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엇갈림(9)
2017.03.24.
역시 이곳에 왔었던 듯, 묘비 앞에는 꽃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리엘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몇 가지 물을 게 있네만...”
묘지기를 찾은 엔릴은 리엘의 인상착의에 대해 설명하며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이곳에 온 걸 본 적이 있는지, 혹시 매일 오는 건지, 아니면 한 번만 왔던 건지 등등...
“나리, 죄송합니다만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정말 송구하옵니다.”
“그렇게 대충 생각하지 말고 좀 더 꼼꼼히 생각해 보거라!”
은화까지 가득 쥐어 주며 닦달했건만, 돌아오는 대답은 영 뜨뜻미지근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묘비가 너무 많아 오가는 사람을 일일이 기억할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리...”
“눈에 확 띄는 인상이란 말이다! 봤다면 분명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어. 잘 좀 떠 올려 보아라!”
“죄, 죄송합니다. 저도 하루 종일 둘러보고 있는 건 아니라... 정말 죄송합니다. 나리...”
만족스럽지 못한 대답에 상대가 분노할까봐, 묘지기는 겁에 질려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기사까지 대동하고 온 모양새가 딱 봐도 대단히 높은 신분의 귀족이었다. 괜히 심기를 거슬렀다가는 뼈도 못 추리는 수가 있는 일이었다.
“하아... 수하를 하나 남기고 갈 테니, 혹시라도 뭔가 생각나는 게 있다면 곧바로 말해 다오.”
내일까지 근처에 머물다 오라며, 엔릴은 기사 하나를 떼놓고 다시 이동했다.
다음 행선지는 리엘이 잠시 있었다는 수녀원이었다. 본인이 한 번도 말한 적은 없었지만, 황제가 따로 조사한 보고서를 통해 이미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거기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리엘이라는 존재를 기억하고는 있었지만, 오래 전 떠난 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레비넌 백작저에도 들렀다. 신분을 밝힐 수 없어 황비의 시종이라고 둘러대고, 수상하지 않을 정도의 선에서 비올레티와 리엘의 이야기를 적당히 물어 보았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들러본 것이었는데,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아무 소득도 없었다.
백작가에 돌아오지는 않았으리라는 건, 사실 그도 이미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탈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대체 어디로 간 거지...? 다른 연고도 없는데...’
한때 가까웠다는 오라버니에게 간 건가 싶기도 했었지만, 이튼은 제도에 머물고 있을 터였다.
‘리엘... 무사한 거야?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엔릴은 짐작 가는 곳 뿐 아니라 닥치는 대로 마을 구석구석을 뒤졌다. 혹시라도 어딘가 여관이나 민가에서 지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렇게 온 영지를 뒤졌음에도 리엘의 머리카락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
엔릴은 생각지도 못한 인물을 맞닥트리게 되었다.
“......!?”
“화, 황자 전하...!”
뒤늦게 리엘이 사라진 걸 알고 영지로 쫓아온 이튼이었다. 예전에 얼굴을 몇 번 본 적 있기에 엔릴도 기억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대가 여긴 어쩐 일이지!!?”
혹시 하는 마음에 엔릴은 다급히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영 생뚱맞았다.
“죄송합니다. 전하...”
이 멀고 먼 타국의 작은 영지에서 황자를 만나다니, 그 순간 이튼은 자신이 크게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전쟁 중에도 불구하고 황자가 직접 리엘을 찾으러 왔다는 것은, 그 마음이 보통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죄송...하다니? 혹시...!”
“죄송합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이렇게 찾아오신 걸 보니 제가 쓸데없는 짓을 했던 것 같습니다.”
“뭐?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이튼은 순순히 이실직고 했다. 기우로 인해 자신이 강제로 리엘을 데려갔다고.
전하께서 분노한 나머지 리엘을 벌하실까 걱정되어 한 일이었다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둘 사이를 더 갈라놓은 꼴이 되어버렸노라고...
“이런 멍청한!!”
“송구합니다...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네놈 때문에 지금 리엘은 행방조차 알 수 없이 실종된 상태란 말이다!!!”
“정말이지 죄송합니다. 무어라 벌하셔도...”
“그래. 당연하지! 리엘의 제국의 귀족이다. 그런 그녀를 본인의 동의도 없이 멋대로 납치하다니, 중죄라는 건 알고 있겠지.”
“네.”
“리엘을 위해서 했다고는 하지만, 그로 인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일이 꼬여버렸단 말이다!”
도저히 쉽게 용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당장 어떻게 처리할지 결정할 수는 없었다.
이제 아무 관계가 아니라지만, 리엘이 한때 의지하던 오라비였다. 그런 그를 그녀에게 묻지도 않고 마음대로 처리해 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
치밀어 오르는 화를 삭이려 노력했지만, 리엘을 찾을 수 없는 이 암담한 상황을 떠올리니 자꾸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너 때문에...!”
하지만 마구 화를 내려던 엔릴은 멈칫했다. 이게 과연 남의 탓만을 할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자신이 그렇게 외면하고 틀어박히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악화되지도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일단 흥분을 가라앉힌 엔릴은, 리엘의 행방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자신보다 먼저 영지에 도착했다면, 분명 리엘의 흔적을 찾았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서였다.
하지만...
“송구합니다, 저하. 영지에 들렀던 것까지는 확인했지만, 그 후의 행방은 저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최근 며칠간 영지에서 그녀를 보았다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하아...”
너무나 답답했다.
엔릴은 일단 그를 기사에게 넘겨 제국으로 호송하라 명하고, 다시 한 번 영지를 샅샅이 뒤졌다. 하지만 잠도 안자고 밤새 그녀를 찾아다녔음에도, 끝끝내 아무 소득이 없었다.
결국 뜬눈으로 밤을 새고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진영으로 돌아온 엔릴이었다. 하지만 허탈한 마음 때문인지 잠도 제대로 오지 않았다.
“이제 어쩌지... 무슨 단서라도 발견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진영을 이탈해 리엘을 찾아다니고 싶었지만, 그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미친 짓이었다.
이 전쟁 와중에 적국의 황족이 적진 한복판을 혼자 어슬렁거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기사를 잔뜩 빼가자니, 그 또한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리엘, 제발 무사하기만 해 줘. 내가 널 꼭 찾으러 갈게...”
***
“우와... 인간 승리! 아니, 리엘 승리!!!”
영원히 못 도착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어찌어찌 여기까지 왔다.
산을 열심히 헤맨 끝에 세이라로 몰래 넘어가는 걸 성공하고 나니, 그 후는 꽤 쉬웠다.
물론 마을에서 수상한 자로 잡혀 곤혹을 치를 뻔했지만, 귀족 신분패로 간신히 모면할 수 있었다.
비록 거지꼴이었지만, 마법을 보여 주며 수행 중인 마법사라고 하자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던 것이었다.
그 후에는 마차를 빌려서 다시 제국 쪽으로 돌아가서, 관도를 타고 쭉 올라가 북부산맥으로 들어갔다.
“춥네... 확실히 북쪽이구나... 따뜻한 제도가 벌써 그립다. 따듯한 사람들로 가득했던 황궁도...”
열흘도 넘게 지났는데 아직도 추억을 떠올리면 눈물이 핑 돌았다.
하긴, 이게 어디 그렇게 쉽게 괜찮아질 일인가... 몇 주는커녕 몇 달이 지나도 나는 울고 있겠지... 몇 년쯤 지나면 그때는 좀 무뎌질까...?
그렇게 될 때까지, 아무도 날 모르는 곳에서 조용히 지내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척박한 오지는 안성맞춤이었다. 마침 이곳은 페텔 왕국의 잦은 약탈로, 터전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다.
일손이 부족한 마을이라면 몸을 의탁하기 쉬울 거야. 이 산구석에 힐링을 할 수 있는 마법사란 대단히 희귀한 존재일 테니까...
정 안 되면 깊은 산속 어딘가, 버려진 폐가를 찾아 혼자 먹고 살아야지. 하지만 한 번도 험한 일을 하며 살아본 적 없는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다.
생각해 보니, 난 야생에 적응하는 법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무를 한다거나, 불을 피운다거나, 무언가를 재배를 한다거나, 사냥감을 손질한다거나 등등....
전생에 비하면 죽도록 고생했다지만, 그래도 나름 이 세상에서는 굉장히 문명의 혜택을 받고 자란 편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할 줄 아는 거라곤 공격마법으로 동물을 사냥하는 것 정도?
“역시 마을에 들어가야겠어. 내 주제에 무슨...”
일단 난, 근처의 마을을 찾기 위해 다시 산 속을 헤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부스럭, 피융!
발 앞에 바로 화살이 날아와 꽂혔다. 그리고 동시에 수풀 너머에서 일단의 무리들이 나타났다.
“으흐흐... 이 산골에 이게 웬 년이지?”
“꾀죄죄하지만 씻겨 놓으면 제법 미인이겠는데?”
***
엔릴은 레비넌 영지뿐 아니라, 그 이후로도 지나가는 곳마다 인근 영지를 샅샅이 뒤지며 리엘을 찾아다녔다.
물론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결국 그는 후작에게 잠행을 들켜버렸고, 된통 혼났다.
그가 왜 이 먼 오지의 전쟁터까지 부득불 따라왔는지 후작 역시 알고 있었지만, 이건 정도가 너무 심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릴은 또 어떻게든 몰래 빠져나가 꿋꿋이 리엘을 찾으러 다녔다. 감시도 감금도 소용이 없었다.
밤이면 밤마다 쉬지도 않고 매번 그 짓을 해 대니 컨디션은 개판이었고, 그 덕에 전투 중에 수도 없이 많이 죽을 뻔했다.
급기야 후작은 애원하다시피 그를 설득했다.
“엔릴. 차라리 이대로 빨리 왕도까지 점령해서, 서둘러 리테인을 복속시켜 황명으로 대대적으로 찾자.”
“.......그 전에 리엘에게 무슨 일 생기면 어떻게 해요!?”
“멍청한 놈아, 무슨 일은 네놈한테 먼저 생기겠다!”
“..........”
“입 다물고 말 좀 들어, 제발! 너 이러다 죽어!!”
엉망진창인 그런 상황 속에서도, 다행히 정벌은 쑥쑥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시간은 훌쩍 흘러 전쟁은 결국 제국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한 달도 넘게 전쟁터에서 구르며 틈틈이 리엘을 찾았음에도, 엔릴은 그녀의 머리털 하나 발견할 수 없었다.
애초에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보다도 희박한 확률이었다.
그나마 가능성이 높았던 레비넌 영지에 가 보기 위해 따라나섰던 것인데, 그곳에서 찾지 못했다면 이 넓은 땅 어디에선가 우연히 발견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전하, 고생 많으셨습니다.”
“제가 한 게 있나요.”
말은 그렇게 했으나, 엔릴의 기도는 한 달 전에 비하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처음의 어리버리하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직접 지휘도 하며 제법 공을 세운 엔릴이었다. 언제나 솔선수범 앞장서며 병사들에게조차 으스대지 않고 몸 낮춰 함께하는 황자의 모습에, 모두가 그를 진심으로 따랐다.
“그럼 원정은 이 정도로 마치고, 치안을 유지할 병력만 남겨 두고 이제 회군하는 게 좋겠습니다. 황궁으로 돌아가셔야지요.”
“......”
점령지에 주둔할 병력은 이미 예전에 지원 와 있는 상태였다. 정예 병력이 제국으로 되돌아가면, 그 빈자리를 이들이 대신해 점령지를 유지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릴은 영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전하.”
“......”
엔릴은 미련이 남은 듯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전하, 이만 돌아가셔야죠.”
“저는... 저는 이곳에 남겠습니다.”
“전하!”
“리엘을 찾을 때까지 못 돌아갑니다.”
“하아...”
아무도 없는 곳으로 그를 끌고 간 후작은 평소와 같은 말투로 되돌아왔다.
“.......엔릴. 리엘이 리테인에 있는 지 없는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잖아요.”
“전쟁터에 오래 있어봤자 좋을 거 하나도 없어. 죽을 확률만 하루하루 높아질 뿐이지. 비록 전쟁은 끝났지만, 점령지의 치안이라는 게 그리 안전하지만은 않다는 걸 몰라?”
“저도 어린애 아니에요. 나름 오러나이트라고요! 그렇게 쉽게 당하지 않아요!”
“이 멍청한 놈! 네 녀석보다 훨씬 대단한 네 아버지도 전쟁터에서 몇 번이나 죽을 뻔했어! 넌 발끝도 못 따라갈 정도의 경지인데도 말이야!”
“.......”
“일단 흥분을 좀 가라앉히고 오늘은 쉬어. 내일 다시 얘기하자.”
하지만 후작은 그가 고집을 꺾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
그 날은 리테인 왕궁에서 승전 파티가 열렸다. 모든 병사들에게 술과 고기가 내려지고, 왕궁의 시설이 개방되었다. 여기저기서 승전을 축하하며 건배를 외치는 가운데, 엔릴은 혼자 쓸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같은 하늘 어딘가에 네가 있을까...?’
사람들이 환호하며 시끌벅적 떠드는 소리를 배경삼아, 멍하니 안뜰을 거닐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바람결에 무언가 이야기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