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 나는 신선이 되련다. 45화
문피아 공유방에서 작업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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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그랬지?’
시간의 방에서 나온 후 혈맥의 힘을 찾아 정체성을 확립하겠다고 다짐한 준혁은, 스승이 중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란 걸 듣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호언장담하고 말았다.
‘설마 호승심 같은 건가?’
갑작스레 나온 말에 자신도 당황했지만, 차분히 생각해보니 수도의 길을 걷는 수도자로서의 호승심 같은 거라 생각됐다.
‘그런 욕심 따윈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사람인 건가.’
동생에 대한 짐을 내려놓은 순간, 준혁은 자신에게 더 이상 욕심이란 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지하지 못한 사이 마음 한편에 강해지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던 것 같았다.
‘그래. 어차피 내가 정한 길을 가기 위해선 강해져야 하는 게 필수다. 하나씩 계단을 밟아 올라가자. 중천으로 올라가 경지를 쌓고, 나의 근원을 찾자.’
준혁은 자신의 눈앞에서 이마에 손을 올린 채 집중하고 있는 고독천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능력이 된다면 스승님의 봉인을 푸는 방법도 찾고···. 기회가 된다면 청호의 혈족들도···. 욕심을 내기 시작하니 할 일이 많구나.’
어느새 고독천을 보는 준혁의 눈에 따뜻한 감정이 맴돌았다.
함께한 순간은 하루가 채 안 될 정도로 짧았지만, 시간의 방에 수년간 머무는 동안 계속해서 누군가에게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걸 느꼈다. 평생 느껴보지 못한 감정.
비록 고독천 역시 준혁에게 바라는 게 있기 때문에 제자로 받아들인 거겠지만, 그의 행동이 가식은 아니란 걸 분명하게 느꼈다.
한동안 기분 좋은 미소를 짓던 준혁의 표정이 급변하더니 눈에 살기가 돌았다.
‘그리고 나와 나연이를 조정하려던 굉라. 너는 반드시 죽이겠다.’
스승에게 전해 듣기로, 굉라가 나연의 몸에 심은 기운은 마역 선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폭식이라는 술법일 거라 했다.
그가 원할 때 언제든 내부를 폭발해 절명에 이르게 하는 기술.
준혁이 자신의 인생에서 동생에 대한 짐을 내려놓았다고는 하나, 그것과 이 문제는 별개.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무언가를 준비 중이던 고독천이 준혁을 불렀다.
“받거라.”
고독천이 이마에서 손을 떼며 손을 뻗자, 그의 손끝에서 작은 옥간이 만들어지더니 준혁에게 날아왔다.
“그 안에 네가 익혀야 할 공법과 네 기억 속에 없던 필요한 지식을 넣었다. 우선 그걸 완벽하게 주입한 후에 시작하도록 하자꾸나.”
“네. 스승님.”
준혁은 망설임 없이 옥간을 잡아 이마에 가져다 댔다.
축기기에 오른 후엔 법기술을 따로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
준혁이 새롭게 익힌 공법은 진혈단신공법.
드넓은 수도계에서 오직 고독천만이 익힐 수 있었던 신공.
“머저리 같은 선역 놈들이 아무리 연구해도 이걸 익힐 순 없지. 진혈단신공은 두 가지가 충족되어야만 비로소 익힐 수 있다. 하나는 혈맥의 힘을 타고날 것. 그리고 심영근을 가지고 있을 것.”
스승의 설명을 들은 준혁이 고개를 갸웃하며 질문했다.
“중천을 비롯해 그곳에 연결된 수많은 계면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많은 곳의 수도자 중 두 가지를 함께 가지고 있는 자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저만해도···.”
“흣, 제자야. 내가 왜 너를 보자마자 제자로 삼고 싶어 했겠느냐? 혈맥의 힘은 고대 혈족의 피를 이은 자만이 가질 수 있다. 그 수가 많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지. 하지만 심영근은 오직 인족에게서만 나타난다.”
“그게 무슨.”
“말 그대로 다. 오직 인족에게서만 나타나는 희귀 영근이 심영근이지. 그렇다면 인족에게서 혈맥의 힘이 나타날 가능성은? 흐흣 애초에 혈맥의 힘이 나타나면 그건 인족이라 할 수가 없지. 그러니 두 가지를 함께 가지고 있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럼 스승님께선 인족이신 겁니까?”
“나는 거인족이다. 중력거인. 다만 인족의 피도 흐르고 있을 뿐이지.”
설명을 하던 고독천이 씨익 웃음을 지어 보였다. 웃음 속엔 자부심이 깃들어 있었다.
“그러니 너와 나같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자는 세상천지에서 극히 드물 수밖에 없는 것. 평생을 살아도 보기 힘들지.”
진혈단신공법을 익히고 난 후에야 준혁은 고독천이 혈단공법을 보며 조잡한 공법이라고 말했던걸 이해할 수 있었다.
조건이 맞지 않은 사람들도 익히게 하도록 능력을 몇 단계나 떨어트려 놓았고, 그 와중에 수많은 부작용이 생겨난 것.
그럼에도 진혈단신공법에 걸린 제약을 완전히 없애진 못했다. 심영근이 아닌 자들도 익힐 수 있게 만들긴 했지만, 여전히 혈맥의 힘이 없으면 조잡한 열화판 마저도 익힐 수가 없었다.
“공법의 핵심인 반탄기를 부작용 따위로 치부하고 없애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걸 보면, 선역 놈들은 진정한 머저리라고 할 수 있지.”
스승의 말에 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준혁도 혈단공법의 부작용인 반탄기를 제어하기 위해 꽤 많은 노력을 했었기에 스승의 말을 체감할 수 있었다.
진혈단신공법에서 반탄기는 부작용이 아닌 공법의 핵심인 공격 수단이었다.
내, 외 적으로 쌓이는 기운을 한곳에 뭉쳐 수십 배 강하게 돌려주는 기술이 바로 반탄기였다.
“그런 의미에서 칭찬해주고 싶구나. 이런 뒤떨어진 공법을 가지고도 반탄기의 원기능을 최대한 살려내다니. 내가 제자 하나는 잘 받은 것 같다.”
“아닙니다. 살기 위해 편법을 쓴 것뿐인걸요.”
“겸양 떨 거 없다. 비록 몸속 충격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했다고는 하나, 스스로 반탄기를 공격수단으로 만든 건 칭찬할 만하다.”
“감사합니다.”
준혁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럼 이제 진정한 반탄기를 어찌 사용하는지 보여주마.”
“네, 스승님.”
+++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갔다.
10년 후.
“후···. 이제야 진혈단신공법을 온전히 익혔네. 스승님도 참···. 기본이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모든 걸 하나씩 짚어주시다니···. 내가 애도 아니고.”
준혁은 한쪽에 둥둥 떠서 눈을 감고 있는 고독천을 보며 웃음 짓고 있었다.
20년 후.
“제자야. 이곳에서 익힌 건 모두 의식을 통한 수련일 뿐, 밖으로 나간다면 다시 시작해야 함을 알고 있겠지?”
“네. 스승님.”
“그럼에도 계속 수련을 할 것이냐?”
“네. 한번 나간다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니···. 스승님과 함께 있을 때 더 많은 걸 배우고 싶습니다.”
“그래. 나 역시 바라는 바다.”
두 사제의 얼굴엔 미소가 닮아 있었다.
30년 후.
“스승님. 더는 수련의 성취가 오르지 않습니다.”
준혁의 고민에 고독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받아들이고 있는 기운은 내가 가상으로 만들어낸 의식의 힘일 뿐이니···. 실제 영기를 몸속에 쌓는 것과는 크게 다를 터.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럼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흠···. 그래! 이렇게 해보자꾸나. 부술 이나 인장술이 잡술이라 할 수 있지만, 그것들 또한 익히다 보면 깨닫는 게 있을 터. 부술 부터 배워보도록 하자꾸나.”
40년 후.
절벽 꼭대기에 마련된 초가집.
고독천이 준혁의 술잔을 채워주었다.
“이곳이 스승이 살던 곳이다.”
“삼청에 오르신 분의 거처치고는 소박하군요.”
“허허, 너도 이 길에 오면 알 수 있을 터. 다 부질없음을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고독천의 씁쓸한 목소리에 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알 순 없었지만, 그동안 가끔 스승이 혼잣말로 하던 한탄을 알고 있었기에 그의 외로움을 이해했다.
“스승님. 오늘은 스승님의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내 얘기? 무엇이 듣고 싶으냐?”
“그냥···. 스승님의 살아왔던 얘기가 듣고 싶습니다.”
“살아왔던 얘기라···.”
50년 후.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준혁은 가부좌를 한 채 앉아있었다.
“의식을 실체화 할 수 있는 념이라···.”
60년 후.
슈아앙-
허공 높은 곳으로 치솟은 준혁이 한곳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준혁의 몸이 흐릿해지는가 싶은 순간, 멀리 떨어져 있는 허공에서 나타났다.
“백호족의 힘을 완벽히 사용하긴 힘들구나.”
70년 후.
“이걸 받거라.”
“이게 무엇입니까?”
“남아있는 내 의식 속에서 너에게 필요하다 싶은 지식을 넣은 것이다. 의식 깊은 곳에 남을 터이니 당장은 사용할 수 없을 테지만, 천천히 네 것으로 만들면 될 것이야.”
“저를 보내시려고 하시는 겁니까?”
준혁의 표정을 본 고독천이 손사래를 쳤다.
“수천 년 일지, 수만 년일지 모를 긴 시간을 이곳에 갇혀 있었다. 어찌 너를 보내고 싶겠느냐. 마음 같아서는 영원히 함께 있고 싶구나. 허나, 내가 돕고 있다고는 하지만 너의 혼백이 점점 옅어지는 게 느껴지는구나. 이제는 의식 세계에서 떠나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준혁은 스승의 말에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언젠가부터 신체 일부가 점점 흐릿해져 가고 있었다.
“일 년만, 일 년만 더 스승님 곁에 있겠습니다. 못다 한 얘기가 많지 않습니까?”
71년 후.
정좌하고 앉아있는 고독천 앞에, 준혁이 큰절을 올렸다.
“제가 살던 곳에선 이렇게 인사를 합니다.”
“오체투지를 하며 하는 인사라···. 웃어른의 입장에선 기분이 좋겠구나.”
“스승님.”
“왜 그러느냐?”
잠깐 말없이 고독천을 바라보던 준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게 하고 싶은 말은 없으십니까?”
준혁의 물음에 고독천이 허공을 응시하다 말했다.
“... 한 가지 명심하거라. 중천의 버러지 같은 놈들이 네 정체를 알게 되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터. 진혈단신공법을 사용하는 걸 누군가 본다면···. 절대 살려두지 말거라.”
“네. 명심하겠습니다. 다른 말씀은 더 없으신지요.”
“...제자야.”
“네. 스승님.”
“몸 건강하거라.”
마지막 스승의 당부 인사에 준혁은 살포시 미소 지었다.
“네.”
준혁이 웃음 짓자 고독천도 마주 보며 웃었다. 잠시 후, 준혁이 무언가 더 말을 이으려고 할 때, 고독천이 피식 웃더니 손을 휘익 저었다.
그 순간, 고독천의 몸과 함께 주변 풍경이 점점 옅어지더니 먼지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무언가 깨지는 느낌과 함께 준혁의 의식이 빠르게 튕겨 나갔다.
+++
“허억-”
두눈을 번쩍 뜬 준혁은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예상대로 백호족의 봉인지를 벗어난 후 숨어들었던 바위 밑, 토굴 안.
여전히 안전한 곳에 있다는 안도감과 함께 준혁은 스승을 떠올렸다.
“결국···. 끝까지 아무 말씀이 없으시구나···.”
70여 년의 시간을 함께하는 동안 고독천은 단 한 번도 부탁하지 않았다. 자신의 봉인과 관련된 것도 자신을 위해 희생한 수하들에 대한 것도.
“마지막엔 말씀하실지 알았더니. 스승님도 참.”
그의 성품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기에 준혁은 고개를 저으며 상념을 떨쳐냈다. 곧바로 몸의 상태를 파악하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럴 거라 생각은 했지만. 역시 몸은 처음 상태 그대로구나. 그래도 머릿속엔 수련성취가 그대로 남아있다. 이젠 혼자 가는 길이 아니야.”
고독천의 의식 속에서 수련했던 모든 걸 천천히 되새겨본 준혁은 주변을 살피며 청호를 찾았다.
“어떻게 된 거지?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 아니었나?”
그때 토굴 한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청호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청호는 준혁을 보며 깜짝 놀란 얼굴로 준혁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녀석. 그런데 청호야. 내가 조화령 속으로 떠난 지 얼마나 지난 거지? 네 행색을 보니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난 거 같은데?”
준혁의 말대로 청호의 몸은 오랫동안 씻지 못했는지 더럽고 이물질이 잔뜩 묻어있었다.
“그르릉, 그릉.”
“뭐? 3년? 허어···. 그곳에 머문 시간에 비한다면 얼마 지나지 않은 건 맞지만···. 전혀 흐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거늘.”
“그릉, 그릉.”
“뭐라? 흣, 내 말투 말이냐? 그러고 보니···. 아니다. 신경 쓸 필요 없다.”
준혁은 자신의 말투가 어느덧 고독천과 비슷해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오랜 시간 그와 함께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
“그럼 그동안 혼자 사냥하며 나를 지킨 것이냐? 고맙구나. 그럼 조금만 더 부탁해도 되겠느냐?”
청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준혁은 곧바로 눈을 감으며 의식 속에서 수십 년간 수련했던 진혈단신공법을 운용했다.
당장 급하게 움직이는 것 보다, 몸속에 자리한 혈단공법의 기운들을 진혈단신공법으로 치환하는 게 더 중요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