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재회(1)
2017.03.24.
“리엘!!!!!!”
***
정신이 들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사방에 널린 적들의 시체였다. 익숙한 혈향이 코끝에 감돌았다. 최근 몇 주간 익숙히 보던 광경이었다. 하지만 딱 하나 익숙하지 않은 게 있었다.
“리엘!! 정신이 들어?”
나 지금... 리일의 품에 안겨있는 거야? 어떻....게?
“리엘!!!”
그녀가 대답 없이 멍하니 바라보자, 리일이 애타게 재촉했다.
“.......”
“리엘, 나야. 나 알아보겠어?”
“....리...일...?”
“리엘.... 왜 이렇게 다쳤어... 왜... 왜 이렇게 엉망진창이 된 거야... 내가,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리일...”
“이제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 앞으로 절대 널 떠나보내지 않을게. 늘 말뿐이었지만, 이젠 정말... 정말로 내가 지켜줄게!”
“있잖아요...”
“리엘, 지금 너무 기력이 떨어져 있어. 나중에, 나중에 얘기하자.”
하지만 난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다.
“그거... 알아요?”
“무슨..?”
“우리 진짜 우연히 만난 건 이번이 딱 세 번째예요...”
맨 처음 운하에서, 그 다음 멧돼지 앞에서, 그리고 지금...
“리엘...”
“이제 진짜... 우리 운명인... 거죠?”
“아니. 우린 처음부터 운명이었어.”
“고마...워요...”
온 힘을 다해 말을 하고 나니, 남아 있던 모든 기운마저 전부 빠져버렸다.
“리엘, 나 이제 절대 널 놓치지 않을 거야...”
꿈에서라도 다시 듣고 싶었던 그 목소리를 들으며, 난 다시 스르르 눈을 감았다.
***
얼마 전 북부의 금빛마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엔릴은, 그 자리에서 바로 리테인을 떠났다.
후작에게 말했다가는 절대 못 가게 할 것이 뻔했기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무작정 나와 버린 것이었다. 저 소문이 정말 리엘이라면, 일분 일초도 지체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호위 하나 없이 홀몸으로 뛰어든 꼴이 되어버렸지만, 그 덕에 늦지 않게 리엘을 구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온 북부를 다 뒤지며 얼마나 온 사방을 헤매고 다녔는지 모른다.
그렇다 하더라도, 정말이지 운명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만남이었다.
아무리 소문을 쫓고 쫓아 그녀의 행적을 쫓아왔다지만, 이 넓은 북쪽 땅에서 그녀를 때마침 만난 건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리엘!!!!!”
당시의 상황은 너무나 급박했다. 적들은 이미 리엘의 바로 뒤까지 쫓아와 있던 상태.
그런데 이미 모든 걸 포기한 모양인지, 그녀는 저항조차 하지 않을 채 그저 우두커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푹!
“흡...”
엔릴은 급한 대로 그녀를 안고 몸을 돌려 화살을 막아냈다. 팔뚝에 틀어박히는 화살을 대충 잘라 던지며, 정신없이 적들을 제거했다.
감격적인 해후를 나눌 겨를 따윈 없었다.
한쪽 팔로는 리엘을 안고 보호하며, 나머지 한 손으로 미친 듯이 검을 휘둘러 적들을 마구 베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오러가 번쩍이고 지나갈 때마다, 적들이 우수수 잘려나갔다.
하지만 적들은 끝도 없었다. 대체 어디서 이렇게 몰고 온 건지, 거의 백여 명에 다다르는 수였다.
퓩!
어디선가 또 화살이 날아와 꽂혔다. 서둘러 달려오기 위해, 무거운 플레이트 메일 대신 경갑을 입고 온 탓이었다.
하필 어깨에 정통으로 박힌 화살 때문에, 팔에 힘을 줄 수가 없어 하마터면 리엘을 놓칠 뻔했다.
“으으...”
억지로 힘을 줘 버텼지만, 근육이 움직일 때마다 화살이 파고들어 끔찍하게 아팠다. 이대로는 리엘을 떨어트릴 것 같아, 잠시 공격이 뜸한 틈을 타 화살을 억지로 잡아 뽑았다.
“크윽... 아윽.....으...”
그리고는 급한 대로 마도구로 대충 힐링하며, 또 다시 리엘을 안아들었다.
아무리 그가 오러나이트라 하더라도, 의식 없이 축 늘어진 사람을 보호하며 적들을 베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엔릴은 필사적이었다. 반드시 리엘과 함께 살아나가야 했다.
“윽...”
다리에 또 화살이 박혔지만, 돌아볼 겨를도 없었다. 엔릴은 다시 억지로 몸을 움직였다.
이대로 무너져 버리면 리엘 역시 죽을 거라는 두려움은, 그에게 초인적인 의지력을 불어 주었다.
“하아... 하아...”
일단은 겨우 따돌렸지만, 그 후로도 추격전은 한참 계속되었다. 황제가 우려했던 바와는 조금 다른 양상이었지만, 결국 그런 상황이 오고야 만 것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혼자인 것보다 훨씬 불리한 처지였다.
잠시 깨어났을 때를 제외하면 내내 의식이 없던 리엘이었다. 그런 그녀를 안아든 채 엔릴 혼자 정신없이 적을 피하고, 죽이고, 싸우며 벗어나야 하는 것이었다.
그나마 전쟁터에서 구를 만큼 굴러본 덕에 어느 정도 대처 경험이 있어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지독히 절망스러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절대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리엘, 반드시 널 지킬게...!!’
***
며칠 후.
“으음...”
“리엘! 정신이 들어?”
눈앞에 그토록 그리워하던 리일의 얼굴이 한가득 들어왔다.
“리....일?”
리일이 어떻게 내 눈앞에? 꿈이... 환영이 아니었던... 거야?
“리엘! 리엘...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정말... 널 이대로 잃게 될까봐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라...”
와락
그가 나를 격정적으로 끌어안았다. 나 역시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의 등을 감싸안았다.
“......”
그를 안고 있는 내 양 팔이 기쁨과 슬픔으로 하염없이 떨렸다. 너무 황홀하게 행복해서 눈물이 끝없이 흘러나왔다.
“흑... 흐흑...”
“리엘... 이제 괜찮아. 다 괜찮아...”
“리일... 꿈인 줄 알았어요... 리일이 여기 어떻게...?”
“꿈일 리가 없잖아. 내가 왔어. 네 곁으로 내가 찾아왔어. 너무 늦어서 미안해...”
“......”
날 찾으러 왔다니... 그가 직접 날 찾으러 왔다니... 너무 고마워서 다시 한 번 눈물이 핑 돌았다.
“리엘. 미안해. 내가 정말 미안해...”
“아니에요. 리일... 제가 더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절 잊지 않아 줘서, 절 찾아 줘서...”
그리고 절 구해 줘서요...
언제나 날 구해주던 리일은, 또 다시 날 지켜주었다.
“미안해... 그렇게 떠나보내면 안 되는 거였는데... 내가 어리석어서...”
“아니에요. 제가...”
난 막 입을 열어 그에게 변명하려 했다. 또 그를 놓칠까봐, 또 말하지 못해 그를 잃을까봐... 그때의 엇갈림, 그리고 내 진심 등등... 모든 걸 말하고 싶었다.
“알아. 말하지 않아도 이미 다 알아.”
“어떻...게요?”
“편지... 봤어. 누나와 아바마마께도 들었고.”
“아...”
나도 잊고 있던 거였는데, 용케 발견한 모양이었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정말 잘못했어.”
“아니에요. 말하지 않은 제 탓이잖아요. 그리고... 그것 말고도 그동안 제가 잘못했던 거고요...”
“아냐. 그런 거... 이제 괜찮아. 정말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냥 내 곁에 있어주기만 하면 돼.”
“고마워요...”
“우린 운명이니까. 이젠 절대로 놓치지 않을 거야.”
“있잖아요. 마치 꿈속 같았던 그때... 그때 리일이 이렇게 말해 주었어요. 우린...”
“우린 처음부터 운명이었다고.”
“맞아요. 운명... 맞아요.”
난 한참을 그에게 안겨 울었다.
“고마워, 리엘... 정말 고마워. 살아 있어줘서 정말 고마워...”
“저야말로요... 정말 고마워요... 나를 찾아줘서. 나를 포기하지 않아 줘서...”
“미안해. 리엘... 내가 너무 미안해. 좋아한다고만 했지, 그동안 널 진정 이해하지 못했나 봐.”
리일은 뭐가 그렇게 미안한지, 사과하고 또 사과하고 거듭 사과했다.
“아니에요. 제가 죄송해요...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솔직하지 못했으니까요.”
“아냐, 내가... 내가 제대로 들어보려 하지도 않고 외면해 버려서...”
“저야말로요. 미리 말하지 못한 것도 저였는데, 결국 제가 먼저 도망쳐 버렸잖아요.”
오라버니가 강제로 데려간 것도 있었지만, 그 전에 내 발로 먼저 떠나온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다 알아. 어떻게 된 건지 이미 들었어. 리엘 탓이 아니었잖아.”
“고마워요... 그리고 리일, 있잖아요. 저 할 말이 정말 많아요. 편지에 쓴 거 말고도요... 이젠 다 말할 수 있어요. 제가 그 동안...”
“쉬잇, 이제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아. 우리 지금은 그냥 이 순간을 즐기자.”
오랜만이었다. 그의 뜨거운 입술도, 달콤한 숨결도... 그리고 이 짜릿한 감각도...
입술을 탐닉하던 말캉한 그의 혀가 내 눈가로 올라와 눈물을 콕 찍어 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귀를 향해 이동하더니 점차 목덜미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 리일... 그리웠어요. 너무 보고 싶어서... 죽기 전에 딱 한 번만 마지막으로 보고 싶었는데...”
“쉬잇. 그런 끔찍한 말 하지 마. 나랑 백년해로하기로 했잖아. 우리 아이가 아이를 낳고, 또 그 아이가 아이를 낳을 때까지 우린 함께 행복할 거야.”
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열기 가득한 그의 입술이 점차 아래로 내려왔다. 나 역시 정신없이 손을 뻗어 그의 몸을 탐했다.
“읏...”
그런데 그때 갑자기 짧은 신음소리가 들렸다.
“리일! 다쳤어요!?”
“괘..괜찮아...”
그제야 그의 엉망진창인 몰골이 눈에 들어왔다. 그간 리일이 얼마나 고생했는지를 역력히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이제야 눈치 채다니! 이렇게 상태가 엉망인데...
“괜찮기는요!!”
얼기설기 대충 감아둔 붕대 곳곳에서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날 보호하며 빠져나오느라 내 몫까지 그가 전부 부상을 입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날 간호하느라 제대로 제 몸은 제대로 돌보지 못했으니...
나 때문에... 고생 한 번 안해 보고 곱게 자랐을 리일이... 그러고 보니 무언가 느낌이 훌쩍 달라져 있었다. 어딘지 성숙해 보인다고 할지, 어른스러워졌다고 할지.
“괜찮아. 힐링하면 금방 나아.”
“제가 해드릴게요!”
“아냐. 마도구 있어. 마법 많이 쓰면 머리 아프잖아. 리엘은 그냥 쉬어.”
아... 난 어떻게 이렇게 싹 나아있나 했더니, 그 귀하다는 힐링용 마도구를 써 준 거였구나... 그런데 제 몸은 신경도 안 쓰고 며칠 내내 나만 치료해 주다니...
“하지만...”
“정말 괜찮아! 나중에 할게. 지금은 그런 것보다는...”
“꺅!”
리일이 나를 순식간에 덮쳐왔다.
***
한참 폭풍 같은 시간을 보낸 후, 우린 나른한 얼굴로 침대에 꼭 붙어 누워 있었다.
그의 팔을 살포시 베고 누워 뒹굴거리는 이 순간, 난 너무너무 행복했다. 이보다 좋은 순간은 다시 안 올 것 같을 만큼 기뻤다.
“정말 좋다. 리엘과 함께하는 이 순간, 너무너무 행복해.”
그 역시 같은 소감이었다. 그런데... 왠지 좋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한 것 같아, 난 뜬금없는 사랑고백을 해버렸다.
“리일, 저 리일 정말 사랑해요. 정말 많이 사랑해요.”
좋아한다는 말이 아닌 사랑한다는 말. 낯부끄러워서 평소에는 거의 하지 않았던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조금의 어색함이 없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와락!
리일은 말 대신 나를 으스러지게 끌어안았다.
“리일...?”
“나도... 나도 사랑해. 리엘. 두 번 다시 잃지 않을 게. 제발 내 곁을 떠나지 말아줘.”
“약속할게요.”
“......”
“영원히, 리일 옆에 있을게요.”
“고마워... 그리고 나도 약속할게. 이제 두 번 다시 내가 먼저 등 돌리는 일은 없을 거야.”
“저도 고마워요...”
리일뿐 아니라 나 역시 많이 달라져 있었지만, 둘이 함께 있는 이 순간만큼은 우린 그대로였다. 그때 그 시절과 조금도 변함없이 풋풋한 연인의 모습,
쪽, 쪼옥... 쓰읍...
아니, 정정. 풋풋하다고 하기엔 우리 둘 다 좀... 야한 걸 너무 좋아했다. 제대로 대화를 나눌 시간도 없이, 역시나 또 뜨거운 시간이 시작되어 버렸다.
***
“리엘, 우리 돌아가면 결...”
“잠깐만요 리일, 저 그 전에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요.”
아까부터 얘기하려 했는데, 자꾸만 덮쳐오는 리일 때문에 이제야 입을 열 기회가 생겼다.
“뭔데?”
“긴 이야기지만... 들어 주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