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새 출발(2) - 완결
2017.03.24.
어디선가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리엘이 나타났다. 피로연장에서 잠시 시간을 내 빠져나온 것이었다.
“리엘...”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비올레티가 머뭇거리는 사이, 리엘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오라버니께 해드릴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네요.”
“.......리엘.”
비올레티에게 미안한 마음에, 리엘은 망명에 필요한 여러 준비와 함께 넉넉한 돈도 챙겨 주었다.
“그동안... 감사했어요.”
“내가 뭘... 난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 걸...”
“아니요. 제가 처음 제국에 와서 정말 힘들 때, 그 작은 온기가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몰라요. 오라버니가 주었던 희망이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지도 몰라요.”
“아냐. 오히려 나 때문에 너희의 관계를 망친 것 같아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아니에요. 그건 오라버니 탓이 아니에요. 어디까지나 우리의 일이었을 뿐이니까요. 오라버니는 그저, 저를 챙겨주고 싶었던 것뿐이잖아요.”
“그래...”
“하지만 이제, 아니 한참 전부터 오라버니의 진짜 동생은 비올레티였어요.”
“......맞아. 내가 너무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어. 그리고 많이 반성했어. 비올레티가 이렇게 된 데는 내 탓도 있으니까.”
“그러니 보호자로서 잘 돌보다가, 좋은 짝도 찾아 주세요.”
“응. 이젠 갚으면서 살려고. 네 말대로 내 하나뿐인 동생이잖아. 그리고 리엘, 너도 행복하길 바랄게.”
“네. 오라버니도요. 비올레티... 우리 다음 생에는 이렇게 만나지 말았으면 좋겠어...”
“...고마워. 리엘... 그리고 미안해.”
“나도...”
“......”
“그럼... 경, 비올레티를 잘 부탁드려요.”
리엘은 더 이상 이튼을 오라버니라고 부르지 않았다. 정말로 모든 관계를 정리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
또 시간은 훌쩍 흘러, 드디어 황제 엘리어트 1세가 퇴위하는 날이 되었다.
고작 한 달 전 급작스레 발표된 양위 소식에, 전 제국이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더할 나위 없이 부강한 제국을 발아래 두고 아직 한참의 나이에 갑자기 퇴위한다니, 모두가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심지어 리테인도 정복되어 이제 승승장구할 일만 남아 적수조차 없는 상황에 말이다.
그것도 황자인 엔릴이 아니라, 황녀인 아나이스에게 양위를 한다니, 모두가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하지만 문무백관의 만류와 읍소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뜻을 꺾지 않았고, 그렇게 시간은 어영부영 흘러 결국 정말로 퇴위식의 날이 되어버렸다.
충격과 혼돈 속에 어쨌든 퇴위식은 무사히 치러졌다. 그리고 동시에 즉위식도 이루어졌다. 이제 명실상부 새 황제 아나이스 1세의 시대가 된 것이다.
다음 날.
“디트, 나나는 아직도 울고 있나요?”
이제 모든 준비를 마치고 떠날 일만 남았는데, 아나이스가 하도 펑펑 우는 바람에 배웅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제 명색이 황제인데, 남들 앞에서 빨개진 얼굴을 보일 수 없어서 어떻게든 추스르고 나오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리엘과 엔릴이 열심히 달래주고 있다지만, 부모님을 보내는 게 못내 섭섭한지 그녀는 쉽게 진정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네... 제가 좀 달래고 올게요.”
황후가 떠나자, 곁에서 지켜보던 레이튼 후작이 슬며시 말을 걸었다. 즉위식에 참석하기 위해 영지에서 잠시 올라왔다가, 친구를 배웅하기 위해 아직 안 내려가고 남아있던 참이었다.
“소감이 어때?”
“홀가분하지. 날아갈 것 같아. 드디어 자유인이다. 평생 이 순간만 기다려왔다고.”
황위는 딸에게, 아들놈은 리엘에게 떠넘기고 드디어 해방된 황제였다.
“그래. 축하해. 그런데 어디로 떠날 거야?”
“세이라로 가야지. 대공비께서 왕궁에 혼자 계시잖아. 하지만 그전에 일단 일 년 동안 대륙을 한 바퀴 돌면서 여행을 다니려고. 단 둘이.”
역시 애처가답게, 외로워하는 황후의 어머니를 위해 세이라로 목적지를 잡은 황제였다.
“이야, 좋겠다. 소원 성취했네!? 다시 한 번 축하한다.”
“고마워. 그리고 너도 나 때문에 고생 많았다. 내가 집무실에 편하게 앉아있는 동안, 나대신 전쟁터를 구르느라...”
“알긴 아는 구나. 황제랍시고 날 아주 제대로 부려먹었지.”
“하하... 억울하면 너도 독립해. 이번에 확장한 동부, 통째로 떼어 줄게.”
“필요 없어! 왕 같은 거 줘도 안 해. 그리고 그 땅 어차피 내가 정벌해 온 땅이잖아! 어디서 옜다 선심이야!”
“싫으면 말고.”
“그나저나 신전은 다 해결한 거야?”
“대충”
이미 리테인이 무너진 이상, 신전은 제국의 무력 앞에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그렇게 강제로 점령하는 과정에서 교황 역시 사살 당했다. 물론 대외적으로는 충격을 못 이겨 쓰러져 죽은 걸로 발표했다.
그리고 교황청을 털어, 황후와 황녀가 연구하던 자료들을 증빙할 내용들을 최대한 긁어모아 세상에 발표했다. 신전의 추악한 진실을 알려 정벌의 명분을 세우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신전 측에서 모아놓은 능력자 아이들은 구해내지 못했다. 비밀의 수도원으로 달려갔을 때는 이미, 아이들이 모두 화재로 사망해 버린 이후였다.
아마도 자신들의 짓을 감추기 위해 마지막으로 불을 지른 모양이었다.
“도주한 사제들의 잔당이 남아있을 수도 있지 않아?”
“그럴 수도 있지만...”
혹시라도 후계자를 빼돌렸을 우려가 있긴 했다.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어차피 이제 아무 힘도 없는 신전이었다.
“리테인 왕족들은?”
“전부 추살했어. 마지막으로 남았던 공주는...”
공주는 오만하게 굴던 대가를 치르라며 평민으로 강등해서 노역장에 보내졌다. 하지만 채 한 달도 못 견디고 자살해 버렸다.
“그래. 아무튼 엘리어트, 고생 많았다. 너 잘 해왔어.”
“응?”
“그동안 고생했다고. 좋은 황제였고, 좋은 아빠였다고. 네가 못 누린 유년시절의 행복, 네 아들은 누리게 해주고 싶다고 얼마나 애썼는지 다 알아.”
연애하랴 직접 사건 해결하랴 몸이 백 개라도 모자랐던 자신과 달리, 아이들만큼은 맘 편히 지내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토록 힘든 와중에도 언제나 엔릴의 일을 애써 처리해 주었고, 편안히 통치할 수 있는 제국을 물려주기 위해 불철주야 일해 왔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왠지 모르게 울컥하는 기분인 것 같기도 했다.
“응... 고마워. 그리고 너야말로 엔릴 때문에 고생 많았어. 미안해. 내 자식인데 너까지 고생시켜서.”
“알면 됐어. 정말이지 가끔 확 두드려 패고 싶었다고.”
“응? 엔릴이 맨날 너한테 맞았다는데? 안 그랬었어?”
“아니, 엔릴 말고 너.”
“........왜 애꿎은 나한테...! 난 할 만큼 했다고! 정말 최선을 다했어!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 엔릴의 일을 왜 나한테 화풀이야!”
“하지만 저놈을 내게 들이민 건 네놈 짓이잖아.”
“.......”
“할 말 없지?”
“그게...”
“내가 엔릴 녀석 12년간 키우면서 얼마나 고생한 줄 알아? 말은 지지리도 안 들어 처먹지, 뻑 하면 제 아빠한테 달려가서 징징대고 이르지, 그 와중에 네 녀석은 또 애 불쌍하다고 시무룩해하지!”
“......”
“내가 기껏 사람 좀 만들어 놓으면 네놈이 맨날 징징 다 받아주면서 다시 망쳐놓고!”
“맨날이라니! 처음에만 좀 그랬지 나중에는...”
“시끄러웟! 나만 맨날 나쁜 놈이고!”
“......”
“그나저나, 이제 너 때려도 반역죄 아니지? 황제 아니잖아.”
“아니! 여전히 반역죄야! 나 폐위된 게 아니라 자진 퇴위했으니 상황제라고!”
“그래도 맞아라.”
“이 자식이! 대관식 전날에도 마지막 기회라고 두드려 패더니, 어떻게 퇴위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너 때문에 대관식도 멍든 얼굴로 치렀다고!”
“17년 전의 일을 아직도 기억하냐? 쪼잔하게... 그나저나 아쉽네. 내가 그 꼴을 꼭 직접 봤어야 하는 건데. 아무튼 오래 참았어!”
하지만 아쉽게도 번쩍 올라갔던 손은, 때마침 나온 황후 일행 덕에 조용히 내려질 수밖에 없었다.
“아바마마...”
기껏 달래 나왔더니만, 아나이스는 부모님을 보자마자 또 눈물을 글썽대기 시작했다.
“나나, 우리 공주님. 이제 그만 울어야지. 이제 황제인데 아직도 이렇게 꼬마 숙녀님처럼 울면 어떻게 해.”
혼자 남겨지는 게 못내 서러운 듯, 아나이스는 아빠를 꽉 안고 놔주질 않았다.
원래 그녀는 쉽게 울기는커녕 후계자로서 늘 의연하고 꿋꿋한 모습만을 보여 왔었다. 그나마 가족 앞에서만 솔직한 모습을 보였을 뿐, 차기 황제라는 압박감에 약한 모습조차 보이지 못하고 살아온 것이었다.
“아바마마... 울면 안 되는데... 죄송해요...”
“혼자 잘 할 거라 믿지만,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연락하렴. 엄마아빠가 바로 달려올게.”
“어마마마... 저 이제 고작 열일곱인데... 너무 두려워요.”
차마 남들 앞에서는 내색도 못하던 솔직한 심정이었다. 대관식 내내 위엄 있는 모습을 보이려 애썼지만, 막상 혼자 남겨진다 생각하니 너무 외로웠다.
그나마 황궁에 남기로 한 빅토리아가 있어서 다행이라지만, 그래도 섭섭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벌써부터 마음이 텅 빈 기분이었다.
“로렌마저도 떠나면 이 큰 황궁에 진짜 혼자 남겨지게 되는데...”
한참 슬픈 이별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데, 옆에서 초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막 아나이스를 따라 나온 로렌이었다.
“근데 누나, 나도 안 우는데 누난 왜 울어? 그럼 나 가지 말까?”
매우 파격적이게도, 막내황자 로렌은 평민들이 다니는 학습원의 연극학부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 날의 연극을 보고 완전히 꽂힌 것인지, 그 어떤 만류에도 고집을 꺾지 않고 연극배우를 하겠다고 땡깡을 부렸다.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든 황제 부부는, 마음대로 하라며 학습원 입학을 허락해 주었다.
연극은 주로 평민들이 보는 장르라 아카데미에는 연극학부가 없을뿐더러, 억지로 신설해봤자 인원이 차지 않을 것이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렇게 로렌은 신분까지 숨기고 학습원 기숙사로 떠나기로 결정되었다.
“....모, 몰라!!!”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제 누나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는 얼굴에, 결국 아나이스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소리를 빽 질러버렸다.
“우리 딸 씩씩한 걸 보니 괜찮을 것 같네.”
“네...”
“그래도 외롭지 않게 어서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해야겠다. 네 아빠 같은 사람으로 잘 골라야 하는 거 알지?”
“네!! 당연하죠!”
황후의 당부에 아나이스는 언제 울었냐는 듯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래. 이제 그만 울렴. 둘 다 부모 품에서 독립할 때가 된 것뿐이야.”
“하지만...”
딸을 다독여주던 황제는, 아이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마지막 당부를 남겼다.
“나나, 리일. 렌, 그리고 리엘”
"네."
“세상 살아보니 나 혼자 잘난 건 하나도 없더구나. 그저 부족하고 또 부족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내밀어준 손을 잡고 살아갔던 것뿐이었어.”
오죽하면 자식 하나 내 손으로 어찌 못 해서, 친구에게 아쉬운 소리 해 가며 부탁을 했을까 싶었다.
“.......”
“그러니 너희도 그걸 잊지 말았으면 한다. 그 자리는, 남을 찍어 누르라고 있는 자리가 아니니까. 오히려 누구보다도 힘들고 책임만 가득한 무거운 자리란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걸 기억하려무나. 서로의 동반자도 있고 친구들도 있잖니. 무엇보다 부모인 우리가 있으니, 힘들 때는 주저 말고 도움을 청하렴. 리엘도 마찬가지야.”
“네!”
“렌, 새로운 세상에 가서 좋은 사람들 많이 만나고 오렴."
“네에!! 생각만 해도 좋아요! 저 잘할 수 있어요!!”
이 상황에서 그저 신나는 건 아직 어린 로렌밖에 없었다.
“그래. 자신감 넘치니 다행이구나. 그리고 엔릴, 너도 이제 지켜야 할 사람이 생겼으니 더 이상 어린아이일 수는 없는 거 알지? 누군가를 지키려면 스스로 강해져야 한단다.”
“네, 알아요.”
“그리고 사랑은, 일방적으로 받기만 해서도 주기만 해서도 유지되지 않아. 그러니 서로 아끼고 보듬어 주는 그런 사이가 되었으면 하는구나.
“네.”
그렇게 한 마디씩 남기고, 드디어 황제 부부는 궁을 떠났다. 소원대로 단 둘이.
“진짜 가셨네...”
“응...”
마차가 멀어지며 흔들고 있는 손이 점점 작아지다가, 이윽고 점이 되어버렸다.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엔릴도 떠날 준비를 했다.
“우리도 갈 거야, 누나”
“응...”
“우리 신혼인데 설마 외롭다고 붙잡는 건 아니겠지!?”
“언제는 눌러 산다며!”
“신혼여행은 가야지!!”
“그럼 당장 가버렷!!! 그리고 오지 마!!”
그렇게 또 순식간에 리리커플도 출발하게 되었다.
***
그렇게 초라하게 떠나야 했던 모국에, 이제는 무려 여왕이 되어 돌아간다니...
리테인, 아니 리엔 왕국. 이제는 내 나라다. 정말로 내가 다스리는 나라.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백작가를 떠나올 때만 해도,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는데... 내가 이런 미래를 맞이하게 될 줄 정말 꿈에나 알았을까?
“리일. 고마워요.”
“응? 뭐가?”
그 동안 겪었던 모든 일들이 한 편의 극처럼 눈앞에 떠올랐다.
엄마를 잃고 내쳐지던 비참했던 순간, 눈물로 지새우던 하루하루, 살기 위한 발버둥, 리일과의 만남, 행복했던 기억들, 그 후 겪었던 온갖 사건 사고들과 두려웠던 순간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따뜻이 감싸 주었던 고맙고 또 고마운 새로운 가족들.
그리고... 언제나 나의 빛이 되어 준 리일...
엄마, 나 이제 가족이 생겼어요... 그리고... 비올레티에게도 가족을 만들어 주었어요. 제가 대신 사과도 했고요... 저, 잘했죠...?
휘몰아치는 감정을 도저히 다 표현할 수가 없어, 난 그에게 딱 한 마디로 전했다.
“저에게 낚여줘서 고맙다고요.”
말해놓고도 뭔가 민망해서 베시시 웃고 있는데, 대답과 동시에 리일의 입술이 나를 뜨겁게 덮쳐왔다.
“나야말로 고마워. 나 낚아줘서....”
“.......”
그동안의 그 어떤 키스보다도, 달콤하고 황홀하고 감미로운 키스였다. 마음이 전부 녹아내리는 듯한 뜨거움...
“리엘...”
한참의 뜨거운 설왕설래 끝에, 리일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입술을 떼어 냈다. 어서 빨리 나와 함께하고 싶어 하는 그의 간절함이, 굳이 읽어보지 않아도 절절히 느껴졌다.
그리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 난 더 없이 씩씩하게 외쳤다.
“자, 그럼 이제 가요! 우리의 신혼 왕국(?)으로!!”
“그래! 출발!! 우리 알콩달콩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될 때까지 행복하자!”
- 누구라도 낚이면 좋겠어!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