 걸 너무 안일하게 생각해 버렸다. 생각해 보니 난 밤에 노숙을 할 줄도, 야생동물을 경계할 줄도 몰랐다.
“.......내가 미쳤지. 정신줄과 함께 뇌도 놓아버렸나?”
몰골을 내려다보니, 아무 준비 없이 뛰어든 산행으로 내 모습은 이미 폐인 꼴이었다.
“때려치워!”
다 포기하고 근처 어디 시골 마을에 틀어박혀 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퍼뜩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잠깐만 나 바본가? 통째로 산맥을 따라 이동할 필요 없이, 산을 통해 몰래 국경만 넘어 세이라의 마을로 넘어가면 되는 거잖아.
비록 꼬락서니는 거지지만, 나름대로 제국 귀족의 신분패도 있다고!
그 다음은 마차를 타고 널널하게 이동하면 되는 것을!! 아! 산에서도 말을 타고 이동했으면 되는 건데!!
관도가 아니라 마차를 타지 못한다는 생각에, 쭐래 쭐래 두 발로 걸어 들어와 버렸다. 내 승마 실력 정도면 얼마든지 산에서 말을 타고 이동할 수도 있는데!
역시 난 바보 천치였어! 하지만 이제라도 정신 차렸으니 얼른 계획대로 이동해야지!
하지만 또 몇 시간 후...
난 나에 대한 평가에 하나를 더 덧붙였다. 바보 천치에 길치까지. 아, 이거 원래 알고 있던 거지. 왜 새삼스럽게 이제 깨달았지?
근데 그걸 왜 지금 다시 깨달았냐고?
“......아까 출발한 마을이네?”
분명 세이라 쪽으로 나가기 위해 산맥을 빠져나가 마을로 들어섰건만, 왜 난 다시 리테인 쪽 마을로 돌아온 걸까?
***
주치의가 꼼꼼히 치료하고 힐링을 퍼부은 덕에, 엔릴의 상태는 금세 나아졌다. 하지만 아무리 푹 쉬며 치료해도 사흘 정도는 누워있을 부상이었다.
“며칠 정도 차도를 지켜보면 될 것 같습니다.”
“알았다.”
2차 원정군의 출발은 일주일 후였기에, 다행히 출정에는 아무 지장 없을 정도였다.
“깊은 상처는 없으시니 하루 푹 주무시면 의식도 차리실 겁니다.”
“그래. 수고했다.”
어차피 깨어나 봐야 아프기만 할 테니 일어나면 다시 마법으로 며칠 내내 재워둘 생각이었다.
“미안하다... 얼마나 아팠을까...”
몸 여기저기 붕대를 감은 채 죽은 듯이 자고 있는 아들의 모습이 시리듯 마음을 파고들었다.
달칵
괴로운 듯 얼굴을 감싸 쥐고 있는데,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엘...”
“...미안해요, 디트.”
“......”
“제가 그랬습니다.”
“알고 있어요.”
“......”
“왜 그랬는지도 알고 있으니 그만 자책해요.”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알아요. 저도 그래요. 엘이 아프면 저도 아프니까요.”
“끝까지 말리지는 못했습니다. 안 가겠다는 소리는 끝끝내 안 하더군요.”
생존이니 뭐니 그런 목적도 있었지만, 사실은 전쟁의 두려움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 포기하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엔릴은 끝끝내 떠나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피는 못 속인다고, 그렇게 오냐오냐 키웠음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독한 아들의 모습에 황제는 퍽 놀랐다.
원래 그런 성격이었는데 편히 자라와 드러날 일이 없었던 건지, 아니면 사랑에 눈이 멀어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예상 외였다.
“......”
“휴... 이제 정말 어쩔 수 없겠지요. 무사할 거라 믿을 수밖에요... 살아 돌아오라고 한 짓인데도, 이렇게 다쳐 누워있는 모습을 보니 제가 참 밉습니다.”
누워 있는 엔릴을 보니 죄책감, 미안함, 안쓰러움, 걱정 등등... 뭐라 말할 수 없이 참담한 마음이 들었다.
“엘...”
“난 이렇게 마음이 아픈데... 제 부모님도 그랬을까요? 제가 기절해 누워있는 걸 볼 때마다 무슨 기분이었을까요. 날 그렇게 몰아붙여놓고 아무렇지도 않았을까요...?”
“...... 그랬을 거예요. 부모인 이상... 당연히 걱정하며 마음 아파했을 거예요.”
“그렇군요. 그랬다면... 저도 나름대로 애정과 관심을 받고 자란 것이겠군요.”
“그럴 거라 믿어야죠. 그러니 그만 괴로워하고 다 내려놓아요. 오늘 일도 마찬가지고요.”
“고맙습니다. 디트, 먼저 가서 쉬어요. 제가 조금 더 지켜보다 갈게요.”
며칠간 심력소모가 너무 큰데다 종일 펑펑 울어서인지, 황후는 거의 탈진에 가까운 상태였다.
“네. 부탁할게요.”
황후가 떠나자 황제는 끊임없이 엔릴의 뺨을 쓰다듬으며 사과했다.
“얼마든지 화내고 원망해도 좋으니, 부디 살아 돌아오기만 해 다오.”
“.....아바마마.”
“...!! 안자고 있었니?”
“지금 깼어요.”
사실 다 듣고 있었다. 모른 척 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둘러댔을 뿐.
“정말 미안하다. 많이 아팠지.”
“미안해하지 마세요. 저 괜찮아요. 오늘의 당부 하나도 잊지 않고 꼭 살아남을게요.”
“고맙구나. 정말로... 레이튼 경이 지켜줄 테니, 그를 잘 따르거라.”
“네. 아바마마, 절 레이튼 경에게 맡기신 거요... 직접 혼내시기 마음 아파서 그랬던 거죠...?”
“....그래. 네가 너무 안하무인으로 자라는걸 알면서도, 내가 도저히 어찌할 자신이 없더구나. 그래서 간곡히 부탁했지.”
자신의 비참했던 어린 시절까지 다 아는 가까운 사이였기에, 너무 과하지 않게 아이를 잘 잡아줄 거라 믿었다. 그리고 매번 먼발치에서 지켜만 봤다.
“그랬군요... 제가 맨날 달려와 징징거릴 때마다 곤란하셨겠어요.”
“곤란했다기 보다는... 억지로 떼어놓느라 마음이 아팠지.”
스승님은 너무 무섭다며, 아빠랑 있겠다고 엉엉 울며 매달리는 아이를 보면서도 황제는 늘 매정히 등을 돌렸다.
마음이 쓰라렸지만, 이대로 못된 아이로 크게 할 수는 없어서 꾹 참고 모른 척했다.
“하지만 잘하신 거잖아요. 그 덕에 저 많이 착해졌죠!?”
“그래그래. 여전히 귀엽구나.”
“풉! 아바마마!!”
훈육에 방해될까봐 그동안 마음껏 애정을 표현하지도 못했었는데, 다행히도 아들은 여전히 정감 넘치는 아이였다.
물론 어린 시절의 깨물어주고 싶게 귀엽던, 못돼 먹었는데도 불구하고 애교 하나는 철철 넘치던 그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랑스럽기만 했다.
“그런데 벌써 다 컸구나. ‘아빠! 나 귀엽!! 내가 엄마보다 귀엽!’ 이라고 애교 부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으악! 그건 제발 좀 잊어주세요!”
“후후후...”
나직하게 웃는 황제의 모습에, 엔릴은 황급히 말을 돌렸다.
“아바마마... 아바마마도 어렸을 땐 저 같았어요? 아까 저처럼 바보같이 다리만 부여잡고 끙끙대셨던 거예요?”
“그럼. 당연하지. 그대로 죽을 뻔 했단다.”
“정말요?”
“열세 살쯤이었나...? 허벅지에 창이 쑤셔 박혔을 때는, 정말이지 너무 아파서 차라리 이대로 죽어버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들었었지.”
저 조그마한 화살도 그렇게 아픈데 창이라니... 무슨 기분이었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
“뒤를 지켜주던 친구, 그리고 날 구하러 온 스승님이 없었다면 정말로 죽었겠지.”
“아...”
“그 후에도 몇 번이나 죽을 뻔 했고. 멍청하게 함정에도 몇 번이나 빠졌었고...”
이제 기억도 희미해질 만큼 오래 된 예전의 일이었다. 그 때는 정말 지옥 같은 경험이었는데, 지금은 그저 흥미진진하게 아들에게 들려 줄 수 있는 이야기에 불과하다니...
하지만 그때의 일에 워낙 큰 충격을 받았던 황후는, 지금도 전쟁이라면 치를 떨었다.
“수천의 적군이 나만 쫓아오는데... 정말로 간담이 서늘했다. 6시간 넘게 혼자 죽도록 추격을 따돌렸는데... 정말이지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단다.”
“으아... 생각만 해도 끔찍해요...”
“화살도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내가 고슴도치가 된 줄 알았다.”
“풉...! 웃어서 죄송해요. 많이 아프셨겠어요.”
“그래. 안 아팠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가 없구나. 그래도 그 전에 여러 번 겪어본 경험 덕에, 어떻게든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휴우, 한겨울의 산속에 쓰러져 얼마나 춥고 아프던지... 정말 살면서 제일 고통스러웠던 순간이었.. 아니구나.”
황제는 뜬금없이 아들에게 꿀밤을 날렸다.
“아야! 갑자기 왜 쥐어박으세요!? 저 환자예요!!”
살짝 톡 쳤건만 엔릴은 그야말로 엄살 작렬이었다.
“너 낳을 때가 가장 아팠다!!”
사랑하는 황후가 아이를 낳느라 아픈 모습을 볼 수 없다며, 마법으로 감각을 교환해 대신 산고를 겪어 주었던 황제였다.
17년 전에는 지금보다 마법수준이 많이 떨어졌기에, 간신히 찾아낸 방법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아하하.. 그러셨어요? 근데... 아니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태어난 게 죄예요!?”
“으음... 흠흠. 아무튼 나처럼 멍청하게 굴면 절대 안 된다. 특히, 리엘의 일이라고 이성을 잃고 성급하게 판단하면 큰일 날 수 있어. 냉정하게 상황을 따져 봐야 해. 나도 네 엄마가 위험하다는 소식에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들었다가 그렇게 될 뻔 했다니까...”
“네! 새겨 놓을게요.”
“그래. 고맙구나. 그럼 이제 어서 자렴. 떠나려면 얼른 회복해야지.”
“네”
“아바마마!”
“응?”
“항상... 항상 감사해요...!!”
고백하듯 수줍은 말에 황제는 멋쩍게 웃으며 떠났다. 방을 나서기 전에 마법사를 불러다 수면마법 걸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열심히 힐링을 받으며 강제로 며칠간 숙면을 취한 엔릴은, 예상보다 빨리 이틀 만에 다 털고 일어났다.
깨어난 후 삼일간은 영양가 높은 음식을 먹고 푹 쉬며 컨디션을 끌어올리고, 간단한 운동을 하며 몸을 풀었다.
그리고 출발 전날에는 무기와 갑옷, 온갖 마도구, 말과 마구를 준비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이었다. 아무리 태연하려 노력해도 긴장이 안 될 수가 없었다.
“엔릴.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했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