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구라도 낚이면 좋겠어-126화 (126/134)

126. 엇갈림(10)

2017.03.24.

“황자 전하의 무력이 폐하를 넘어설 정도라며?”

“이번 전쟁에서 정말 혁혁한 공을 세우셨어!”

“전하께서 몸소 앞장서시니 병사들의 사기도 남달랐다고!”

“리테인은 전하께 하사되겠지?”

“그렇겠지! 다음 전쟁에서도 함께하시면 좋겠다.”

“예끼! 이사람! 다음 전쟁이라니! 난 지긋지긋해! 그리고 당분간은 별 일 없지 않겠어? 동부도 다 정리되었는데...”

“왜? 북부가 있잖아. 페텔 왕국을 언제까지 저렇게 두겠어. 자꾸만 제국 북부를 침략해서 약탈한다는데, 본때를 보여 줘야지!”

“하긴, 그도 그렇구만... 맞다, 자네들. 그 소문 들었는가?”

왠지 낯간지러운 기분에 막 자리를 뜨려는데, 소문 이라는 단어 하나가 엔릴의 발을 붙잡았다. 리엘을 찾아다닌 후에는 작은 단서나 소문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귀 기울여 듣는 습관이 자리 잡힌 탓이었다.

“무슨 소문?”

“북부에 마녀가 나타나 페텔 잔병들의 목을 따고 다닌다는 소문 모르는가?”

“아! 나도 들었네! 북부의 금빛 마녀라고...”

“뭐시기?”

멈칫

귀가 솔깃해진 엔릴은 발걸음을 쉽사리 떼지 못하고 한참을 귀 기울였다.

“이 사람이 쯧쯔... 무지몽매한 리테인 사람도 아니거늘 마녀라니! 마법사라 해야지!”

“아무튼... 대단한 마녀, 아니 마법사라더군. 적들을 바람처럼 썰고 다닌다 하더라고.”

“계집이 그렇게 대단하단 말이야?”

“그래! 별명부터 거창하잖아. 북부의 금빛 마녀! 눈만 마주쳐도 즉사하고 하더군!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목이 슥 베어진다는데?”

“에이 말도 안 돼! 그런 헛소문을 어디서 주워들은 겐가?”

“헛소문이라니! 내가 얼마 전까지 북부에 있었잖아. 그쪽 약탈이 심해서 경계를 강화하느라 병력이 대거 파견되었던 거 모르나? 지금이야 이쪽 안정을 위해 대부분 이동했다지만, 거기에 있다가 온 사람들이 꽤 많네!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게!”

“그래도 소문이 과장되었겠지, 어떻게 사람이 눈만 마주쳐도 죽어? 정말 마녀가 아니고서야...”

“진짜라니까! 물론 나도 정말 본 적은 없지만... 헉, 저, 전하!!”

갑자기 엔릴이 불쑥 나타나자 병사들은 기겁을 하여 벌떡 일어났다.

“조금 전에 한 말, 다시 말해 봐!”

“네? 네!? 주,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그게 아니라! 조금 전에 한 말 자세히 좀 말해 보라고!”

뭘 어쨌다고 갑자기 죽을죄라고 무릎을 꿇는지, 황당했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 일분 일초가 아까웠다.

“네..네?”

“마녀 얘기!!!”

“네! 넵!! 부, 부, 북부... 북부에... 왠 마녀가... 그게 그러니까...”

한참 버벅거리던 병사는 어찌되었던 설명을 끝마치긴 했다.

요약하자면, 마치 게릴라 전사처럼 왠 젊은 여자가 적병을 썰고 다니는데, 그 행태가 하도 특이해서 소문이 무성하다는 것이었다.

“그 여자 용모특징이 어떻지?”

“그...금빛 마녀니까 금...금발에... 금안에...”

‘금안? 리엘의 눈동자는 오렌지색인데... 하지만 햇빛 아래에서 금색으로 보일 수도 있어. 무엇보다도 눈만 마주치면 죽는다는 건...’

뒤늦게나마 들은 덕에, 그 역시 리엘의 능력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타인의 정신에 강제로 간섭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혹시...?’

눈을 마주친 순간 목이 베어진다는 게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게다가 바람의 칼날은 리엘의 전매특허였다. 그에게도 몇 번이나 보여주며 자랑했었던...

‘혹시 정말 리엘? 그런데 리엘이 거기에 왜...?

***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음심을 품고 달려든 적들을 물리친 것 까지는 좋았는데, 한 번에 몰살시키지 못한 탓에 잔당들 몇 놈이 도망치고 말았다.

그 다음의 전개는 뻔했다. 도망간 적들은 패거리를 데리고 다시 몰려왔고, 난 닥치는 대로 적을 죽여 가며 쫓기기 시작했다.

덕분에 웬 계집이 부족의 전사들을 죽이고 다닌다는 소문이 퍼진 것 같았다. 그리고 길치인 난, 설상가상으로 길을 헤맨 끝에 그들의 영역으로 들어와 버렸다.

이젠 가는 곳마다 쫓기는 신세였다. 결코 내 의도가 아니었는데, 저들은 내가 제국에서 파견된 비밀병기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헉... 헉... 대체 어디로 가야 제국 쪽인 거야...!”

나는 왜 길치로 태어난 것인가... 한탄할 겨를도 없었다. 그리고 이놈의 적들은 왜 이렇게 끝도 없이 나타나는지...

그나마 정규군이 아닌 게 정말 다행이었다. 내가 마주쳤던 적들은, 부족 싸움에 패한 쪽의 유랑민들이었다.

승리한 부족이 페텔 왕국을 세웠고, 패배한 쪽은 힘없는 떠돌이 신세가 되어버린 듯했다. 그리고 이들이 제국령으로 넘어와 약탈을 일삼는 주범들이었다.

“저기다! 족장님의 원수를 갚아라!!”

미친놈들. 먼저 시작한 건 네놈들이잖아! 그럼 가만히 겁탈당해 줬어야 하냐고!

수십 명의 전사들이 나를 둘러쌌다.

휘잉!

일단 강한 풍압으로 포위를 흐트러트린 후,

찌릿!

맨 앞 놈부터 차례로 멈칫하게 만들었다. 오래 간섭을 유지할 필요도 없었다. 내가 마법을 발현하는 찰나의 순간동안만 움찔하게 하면 된다.

그리고는 스윽!

경동맥을 베고 지나간 날카로운 바람에, 적들은 차례차례 목에서 피를 뿜으며 죽어갔다.

“눈을 마주치지 마! 저년은 마녀다! 죽고 싶지 않으면... 커헉...!”

뭔가 잘못 알고 있는 모양인데, 내 쪽에서 간섭을 행사할 때는 눈을 마주칠 필요도 없다고! 네 놈 생각을 들여다 볼때나 필요한 거지!

사람을 죽인다는 느낌도 별로 없이, 그냥 기계적으로 차례차례 없애 나갔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으니까.

게다가 이놈들 살려둬 봤자, 나처럼 힘없는 사람들을 약탈하고 죽이고 다니겠지. 만약 나 역시 힘이 없었다면 그 자리에서 강간당하고 살해당했을 거야.

여긴, 죽지 않으려면 죽여야 하는 세상이니 양심의 가책 따윈 필요 없어!

“한꺼번에 쳐!”

아직 살아있는 적들이 다시금 포위를 좁혀오기 시작했다.

휘잉!

하지만 강풍을 날리자 저들은 비틀거리며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다시 차례차례...

몇 분이 흐르자 서 있는 사람은 나밖에 안 남아 있었다.

“하아... 하아... 머리... 깨질 것 같아...”

그래도 수십 명 정도라 무사히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이지, 인원수가 백 단위로 넘어가면 적들을 베기 전에 내가 먼저 뇌의 과부하로 쓰러질 게 뻔했다.

그래도 나 정말 강해졌구나. 진즉 이랬으면, 여우사냥 때 그렇게 죽을 뻔 하지도 않았을 텐데...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꼴이라니, 난 왜 항상 이렇게 뒷북일까. 리일과의 일도 그렇고...

“리일... 나 이제 더 이상 예전의 리엘이 아니게 되었어요... 리일이 아는, 좀 밝히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 순진무구했던 나는 이제 없어요.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것이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 슬프네요...”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같은 바람 계열 마법으로 난 리일과 게임을 했었다.

공을 날리며 웃고 떠들고, 함께 요리를 해 먹고... 그와 함께 하던 즐거웠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그러던 마법을, 이제는 남을 해치는 데 쓰고 있구나. 아무렇지도 않게...

감성이 메말랐는지 이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사람을 죽였다고 벌벌 떠는 것도 사치일 지경이었다.

지금 내게 남은 건 그저... 생존본능 뿐이었다. 적들의 시체를 뒤져 식량을 빼앗고, 그걸로 연명하고...

이렇게 연명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차피 이러다 언젠가 여기서 죽을 텐데... 조금 다르긴 하지만, 소원대로 아무도 모르게 혼자 있게 되겠구나.

돌아가고 싶어. 그때 그 시절로 너무나 돌아가고 싶어. 하지만 영원히 불가능하겠지. 당장 이 곳을 벗어날 줄도 몰라 그저 헤매고 있는데...

마을을 찾아 조용히 살겠다는 원래의 계획은 다 어디로 가고, 난 어딘지도 모르는 넓은 북부지역을 그저 끝없이 떠돌았다.

완전히 길을 잃었다. 인생의 길을 완전히... 뒤늦게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제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 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처음부터 그를 속이지 말 걸 그랬어. 신분을 알았을 때 솔직히 말하고, 감히 제가 넘볼 수 없는 분이니 놓아달라고 할걸...

아니면 그 후에라도 미리 말할 걸... 사실 먼저 눈치 챘었는데, 부담스러워서 말을 못 했다고. 내가 너무 절박해서 뭐라도 붙잡고 싶어 모른 척 했다고...

아니, 적어도 그렇게 쉽게 포기하고 떠나려 하지 말고 조금 더 빌어보기라도 했으면... 그냥 뻔뻔하게 더 매달려 볼걸...

내 발로 나서지 않았다면 오라버니가 날 강제로 데려오는 일도 없었을 텐데...

하지만 그땐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겁쟁이 같이 들리겠지만, 내가 그렇게 도망치듯 떠나려 했던 건 두려워서였다.

변한 리일의 모습을 보는 게 너무 무서웠으니까. 그 애정 가득한 따뜻한 눈동자가, 차가운 경멸로 바뀔 까봐 너무 겁이 났다.

혹시라도 분노한 그가 차갑게 돌아서며 나를 벌하라고 할까봐, 황족을 능멸한 무엄한 죄인에게 처벌을 명할까봐...

결국 그렇게 지독하게 상처받고 싶지 않았던 비겁한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오라버니가 나를 걱정한 것도 다 일리 있는 일이었다.

“그래도 내가 미쳤지...”

적어도 폐하의 말이라도 들을걸 그랬어. 리일과 설령 잘못 되더라도, 모든 걸 놓아버리지 말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차라리 그때라도 제국으로 돌아가, 어딘가 구석에 얌전히 정착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그저 멀리멀리 도망치고 숨고 싶다는 생각에 바보 같은 선택을 해 버렸어...

대체 무슨 용기로 혼자 겁 없이 돌아다니려 한 건지... 나는 왜 이렇게 어리석을까. 혼자 똑똑한 척은 다 하더니... 정말 허당도 이런 허당이 없네.

하지만 세상은 내게 슬퍼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마녀다!”

“잡아라!! 죽여!”

***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지만, 어쨌든 살아남은 난 광활한 대지를 터덜 터덜 걸었다. 그런데 저 뒤쪽 멀리서 또다시 적들이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너무 지쳐서일까, 더 이상 싸울 의지도 들지 않았다. 쫓기며 누적된 부상도 점점 심해져 이제 도망칠 기력도 없었다.

적이 다가오든 말든 등 뒤가 궁금하지도 않았다.

돌아보지도 않은 채, 난 그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중천에 떠 있는 햇살이 유난히 눈이 부셨다. 해가 떠 있는 저쪽이 남쪽이겠지.

그리고 저 너머 아름다운 황궁에 그가 있겠지. 따뜻한 봄날의 햇살 같은 리일이...

점점 소란스러움이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마치 다른 세상 이야기인 듯,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고 웅웅 멀게만 느껴졌다.

난 그저 힘없는 발걸음으로, 해가 떠있는 방향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가만히 내딛었다.

“보고 싶어... 너무 보고 싶어...”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해서인지 눈앞이 흐릿했다. 너무 무리해서 능력을 써서인지 머릿속이 멍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냥 기계적으로 발걸음을 움직일 뿐이었다.

하지만 걸어도 걸어도 태양은 가까워지지 않았고, 땅은 끝도 없이 넓었다. 그 넓은 지평선 너머에서 또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지긋지긋한 것들...”

피융

뒤쪽에서 날아온 화살이 귓가를 스치며 지나갔지만, 신경도 쓰고 싶지 않았다. 그냥 한 걸음이라도 걷고 또 걸었다. 무작정, 리일이 있는 곳과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고 싶어서였다.

그렇게 멀리 도망치려 했는데, 왜 죽을 때가 되어서야 다시 다가가고 싶은 건지... 나도 참 내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피잉!

“아윽...”

뒤에서 날아온 화살이 팔뚝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봤자 원래 있던 상처에 하나 더 추가된 것뿐이라 티도 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간절한 바람 덕분인지, 언덕 너머에서 불쑥 환상처럼 리일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가 만들어낸 환영이겠지만 마치 진짜처럼 생생했다. 조각 같은 얼굴도 그대로였다. 아니, 더 잘 생겨진 것 같았다.

몽롱한 정신에 흐릿한 시야였지만, 그래도 그의 얼굴은 아직도 이렇게 뚜렷이 생각해 낼 수 있나 보네...

“......”

나는 말없이 물끄러미 앞을 바라보았다.

“...&[email protected]&....!!”

환영은 마치 진짜인 듯 입을 열어 내게 말까지 걸려 했다. 다급한 표정으로 뭐라 소리치는 것 같았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좋다...”

입가에 살짝 미소를 매단 채,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난 눈을 감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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