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화
47장 정체
『에피르에 도착하셨습니다.』
숲.
그들이 있는 장소는 검은 숲이었다.
가끔 바위덩어리가 박혀 있었고, 시체 썩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바닥은 검은 오물이 잔뜩 묻어 있었으며, 기분 나쁜 기운이 느껴지기도 했다.
다른 세상에 오면서 가장 처음 보는 광경이 영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이거 딱 봐도 꺼림칙한데……'
꼭 누군가가 당장에라도 튀어나올것 같은 흉흉한 분위기였다.
[죽음의 대마도사(전설급) : 리치의 숲이네. 진짜 오랜만에 본다. 야.]
[죽음의 대마도사가 오랜만에 보는 광경에 즐거워하며 이야기합니다.]
"별로 오래 있고 싶은 곳은 아니네요."
승철은 갑자기 선택권도 없이 이곳에 말려들어서 딱히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애초에 강연하려고 던전에 왔는데 이곳으로 이동된 거니까.
[그래도 못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네 마음대로 돌아갈 수 있잖냐.]
'못 돌아갔으면 상당히 짜증 났을걸.'
갑자기 끌려와서 집에 못 간다고 하면 그만큼 열 받는 것도 없으니까.
그래도 '심연 속의 어릿광대'가 말한 대로 귀환은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하니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근데 나 던전에 올 때마다 이러는 거는 아니겠지?'
『지금이 처음이라서 그렇지, 다음 부터는 주인님의 의사에 맞춰서 이동할 수 있도록 제가 시스템 내부에서 조정하겠습니다. 이번만 그럴 거예요』
'그러면 다행이고.'
우선 뒤에 하연이랑 아카데미 학생인 동훈이 있으니까 지구로 다시 돌아가는 게 좋았다.
잠깐 주변을 슥 둘러본 승철이 방금 알림에서 올라온 키워드를 내뱉었다.
"귀환."
『적대 관계의 적이 주변에 존재합니다. 귀환하실 수 없습니다.』
애써 마음을 편하게 먹고 귀환을 호기롭게 외쳤다. 하나 돌아오는 건 귀환할 수 없다는 메시지뿐.
아무래도 안전한 곳으로 이동하기 전까지는 귀환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승철이 알림을 보고 거하게 한숨을 쉬었다.
『주. 주인님. 아까 거는 제가 보낸 거 아니에요! 이거 시스템 자체에서 자동적으로 나오는 거라서……!』
알아.
라온이라고 시스템을 전지전능하게 움직일 수 있는 건 아니다.
일부나마 시스템 권한을 가졌을 뿐 이라서, 라온의 권한 밖의 문제는 어쩔 수 없다는 걸 상기했다.
"……후우. 일이 진짜 귀찮게 되었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심연 속의 어릿광대가 킥킥거리며 당신의 모습을 보고 웃습니다.]
『라온이 심연 속의 어릿광대에게서 채팅 권한을 뺏으려고 달려듭니다.』
『심연 속의 어릿광대의 채팅 권한이 20초 동안 박탈당합니다.』
마침 라온이 기특한 일을 해줬다.
승철이 마음속으로 녀석을 칭찬하자 라온이 실없이 웃으며 기뻐했다.
라온과 어릿광대는 그렇다고 쳐도…… 지금 상황을 해결하는 게 급선무다.
'뭐…… 이렇게 되면 이것저것 숨기기는 애매해졌네.'
승철이 뒤편에 있는 하연과 동훈을 힐끗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사람들한테 정체 드러나기 싫어서 뭐든 숨기겠다고 아이템도 가려서 쓰다가 상관없는 이들을 위험하게 만들 순 없으니까.
동훈이라는 얘 같은 경우에는 이제 겨우 오늘 만난 사람이지만.
'나중에 조금 귀찮아지더라도 어쩔수 없지.'
죽을 때까지 숨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살짝 귀찮아지는 건 감수해야겠다.
[일필휘지(전설급) : 확실히…… 사람이 바뀌긴 바뀌었네. 예전이었다면 어떻게든 숨어서 행동해보겠다고 난리를 쳤을 텐데.]
[심연 속의 어릿광대가 뿌듯해합니다.]
[역시 직접 나서서 정신 교육 하길 잘 했어.]
"인벤토리 (Passive)."
공간이 일그러졌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승철이 이미 지하는 물체가 한 순간에 그의 주변에 생성되었다.
척 봐도 50개체가 넘어 보이는 자동 비행형 기계 아이템들.
옵저버 (observer) -79기체.
『옵저버와 완벽하게 동기화되었습니다.』
아공간과는 다르게 인벤토리 특성상 한 가지 종류의 아이템들을 숫자에 상관없이 수납할 수 있다는 설명에 양산시켜 놓은 것들이다.
보통 이렇게 숫자가 많은 기기를 동시 소환하면 마력이 부족하게 마련이지만, 그 에너지는 방금 위치를 사냥하고 얻어낸 상급 마정석이면 충분히 대체 할 수 있었다.
"이 주변의 위치를 정확하게 스캔하고. 적들을 탐색. 주변의 마력장탐색."
"그리고 지구의 데이터와 다른 이세상만의 특이점들을 검색하고 조사해."
기이이잉…….
파앙-!
그가 명령을 내리자 옵저버들이 잠시 차징음을 내며 부스터를 모으더니 단숨에 사방으로 퍼져서 날아올랐다. 그러곤 정확히 3초.
『주인님. 주위 반경 50km 내외의 지도가 제작되었습니다. 지금 더 반경을 넓히는 중입니다. 홀로그램 영상으로 위치를 보여드릴까요?』
그가 무심하게 라온의 질문에 대답했다.
승철의 검은 정장으로 부터 동전만한 크기의 금속 유기체가 돌연 떠오르더니 허공에 홀로그램을 띄워냈다.
아쉽게도 이 근처에 몬스터들이 없는 안전한 위치는 없었다. 조금 더 멀리 가게 되면 안전지대가 보이기도 했다.
'전투 전함만 인벤토리에 넣어놓았어도 이렇게 귀찮은 일은 없었을 텐데. 전함으로 이동해서 바로 귀환할수 있을 텐데.'
그건 아직 집 지하에 드워프들의 던전에 있었다. 승철은 집으로 돌아가게 되면 반드시 챙겨 놓으리라고 다짐했다.
[죽음의 대마도사가 지도를 보고 안전지대 위치를 기억에서 떠을립니다.]
[죽음의 대마도사(전설급) : 저기 위쪽으로 올라가면 내 1번 보물고 있는데…… 한번 가볼래?]
"거기. 안전해요?"
[죽음의 대마도사(전설급) : 무조건. 드워프들한테 시켜서 방어 설비다 갖추게 하고 내가 직접 가디언도 배정했으니까]
"그러면 거기로 가는 길 안내해줘요."
[죽음의 대마도사가 지도에 안전지 대의 위치를 알려줍니다.]
아까부터 주변에 이쪽을 향하는 적의가 피부 끝을 콕콕 찌르고 있었으니.
우선 사방에서 조여오는 몬스터들 사이에 길을 뚫어 놓고 자리를 이동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사방에서 느껴지는 살의들.
방금 옵저버가 탐색한 자료로 이곳의 대부분의 몬스터가 언데드임을 확인했다.
괜히 냄새나는 시체더 미랑 싸우기 싫은 승철이 다시 한번 인벤토리를 개방했다.
"자동 전투 기갑병 100개체."
불과 며칠 전, 몬스터 웨이브의 적들을 학살해 나갔던 기계군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하나에 최상급 마정석이 하나씩 꽂혀 있는 고급 병력.
각 개체가 110~ 120레벨의 몬스터들을 상대할 수 있도록 제작된 자동 전투 병기.
지구의 사냥꾼 무력 등급으로 치면 군단장급의 사냥꾼이 100명이 한 곳에 소환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주변 경계태세. 나를 적대하는 몬스터 박멸. 큰 소리 나지 않게 잠행모드로 활동하고……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도 미리 뚫어줘."
『최고관리자님의 명을 이행하겠습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갑병들이 소리가 크게 나지 않는 근거리형 무기를 꺼내 들며 각자 적들을 소멸시키기 위해 빠른 속도로 발진했다.
'이렇게 대놓고 움직였으니 바보라도 눈치챘겠지.'
옵저버의 소환부터. 홀로그램 생성까지.
그리고 기계공학자의 산물로 알려지는 자동 전투 병기.
또한, 지금의 과학 기술로써는 불가능한 처리 속도였고 움직임.
이쯤 되면 승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자동 전투 기체. 바꿔 말해서 전투기갑병들은 바로 며칠 전에 TV에서도 나온 존재들이니까.
이것들이 의미하는 바는 한 가지.
동훈의 얼굴이 허옇게 질려서 겨우 입을 열었다.
베일 속에 가려져서 정보가 하나도 공개되지 않은 사람.
"기계공학자……?"
협회에서 그를 지칭하길.
「이명 : 기계군단의 왕.」이라고 한 존재.
기계공학자(Mechanical engineer)그의 뒤편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하연이 두 눈을 부릅뜨며 믿기지가 않다는 듯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 많이 놀란 건 하연이었다.
"스……승님……?"
절대.
그녀로서는 도저히 상상하지도 못했던 모습이었으니까.
특히 오랜 기간 승철이 직접 싸우는 모습을 봐왔던 그녀가 말을 조금씩 더듬었다.
"진…… 짜로 스승님…… 이 기계공학자신 거죠?"
하연이 당장에라도 크게 울릴 것 같은 소리들을 애써 삼켜 눌렀다.
승철이 당혹스러워 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그녀를 힐끗 돌아봤다. 어찌나 놀랐는지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이제는 백지를 연상하게 할 정도로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표정을 읽으니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다 보였다.
생산자가.
선천적으로 몸이 약할 수밖에 없는 아이템 제작자가…….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저렇게 강해진 걸까.
저렇게 대단한 사람이 왜……?
그렇게 강한 권력하고 힘을 가졌으면서 왜 그렇게 숨어서…… 뭐가 무서워서.
왜 숨겼지?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웠을까?
……결국 그녀 스스로를 자책하는 표정을 짓기까지. 그 의식의 흐름이 대충 예상이 갔다.
그녀의 표정 속에서는 질투의 감정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거참, 생각하는 거 너무 뻔하게 보이는데. 얼굴 표현력 봐라.]
'그렇게 말하지 말고.'
승철이 쓸데없이 자책하기 시작하는 하연의 오해를 풀어주고자 바쁜 와중에 입을 열었다.
"그냥. 예전에 겪은 일이 있어서 내가 사람을 많이 가렸어. 지금은 이야기할 때는 아니니까 다 제치고…… 네가 못 미더웠던 건 아니었다는 건 아니거든."
트라우마가 있던 시절에는 그랬다.
『……구울이 소멸되었습니다. 가호 효과로 인해서 경험치가 추가 지급됩니다.』
『식귀가 소멸되었습니다. 가호 효과로 인해서 경험치가 추가 지급됩니다.
[죽음의 대마도사가 한곳에 오래있으면 추가 몬스터들이 접근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몬스터가 더 몰려서 좋을 건 없었다.
경험치도 얼마 되지 않는 놈들을 잡아봤자 괜한 마력 소모니까.
그가 혼이 다 빠진 하연과 동훈을 일깨우고 인벤토리에서 이동용 아이템을 새로 꺼냈다.
동훈은 끝도 없이 나오는 아이템들의 향연에 솔직히 말해서 어처구니없어하며 헛웃음을 지었다.
처음에는 탐색형 로봇 수십 대. 그다음에는 전투 기계병 100대.
이제는 특이해 보이는 장갑차까지.
"정체가 뭐예요. 진짜……?"
"뭐긴 뭐야. 네가 매일같이 뉴스에서 보던 기계공학자지. 마력 구동으로 특별 제작했으니까 연료 걱정은 안 해도 되니까 타."
『마력 구동 장갑차
설명 : 마력으로 움직이는 장갑차.
어지간한 몬스터의 공격으로는 쉽게 박살 나지 않는 단단함을 가지고 있다. 자동으로 운행되며, 마력만 충분하다면 비행 운행도 가능하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또한 마력을 추가 투입시킬 시, 장갑차의 내구도를 순간적으로 증폭시킬 수도 있다.』
『동기화…… 성공. 목적지까지 자동 운행을 시작합니다.』
"이건 또 뭐야……"
충격에 정신이 반쯤 빠져 있는 사람들을 태우며.
전설급 성좌 -죽음의 대마도사의 보물고로 향했다.
내가 만든 AI가 성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