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재회(2)
2017.03.24.
“그럼. 당연하지. 뭐든지 말해도 돼.”
난 드디어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가 이미 내가 남긴 편지를 봤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 못 다한 이야기가 많았다.
그리고... 그의 눈을 마주 보며 직접 내 입으로 말하고 사과하고 싶었다.
“제가 레비넌 백작가의 딸이 아닌 건 이미 알고 계시죠.”
“응.”
“하지만 단순히 전해 듣는 것과 달리, 제게 있어서 그 일은... 차마 말 한두 마디로 끝낼 수 없을 만큼 큰 상처였어요...”
“응... 당연하겠지.”
진짜 백작 영애로 자라온 시절에서부터 갑자기 바닥으로 떨어졌던 사연, 그리고 얼떨결에 제국에 대신 오게 된 일까지...
리일도 대충 보고서로 들어 알고는 있겠지만, 이렇게 내 입으로 직접 듣는 건 또 다른 느낌일 것이다.
“정말... 하루아침에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어요.”
“얼마나 충격이었을까...”
“리일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신분이겠지만, 저도 나름 평생을 귀하게 떠받들려 자라온 백작가의 아가씨였어요. 그런데... 부모라 알고 있던 사람들은 한순간에 내게 등을 돌리고, 친엄마는 내 일로 처형당했어요. 난 모든 것을 잃고 한순간에 집밖으로 쫓겨났죠. 단 한 번도 혼자 힘으로 살아본 적이 없었는데... 고작 열다섯의 어린 나이였는데... 흐흑... 흑...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요.”
“리엘...”
“그래서 더 그랬어요. 죽을 만큼 힘든데 어떻게든 버티려고, 혼자 살아 보려고 푼수 같은 성격도 스스로 만들어 내며 씩씩한 척 했어요. 그렇다고 죽을 수는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서 뭐라도 붙잡고 싶을 만큼 미치도록 절박했어요. 그래도 제가 나빴죠...”
“아.. 리엘, 얼마나 혼자 고생했을까...”
“그렇지만... 리일이 누군지 처음엔 정말 몰랐어요. 이건 정말 믿어주세요.”
“응. 알아. 난 무조건 리엘을 믿어.”
“고마워요. 하지만 결국 알아버리고 말았죠. 편지에도 썼듯이, 리일의 처소에 끌려가 밤을 새웠던 날 처음 눈치 챘어요. 확실히 알게 된 건 초상화 덕분이었지만요. 그런데 저에 비해 너무 대단한 신분인 리일을 보며... 그 앞에서 차마 정체를 안다고 말할 수가 없었어요. 그걸 말하고 나면 제가 감히 나설 주제가 안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주제라니...”
“처음에 신분을 알고 났을 때 정말 많이 고민했어요. 멀어지려 노력도 해 봤다가, 정말 운명이라면 욕심을 내 봐도 좋지 않을까 하다가, 제 처지가 너무 힘들고 비참해 뭐라도 붙잡아 기대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처음엔 저도 진심이 아니었기에,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도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참 속물이었죠.”
“아냐. 그렇지 않아, 리엘. 내가 나이에도 지위에도 맞지 않게 순수하게만 살 수 있었던 건,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 모든 사람들이 나를 보호해줬기 때문이었어.”
“......”
“리엘, 네가 살아남기 위해 혼자 악착같이 발버둥치는 동안, 나는 그저 솜털같이 따뜻한 세상에서 편히 자라왔어. 그런 내가 어떻게 널 비난하겠어.”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리일, 그거 기억 나요? 외궁무도회 때 제가 물어봤잖아요. 황태자 아니냐고...”
“아? 응.”
“리일이 딱 잘라 부정했을 때 전 차라리 안도했어요. 본인이 부정하는데 내가 어떻게 아는 척 하겠냐며, 스스로 변명했죠. 물론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황태자’라는 단어가 준 오해였지만요.”
“응! 난 사실을 말했다구!”
이 와중에도 리일이 너무 귀여워, 난 쿡쿡 웃으며 그의 볼을 찔러보았다.
“네네. 아무튼 제가 나빴어요. 심지어 리일의 진짜 마음을 알고 있었으면서도요.”
“응?”
“제가 차라리 눈치 채 주길 바라는 마음에 드레스를 보냈잖아요.”
“아...”
“죄송해요. 그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랬구나...”
“몇 번 그렇게 숨기고 나니 더더욱 말할 수가 없어지더라고요. 게다가 제가... 남들과 좀 다르니까... 더욱 사실을 숨기고 싶었어요. 한 번 털어놓기 시작하면 전부 알려지게 될까봐. 그런데... 솔직히 이런 부담스러운 사람을 누가 곁에 두고 싶어 하겠어요.”
“나! 내가 원하잖아! 널 평생 곁에 두기를 원해!!”
나에 대해 모두 알았음에도 조금의 흔들림도 망설임도 없는 그 대답에, 결국 또 눈물이 핑 돌았다.
“리일... 흐흑... 정말 고마워요. 저 정말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요.”
“아니, 현생에 나라를 구했어.”
“풉. 뭐예요 그게!”
“진짜야. 리엘이 얼마나 큰일을 했는지 알아.”
“몰라요, 부끄럽게 왜 그래요! 아무튼, 그런데 그러다가 정말 진심이 되어버렸어요. 그걸 깨달은 게... 마탑 사건 때 감옥에서였어요.”
“그래서 날 아는 척 하지 않았던 거야? 황자니까 나 좀 구해달라고 말하지 않았잖아... 모든 걸 포기하고 죽음을 앞두게 된 상황이라니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 차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절박했을 텐데...”
“여러 가지 이유에서요. 제 마음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제 죽을 텐데, 이제 와서 진심이라는 걸 깨달아서 뭐하나 싶었죠. 물론 그때도 매달리고 싶었지만... 제가 모른 척 했다는 걸 알게 되면 리일이 화내고 실망할 것이 두려웠어요. 그래서... 그게 마음에 걸려서 살려달라고 매달리지도 못했어요. 속였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배신감 느끼겠죠.”
“그래도 말했어야지! 만약 내가 제때 널 구하지 못했으면 어쩔 뻔 했어!!”
“하지만 구해줬잖아요.”
그때의 순간을 생각하면, 아직도 간담이 서늘하면서도 그 기적적인 구원에 마음이 벅차올랐다.
“아무튼 다 잘 풀렸으니..”
“네. 그래서... 그 후에도 죽 말하지 못했던 거예요. 그냥 그때 처형 직전에 알아챈 것처럼...”
“응..”
“그 후로도 많이 갈등했어요. 절 곁에 두기 위해 리일이 감수해야 할 것들에 대한 미안함. 신분에 대한 자격지심. 아니, 심지어 그 신분조차도 위태위태한 가짜였죠. 비올레티가 절 몰락시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더더욱 불안했어요. 그리고 그 무엇보다 가장 큰 건... 제가 한때나마 리일을 속였다는 거였어요. 그 후 쌓아온 관계가 아무리 진실이라 하더라도, 시작이 거짓이었다면 모든 게 거짓으로 매도될까봐 두려웠어요. 그래서 그렇게 밀어냈어요. 그렇게 자격도 안 되는 제가 리일의 앞길을 막을까봐...”
“그랬구나... 내가 그런 것도 모르고 그냥 밀어붙이기만 했어.”
“그 덕에 결국 리일에게 넘어갔잖아요. 마음이 더 커지자... 밀어낼 수조차 없게 되더라고요.”
“역시 내가 밀어붙이길 잘했지?”
“네! 하지만... 점점 더 두려워지기 시작했어요. 초라한 제 신분이, 알면서도 모른척했다는 사실이 제 발목을 항상 붙잡고 있었어요.”
“혼자 그런 고민하는 줄도 모르고 난...”
“이런 건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 말하기 어려워지는 법이잖아요. 그래서 몇 번이나 털어놓으려 했어요. 그런데 하필 그때마다 저를 망설이게 만드는 일이 생겨버리더라고요. 정말 변명처럼 들리시겠지만...”
“아냐, 다 알아.”
“고마워요...”
“있잖아, 리엘. 나도 사과할 게 많더라. 신분 차이로 그렇게 어려워했던 것도 모르고, 나 혼자 희희낙락했던 게 너무 미안해. 내가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어. 조금만 더 일찍 알았으면, 리엘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줄 수 있었을 텐데... 리엘이 말하지 못했던 거에는 내 탓도 있다고 생각해...”
“리일...”
“내가 리엘의 마음을 하나도 배려해 주지 못했더라. 얼마나 부담스럽고 불편했을까...”
“아니에요... 그 덕에 우리 이렇게 이루어졌잖아요.”
“그래도... 그 과정 동안 혼자 얼마나 마음 고생했을까... 네 불안한 마음을 조금도 헤아려주지 못했다니, 연인으로서 자격도 없었어. 그저 무식하게 애정을 쏟아 부을 줄만 알았던 내가 참 철이 없었지..? 이렇게 된 것도 다 나 때문이야.”
“......리일...”
속였던 걸 용서해 주는 것만으로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너그러운 마음일진데, 리일은 오히려 나에게 사과하고 있었다.
“미안해. 내가 내 입장밖에 몰랐어.”
“아니에요. 리일이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아냐. 내가 너무 바보 같고 한심하더라. 황비가 아무리 중상모략을 해도 리엘을 믿었어야 하는데... 그때의 엇갈림도 다 내 잘못이야. 등 돌린 내게 까마득한 막막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네 심정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
“그건 그랬어요. 그땐...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죠. 눈앞이 깜깜해지며...”
그렇게 긴긴 이야기는 밤새 계속되었다. 난 정말 그동안 하고 싶던 말들을 싹 다 털어놓았다.
아, 한 가지만 빼고... 환생, 그건 이제 별 의미도 없는 일인데다 나도 잘 기억나지 않았으니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
며칠 푹 쉰 덕에 우리 둘 다 컨디션이 꽤 나아져 있었다. 힐링 마도구를 끝도 없이 사용한 덕이었다.
“우리 이제 황궁으로 돌아가야죠? 다들 걱정할 텐데... 리일, 황자씩이나 되어서 황궁을 비우고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돼요? 그보다 폐하께 연락은 한 거예요?”
“다, 당연하지! 미리 연락해 놨어. 리엘을 구해내고 마을에 와서 바로 급보를 날렸으니 걱정 마.”
“흐음... 정말요? 근데 왜 그렇게 어딘가 찔끔한 표정이에요?”
“그게...”
“말없이 뛰쳐나온 거죠?!”
“아냐, 그건 아니고...”
내가 재차 닦달하자, 그제야 엔릴은 그간의 모든 일을 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내가 떠나고 난 후 얼마나 힘들어 했는지, 뒤늦게 사정을 알게 된 후 어찌나 후회했는지, 그리고 나를 찾으러 가겠다며 난리를 피워 부모님 가슴에 대못 박은 일 까지...
그렇게 끝끝내 원정군에 합류해 리테인을 정벌하고, 그 과정에서 나를 샅샅이 찾아다니고, 희미한 단서를 얻어 여기까지 온 일 전부...
“저 때문에 그런 고생을... 리일... 미안해요. 제가 너무 미안해요.”
“아냐, 리엘이 더 고생 많았지. 내가 정말 미안해.”
“아니에요... 전 그냥 좀 많이 헤맨 거밖에 없었어요. 막판에 쫓기느라 좀 고생하긴 했지만요.”
나 역시 대강의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리일은 나도 모르고 있던 내 우스꽝스러운 별명을 말해 주었다.
“뭐라고요? 그..금빛마녀!? 무슨 만화 주인공도 아니고 누가 그런 웃기지도 않은 이름을!”
“쿡쿡... 그치!? 근데 그 웃긴 별명 덕에 우리가 이렇게 다시 만났잖아. 난 듣자마자 딱 감이 왔어. 저건 리엘이다! 라고 말이야.”
“후..후훗. 푸하하! 그건 참 다행인데... 다시 들어도 웃기네요. 북부의 금빛마녀라니... 하하하하!”
리일도 신나게 따라 웃었다.
“아차, 그런데! 그럼 전쟁에 나선 건 허락을 받았지만, 여기에 온 건 멋대로 온 거 맞네요?”
“으응? 응... 그, 그렇지?”
“어휴! 얼마나 걱정하셨겠어요!?”
“뭐, 나도 이제 어린애 아니라고...! 리엘과 단둘이 다녀도 될 만큼 강해. 게다가 여긴 제국령이니 별 문제도 없고. 내 연락에도 아바마마가 기사들을 한 트럭을 보내지 않은 거 보면 모르겠어?”
“잘했어요. 그래도 정말 나중에 가서 싹싹 빌어요. 제 책임도 있으니까 저도 같이 빌게요.”
“아냐! 나 혼자 혼나고 말게. 리엘을 혼나게 할 수는 없지.”
“그래도요... 두 분 폐하께서 저 정말 미워하시겠어요...”
“뭐!? 감히 우리 리엘을 미워하면 내가 혼내줄 거야!”
“.........”
아 진짜 제발 철 좀 들어라! 아까 좀 성숙해진 것 같다는 거 다 취소!
엄빠를 혼내준다니, 보통 집에서 그런 소릴 해도 패륜아 소리 듣는데, 너희 집에서는 반역죄에 해당된다고!
혹시라도 얘가 나중에 그런 미친 짓 하면, 내가 눈물바람으로 ‘아버님!’ 하며 바짓가랑이라도 붙들어야 하는 건가...?
음 그나저나 아버님 이라니, 입에 착착 붙네. 우리 황제 아버님 싸랑해요! 앗! 이건 불륜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며느리로서 애정한다는 뜻!
휴, 내 개소리는 어디까지 진화하는 건지...
내가 어쩌다 이런 성격이 된 거지? 아니면 원래 이랬는데 영애인 척 고상 떠느라 억눌려 있던 것뿐인가? 여전히 헛소리 잘 지껄이는 걸 보니 나 하나도 안 변한 모양이었다.
다행히, 끝을 모르는 내 망상을 리일이 시기 적절히 끝내 주었다.
“아무튼, 우리 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음껏 데이트하자! 우리 여러 가지 사건 때문에 밖에 제대로 놀러나간 적이 없잖아. 나 이제 얼마든지 단둘이 돌아다녀도 될 만큼 강해졌어!”
“물론이죠!! 얼른 나가요!”
***
제도까지 돌아오는 길은 말 그대로 프라이빗한 여정이었다.
내내 소원하던 황궁 밖 데이트를 이런 식으로 하게 될 줄이야... 우린 정말 끝없이 꽁냥거리며 이보다 닭살 돋을 수 없을 모습을 연출했다.
하지만 제도에 들어선 후에는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어? 이게 다 뭐에요?”
제도의 초입에서부터 황궁까지 쭉 뻗은 관도 양옆에는, 제국 군사들이 빽빽이 도열해 있었다.
“리엘, 내가 깜짝 쇼를 준비했어.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
“네? 이게 다 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