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구라도 낚이면 좋겠어-130화 (130/134)

130. 재회(4)

2017.03.24.

약혼 무도회는 더할 나위 없이 호의적이었다. 리일의 탄신일 무도회 때와 전혀 달라진 분위기가 온 몸으로 느껴졌다.

그때의 내가 정체불명의 이방인이었다면, 지금의 난 이들의 가족이었다.

황제일가가 내게 우호적인데 감히 누가 나에게 시비를 걸겠는가. 단 한 명의 적조차도 없었으니, 우린 그저 물 만난 물고기처럼 즐거울 뿐이었다.

그렇게 한참 즐겁게 파티를 즐기고 있는데, 익숙하고도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줄리도 소원하던 무도회에 오게 된 것이었다.

“리엘!!”

“줄리! 어디에 있었어!? 왜 이제야 찾아왔어?”

“구석에서 네가 한가해지기만을 기다렸지! 이제 너무 유명인이라 잠시도 틈이 안 나던데?”

“유명인은 무슨... 이 아니라 맞구나! 아무튼 줄리,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다!”

“응. 역시 황궁 힐러는 대단한가 봐! 그렇게 심한 마차사고였다는데, 깨 보니까 아무렇지도 않더라.”

내가 직접 기억을 건드려 준 덕에, 줄리는 납치사건을 여전히 악몽이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황비와 비올레티도 이미 없어져 버린 상황이었으니, 줄리가 괜히 그들을 마주쳐 진실을 알게 될 일도 없었다.

“그보다, 소개 좀 부탁해.”

내가 떠나 있는 사이 황녀전하가 잘 처리해 주신 건지, 줄리는 무사히 제국민이 되어 있었다. 그리곤 그때 말한 연인과 함께 당당히 무도회에 참석했다.

드디어 의문의 남친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안녕하십니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근위기사인 페딘 폰 플리어입니다. 약혼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애스틴 백작이에요.”

“우와아아아... 리엘 멋지다아아아... 아차, 이제 이렇게 이름 부르면 안 되나?”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예전처럼 대해 줘!”

“아무튼 이제 백작님이야!?”

“훗, 그뿐이겠어? 이젠 황자비라고!”

“우와아아아아!”

그때 잠시 황제폐하께 불려갔던 리일이 돌아왔다.

“리엘, 혼자 심심했지? 미안”

“아니에요. 하지만 역시 리일 곁이 제일 좋네요. 으음...”

쪽, 쪼오옥...

“.........”

그 다정한 모습에 석상처럼 굳어버린 줄리 커플은, 곧 자기들도 질세라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재빨리 인사만 마친 둘은 순식간에 발코니로 직행해 사라졌다.

“......우리도 질 수야 없죠! 우린 가서 춤춰요!!”

“그래! 우리 사이를 보란 듯이 과시하자!”

“내!!”

그렇게 파티는 정말 신나고 즐겁게 웃음이 넘쳐흘렀다. 근데 다 좋은데...

“리일... 우리 조금 쉬어요...”

하도 연달아 춤을 춰 댔더니 힘들어 죽을 것 같았다. 어찌나 신났는지, 끝없이 빙글빙글, 뱅글뱅글 안고 돌리고 흐어어어...

“아차, 미안. 내가 너무 혼자 신나 방방 뛰었네.”

“휴...”

“우리 잠시 테라스에 나가서 쉴까?”

“테라스요? 휴게실이 낫지 않겠어요? 푹신한 데 눕고 싶은데...”

“하지만 그게... 음... 잠깐만 테라스로 가면 안 될까?”

평소에 항상 내가 하자는 대로 하던 리일이었는데, 왠지 이번만은 고집을 부렸다. 왜 그러지 싶으면서도 난 순순히 따라 나섰다.

달칵

테라스로 나온 리일은, 내게 재킷을 덮어 주며 물어보았다.

“리엘. 예전에, 불꽃놀이 같이 보면 좋겠다고 한 말 기억나?”

“네?”

“그때 축제 때...”

“아! 기억나요!”

“좀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준비했어. 오래 걸려서 미안해.”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하늘에 색색의 불꽃이 수놓아지기 시작했다.

“........아!!!”

리엘, 사랑해.

사랑해. 나와 평생 행복하자.

사랑하는 리엘, 나의 여신님.

우리 예쁜 리엘, 사랑합니다.

엔릴은 리엘을 사랑해.

등등... 간질간질한 글자들이 마법의 불꽃으로 끝없이 피어올랐다.

펑, 퍼펑! 파바방!

끊임없이 터져 오르는 불꽃에, 어느덧 연회장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테라스로 나와 그 모습을 구경했다.

“리엘, 마음에 들어?”

“.........”

“너무... 너무 기뻐요!! 리일, 저도 정말 사랑해요.”

난 그를 와락 끌어안았고, 또다시 모두가 보든 앞에서 딥키스를 시전해 주었다.

짝짝짝짝짝!

부끄럽게도 온 귀족들의 박수를 받으며, 우린 그렇게 약혼을 했다.

***

불꽃놀이가 끝난 후, 리일은 나를 다짜고짜 끌고 갔다.

“우리 이제 단 둘이 어디에... 아니다! 우리 그만 퇴장하자! 우리 오늘 약혼한 거잖아! 그러니까 이제 예비부부고...”

끄아악! 너 또 야한 생각하지! 이 응큼한 놈! 나야 땡큐지!

그렇게 우린 무려 황제보다도 먼저 자리를 뜨는 불상사를 저질러 버렸다. 하지만 이미 머릿속에 그런 건 남아있지도 않은 듯, 둘 다 허겁지겁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뜨거운 입술이 나를 탐해왔다. 이렇게 거칠게 탐닉하는 와중에도 리일의 입술은 녹아내릴 듯이 부드러웠다. 달콤한 기쁨이 온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갔다.

“으응... 흐읍...”

몸이 절로 열리며, 난 그를 더욱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아응... 있잖아요, 리일. 내가 이 말 했던가요?”

“응? 뭐?”

“우리 리일 정말 잘생겼다고요.”

리일의 아름다움 얼굴이 더욱 환하게 빛났다.

“리엘이 더 예뻐. 여신처럼 예뻐.”

그렇게 말한 그는 다시 내게 덮쳐들었다. 잠시 떨어졌던 입술이 순식간에 포개어지고, 리일의 손은 점점 나를 애타게 쓰다듬었다.

“근데 그거 알아요? 리일 지금 귀 끝 빨개요.”

“....쑤, 쑥스러워서...”

잘근잘근 그의 입술을 괴롭히던 난, 놀리듯이 훅 귓가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아읏.. 리엘...”

갑자기 시야가 휙 돌더니, 난 순식간에 침대에 눕혀져 버렸다.

***

아... 정말 끝내줬어!

“흐응...”

나른한 기분을 느끼며 리일의 품안에 안긴 나는, 기분 좋은 고양이처럼 갸르릉거렸다.

“리엘. 나 큰일 났어.”

“왜요?”

“부끄러워서...”

“뭐가요?”

“내 생각 다 읽을 수 있으니, 나 얼마나 음흉한 지 알거 아냐.”

“하하하...! 뭐에요, 그게 무슨 황당한 걱정이에요.”

“하지만 민망한걸...”

“죄송해요...”

“뭐가?”

“솔직히... 마음 편하지는 않을 거 아니에요. 생각을 읽힌다는 건...”

지난번에도 이미 털어놓았던 이야기지만, 그래도 이건 쉽게 어영부영 넘어가기 힘든 민감한 사항이었다.

“흐음...”

“아, 물론 결코 함부로 읽은 적은 없어요! 처음이랑, 나중에 아주 가..끔 빼고는요...”

내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자그마해졌다.

“알아. 마구 읽어댔다면... 진즉에 기절초풍하며 도망갔을 테니까.”

“네? 왜요?”

“왜냐하면...”

리일은 말하다 말고, 읽어보라고 약속한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

으악! 온통 시커매!

“그치? 이거 다 읽었으면 멀리멀리 도망가지 않았겠어? 그러니까 안 읽었다는 거 믿어.”

......그건 아닌데... 오히려 좋아했으면 모를까... 으흐흐!

아무튼, 그래도 난 자꾸 미안해졌다.

“하지만... 그게 가능하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불편할 텐데... 솔직히 저라면 찜찜할 것 같아요.”

“에이, 무슨 그런 소리를 해!? 그런 능력 없어도 어차피 부부사이엔 원래 눈빛 만 봐도 다 안다잖아. 그리고 얼마나 편해? 말로 직접 하기 민망할 때는 그냥 머릿속으로만 떠올리면 되잖아. 그럼 리엘이 다 알아서 읽어줄 거 아냐.”

그 말에 난 슬쩍 리일의 생각을 들여다보았다.

역시나 또... 시커먼 머릿속이 그새 어디 사라질 리 없었다.

“리일!!”

“나 이제 응큼한 속내 다 들켰으니 안 참을래! 우리 이제 어차피 결혼할 거잖아!”

“겨, 결혼이요? 이렇게 바로? 오늘 약혼했는데...”

“뭐 어때?”

“그치만... 아 신전의 일은요?”

“그런 걸 왜 신경 써? 잘 해결되겠지. 걱정하지 마.”

“아, 리테인도 무너졌으니 이젠 숨을 데도 없겠군요. 그럼 무력으로 꺾은 후 그 다음은... 아 우리 쪽이 쥐고 있는 신전의 구린 증거들이 많으니까...!”

“몰라! 그런 거, 두 분이 알아서 하시겠지. 우린 이런 거나 하자.”

쪽, 쪼오오옥!

자꾸만 길어지는 내 말을, 리일은 그냥 입으로 콱 막아버렸다.

***

하지만 리일의 바람과 달리, 아직은 해결해야 할 일이 조금 남아 있었다.

“리엘, 비올레티의 일로 불렀단다.”

다음날, 나를 부른 황후는 비올레티를 어떻게 하고 싶냐고 물어보셨다. 내가 떠나기 전 만들어 놓은 사건으로, 황비와 비올레티는 감옥에 갇혀 있는 신세라고 했다.

“네? 그걸 제가 결정해도 되나요?”

“황비는 몰라도, 비올레티 일은 네가 가장 큰 피해자잖니. 네 의견을 들어 보려고.”

“아... 감사합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바라시는 대로 하셔야지요.”

“그래도 혹시 몰라서 기다렸단다.”

나에게 물어보기 위해 일부러 처벌하지 않고 기다렸다니... 정말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럼 저... 한 가지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럼, 얼마든지.”

“비올레티와 만나서 얘기를 해 보고 싶어요.”

***

끼이익

예전의 콧대 높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비올레티는 추레한 모습으로 감옥에 쭈그려 앉아있었다.

비올레티가 황비에게 붙었던 덕에, 자동으로 리테인 왕실의 측근세력이 되었던 레비넌 백작가였다. 하지만 리테인의 멸망으로 백작가 역시 완전히 몰락해 버렸다.

“비올레티”

“......리엘...!?”

비록 내내 적이었지만, 이렇게 된 모습을 보니 마음이 좋지는 않았다.

비올레티가 나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인과응보인 것도 같았지만, 그래도 그녀 역시 피해자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둘 모두 한참 침묵만 지켰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건 내 쪽이었다.

“비올레티, 난... 네가 이렇게 되길 원한 건 아니었어.”

“뭐? 함정을 파 날 나락으로 떨어트려놓고, 이런 결말을 원한 건 아니었다고?”

“그 일은... 그래. 그 일로 인해 이렇게 될 줄 몰랐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내 말은... 그걸 말하는 게 아냐. 그동안의 모든 일들을 말하는 거야.”

“........”

“난 적어도 네가 잘못되기를 바라지는 않았어. 너한테 미안했으니까.”

“닥쳐!”

“비올레티, 나를 왜 그렇게 미워했던 거야? 우리가 바뀌었던 건, 내 잘못이 아니었잖아.”

“아니, 네 존재 자체가 잘못이었어.”

“...뭐? ”

“난 유모가 아이를 일부러 바꿨다고 생각해. 유모도 너도 같은 능력자라는 게 그 근거야.”

나와 같은 추론에 나도 모르게 찔끔 놀랐다. 내 반응을 싸늘하게 비웃으며, 비올레티는 차갑게 말을 이었다.

“엄마라고 믿어왔던 사람은, 나한테 그런 짓을 한 악녀였어.”

“......”

그렇구나... 한 번도 비올레티의 입장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 일의 최대 피해자는 비올레티였다.

아무 잘못 없이 태어나자마자 자신의 자리를 빼앗겼으니까.

신분을 되찾고 난 후의 악행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그 순간까지의 가장 억울한 사람은 비올레티가 맞았다.

그리고 내 엄마... 나한테는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그리운 엄마지만, 비올레티 입장에서는 그저... 그래. 말 그대로 악녀구나.

난 엄마인 줄 알았던 백작부인에게 잠깐 독설을 들은 것만으로도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왔었다.

그런데 비올레티는... 평생 엄마로 알고 커 온 사람이 자신에게 그런 짓을 했던 것이었다. 오직 제 친자식인 나를 위해...

얼마나 배신감을 느꼈을까... 내가 백작 부부에게 느낀 것보다 훨씬 배신감이 컸을 거라는 걸, 난 지금에야 깨달았다.

엄마, 왜 그랬어요... 내 자식이 소중한 만큼, 남의 자식도 귀한 거잖아요... 너무 절박한 나머지 잘못된 선택을 해버린 건가요...? 마치... 내가 그랬었듯이요...?

내가 멍하니 생각하는 사이, 비올레티가 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겨우 되찾은 가족은, 날 가문의 수치 정도로 취급할 뿐이었어. 귀족으로서의 교양하나 제대로 못 갖추어, 어디에 내놓기에도 부끄러운 그런 자식”

“.......”

“동경했던 도련님은 친 오라버니가 되어버려 더 이상 마음에 품을 수도 없어져 버렸고, 심지어 가족으로서도 나를 애정해 주지 않았어. 오직 너만 챙겼지.”

“아...”

“내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너는 모르겠지. 이왕 이렇게 된 거 너한테 확실히 복수나 해 주고 싶었어. 그런 내게 필요했던 건 아무 의미 없는 가족 따위가 아니었어! 힘, 권력. 나를 지킬 수 있는 것들이 필요했을 뿐이야. 그걸 추구하는 게 왜 나빠?”

“비올레티...”

“너도 나처럼 비참하게 만들어주고 싶은 게 왜 나쁘냐고!! 왜 나만 이렇게 되어야 해? 넌 내 자리까지 15년간 빼앗아 잘 먹고 잘 살더니, 이젠 가문까지 말아먹고 저 혼자 잘 되겠다잖아!!”

“내가 언제 가문을...”

“너 때문에 몇 번이나 집안이 휘청했는지 몰라?”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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