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구라도 낚이면 좋겠어-124화 (124/134)

124. 엇갈림(8)

2017.03.24.

“알겠다.”

성으로 돌아온 엔릴은 아까 했던 명령을 수정해, 민간인에게 손 하나 까딱하지 말라고 엄포를 내렸다. 그리고는 뒤늦게야 치료를 받기 위해 군의관에게 향했다.

군의관이 있는 막사에 도착해 보니, 그곳은 또 다른 전쟁터였다. 여기저기 피를 흘리고 있는 부상병들의 모습이 가득했다.

“여기 응급환자!!”

“이쪽은 절단 수술! 마취약 가져와! 어서!”

“소독약이 다 떨어졌어요!”

“마취약도 부족해!”

엔릴이 멍하니 둘러보는 사이, 군의관과 종군 힐러가 황급히 다가왔다.

“전하. 어서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아... 응...”

“일단 화살을 제거해야겠습니다. 간호병! 마취약을 가져오너라!”

다들 여기저기서 신음하고 있는 정신없는 와중에, 비교적 멀쩡한 엔릴이 혼자 의료인을 두 명이나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아무도 그것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지만, 엔릴은 왠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저기, 잠깐만.”

“네? 전하?”

“약품이 부족한 건가?”

“....네.”

“점령한 성에서 있는 대로 가져왔는데도?”

“그게... 네. 리테인은 우리 그라츠만큼 의술이 발달하지 않아 상비약이 많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마취약이 없으면 어떻게 수술해? 저기 저쪽에 다리가 뭉개진 저 환자, 잘라내야 한다며...”

“그.. 그게... 어쩔 수 없지만 그냥...”

“그럼 쓸데없이 나한테 마취약 쓰면 안 되는 거잖아. 아니, 약이 문제가 아니라... 저 사람들이 더 급한데...”

“전하, 하지만 전하께서는 고귀한 신분...”

“그만. 난 알아서 할 테니까, 다른 사람들부터 돌봐주면 좋겠어. 그냥 붕대랑 소독약만, 아니 그것도 됐어.”

“전하..!”

화살은 직접 뽑으면 되고, 나머지 치료는 힐링 마도구로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걸 왜 이제야 생각했지..? 전투 중간중간에 썼으면 훨씬 편했을 것을... 진짜 바보 같네.’

아까는 너무 정신이 없는 와중이라 새까맣게 잊어버린 것이었지만, 엔릴은 그저 자신의 멍청함을 욕했다.

“후우...”

그가 그냥 발걸음을 돌려버리자, 당황한 군의관들이 다급히 불러댔다. 하지만 엔릴은 그대로 나가버렸다.

성으로 돌아온 엔릴은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 그동안 부모의 테두리에서 얼마나 꽃처럼 곱게 자란 건지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얼마나 떠받들려 자랐는지도...

심지어 이렇게 전쟁터에서 구르고 있는 이 와중에도, 자신은 철저히 특권계층이었다.

그에 반해 병사들은 마치 소모품처럼 너무나 쉽게 죽어 없어졌다. 바로 두 눈 앞에서 순식간에 짚단처럼 우수수 썰려나가는 모습은 정말이지 충격적이었다.

그나마 겨우 살아남은 자들조차도, 팔다리가 잘려 비참한 모습으로 여기저기서 신음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난 겨우 화살 몇 대 맞았을 뿐인데... 그런 별 거 아닌 부상에도 가장 먼저 치료받을 수 있고...’

“휴우...”

자괴감이 들었다.

리엘이 왜 그렇게 신분 신분 거리며 어려워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 어마어마하게 느껴지는 차이와 거리감, 그로 인한 부담감을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신분을 알게 된 후 왜 내색하지 못했는지도... 그리고 더 이상 모른 척 할 수 없게 된 후에는 왜 그렇게 밀어냈는지도...

‘난 정말 아무것도 몰랐구나...’

지금 생각해 보니, 리엘이 자신의 정체를 알게 된 후 고민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하지만 갈등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붙잡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너무 힘들고 비참한 처지에, 자신에게 부탁해서라도 어떻게든 나아지고 싶은 건 당연한 마음이었을 테니까...

‘리엘... 내가 미안해... 네 입장을 조금 더 이해해보려 했어야 하는 건데... 그저 널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다 되는 줄 알았어. 너한테 뭐든지 다 해주고 싶다고 말한 주제에, 그동안의 난 단지 내 방식으로만 애정을 표현했던 거야... 배려란 건, 내가 원하는 걸 주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걸 줘야 하는 거였는데... 네 불안한 마음을 조금도 헤아려 주지 못한 나머지, 결국 널 막다른 길로 몰아넣은 것 같아...’

생각해보니 리엘은 늘 신분 차를 말하며 부담스러워했고, 언제나 자신 없어 했다. 그런데 한 번도 그걸 진지하게 공감해 본 적이 없던 것 같았다.

자신이야 다 가진 입장이었으니 아무 어려움 없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리엘 입장에선 어땠을까 생각해 보니,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 했을지 이제야 보였다.

둘 사이를 허락받고, 많은 사건사고들을 수습하는 과정들도 그랬다.

자신에게는 그저 내 편인 부모였지만, 그녀 입장에서는 어렵고도 어려운 사람들이었을 텐데... 자신 혼자만 그저 마음 편했던 것이었다.

‘날 일부러 속인 게 아니었을 텐데...’

그저 털어놓을 시기를 놓친 것뿐이었고, 그 이유도 그녀 자신 때문이 아니었다. 공국에 무사히 다녀오면 꼭 말하겠다고 결심하고 간 거였는데...

멍청한 자신은 그 마음도 몰라주고, 황비의 유도 질문에 넘어가 그녀를 절벽 아래로 밀어버렸다.

“리엘...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결정적으로, 그 엇갈림의 순간도 다 자신의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그렇게 삐쳐 거부해도 리엘이 억지로 끄집어내 주길 바랐던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기대였다.

가뜩이나 신분차로 인한 부담감에 더해, 당시 리엘의 위축된 심리상태를 생각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바람이었으니까...

그러니 리엘은 그저 그가 나오길 하염없이 기다렸을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게다가 몇 번이나 찾아와 기다린 걸로도 부족해 문 앞에서 쓰러지기까지...

그런데 자신은 그것도 모르고 찾아오지 않는다며 그저 원망했었다.

“바보... 멍청이... 쓰레기...”

뿐만 아니라 그 와중에도 리엘은 어떻게든 제 할 일을 다 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그것도 몰라준 채 끝끝내 마음의 문을 쾅 닫아버린 자신이 문제였던 것이다. 혼자 아이처럼 삐져서 한심하게 동굴 속에 처박혀 있는 꼴이었다니...

“미안해. 미안해... 내가 꼭 찾으러 갈게. 조금만 기다려 줘...”

***

리테인 쪽 어느 이름 모를 마을로 돌아왔던 난, 일단 여관에서 며칠 푹 쉬면서 거지 몰골을 회복했다.

씻고 밥 먹고, 옷도 사서 갈아입고... 시녀일하면서 열심히 벌어놨던 은화가 있어 참 다행이었다.

만사가 귀찮아져서 그냥 이대로 여기 주저앉아 버릴까 하는 들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 요상한 나라는 까딱 잘못하면 마녀로 몰려 끝장나기 십상이었다. 특히 나처럼 혼자 지내는 젊은 여자는 가장 만만한 표적이 되기 마련이다.

게다가 혹시라도 마법을 쓰는 모습을 보이기라도 했다간... 으윽, 그 뒤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다.

결국 난 다시 열심히 산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리고 한참을 헤맨 끝에 드디어 저 아래 마을이 내려다 볼 만큼 높은 지대까지 올라왔다.

“헉...하아...”

그래도 이것만 넘어서 반대쪽으로 가면 성공이겠지? 이번에는 꼭 되돌아가지 말고 저쪽으로 가야지!

잠시 숨을 고르며 쉬고 있는데 저 멀리 능선 너머에 일단의 군대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라츠 제국...군?”

맨 앞의 기수가 들고 있는 깃발은 그라츠 황실의 문장이었다. 나에게 아주 익숙한 저 문장을 보니 나도 모르게 또 눈물이 핑 돌았다.

선두는 그 어쩌고 후작이겠지? 리일의 검술 스승님이라는... 리일은 잘 지내고 있을까? 나 같은 건 벌써 잊고 예쁜 영애들을 만나고 있을까?

“리일... 보고 싶어요...”

깃발만 봐도 설레다니, 나도 참 중증이구나... 리테인 땅에서 저들은 적군일 텐데 반가운 기분이 들다니, 내가 정말 뼛속까지 제국민 다 됐나봐.

하지만 내가 뭐라고 생각하든 간에, 괜히 마주쳤다간 곤욕을 치를 수 있었다. 민간인 여자에게 있어 적군이란 무조건 피해 다녀야 하는 존재들이니까.

비록 내가 제국 귀족의 신분이라지만, 리테인 땅에서 혼자 어슬렁거리고 있는 지금에야 그저 흔해빠진 적국의 백성으로 보일 뿐이었다.

내가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 저들의 모습은 점점 지평선 너머로 멀어지고 있었다.

멀어져가는 저들의 모습이 마치 내게 등을 돌렸던 리일의 뒷모습 같이 느껴져, 또다시 눈물이 흘러나왔다.

“에이씨! 울지 마! 이제 나랑 아무 상관없는 세상이야..!”

난 눈물을 슥슥 닦아내고 등을 돌렸다. 바보 같이 또 울기나 하고... 바보 리엘... 바보. 바보...

하지만 나도 모르게 생각은 자꾸 리일에게로 향했다. 고작 이런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도 미치도록 그가 생각났다.

***

그렇게 서로 스쳐지나간 것도 모른 채, 리일은 오직 리엘을 찾기 위해 열심히 말을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기계적으로 달리고 있을 뿐, 눈이 반쯤 풀린 그의 상태는 영 엉망이었다. 전날 밤 한 숨도 못 잔 덕이었다.

전투 직후에는 치료하느라 정신없는데다가, 때마침 떠오른 리엘의 생각으로 침울해 하느라 잘 몰랐었다.

하지만 조용히 쉬게 되자 온간 끔찍한 잔영들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눈만 감으면 낮에 겪었던 시산혈해의 지옥도가 펼쳐졌다.

기괴한 모습으로 죽어있던 시체들이 벌떡 일어나 달려오는 것 같았다.

덕분에 엔릴은 하룻밤 내내 거의 공황에 가까운 상태에 빠져있었다.

“엔릴, 정신 차려.”

“......”

잠시 행군을 멈추고 휴식하는 사이, 레이튼 후작이 다가와 그의 상태를 살폈다.

“엔릴!”

짜악!

“......아...”

뺨을 갈기는 무자비한 손길에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정신 차려! 이럴 거면 왜 온 거냐!”

“아, 경...”

“그렇게 하루 종일 멍청히 있다간 죽어 나자빠지기 딱 좋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돌아가!”

“......싫어요.”

이제 드디어 레비넌 영지 근처를 지나갈 즈음이었다. 이제 와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엔릴은 끝내 고집을 꺽지 않았고, 다음날 무렵 드디어 두 번째 전투가 시작되었다.

두 번째 전투는 널따란 평원을 전장으로 하여, 이름 모를 작은 산을 통과한 직후 이루어졌다.

아무 생각 없이 이동한 엔릴은 몰랐지만, 산에서 공격당하면 지리적으로 불리할 게 뻔했기에 적군의 이동 경로를 미리 파악한 후작이 서두른 덕분이었다.

그 덕에 적들에게 유리한 위치를 내 주지는 않을 수 있었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 누구에게도 딱히 유리할 것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인지 전투는 우세했다 밀렸다 하며 하루 종일 치열하게 계속되었다.

“하아.... 하아....”

해 뜰 무렵부터 해 질 무렵까지 종일 죽도록 싸운 끝에, 시체가 산처럼 쌓이고 피의 강이 흘렀다. 죽은 시체들의 대부분은 리테인 병사의 복식이었다.

역시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어쨌든 승리한 것 같았다.

“수고했다. 어제보다 나아졌구나. 이렇게 계속 구르다 보면 전황을 파악하는 눈도 생길 거다.”

“감사...합니다...”

너무 지쳐서 팔이 잘 움직여지지도 않았다.

“저 구릉 너머에 임시로 진영을 차릴 것이니, 곧 쉴 수 있을 게다.”

“네...”

연이은 승리로 아군 진영에는 화색이 돌았다. 게다가 황자가 직접 군을 이끌고 앞장 서 싸우니, 병사들의 사기 역시 끝없이 치솟았다.

비록 그저 살아남는 것만도 벅찬 엔릴이었지만, 병사들은 어차피 잘 모르는 데다가 그것만으로도 대단히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한숨 돌린 엔릴은, 드디어 목적했던 바를 이루기 위해 조용히 막사를 나왔다. 그를 24시간 호위하는 임페리얼 가드들이 자동으로 따라 나왔다.

“전하, 위험합니다.”

“잠시 가볼 데가 있어. 멀지 않은 곳이고, 전쟁과 별 상관없는 작은 마을이야.”

“하지만...”

“이것 때문에 온 거야. 난 무조건 갈 테니 따라오든 말든 마음대로 해.”

“...모시겠습니다.”

미리 챙겨온 시커먼 로브로 몸을 가린 엔릴은, 조용히 밤늦게 진영을 빠져나왔다. 그를 따르는 기사 다섯이 소리 없이 뒤를 따랐다.

레비넌 영지는 이들이 진군하는 길목 근처에 위치해 있긴 했지만, 그저 작은 시골마을로 전쟁과는 한끗 빗겨난 조용한 곳이었다.

병참기지나 요새는커녕 아무 가치도 없는 영지였기에, 다행히 점령 대상지도 아니었다.

몰래 엔릴 잠입한 엔릴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미리 눈여겨 점찍어 두었던 마을 공동묘지였다.

이 밤중에 그녀가 여기에 와 있을 리는 없겠지만, 일단 뭐라도 단서를 얻기 위해서였다.

‘애스틴... 애스틴... 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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