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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화 〉첫만남, 혹은 재회 (9/93)



〈 9화 〉첫만남, 혹은 재회

결국 가상현실 접속기는 책상 한구석을 차지했다. 잡동사니 사이에 놓인 단말기가 제 자리를 찾은  마냥 자연스럽기까지 했다.

묵직한 시선이  새까만 플라스틱 몸체를 잠깐 훑고 지나갔다.

처음 YWO에 접속했던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현은 다시 가상현실에 손을 대었다.

토악질이 나올  같은 거부감은 첫날의 경험이 전부였다. 흉터처럼 남아 있는 끔찍한 기억이 행여나 다시금 반복될까봐. 여태까지 도망치듯 가상현실을 피해왔던 행동이 무색하게도. 일단 선을 넘게 되자 관성에 떠밀리듯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조금만,  번만 더, 그렇게 벌써 며칠째. ‘그때’ 일이 떠올라 불안한 마음을 견디기 힘들 때마다, 오히려 그 세계를 닮은 가상공간에 정신을 맡기는 것이다.

아현은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직까지 괴로워하면서도, 무언가에 이끌린 듯 가상현실을 다시 찾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모르겠어. 다만, 심장에 아릿하게 남겨지는 아쉬움 때문에, 자꾸 미련이 남아서.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온 것 같았다. 그런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무엇을 바라고 아픈 기억의 조각을 들추어 보는지 정작 본인조차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아현은 분명  세계에서 무언가를 찾아 헤매고 있다. 마음속에 남은 미련의 흔적을 따라서. 그때, 그곳에 남겨 두고 온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서.

“...”

눈가를 조금 찌푸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생각이 날 듯  듯. 의식 속에 깊게 파묻힌 실마리를 붙잡으려 노력했지만, 항상 그래왔듯 어느 순간부터 놓쳐버렸다.

아현은 가벼운 한숨을 내뱉고 의자 위에 몸을 묻었다.

‘아직...’

머릿속을 매우는 상념들을 무의미하게 흘려보냈다. 그러다 문득, 다급하게 쫓기던 소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원래대로라면 이렇게까지 길게 이어지지 않았을 인연이었다. 아니, 애초에 만날 일도 없었겠지. 소녀의 사정은 아현과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니까.

그렇지만 왠지 계속 신경이 쓰였다. 두려움에  눈동자가. 애써 의연하려고 하지만 숨길  없었던 불안감이. 쫓기고 몰려서 결국 혼자 남겨지게 된, 그 모습들이 묘하게 마음에 걸려서. 그건 마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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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숙여.”

아현은 나긋하게 경고하고 소녀의 어깨 너머로 검을 내찔렀다.

섬광 같은 칼날이 소녀의 뒤에서 다가오던 남자의 목을 스쳤다. 거칠게 튀기는 핏방울. 그륵-, 피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남자는 깊게 갈라진 목을 꽉 감싸 쥐었다. 하지만 손가락 틈새를 비집고 새어나오는 핏줄기를 막을 순 없었다.

 탓에 바로 앞에 서있던 소녀에게까지 뜨끈한 액체가 주륵 쏟아졌다.

“꺄악!!”

졸지에 핏물을 뒤집어쓰게 된 소녀는 까무러치는 비명과 함께 주저앉았다.

아현은 차분하게 검을 갈무리했다. 이걸로 여덟 명. 이번에 습격해 온 자들은 방금의 남자가 마지막이었다.

“으, 아..”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감촉에 소녀는 몸서리쳤다. 뜨끈한 혈액의 온기가 진저리나게 소름끼쳤다. 가녀린 어깨를 바들바들 떨다가, 떨리는 손으로 목덜미를 간신히 닦아냈다. 붉은 자국이 진득하게 묻어나오는 걸 보곤 한 번  숨을 삼켰다.

아무렇게나 손에 잡힌 모포로 한참을 닦아내고도 모자라서, 마실 물까지 전부 들이 부어 핏자국을 씻어냈다.

한참 후에야 가까스로 진정한 소녀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다, 문득 저의 모습을 무심하게 쳐다보는 모험가를 눈치 챘다.

“당신은...!!”

원망 섞인 시선이 아현을 노려보았다.그러나 냉담한 눈빛을 마주하고는 도리어 흠칫 놀랐다. 딱히 어떠한 감정조차 섞이지 않은 그건, 소녀에게는 마치 짐덩이를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누가 당신의 고용주인지 잊었나요?!”

아현은 굳이 대답하지 않고 먼저 말에 올라탔다. 소녀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울분을 삭혔다.

‘마음에 안 들어!’

소녀가 모험가와 처음 만났을 때, 수많은 적들을 맞서 싸워 이겨내는 모습에 선망과도 같은 끌림을 느꼈다. 그녀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지켜낼  있을  같아서. 항상 무력하게 도망쳐야 했던 자신이 바라는 모습을 가진, 원했지만 할 수 없었던 일을 해낸 그녀를 동경했다.

하지만 그때와 같은 호감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맨 처음, 소녀의부탁이 어이없이 거절당했을 때부터.지금껏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소녀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같은 태도까지. 전부 마음에  들었다.

“뭐 때문에 이렇게 쫓기는 거야? 쫓아오는 것들도 이번이 벌써 다섯번째잖아. 지긋지긋하게 따라오는데.”

“일일이 당신에게 알려 줄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맡은 일에나 제대로 집중하세요.”

“솔직히 그렇게까지 궁금하지는 않았어.”

“그거 잘 됐네요.”

나름 까칠하게 대꾸했건만 상대방이 무심하게 받아넘기자 오히려 소녀가 더 속이 뒤집어졌다.

‘짜증나!’

저런 무뢰한이랑 단 둘이 함께하고 있는 처지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알베르트 경이나, 오라버니였으면...

문득, 자신을 아껴주던 사람들에게까지 생각이 미치자 침울한 감상이 밀려왔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소녀의 곁에 없다. 그렇지만….

조금이나마 상냥한 위로를 바랬던 건, 너무  기대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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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여기서 기다려요.”

자그마한 목소리가 앞서가던 아현을 불러 세웠다. 지금 시점에서 멈춰  이유는 없는데. 설마 또 쉬고 가자는 이야기일까?

‘여긴 좋지 않은 장소인데.’

잔뜩 우거진 나무와 풀이 주변에 무성했다. 아무리 아현이라지만 이런 식으로 시야가 좁아지면 좋을 게 없었다. 쉬더라도 조금 더 눈앞이 트인 곳에서 숨을 돌리는 게 돌발 상황에 대응하기 용이할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좋은 타이밍도 아니었다. 아까전부터 먼 곳에서 느껴지던 인기척이 어딘가로 사라졌다. 기회를 살피는 걸까. 언제 다시 나타날지 모른다. 그런데….

하지만 소녀는 아현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에서 내려 풀숲 사이로 들어갔다. 같이 따라가려고 하자 도리어 얼굴을 붉히며 성을 냈다.

“됐으니까 거기서 기다려요!”

수풀 사이를 헤치고 한참을 걸어 나온 소녀는 그제야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아슬아슬했다. 아까부터 한참 참았던 터라 이제 한계였다. 아랫배가 욱신거릴 정도로. 예민한 감수성의 아가씨는 부끄러워서 볼일 보러 간다는 말을 차마 남에게 꺼낼 수 없었다. 항상 바른 몸가짐을 교육받은 공주님이 이런 길가에서...

 이상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소녀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이쯤이면 되겠지, 하고는 걸음을 멈춰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 순간 우악스러운 손길이 소녀의 팔뚝을 잡아채었다.

“흡!!”

화들짝 놀란 소녀는 비명을 내지를 뻔 했다. 하지만 커다랗고 거친 손바닥이 입가를 콱 틀어막았다.

****

소녀는 갑자기 나타난 괴한에게 속절없이 끌려갔다. 온 힘을 다해발버둥쳐봐도 강압적으로 억눌렸다. 잡힌 팔을 비틀어 빼내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내지르려던 비명소리조차도 입가를 틀어막은 손바닥에 답답하게만 울릴 뿐이었다. 있는 힘껏 저항해 보았지만 전혀 소용없었다.

연약한 소녀의 몸부림은, 커다란 덩치의 사내에게는 조금 귀찮게 구는 정도였다.

‘이렇게 끌려가면… 이대로 끝이야……!’

소녀는 자신의 입가를 틀어잡은 손등을 쥐어뜯고 할퀴었다. 투박한 살가죽에 붉은 실선들이 여럿 생겨나자 짜증 섞인 목소리가 낮게 흘렀다.

“아가야, 뒈지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있어라.”

무겁고, 살벌한 어조였다. 게다가 말 뿐인 위협도 아니었다. 어느새 소녀의 턱 밑에 날카로운 단검이 들이대졌다. 피부에 와닿는 차가운 칼날이 섬뜩하게 경고했다. 이대로 숨통을 그어 버릴 수 있다고.

일말의 자비조차 없을 것 같은 손속에 소녀는 팔다리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난생 처음 겪는 무시무시한 협박에 더 이상 어떻게  의지조차사라져 버렸다.

짐짝처럼 질질 끌려가면서도 그저 겁에 질려 벌벌 떨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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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는 이리저리 수풀을 헤치며 소녀를 끌고갔다. 상당히 걸었다 싶을 무렵, 나무 사이 가려진 짐마차가 나타났다.

그곳에는 또 다른 남자 한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때?”

“안 보여. 따돌렸나봐.”

“후우, 잘했어. 그래도 방심하지 마. 절대 그 년이랑 마주치면 안 돼. 벌써 스물이나 당했어. 제기랄. 어디서 그따위 미친 괴물딱지가 튀어나온거야…….”

“그래도 결국엔 우리가 해냈잖아.”

“다른 놈들이 먼저 나서준 덕분에, 운이 좋았지.”

겁에 질린 소녀를 힐끗 바라 본 남자는 말을 이었다.

“커티스 경이 보수를 제대로 챙겨준다고 했어. 어쩌면 공작님께서 직접 포상을 내리실지도 몰라. 아니, 이젠 섭정 각하시던가?”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이 꼬맹이년 갖다 바치고 우리는 우리 몫만 챙기면 되는 거야.”

“그래, 어떻게 생각하면 오히려  풀린 걸지도 몰라. 뒈진 놈들은 지들 몫이 필요 없잖아.”

저들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소녀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공작? 섭정이라고? 누구를 말하는 거지? 아니, 그것보다, 이제 나는 어떻게 되는 거야? 두려움에 뒤섞인 생각들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소녀를 거칠게 잡아끄는 손길 때문이었다.

가냘픈 손발이 묶이고, 입에 재갈까지 물려졌다.

“으읍! 읍!!”

그리고 사내들은 묶인 소녀를 짐짝처럼 마차 뒤쪽에 내팽개쳤다. 두 쌍의 눈동자가 불안에 떠는 그녀의 모습을 찬찬히 내려 보았다.

“그러고 보니... 왕녀라고 했지? 흐음. 고귀하신 왕족께서는 어떻게 우실지 궁금하지 않아?”

“아서라. 흠집 안 나게 데려오란 말 잊었어? 명령이 바뀌었다고. 괜히 건드리지 마. 조금만 참으면 우리 몫 챙겨서 뭐든 미련 없이 즐길  있잖아. 그때 니 마음대로 질펀하게 놀던가 하라고.”

쩝, 말을 꺼낸 사내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마차 바닥에 몸을 뉘인 소녀를 다시  번 찬찬히 훑어본 남자는 그 위에 모포를 확 덮었다.

두꺼운 천이 덮이자 소녀는 당황했다. 아무것도 보이질 않아서. 눈앞이 어두워지자 본능적인 공포가 밀려왔다. 점점 숨이 가빠졌다.

“.. 년이... 기 전에.. 빨리....”

드문드문 들리는 사내들의 말소리가 멀어졌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차 바닥이 들썩였다. 미약한 관성이 느껴짐과 동시에, 소녀는 마차가 출발하고있다는걸 깨달았다.

‘안 돼!’

소녀는 묶인 손발로 발버둥 쳤지만 자신에게 덮인 모포 하나 치울 수 없었다. 걷어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몇 번이나 실감했다. 여태껏 당연하게 누려왔던 권위가 얼마나 손쉽게 사라지는지. 마주한 현실은 너무나 냉혹하게 다가왔다.

견딜  없을 만큼 불안해졌을 때, 불현 듯  사람이 생각났다.

‘그녀처럼, 내게도 자신을 지킬 힘이 있었더라면...’

그리고 소녀의 오래된 기억  오라버니의 말씀이 떠올랐다.

『‘나의 소중한 동생 리엔느. 군주라는 것은 무척이나 외로운 자리란다. 그러니까 언제,어디에서도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을 많이 가져야 해.’』

『‘그치만 저는 이미 충분한걸요. 오라버니가 언제까지나 제 곁에 있어 주실 거잖아요?’』

『‘그래, 그렇겠지.’』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이었지만, 소녀는 그 묘한 대답을 기억했다. 같이 있어 준다고 말했으면서. 괜한 원망이 치솟아 오르다, 맥이 탁 풀렸다. 이제 와서 이래봐야 아무 소용없는걸.

그저 미치도록 무서웠다.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혼자 남겨진  처음이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소녀의 주변에는 언제나 호의를 품은 사람들이 맴돌았다. 누구보다 귀하게 대해 주었고, 원하는  무엇이라도 바칠 듯 대접했다. 그들이 무슨 생각으로 다가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어느 때에도 소녀는 아쉬울 것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소녀의 곁에 남아있는 사람은 없었다.

코끝이 시큰해졌다. 서러워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여태까지 갖은 고생을 넘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소녀는 여전히 무력했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니 누가 좀...

‘도와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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