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나는 신선이 되련다. 44화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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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만들어 주신다고요?”
“그래. 너도 눈치챘겠지만, 내가 봉인되 있는 곳과 조화령이 관련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나를 가둔 놈들 중 하나가 천궁주였으니···. 딱히 놀랄 일은 아니지. 쯧. 허나 몰랐다면 모를까. 그걸 알게 된 이상 의식의 확장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네가 원한다면 언제까지나 이 안에 머물 수 있게 해주마.”
“언제까지나···. 말씀이십니까?”
고독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른 수사들이 조화령을 통해 의식 수련을 할 수 있는 기간이 1년에서 10년 사이인 것은 본인의 정신력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너 역시 그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터. 하지만 내 의식 안이라면 다르지. 네가 겪어야 할 정신력 마모를 내가 감당해 주마. 어떠냐? 해보겠느냐?”
준혁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숙였다.
“네. 해보겠습니다.”
준혁이 긍정을 표하자 고독천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손을 가볍게 저었다.
“그래. 오랜만에 생긴 제자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것도 좋지만, 모든 일엔 순서가 있는 법. 네가 스스로 알을 깨고 나오면 그때 보도록 하자꾸나. 그럼 준비하거라.”
어느샌가 고독천의 손위엔 푸른빛 덩어리가 뭉쳐, 당장이라도 터질 듯 넘실대고 있었다.
“준비됐습니다.”
“좋다. 너무 오래 걸리지는 말거라! 나도 어서 빨리 사제의 정을 쌓아보고 싶으니 말이다.”
고독천이 웃음 지으며 손을 움켜쥐자 손안의 푸른빛 덩어리가 퍼엉 터지며 준혁에게 쏘야졌다.
준혁이 푸른빛에 감싸이며 고독천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사이, 어느새 눈앞의 세상이 반전되며 새로운 풍경 속에 자리하게 되었다.
“여긴···.”
높다란 산 봉우리 위에 작은 초가집 하나만이 덩그러니 존재하는 곳, 집 앞으로는 수백 수천의 낮은 봉우리가 펼쳐져 있어 개방감과 함께 웅장함이 느껴졌다.
의식 속에 만들어진 환영이란 걸 알았지만, 이따금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청량감까지 묻어있어 현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준혁은 주변을 잠시 둘러보다 시야가 뻥 뚫린 절벽 한편에 자리하고 앉았다.
“삶의 목표라···.”
준혁은 자조적인 웃음을 띠며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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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시간이 지난 걸까.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고독천의 말대로 과거의 일을 하나씩 회상했다.
고아원에 도착한 날, 흐릿하게 기억나는 부모의 뒷모습부터 시작해, 동생이 죽었다 살아나며 안도의 눈물을 흘렸던 날까지.
“지독하게도 살았구나···.”
인생을 차분히 돌이켜 볼일이 얼마나 있을까?
준혁은 자신이 살아왔던 과거를 돌이켜 보며 웃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 모든 행적을 낱낱이 되새겼다.
“정말 내 인생은 없었어···.”
자신도 알고 있었고, 크게 문제가 된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동생을 살리는 게 오빠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고, 어려운 형편에 그 하나에만 매진하다 보니, 언젠가부터 동생을 살리고 행복하게 하는 게 준혁의 인생 목표가 돼버린 것.
“그럼 내가 하고 싶은 건 뭘까?”
몇 차례나 삶을 되새기며 살펴보았지만 스스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고 싶은 일···. 원하는 것 하나 찾는 것뿐인데···. 어렵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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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정처 없이 흘러갔고, 고독천이 만들어 준 의식 속 환영의 풍경도 몇 차례나 바뀌었다.
준혁이 생각에 골똘하다 심장 어림에 통증이 느껴질 때면 어김없이 비바람이 몰아 쳐와 기분을 전환해 주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기에 준혁은 허공 어딘가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준혁은 목표와 목적을 찾기 위해 더 이상 고민을 하지 않았다.
그저 명상에 잠기고 자연 풍광을 구경하다 잠들기를 반복했다.
“이렇게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가는 게 신선들의 삶일까?”
비록 고독천이 만들어 준 의식 속 환영이라고는 하나 준혁은 마음의 평온이 찾아온다는 게 어떤 건지 느낄 수 있었다.
동생에 대한 걱정도 어느 순간부터는 조금씩 내려놓을 수 있었다.
고독천의 말대로 동생은 이미 치료가 된 것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나연도 이제는 성인이니 스스로 삶의 주인이 돼야 하는 법.
준혁은 사색과 명상에 잠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런 이치를 조금씩 깨우치고 진실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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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일까?”
의식의 환상 속에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 가늠도 가지 않는 어느 날.
준혁은 하늘 높이 떠다니는 구름을 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언젠가부턴 동생 걱정도, 환상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삶의 목적과 목표라는 거창한 주제도 깡그리 지워버렸다.
이제는 순수하게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한 물음만이 남았고, 그에 대한 해답을 고민 중이었다.
“내 근원은 어디에서 온 거지.”
명상을 거듭해 나가던 어느 날, 준혁은 자신의 깊은 곳에 죽은 듯이 천천히 맥동하는 어떤 힘을 느꼈다.
그 힘은 너무나 작고 연약해 이토록 오랜 기간 마음의 평정을 찾고 내면으로 빠져들지 않았다면 절대 느낄 수 없을 정도.
준혁은 그것이 백호천군이 말한 알 수 없는 혈맥의 힘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 힘을 느끼고 난 후, 자신의 존재가치에 대한 의구심이 더욱 짙어졌다.
“난 사람이 아닌가? 난 누구지?”
생각이 깊어질수록 심장 어림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자신을 충동질했다. 그건 마치 깨어나고 싶다고 발버둥 치는 것처럼 간절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때 준혁의 뇌리로 벼락이 치는 느낌과 함께 어떤 의지가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내 삶의 목표나 목적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나는 나로서 온전히 존재해야 그 후를 이야기 할 수 있는 법. 내 갈 길을 찾기 전에 내가 누구인지, 나라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게 먼저야.”
순간, 어떻게? 무슨 방법으로? 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지만 이내 사그라들었다.
“더 이상의 고민은 무의미해. 스승님과 상의하자. 내가 해야 할 일을 정했으니 나머지는 조언을 받아 정하면 되는 일.”
그동안 고민했던 일들이 거품처럼 가벼운 일인마냥, 준혁이 확고한 결심을 하는 순간 모든 사념이 산산이 부서지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동안 준혁에게 편안한 쉼터를 제공했던 절벽 위 초가집이 주변 풍경과 함께 무너지고 있었다.
초가집과 함께 준혁의 과거 걱정들도 함께 무너져 사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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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몇 년째지? 제법 오래 걸리는군.”
고독천은 걱정스러운 말투와 달리 웃는 표정으로 눈앞의 푸른 구체를 보고 있었다.
자신이 만든 ‘시간의 방’은 안에서 수련하는 사람의 의지력에 비례해 방의 강도가 강해졌다.
즉, 나약한 자가 들어서면 작은 변화에도 시간의 방이 쉽게 붕괴하고, 반대로 정신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세상을 관철시킬 정도의 강력한 의지가 서지 않고서는 시간의 방에서 절대 탈출할 수가 없는 것.
몇 년째 미동도 없이 유지되는 시간의 방을 보면 이번에 새로 얻은 제자의 정신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게 틀림없었다.
“벌써 마음에 드는구나.”
그때, 푸른 구체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제 끝나려나 보군.”
고독천의 예상대로 잠시 후 푸른 구체가 펑 하고 터져 나가더니 그 안에서 가부좌를 한 채 두눈을 감고 있는 준혁의 모습이 드러났다.
준혁은 마치 죽은 듯 숨조차 내쉬지 않고 있다가 푸른 구체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지자 두눈을 번쩍 떴다.
“고생했다. 그래, 너의 길을 찾았느냐?”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는 고독천을 발견한 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나는 그저 기회를 제공했을 뿐, 그 안에서 깨달은 건 순전히 너의 노력이다. 고마워 할 필요 없다.”
고독천의 겸양에 준혁이 살포시 미소 지었다.
“마음의 평정이 깨져 심마가 찾아오려고 할 때마다, 스승님께서 도움 주신 걸 알고 있습니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오랜 시간 안에서 버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알고 있었더냐? 눈치도 빠르구나.”
“감사합니다. 스승님.”
다시 한번 준혁이 허리를 숙이자, 고독천이 손을 휘익 저어 준혁의 몸을 바르게 세웠다.
“됐다. 그런 것이야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그래. 이제 들어볼 수 있겠느냐? 안에서 어떤 마음을 세우고 나왔는지?”
고독천의 물음에 준혁은 한 번 더 생각을 정리한 후 말했다.
“제가 누구인지 알고 싶습니다.”
“흐음? 자세히 말해 보려무나.”
“동생의 일을 제 인생에서 떼어놓고 보니, 저에게 남은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고민을 거듭하다 보니 텅 빈 마음 한편에 그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의 근원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나. 우연인지 그때 제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혈맥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제게 필요한 건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하는 것이 아닌, 내가 누구인지 정체성을 깨달아야 한다는 걸.”
“흐음···.”
“혹시···. 제가 내린 결론이 마음에 드시지 않으신 겁니까?”
준혁의 질문에 말없이 생각에 잠겨있던 고독천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경지를 높이고 강함을 추구하는 것보다, 세상의 부를 움켜잡고 정상에 서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네가 말한 스스로를 알고자 하는 일이지. 내가 생각에 잠겼던 건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그럼 무엇이?”
“얘기하자면 길겠구나. 그래 자리에 앉자.”
고독천이 허공에 가볍게 손을 휘젓자 회색 공간이 변하며 아늑한 건물 안의 풍경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눈앞엔 단조로운 목탁 위로 다기와 주전자가 생겨났다.
“자리에 앉거라.”
“네.”
김이 풀풀 나는 주전자를 집어 든 고독천이 차를 우려내며 말을 시작했다.
“백호족의 지식을 얻었으니 너도 혈맥의 힘에 대해선 대충 알고 있을 터. 고대로부터 전승되어 오는 혈맥을 지우는 방법에 대핸 알고 있느냐?”
“자세히는 알지 못하나. 혈맥의 힘은 세상에 일정 이상 항상 존재하기에 온전하게 지울 수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 말이 맞다. 만약 특정 혈맥의 힘을 완전히 지우길 원한다면 중천과 수많은 계면, 그리고 상천에 이르기까지 혈맥의 피를 잇는 모든 생명체를 동시에 죽여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혈맥 보존의 법칙에 따라 세상 어딘가 족인의 몸에서 혈맥의 힘이 발현되고 말지.”
준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차를 한 모금 마신 고독천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예로부터 혈맥의 힘을 가진자는 처리하기보단 봉인해 버리는 게 당연한 방법이었지. 지금의 나와 천군이처럼 말이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천군이라 하심은.”
“백호천군 말이다. 그 녀석이 말한 천마혈선이 바로 본좌니라. 버러지 같은 선역 놈들이 감히 나에게 혈선이라는 악명을 붙였지.”
“!!”
전혀 생각도 못 했기에 준혁은 눈이 화등잔만 해지며 스승을 직시했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 신경 쓰지 말거라. 그렇기에 네 녀석이 미약한 혈맥의 기운만을 겨우 느꼈다 함은 너의 윗대의 누군가가 강력한 혈맥의 힘을 품은 채 어딘가에 봉인 당했다는 뜻이겠지.”
“아···.”
“한데 말이다? 너에게서 느껴지는 혈맥의 기운은 정말 생소하구나. 봉인까지 당한 혈맥이라면 응당 알고 있어야 정상이거늘···. 어찌 이토록 생소한 건지. 흠···.”
두 사람은 각자의 생각에 빠지며 한동안 김이 나는 차만을 홀짝거렸다. 그 어색함이 싫었는지 고독천이 다시 말을 꺼냈다.
“네가 말한 정체성은 혈맥의 근원이 되는 힘을 찾아 나서겠다는 말이냐?”
“사실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저의 근원인 혈맥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찾고 싶었던 것은 맞습니다. 한데 스승님의 얘기를 들으며 조금은 방향성이 잡힌 것 같습니다. 봉인되어 있을지 모르는 혈맥의 힘을 찾고 싶습니다.”
준혁이 말을 하며 두 눈을 빛내자, 고독천이 잠시 헛웃음을 흘리다 말을 꺼냈다.
“찾아서 혈족의 복수라도 하려는 것이냐?”
고독천의 물음에 준혁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비록 제가 혈맥을 타고난 후예라고는 하나, 누군지도 모르는 자를 위해 복수까지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저의 근원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만 알 수 있으면 족합니다.”
“잘 생각했다. 필요 없는 은원 따위에 끼어드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지.”
잠시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던 고독천이 말을 이었다.
“한데 근원에 닿는다는 그 말,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아느냐?”
“가르침을 주십시오.”
“봉인까지 당했다는 건···. 특히 너처럼 그 기운의 형태조차 파악할 수 없을 만큼 꽉 막혀있다는 건, 봉인의 주체가 신선경에 이른 자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 말인즉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선 너 역시 그 정도 경지에 이르러야 하는 법.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아니 시간이 문제라고 할 순 없지···. 할 수 있겠느냐?”
“네 해보려 합니다.”
준혁은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모습에 걱정이 이는지, 고독천이 부연해 설명했다.
“네 녀석의 기억을 보니 수련 경지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더구나. 네가 사는 곳이 영기가 충만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이제야 원영기 수사들이 나타났으니 그럴 만도 하지.”
“...”
“중천에선 신이라 불리는 대라경에 이르기까지의 길을 칠기삼경삼선삼청이라고 부른다. 그중 신선경은 삼선에 해당하는 경지.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끝이라고 볼 수 있지. 네가 최고라 생각하고 있던 원영기는 칠기의 끄트머리, 신선경으로 가는 초입에도 이르지 못한 경지다.”
“신선경···.”
“네가 그리 맘을 정했다면 말릴 생각은 없다. 다만 그 길이 쉽지는 않을 것이야.”
“명심하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스승님께선···.”
준혁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묻자, 피식 웃은 고독천이 대답했다.
“나는 삼선을 넘어 삼청에 발을 디뎠다. 중천 오역의 주인들은 모두 삼청에 다다른 괴물들이다.”
고독천의 말에 준혁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두눈을 빛내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저 역시! 저 역시 삼청에 오르겠습니다. 신선경을 뛰어넘어 보겠습니다!”
“뭐라? 하하, 꿈도 야무지구나. 그래 계획을 세웠다면 큰 꿈을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지.”
기분 좋게 웃던 고독천의 표정이 변하더니 진지한 얼굴을 했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도록 하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