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재회(3)
2017.03.24.
생뚱맞게 뭔 소린가 싶었다. 리일의 설명에도 난 이게 무슨 영문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뭐긴, 리테인 전쟁에 참여했던 원정군이지. 시간이 딱 맞아서 다행이다. 나름 신경 쓰며 오긴 했는데, 그래도 너무 늦을까봐 걱정했거든.”
그러고 보니 오는 동안 마을에 들를 때마다 무언가 연락을 보내더니, 제도에 도착할 시기를 맞추려 한 거였구나...
나를 구하러 오느라 멋대로 이탈해서 북부까지 빙 돌아왔음에도 양쪽의 도착 시기가 엇비슷했던 건, 우리가 말을 타고 재빨리 달려온 덕분인 것 같았다.
보병이 잔뜩 있는 저쪽이 우리보다 느린 건 당연할 테니까.
“아... 개선 행진인가요?”
“아직은 비밀!”
리일은 다짜고짜 내 손을 잡고, 한편에 마련된 마차로 데려갔다.
“자, 여기 타자.”
헉, 웨, 웬 꽃마차? 천장이 없이 오픈되어 있는 새하얀 마차는 색색의 꽃들로 온통 장식되어 있었다.
“근데 전 여기 왜...”
내가 계속 의문을 날렸지만, 리일은 수상한 표정으로 씩 웃기만 할 뿐 말을 해주지 않았다.
어쨌든 간에 곧 퍼레이드가 시작되었다.
“와아!!”
“황자 전하!!”
“황제 폐하, 황후 폐하 만세!!”
“그라츠 제국 만세!!”
어마어마한 환호였다. 리일, 이렇게 인기 많았구나...
시민들의 환호와 함께 온갖 꽃이 휘날렸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군악대가 세레나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세, 세레나데? 개선행진곡이 아니라?”
“응.. 하하하...”
무쇠 같은 금관악기들로 연주되는 군악대의 세레나데는... 너무 위풍당당했다.
“풋, 너무 웃겨요!”
내가 까르르 웃자, 리일도 민망했던지 얼굴을 붉혔다. 물론 그는 그 와중에도 그는 참 잘생겼다. 시민들이 뿌려댄 꽃과 반짝이는 종잇조각들이, 마치 리일을 위한 배경처럼 온통 허공을 수놓아 주었다.
이건 대체 누구를 닦달해서 준비시켜 놓을 걸까... 라는 미안함이 들면서도, 내 입은 이미 좋아서 귀에 걸려 있었다.
그야말로 온몸으로 환성을 들으며 우리는 마냥 즐겁게 쭉쭉 황궁으로 나아갔다.
머잖아 대운하 너머 저 끝에 황궁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문 앞에는 황제와 황후가 나란히 나와 있었다. 그 옆에 황녀와 막내 로렌도 함께 있었다.
드디어 마차가 멈춰 서자...
눈앞에 황제 일가, 양 옆에 만백성을 둔 채 리일이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
시끌벅적하던 환호성이 순식간에 뚝 멎었다. 죽은 듯 조용해진 가운데, 리일의 목소리가 나직이 들려왔다.
“리엘, 부디 내게... 너를 평생 행복하게 해줄 기회를 주지 않겠어?”
“..........”
너무 감격해서 말이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 거...”
“......”
공개 프러포즈를 한 리일은 초조한 표정으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긴장으로 침을 꿀꺽 삼키는 그의 목울대가 보였다.
“그런 거 물어볼 필요도 없잖아요!!!”
난 그를 일으켜 와락 안겨들었다.
휘이익!
“꺄!!”
“멋지다!!”
“황자님 멋있어요!!”
“행복하세요!!”
온갖 환호성과 휘파람 소리, 박수소리가 한데 섞여 황궁 앞이 떠들썩하게 흔들렸다. 그 우레와 같은 성원을 들으며, 우린 진하게 입을 맞췄다.
지금 이 순간,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제 남은 생을 평생 리일과 함께 할게요. 고마워요... 정말 사랑해요.”
“리엘, 사랑해...”
***
길고 긴 딥키스가 끝난 후, 난 리일을 얼른 황후폐하께 보내드렸다.
아들에게 달려오고 싶어서 아까부터 눈물을 글썽이고 있던 걸, 프러포즈 때문에 애타게 바라만 보고 계셨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리일!! 리일... 무사했구나. 아... 정말 고마워. 무사히 돌아와 줘서 정말 고마워... 우리 아들, 얼마나 고생했을까... 흐흑... 얼마나 걱정했는지... 그래도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죄송해요, 어마마마. 많이 걱정하셨죠...”
황후는 그를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이윽고 차례로 다들 리일을 포옹하느라 바빴다. 황제마저도 아들을 살짝 안고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수고했다. 그리고 살아 돌아와 줘서 고맙다.”
매번 투닥거리며 눈을 흘기기 바빴던 황녀마저도 오늘만큼은 동생을 그저 예뻐했다. 다다다다 달려와서 허리에 풀썩 매달린 로렌도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가족들과 해후를 나눈 엔릴은, 내 손을 잡고 가까이 데려갔다.
“폐하, 제 어리석은 행동으로...”
내가 막 사죄를 드리려는데...
“그동안 혼자 고생 많았겠구나. 잘 돌아와 주었다.”
갑자기 황제폐하의 든든한 품이 날 감싸오는 게 느껴졌다.
“.......죄송... 죄송해요... 으흑... 흑...”
그 따뜻한 말에 참아왔던 눈물이 펑펑 쏟아져 버렸다.
“리엘, 우리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난 순식간에 눈물바다가 되어버렸고, 리일이 그런 내 등을 다독여 주며 다정히 이끌어 주었다.
전설이 될 만큼 대단했던 프러포즈를 뒤로 하고, 우리는 일단 궁 안으로 자리를 옮겨 들어왔다.
“폐하, 정말 죄송합니다. 뭐라 드릴 말씀이...”
난 너무 죄송한 마음에 재빨리 무릎을 꿇었다.
“리엘! 그러지 마! 아바마마, 이건 제가 잘못한 거예요.”
내가 무릎을 꿇자 리일도 재빨리 내 옆에 와서 빌었다.
“리일, 이러지 마세요. 처음부터 제가 잘못한 거잖아요...”
“아냐.”
우리가 투닥거리는 걸 보던 황제는 그럴 필요 없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괜찮으니 둘 다 일어나려무나.”
“아닙니다. 폐하, 제가... 제가 다 잘못해서... 전부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리일에게 털어놓았던 것처럼, 난 두 분께 전부 숨김없이 사실대로 털어 놓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너희 둘이 해결했으면 그걸로 된 거다. 문제 삼을 생각 없으니, 더 이상 담아두지 말려무나.”
“........”
너무 감사하고 죄송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턱 막혔다.
“그래. 그냥 둘이 행복하게 잘 살아주렴. 그게 가장 큰 선물이란다.”
옆에서 황후폐하도 한 마디 거들어 주셨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이건 꼭 말해야겠구나.”
“네, 폐하.”
“서로 대화하고 이해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던 것 기억나느냐?”
“......”
솔직히 기억 안 났다. 옆을 슬쩍 돌아보니 리일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우리의 표정만 봐도 알았는지, 황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니들이 그렇지 뭐, 들은 척도 안 할 줄 알았다는 얼굴이었다.
아... 불쌍한 폐하. 저러다 몸에서 사리 나오겠다... 아니구나, 이미 많겠구나. 내가 만든 사리도 좀 들어있을 것 같고...
“죄송합니다.”
“네가 왜 그랬는지 나 역시 알고는 있었다. 리일과의 미래를 위해서라고 생각했기에 말하지 못했겠지.”
“네...”
“네 결정이라 그냥 두긴 했다만, 그때도 사실 불안했다. 상대방을 위하는 거라 생각하며 아무 말 없이 희생하지 말라고 한 것 역시 기억 안 나겠지만...”
“아...!”
이제야 기억났다. 그날 밤에! 오밤중에 찾아갔을 때!
“그래. 기억 난 모양이구나. 휴... 애들은 왜 이렇게 하나같이 말을 안 듣는 건지...”
뒷말은 중얼거리듯 작았지만, 그래도 다 들렸다. 옆에서 황후가 키득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죄송합니다...”
“아니다. 알면서도 보고만 있던 내가 할 말은 아니겠구나. 엔릴, 너도 잘못했고.”
“네... 아바마마...”
“아무튼, 둘 다 고생 많았다. 리테인의 일을 꽤 오래 끌어왔는데, 너희들의 도움이 컸구나.”
“아닙니다. 제가 뭘 한 게 있겠습니까. 두 분 폐하께서 십 수 년간 해 오신 일에, 전 그저 숟가락만 얹었을 뿐입니다.”
“리엘, 겸손해 하지 않아도 돼. 네가 방점을 찍었잖아.”
“아니에요. 전 그냥 다 된 밥에...”
황녀가 내 편을 들어줬지만, 난 그저 내가 싸질러놓은 일을 해결할 뿐이었기에 차마 저 칭찬을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정말이야. 똑같이 무력으로 해결한다 해도, 훨씬 일이 수월해졌잖아. 덕분에 엔릴도 승전하고 돌아왔고.”
“누나, 부끄럽게 갑자기 왜 그래? 차라리 그냥 평소처럼...”
콰직!
리일의 소원대로 황녀가 평소처럼 발을 짓밟아 주었고, 옆에서 보던 황후는 우아하게 웃었다.
“아야!”
리일은 밟힌 곳이 아픈 듯 슥슥 문지르며 말했다.
“아무튼... 나도 그냥 레이튼 경 뒤만 따라다녔지 별로 한 건 없어. 아참, 근데 아바마마, 레이튼 경은 어디로 갔어요? 공은 다 세워놓고 왜 개선행진은 저만...?”
“황궁으로 돌아오지도 않고 바로 동부전선으로 떠났다. 이 나이에 무슨 개선행진이냐며, 네 녀석이나 시키라고 하더구나.”
“아... 하긴, 한두 번 해봤겠어요? 저라도 쪽팔리... 음음, 민망하겠어요.”
“아무튼 엔릴, 고생 많았다.”
황제는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민폐덩어리 우리 커플이 한 몫 할 줄은 몰랐다는 듯한 뉘앙스...
-인생 오래 살고 봐야 하는 군... 아들 녀석이 이렇게 쓸모 있는 짓을 하게 될 날이 올 줄이야...
으악, 실수로 들어버렸다. 이건 진짜 실수! 잠시 마음을 놓는 바람에 차단이 느슨해져서...
“그래. 정말 큰일 했으니 겸손해하지 않아도 된다. 아무튼, 피곤할 텐데 너무 오래 붙잡아 두었구나. 어서 가서 쉬어라.”
“네, 폐하.”
“네!”
***
그리고 그날 밤 늦게 승전 무도회 겸 약혼무도회가 열렸다. 리일의 닦달로, 돌아오는 날에 맞추어 황후가 알아서 미리 준비해 둔 모양이었다.
피곤했던 우리는 낮 내내 퍼질러 잤고, 부랴부랴 일어나 후다닥 대연회장으로 내려갔다.
“리일, 저 괜찮아요? 너무 급히 준비해서 영 엉망인 것 같은데...”
야전에서 구른 탓에 피부도 거칠고 흐음...
“그럼! 이보다 예쁠 수는 없지!”
물어본 내가 바보지...
“.....”
아무튼 거대한 문 앞에 도착하자, 시종이 큰 소리로 고했다.
“1황자 엔릴 세이라 폰 그라츠 전하와, 약혼녀 리엘 폰 애스틴 백작께서 드십니다!”
이제 난 당당히 그의 약혼녀로, 그리고 애스틴 백작으로 소개되었다.
정말 감개무량했다. 비루한 신분으로 처음 제국에 왔을 때가 갑자기 떠올랐다.
거기서부터 여기까지 겪었던 일들이 눈앞에 주르륵 펼쳐지는 기분이었다. 그의 곁에 있기 위해 했던 모든 노력들...
“리엘”
“아...”
북받쳐 오르는 내 기분을 짐작하는 듯, 리일이 따스한 시선을 보내왔다. 그리고 언제나 든든하게 날 붙들어 주던 커다란 손이 느껴졌다.
“가요! 리일. 우리 항상 손 꼬옥 잡고 같이 나아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