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76장 타락한 성좌⑴
이 세상에서 성좌란.
과거의 신화가, 이야기가, 전설이, 기록들이 모두 하늘의 별자리가 되어 스스로의 업을 가지고 있는 자들을 뜻한다.
초월적인 존재로서 이야기와 기록의 후계자를 찾고, 업을 잇는 자를 찾아 계약한다.
즉, 성좌들이 공통적으로 행하는 행위는 기록을 잇는다는 것이다.
계약자들이 그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고, 사도의 존재 이유도 마찬가지.
[사과 말씀 올립니다.]
승철이 확인한 쪽지 제목은 이전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성좌님께 다소 무례한 행동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해서, 다른 화제로 '기계공학의 개척자'님을 끌어들이고자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불편을 느끼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현재 미국 측에 개방되기 직전인 멸망 등급의 던전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저희 12 원로는 해당 던전 내부에 일반적인 성좌와 다른, '타락 성좌가 강림해' 있는 것을 확인하여, 언론에 비공개한 채로 일을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타락한 성좌라…… 진짜 오랜만에 들어보네. 수천 년 이전에나 있던 얘들이었는데.]
[심연 속의 어릿광대가 과거를 회상합니다.]
"타락 성좌?"
승철이 방금 협회로부터 다시 도착한 메일을 들여다보며 어릿광대의 말에 반문했다.
라온이 조용히 침묵하며 승철의 손을 슬며시 잡았고, 어릿광대가 한숨을 내쉬었다.
[망각의 추종자]
『아카식 레코드의 반대되는 족속들.』
라온과 어릿광대가 번갈아가며 말을 이었다.
특히 라온은 조금 불안한지, 승철을 잡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우선 협회에서 부른 이유가 있었네. 역시 수장이란 얘들이 멍청하게 너한테 시비를 걸리가 없었지. 가능하면 미국까지 가보는 게 좋겠어.]
[타락 성좌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면 어서 해결하는 게 좋거든.]
승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승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쪽지로 보내는 답장 대신, 격을 끌어올려 상대방에게 성좌 메세지를 발송시켰다.
[기계공학의 개척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도와주러 가겠다고 합니다.]
[거룩한 수호의 파편이 화들짝 놀랍니다.]
[암영의 그림자가 당신의 메세지를 보고 놀라움을 보입니다.]
[중창의 학살자가 미소지으며 손을 흔듭니다.]
[명각의 신좌가 반가움을 표합니다.]
12원로들과 계약한 성좌들 또한 답장을 보내왔다.
승철이 씨익 웃었다.
* * *
그는 이번에도 알렉스의 도움을 받아 전세기를 하나 빌려 미국으로 향했다.
승철이 항상 즐겨 마시는 생과일 음료를 마시면서 핸드폰을 들여봤다.
-왜 갑자기 뜬금없이 미국이야? 무슨 일이라도 있어?
알렉스의 질문에 대충 둘러서 답장을 보냈다.
협회에서 승철에게 협회 원로 자리를 미끼로 몰래 부르려던 이유를 읽었기 때문에 사실대로 말하진 않았다.
그가 의자에 편하게 기대어 앉았다. 개인 침실부터 냉장고도 가득했고, 셰프도 또한 기다리고 있었다.
전세기라서 그런지 시설도 참 좋았다.
하나 누나한테는 요즘 많이 무리했으니까 이번 기회에 생각도 잠시 정리할 겸, 미국 여행이라도 며칠간갔다 오겠다고 이야기해 두었다.
누나는 잘 되었다면서 충분히 쉬고 오고, 혹시 한국 음식이 고플까 봐, 미리 새벽에 일어나서 음식까지 조리 해줬다.
"누나도 다음에 해외여행 한번 시켜줘야 하는데."
그렇다고 나도 지금 놀러 가는 건 아니니까.
몇 시간을 가만히 비행기를 탄 채, 미국으로 향하고 있자니 그의 감각에 거슬리는 기운이 걸리기 시작했다.
승철이 눈살을 찌푸리며 아래에서 느껴지는 기운. 신성과 섞인 마기에 숨을 길게 내쉬었다.
발밑에서 잠들어 있던 궁기가 벌떡 일어나서 승철의 주위에 맴돌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만나는 본신이 현현한 성좌.
조금 기대되었다.
* * *
미국에 도착해 내려서자, 공항 안의 7명의 협회 원로들이 그를 반겼다.
그들은 바로 승철을 5성급 호텔에 최상층으로 자리를 잡아줬다고 이야기했다.
그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상당히 어렸으며, 기껏해야 40대 정도 될 줄 알았던 이들이 20~30대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들은 미국 대표 2명, 한국 대표3명, 일본 대표 1명, 중국 대표 1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2원로라고 했지만, 모두 다 같이 한자리에 모이지는 못했다.
'생각보다 한국인이 많구나.'
조용히 속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다른 사람한테 관심을 잘 가지지 않아서, 원로들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게 없는 그였다.
라온이 옆에서 싸늘하게 웃으며 저들을 담담히 응시했는데, 옆에 있는 승철이 조금 무서울 지경이었다.
본래 한국은 땅이 엄청나게 좁은 대신 사람이 많이 밀집되어 있는 형태라 안전에 대해서는 다른 어떤 국가보다 더 뛰어났다.
결국 환경이 안전하니, 초심자 같은 경우에는 보호를 자처하는 사냥꾼들도 있으니, 타 국가보다 성장할 기회가 많기도 했다.
"전에 보냈던 메일은 정말 미안해요. 상황이 너무 급해서 실례했습니다. 전 에일리입니다."
금발의 서양 여성이 웃으며 승철에게 손을 내밀며 사과의 말을 건넸다.
옆에 있던 라온이 깍지 낀 승철의 손을 꾸욱 강하게 쥐었다.
"뭐. 어때요. 서로 오해한 건데. 저는 전설급 성좌 : 기계공학의 개척자라고 불립니다."
"기계공학자라고 해도 좋고, 승철이라고 불러도 상관없어요."
[기계공학의 개척자가 스스로를 밝힙니다.]
승철이 자기소개를 하자마자, 원로 모두에게 성좌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그에 다들 숨을 들이 삼켰다.
"멸망급 던전 때문에 조용히 부른 거면, 이거 비밀 유지 의뢰라고 생각해도 되는 거죠?"
승철이 저들에게 물었다. 원로들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입꼬리가 자그맣게올라갔다.
그가 눈앞에 있는 원로들을 상대로 양손에 깍지를 끼며 의자의 등받이에 편히 기댔다.
"의뢰 보상부터 협상하시죠. 물론……."
공짜는 없다.
나한테 맞는 보상을 가져와라.
승철의 말의 의미는 그것이었다.
대가 없이 일하는 것은 절대 사절이었다.
잠시 뒤, 원로들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 * *
당연한 말이지만, 사람이 하는 노동력에는 대가가 필요하다.
보통의 고용주들은 알바나 업무자에게 돈이라는 대가를 지불하게 되지만,
"저한테 돈은 필요 없습니다."
승철이 미리 언급한 것은 그것이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에게 필요없는 것들을 일일이 나열했다.
"아이템도 필요 없습니다. 제가 알렉스보다 훨씬 더 잘 만든다고 말할수 있거든요. 신화급 아이템…… 혹은 정말 특별한 고유 아이템을 제외하곤 쓸모없고."
경호원도 필요 없어요. 자택 보호? 이미 몬스터 따위로는 흠집도 나지 않도록 요새를 만들어 놓았어요."
"인맥은 더더욱 필요 없고."
그가 말하는 건 상대를 엿 먹이고자 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승철은 가진 게 정말 많았다.
오히려 부족한 게 거의 없는 편이었다.
"권력……은. 생각하실 필요도 없으시고…… 음…… 회계 쪽을 비롯한 서포트에도 유능한 사람이 제 옆에 있어서."
승철이 옆에 앉아 있던 라온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어깨를 잡으며 이야기했다.
라온의 얼굴이 화아아악 붉게 달아올랐다.
[이거 생 양아치구만.]
[심연 속의 어릿광대가 낄낄거리며 웃음을 짓습니다.]
[기계공학의 개척자가 원로들을 내려보며 이죽거립니다.]
그는 인간을 초월한 존재.
성좌다.
사실 원한다면 그 누구보다 쉽게 권력을 얻어낼 수 있었다.
실제로 그를 따르는 광신도들은 어떤 세력보다 위협적이기도 하고.
이렇게 되면 그들이 해줄 수 있는 보상에 한계가 명확하게 주어지기 때문에.
원로들의 낯이 굳어가기 시작했다.
아까 스스로를 에일리라고 소개했던 금발 여성이 입을 내밀었다.
조금 긴장했는지 그녀가 침을 삼켰다.
"그러면 혹시 가지고 싶으신 건 없어요?"
'왔다.'
마침 기다리던 질문이 왔다.
앞서 보상에 필요 없는 것들을 나열해서 말한 데에는 이를 위해서였다.
전세기를 타고 오는 동안 라온이 미리 알아봐서, 이 기회에 뜯어낼 수 있는 보상을 미리 알아봐 주었었다.
"세계 특수 광물 생산 지대. 별칭 죽음의 황금향."
내부에 측정 불가 랭크의 괴물들이 잠들어 있는 던전.
개방 제한 시간 3년 8개월 남은 무저갱.
그러나 그 어떤 장소보다 많은 광물들과 마정석들이 박혀 있으며, 그 지하에는 끝을 알 수 없는 종류의 금속들이 잠들어 있다는 황금향.
하나 그 누구도 그곳에 입장하길 꺼려 하는 장소.
어릿광대가 말하길, 세계 : 에피르로부터 떨어진 파편. 그 2번째.
"그곳의 지분을 원합니다."
라온에게서 설명을 듣고 나서부터 정말 가고 싶었던 곳이다.
마침 협회에서 관리한다고 하니, 오는 동안에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저들에게서 고민이 가득한 침음이 들려왔다.
물론, 그들이 할 수 있는 대답은 정해져 있을 테지만.
* * *
협상은 그가 원하는 대로 성공했다.
라온이 중간에 메일의 건도 이야기 해서 그런지 무려 지분을 50%나 혼자서 떼어먹을 수 있었다.
그가 성좌라는 것도 거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던전에 입장할 때, 천룡길드의 성기사 하운과 하연도 섭외되었다며 미국에서 만나게 되었다.
이제 들었는데 둘은 전투 유지력과 다방면에서 뛰어나, 보통 둘이 같이 일을 하게 되는 일이 잦다고 한다.
"승철 오빠. 하나 누나한테 여행간다고 했으면서 여기 일하러 온 거야?"
"어. 누나한테는 비밀로 해줘, 하연아."
승철이 인벤토리 내부에 있는 장비를 갖춰 입었다.
며칠 전에도 제작하던 신병기는 아직 완벽하게 완성되진 않았지만, 실전에서 쓰고자 한다면 충분히 사용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는 협회의 원로라고 하는 이들, 그리고 성기사, 마법사와 같이 그는 던전으로 입장했다.
『던전에 입장하시겠습니까? 안에는 '타락한 성좌'가 현현해 있습니다.』
『당신의 신성을 확인했습니다. 동등한 격의 성좌임을 확인.』
『시스템 권한 소유자 : 라온의 요청에 의해 당신에게 던전의 축복이 주어집니다.』
『라온의 가호가 일시적으로 '신성의 축복'으로 변형됩니다.』
『신성의 축복 : 타락 성좌를 상대하게 될 경우, 당신의 신성력의 양과 질이 1.5배 증폭되게 됩니다.』
[기계공학의 개척자가 던전에 입장합니다. 증폭된 신성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던전에 입장하자, 마기에 저항하기 위해 가볍게 피부위를 덮을 정도로만 스스로를 감쌌던 승철의 신성이 돌연 증폭되었다.
황금색으로 일렁이는 마력과 섞인 신성이 승철의 몸 주위를 맴돌면서 일렁거렸다.
던전 내부의 오염된 마기가 그의 신성이 나타나자, 갑자기 뒤로 빠지며 오염된 땅과 공기가 저절로 정화되었다.
[당신의 기록이 잠시나마 더 뚜렷해집니다.]
[기록 : 신성의 관리자가 활성화됩니다. 마기의 기운이 당신을 매우 두려워합니다.]
"뭐, 뭐야?! 갑자기 왜 이래? 마기가 왜……"
그의 뒤편에서 마기에 대항하기 위해 준비한 아티펙트나, 결계 방벽을 펼치려던 다른 일행들이 승철을 황당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그가 단번에 모이는 시선에 한 마디를 툭 내밀었다.
"뭘 보세요. 성좌 처음 봅니까?"
이젠 일상과도 같은 일이었다.
내가 만든 AI가 성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