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112장 신성기관(2)
각 세계에 따라서 신격에 쌓이게 되는 신앙은 그 성질이 다를 수밖에 없다.
서로 다른 세계는 기원, 문화, 가치관, 세계관, 풍습, 전례, 일상, 계기를 포함한 대부분의 동기와 사람들의 모든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세계 - 에피르의 신성 에너지가 가득 차오릅니다.』
그렇게 다른 기운의 신성을 같은 신성기관에 저장하고 다루려고 하다보면, 한두 번은 괜찮아도 조금만 그 상황이 지속되면 기관이 결국 오염되게 된다.
승철이 우선 일을 치르기 전에 현재 그의 몸에 녹아들어 있는 기관을 차분히. 느끼면서 관조를 계속 했다.
이미 있는 기관에 대해서 최대한 연구한다.
그의 몸은 하나고, 단 한 번의 실패도 허락하지 않았기에 특히나 더 조심해야 했으니까.
파지지직……!
[태초의 신룡이 공간을 열고 당신에게 도달합니다.]
그의 감각 끝자락에 공간이 열리는게 느껴진다.
이미 익숙한 기운이라서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다시 정신을 집중하고 스스로의 신성 기관에 집중력을 올릴 때였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숨을 가쁘게 쉬고 있는 신룡이 그를 멈춰 세웠다.
"잠깐 멈춰봐. 너 지금 신성기관 만들려는 거 다 아니까 우선 스톱."
목소리에 간절함이 묻었다. 강한 걱정이 드러났다.
[기계공학의 개척자가 집중을 끊어내고 천천히 눈을 뜹니다.]
"갑자기 왜?"
"지금 신성 기관. 하나 더 만들려고 하는 거잖아. 맞지?"
"그런데?"
승철이 신룡의 말에 동의했다. 정확히는 그 기계부품을 제작하기 전에 앞서, 스스로의 기관을 조금 더 자세히 파헤치는 건데. 뭐 금방 제작할 예정이었으니까.
"진짜 그거 안 하면 안 되냐? 꼭 해야겠어?"
그 표정이 비장하다. 평소에 보이는 여유로운 웃음이나 가벼운 호흡.
느긋한 시선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아. 뭐 때문에 그러는데. 어차피 신성 기관 하나 더 안 만들면 앞으로가 위험한데. 세계의 신앙에 따라 쌓이는 기운이 다르다고 하니까."
"꼭? 그 방법이 최선이야? 너라면 다른 방법을 찾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닐 거 아냐."
"그래도 이게 가장 효율적이니까 그러지. 갑자기 찾아 와서 왜 그러는 건데?"
신룡이 잘근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면 그 일 하기 전에 한 가지. 알려 줄 사실이 있거든."
신룡이 오른쪽 손에 주먹을 꽉 쥐었다. 근거 없는 강요는 어차피 승철에게 통하지 않는 걸 안다.
그렇다면 그도 계속 강요만 할 수는 없었다.
설득을 위해서는 설득할 만한 논리와 그 바탕이 필수적이어서.
[태초의 신룡의 격이 흔들립니다.]
5 초.
잠시 그는 고민하는 듯하더니 한숨을 쉬고 무거운 입술을 뗐다.
둘이 잠시 얼굴을 마주하는 그 잠깐의 정적의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정확히는, 너처럼 신성 기관을 하나 더 만들려고 하다가 실패한 사례가 있어서. 너 말리러 왔다."
신룡이 얼굴을 확 찡그리며 목 안에 갇혀 있던 한마디를 꺼냈다.
파지직.
붉은 스파크가 일어났다.
동시에 성좌들 다수가 의문을 토해냈다.
[어……? 무슨 소리야? 그런 전례가 없는데.]
『네? 혹시……』
[심연속의 어릿광대가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어릿광대와 라온이 동시에 들어보지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의문사를 토했다.
시스템 권한자와 창세급의 성좌 둘다 모르는 사실을 신화급에 달하는 신룡이 알고 있다는 게 이상했다.
승철도 속으로 작은 의문이 일었지만, 우선 신룡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그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 따위는 조금도 없다.
[태초의 신룡이 조용히 숨을 고릅니다.]
* * *
그는 직설적으로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모두가 모순을 느낄 수 있도록 말을 조금씩 돌려서 말하는 데 최대한 집중했다.
"간단한 이야기야. 자세히는 말할수 없으니까 최대한 에둘러서 이야기할게."
그가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금기 어라도 있는 것처럼.
모든 차원을 둘러싼 세계는 많다.
거의 그 끝이 없을 정도로 가득해서 감히 그 수를 가늠하기도 힘들 정도로 끝이 없고, 거기다 종류도 다양하다.
인간이 세계를 지배한 세상도 있고, 엘프가 멸망한 세계, 드워프가 모든 것을 지배한 세상.
용이 인간들에 의해 멸종한 세계.
혹은 용과 엘프. 드워프와 같은 환상종족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
다만 그 세상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떠돌거나 맴도는 이야기가 한 가지 존재한다.
"그게 누굴까?"
[용사……?]
[심연속의 어릿광대가 중얼거립니다.]
[태초의 신룡이 어금니를 꽉 다물니다.]
"정답."
심연속의 어릿광대의 말대로 서로 다른 세계에서도 어디서나 '용사'라는 언어는 모든 세계의 구성원이 알고 있었다.
[태초의 신룡의 격이 뒤흔들립니다.]
분명 각 차원은 서로 떨어져 있어서 이야기가 전달되지 않는 게 정상인데, 차원 간의 교류가 일어나기 전에도 모두는 용사에 대한 사실을 알았다.
하다못해, 환상. 마력을 깨우치지 못한 지구에서도, 게임, 스토리, 시나리오, 혹은 이야기의 형태로 대부분이 알고 있다.
단순히 '우연'이라고 하기 힘든 이야기. 조금도 연관성이 있을 리가 없는 세계에서조차 같은 이야기가 공유된다.
승철도 용사에 대해서는 대충. 알고 있었다.
신룡이 입을 다물고 침묵하며 성좌메시지를 보냈다.
[태초의 신룡이. 용사의 이야기는 어느 인간을 한참을 조롱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태초의 신룡이 용사란. 누군가 이름 지은 역겨운 명칭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스파크는 한 번 더 강해졌다.
붉은 스파크는 그렇게 거대한 위력처럼 보이지 않는데도 볼 때마다 소름이 끼쳤다.
"끄으으으으어억……."
[망각의 눈이 태초의 신룡을 주시합니다.]
[대가로 태초의 신룡의 기록 중 하나가 무너져 내립니다.]
"후우."
그 스파크는 집요하게 신룡이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도록 괴롭혔다.
신룡이 격한 숨을 들이마셨다가 다시 내쉬었다.
『아.』
라온이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잠시만요. 더 이상 말하지 말아주세요.』
무언가 짐작이 가는게 있는지, 다급하게 그녀가 신룡이 더 이상 말하고자 하는 걸 멈추게 했다. 태초의 신룡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태초의 신룡의 격이 손상을 입었습니다.]
『얼마 전에, 주인님이 검성과 대련을 했을 당시, 주인님께서 마지막에 사용하신 일격. 기억나세요?』
"어."
기억난다.
분명히 그 당시에 누군가의 일격을 재현했다는 메시지가 나왔었다.
정확히 누구의 일격인지는 자세히 나오지 않았지만, 그 당시에 신룡만이 유일하게 무언가 아는 눈치였었다.
『그 기록. 전에 제가 한번 검색해봤습니다만, 저도 접근 불가능한 정보라는 응답이 나왔어요. 게다가 시스템에서도 거의 남은 잔존 기록이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정확히는 아예 시스템 내에서도 폐지되다시피했어요. 거기다 정보에 대한 접근 가능 권한자가 태초의 신룡이 유일했고요.』
[그거 조금 이상한데. 내가 알지 못하는게 있었다고?]
[심연속의 어릿광대가 이상해합니다.]
아니야.
가능성이 있어.
승철이 머리를 굴려서 과거를 회상했다.
"……."
"비슷한 일이 예전에 있었잖아."
신룡은 침묵했고, 승철은 어느 누군가를 회상했다. 그는 과거 드워프들의 왕이라고 불리는 자.
모든 드워프들에게 잊혀지는 대신, 그리고 오직 자신만이 그들을 기억할 수 있었던 필멸자.
전대 드워프의 왕.
그는 분명 모든 드워프들에게 잊혀지고, 스스로의 모든 힘을 잃는 대신 모두를 기억하는 늙은 드워프가 되었었다.
이전에 그 드워프 왕을 한번 봤었기에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어느 순간부터 승철은 태초의 신룡이 하는 말들을 온전히 믿고 있었다.
[분명히, 지워지는, 혹은 그 쌍년이 삭제한 기록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그 대가가 필요한데…… 그리고 그 기록이 크거나 거대할수록 대가는 커지는 법인데…….]
[심연속의 어릿광대가 조용히 고민하다가 태초의 신룡이 벌인 짓거리를 추측하고 경악합니다.]
"……."
승철이 처음에 태초의 신룡을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망각의 던전은 저주에 걸렸었고, 태초의 신룡은 대부분의 신성이 바닥나서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신룡은 최대한 개척자의 기운을 가지고 있던 승철을 가르치거나 성장시켜 주는데 모든 자원을 아끼지 않고 지원하는 자였다.
왜 그가 초면인 승철에게 그렇게 대해줬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
앞뒤는 맞았다.
"무슨…… 바보 같은."
"후……. 우선 내 성좌명. 읽어봐."
신룡이 잠시 답답해하면서 이를 악물었다. 그가 승철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태초의 신룡."
그게 왜……?
뜬금없었지만 우선 그의 요청대로 성좌명을 읽었다.
아직까지는 아무것도 모르겠다.
[태초의 신룡의 격이 흔들립니다.]
"다시 한번. 뜻을 생각하면서. 내 성좌명을 읽어봐. 자세하게."
신룡이 다시 한번. 그의 성좌명을 읽는 것을 요구했다. 역시. 그는 지금 상당히 진지했다.
[태초의 신룡의 격이 격하게 흔들립니다.]
"뜻이라……"
태초의 신룡.
태초란.
하늘과 땅이 생겨난 가장 최초의 시기.
신룡.
용(龍) 종 중에서도 가장 높은 격을 가진 존재이자 신위의 경지에 오른 존재를 뜻하니.
그 둘의 뜻이 합해지면, 즉, 세계가 생겨나는 시기부터 존재해 왔던 용신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성좌 명의 뜻을 하나하나 따지면 그렇게 되는……데.
어라?
뭔가 이질감이 들었다.
"잠깐만."
승철의 표정이 갑자기 확 굳었다.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모순점을 느낀 것이다. 신룡의 얼굴이 조금. 더 확 일그러졌다.
오히려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게 더 말이 안 되었다. 너무나도 간단한 의심.
이미 진즉에 했어야 할 의문점.
승철의 시선이 눈앞에서 자조하며 웃고 있는 신룡에게 고정되었다. 그는 분명히 씁쓸한 웃음을 자아내고 있었다.
『망각의 눈이 태초의 신룡을 노려보기 시작합니다.』
[태초의 신룡의 격이 격하게 흔들립니다.]
그러고 보니까, 태초의 신룡은 특히 아는 것들이 많았다.
심지어 그는 심연속의 어릿광대를 무서워 하는 모습을 여태 보인 적 없었다.
무려 기사왕마저 벌벌 떠는 존재
"당신. 어째서 지금 신화급 성좌야."
조금. 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승철의 팔뚝에 소름이 오싹하게 돋았다.
신룡이 미약한 신성을 허공에 피워올렸다. 이제는 승철보다 더 약한 기운.
"……흐."
태초의 신룡이 몇 번. 호흡을 정돈한 다음에 승철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는 더 이상 어느 누군가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더 이야기하는 건 정말로 위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짧게.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전해야 했다.
신룡이 고개를 들고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아까의 질문에 대답했다.
"난 창세급 존재의 대부분의 격을 모두 단순히 누군가에 대한 기억을 유지하는 데에 대가로 바쳤거든. 그리고 내가 가진 힘과 기록의 대부분을 잃어버려서 던전에 처박혔었거든. 전대 개척자."
[미친 새끼.]
[심연속의 어릿광대가 태초의 신룡을 바라보며 쌍욕을 합니다.]
승철이 혀를 찼다.
내가 만든 AI가 성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