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엇갈림(7)
2017.03.24.
“살아 돌아오라고요.”
“그래. 죽지만 말고 돌아와라. 포로가 되느니 자결한다거나 하는 그딴 어리석은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고.”
“네...”
“전쟁 따위 어떻게 되도 상관없으니까 살아만 돌아오렴. 포로가 되도 좋으니까 죽지만 말거라.”
만약 엔릴이 포로가 되면 공주랑 교환해서라도, 아니 자신의 목숨과 교환해서라도 구해올 생각이었다.
“네 고맙습니다...”
황제는 무사히 돌아와 한층 성장할 아들의 모습을 기대하며, 근심으로 쿡쿡 쑤시는 마음을 애써 내리눌렀다. 그런데 그 애틋한 장면에 초를 치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잘 지킬 테니 걱정 붙들어 매. 어휴, 정말 저놈의 치맛바람...”
“......”
이 제국에서 저런 말을 툭툭 내뱉을 수 있는 사람은 레이튼 후작 한 사람밖에 없었다.
“아차, 미안.”
긴장 풀라고 일부러 한 말임을 알았기에, 황제는 대충 넘어가 주었다.
“됐다. 너도 죽지 말고 살아 돌아와.”
“걱정 마. 함께 무사히 돌아올게.”
대륙에서 적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강한 기사인 그가 곁에서 딱 붙어 지킬 예정인데다, 온갖 마법 아이템을 있는 대로 챙겨준 상황이었다.
후작이 보기에는 그러고도 좌불안석이 황제 부부가 오히려 이상해 보였다.
정작 황제 본인은 어릴 때부터 그렇게 전쟁터를 굴러온 주제에, 아들은 왜 그렇게 유리조각처럼 싸고도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 우리 아들 잘 부탁하고, 매번 미안하다. 네 부인에게도 미안하고...”
엔릴 때문에 지금 후작 부부는 생이별한 상황이었다. 매우 독특한 종류의 잉꼬부부인 후작내외는, 나란히 오러나이트로 원래 항상 전쟁터에 함께 나가곤 했다.
그런데 엔릴의 보호자로 후작을 붙여 주기 위해, 동부 실로엔 전쟁의 마무리를 후작부인에게만 맡겨 둔 상황인 것이었다.
“나중에 내가 우리 아내님한테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야지 뭐.”
“......”
황제가 딴청을 피우는 사이, 이윽고 황후도 배웅을 위해 밖으로 나왔다.
“리일...”
우는 모습으로 떠날 보낼 수는 없어, 감정을 추스르고 눈물 자국을 지우느라 한참이 걸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 펑펑 운 흔적이 숨길 수 없을 만큼 뚜렷이 남아 있었다.
“어마마마 눈에 눈물 나게 해드려 죄송해요. 하지만 꼭 웃으며 맞이할 수 있도록 무사히 돌아올게요.”
“그래... 건강하고, 몸조심하고.... 그리고 이왕이면 리엘과 함께 돌아오고.”
솔직히 리엘에 대한 원망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 애를 찾으러 아들이 적국 한복판에 뛰어들겠다는데, 어떻게 탓하는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하지만 지금 그런 생각 해봐야 아무 소용없었다. 그렇기에 그저 아들의 무사 귀환을 기원할 뿐이었다.
“네!!”
***
첫 번째 전투는 공성전이었다. 그리고 기억나는 사실은 그게 전부였다.
피융
챙!
채챙, 까강!
실제 전쟁은 상상했던 그 어떤 것보다도 훨씬 심한 지옥이었다. 말 그대로 아비규환. 여기저기서 정신없이 화살이 쏟아지고, 사방팔방에서 눈먼 검이 날아 들어왔다.
지휘? 그런 거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 원정군의 공식적인 지휘관은 엔릴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명목상일 뿐이었다. 실제로 모든 작전 수행과 지시는 레이튼 후작이 내렸다.
엔릴은 그저 그의 곁에 딱 붙어 살아남느라 바쁠 뿐이었다.
“...헉...헉....!”
누가 어떻게 공격하는지 파악할 새도 없이, 그냥 막고, 휘두르고, 베고, 피하고, 뚫고, 돌진하고... 그저 생존본능에 따라 살기위해 발버둥 칠뿐이었다.
머릿속이 텅 빈 채 엔릴은 그저 무아지경으로 검을 휘둘렀다. 사실 패닉에 빠져버리지 않고 이만큼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정도였다.
물론 혼자 힘으로 살아남은 건 절대 아니었다. 그를 지키는 기사들이 빈틈없이 겹겹이 둘러싸 귀한 황자님을 필사적으로 보호하고 있는 덕이었다.
게다가 오러를 깨우친 덕에, 같은 오러나이트가 아닌 이상 웬만한 적수가 없다는 것도 그나마 다행인 점이었다.
“하아... 하아...”
주변은 온통 시체들로 그득했다. 베이고 잘리고 꿰뚫린 채 죽어있는 시체들은 마치 지옥도를 방불케 했다.
특히 그가 이끄는 오러나이트 기사단의 차지공격에 갈가리 찢긴 시체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이 처참했다.
그 참혹한 모습 자체도 끔찍하고 역겨웠지만, 저걸 만들어 놓은 게 자신이라는 점이 더더욱 소름끼쳤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람을 죽여 본 게 처음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런 게 전쟁이라니...’
잠깐 딴 생각을 하는 사이, 미쳐 막아내지 못한 화살이 왼팔에 정통으로 꽂혔다. 하필이면 갑옷 틈이었다.
“아윽...!”
“전하!”
“전하! 뒤!”
괜찮다고 대답을 할 새도 없었다. 엔릴은 뒤에서 날아오는 창을 다급히 막아냈다.
챙, 스윽...!
피융
“전하!”
오러를 일으켜 창날 째로 베며 적의 목을 날려버린 엔릴은, 그새 또다시 날아든 화살을 다시 한 번 쳐냈다.
그리고는 왼팔에 꽂힌 화살의 대 부분만 잘라내었다. 억지로 뽑으면 출혈이 생기고, 그냥 두면 덜렁거려 방해가 되기에 한 응급처치였다.
“헉..허억...”
잠시 틈이 생기자, 엔릴은 암담한 심정으로 높다란 성벽을 올려다보았다.
‘대체 저걸 어떻게 공략한다는 거지...?’
“엔릴! 정신 차려! 지휘까지는 바라지도 않지만, 정신은 똑바로 차려야 할 거 아냐! 넌 그냥 살아서 따라만 와!!”
어디선가 버럭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엔릴은 혼미해지려는 정신을 다잡으며, 계속해서 베고 또 베었다.
어떻게 끝난 건지 잘 모르겠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성 안에 들어서는 중이었다. 점령에 성공한 모양이었다.
엔릴은 몰랐지만, 사실 이건 아주 여유 있게 승승장구한 전투였다. 저들이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덕에, 전황 자체가 전반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으윽...”
공포와 흥분이 가시자 그제야 여기저기서 지독한 통증이 느껴졌다.
몰랐는데 화살이 몇 개 더 박혀 있었다. 검이 스쳐 지나간 건지 얼굴도 여기저기 긁혀있었다. 뿐만 아니라 온통 피와 땀에 절은 몸은 너무 찝찝했다.
“전하, 치료를 받으셔야지요.”
“네...”
다행히 승리한 입장이었기에, 여유 있게 군의관의 치료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거친 환경이겠지만, 그래도 쫓기며 혼자 응급처치 하는 거에 비하면 천국 같은 상황이었다.
예전이었다면 툴툴거렸을 엔릴은, 출발 전 황제에게 굴러본 경험 덕인지 그저 남이 치료해 준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여겼다.
“그리고... 처음 치고는 잘 하셨습니다.”
레이튼 후작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사적으로는 황제에게도 반말을 찍찍 해대는 그였지만, 남들 보는 앞에서는 깎듯이 대우해 주는 게 당연했다. 특히 지금의 엔릴은 이 원정군의 공식적인 지휘관이었다.
“네... 고맙습니다. 경 덕분입니다.”
“그럼...”
“아, 경! 절대 민간인을 해치지 말라고 병사들에게 명령을...”
“전하, 전하께서 지휘관이십니다.”
“아... 그렇지.”
엔릴은 새삼 그 사실을 떠올리고는, 부관을 통해 각 부대의 대장들에게 신속히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는 치료는 뒷전으로 한 채 일단 시가지로 향했다.
엔릴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졌다. 리엘이 있을 곳으로 예상되는 마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도저히 가만있을 수가 없던 것이었다.
‘저 어딘가에 리엘이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역시나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였다. 널따란 성내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도 막막했다. 그래도 엔릴은 쉽사리 발걸음을 돌릴 수 없어, 포기하지 않고 여기저기 무작정 찾아 다녔다.
저기 보이는 저 금발의 뒷모습이 혹시 리엘인가 싶어 달려갔지만...
“에그머니나! 사..살려 주세요! 저, 전 아이와 남편이 있어요! 제발...”
당연히 아니었다. 적군의 복색, 그것도 매우 신분 높아 보이는 모습을 한 그의 모습에 마을 아낙들은 겁에 질려 덜덜 떨었다. 혹시라도 끌려가 치욕스러운 일이라도 당할까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하아... 놀라게 해서 미안합니다.”
엔릴은 힘없이 등을 돌렸다. 그 모습에 기사들이 다가와 돌아가기를 권했다. 적의 잔당들이 어딘가 남아있을지 몰라 호위를 위해 따라 온 임페리얼 가드였다.
“전하, 치료부터 받으셔야지요.”
“......”
“전하”
“알았다.”
‘그래. 여기에 있을 리가 없지. 별 일 없는 한, 레비넌 영지 근처를 지나가는 건 모레쯤이 될 거야...’
다행히 레비넌 영지는 원정군이 이동하는 경로에서 크게 멀지 않은 곳이었다. 미리 알고 따라온 것이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 루트가 달라질까봐 노심초사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생각해서 막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꺄아아악!”
어디선가 찢어질 듯한 여인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엔릴은 미친 듯이 말을 몰아 소리가 난 쪽으로 달렸다.
“멈춰라!”
막 도착한 곳에서는 눈살이 절로 찌푸려지는 역겨운 광경이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힘없는 민간인 여인 몇 명을 두고 아군 병사들이 집단 윤간을 하려하고 있었다. 양쪽에서 결박당한 채 미친 듯이 울부짖는 여인의 옷은 이미 반쯤 찢겨져 있었다.
“감히!!”
“저...전하!”
아무리 황자의 얼굴도 모르는 말단 병사들이라지만, 갑옷에 새겨진 황가의 문양을 못 알아볼 리는 없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절대 민간인을 해치지 말라고 했거늘!! 전시에 명령불복종은 즉결처형인 걸 모르더냐!”
“해..해친 적은 없사온데... 그저 계집을 잠시...”
“닥쳐라!”
정말 충격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뻔뻔한지... 해치지는 않았으니 괜찮다고 생각하는 저 정신상태가 심히 의심스러웠다. 그런데 더 황당한 것은, 다른 병사들의 표정도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경들!”
머리 끝가지 화가 난 엔릴이 차갑게 처형을 명령했다.
스릉...
수행하던 기사들이 그들의 목을 베는 소리가 들려왔다.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던 엔릴은 그대로 등을 돌려버렸다.
‘리엘도 어디선가 험한 일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내가 리엘의 말을 들어보려 하지도 않고 외면한 탓에 떠나보낸 거야... 내가 떠나보낸 탓에... 나 때문에 이런 일을 겪고 있으면 어쩌지...?’
생각만 해도 미칠 것 같았다.
‘내가 이름 모를 누군가를 도왔듯이, 부디 너에게도 따스한 손을 내밀어 주는 누군가가 있기를...’
지금은 그저 간절히 기원할 수밖에 없었다.
“전하, 이만 돌아가시지요.”
그런 간절한 바람을 모르는 기사들은 그저 돌아가기를 재차 종용했다.
“.....”
“전하, 우선 치료부터...”
‘여긴 없겠지...? 리엘이 이곳에 있는 건 아니겠지?’
한참의 망설임 끝에 엔릴은 결국 발걸음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